헉, 헉. 제 몸보다 큰 이예주를 들쳐 엎고 걷고 있는 조롱이가 언제 다시 합류한 건지 물어볼 새도 없이 그녀는 다시 발작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려! 내려 줘! 내려 줘!”
“아악! 예주 누나 왜 이래여!”
“당장, 당장 내려!”
눈을 까뒤집고 발광을 해 대자 짜부라질 듯 위태롭게 걷던 조롱이가 단번에 그녀를 내팽개쳤다.
그 여파로 그녀의 이마에 붙어 있던 질척한 게 뚝 떨어졌다.
저번에 본 적 있었던 짓이긴 약초를 뭉친 것이다.
아마도 거하게 나무에 들이받은 그녀의 안쓰러운 마빡을 보다 못한 조롱이가 붙여 준 듯싶었다.
“아이, 아까워라. 페어리니틀 다 떨어지잖아여!”
약초가 흙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것을 보자 조롱이가 눈을 휙 치켜뜨며 이예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당장 도망가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그녀의 눈에 그런 소소한 것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예주 누나! 누나, 어디가여! 예주 누나!”
조롱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예주는 그대로 ‘문’을 향해 달렸다.
저번처럼 남자에게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바로 등 뒤에서 뱀이 쉭쉭거리며 혀를 날름대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본능이다.
지금을 놓친다면 미래의 기약이고 뭐고 모두 뱀의 배 속에서나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 정도로 뱀이 지척에 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예주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허옇게 들뜬 얼굴로 ‘문’을 향해 뛰었다.
떽떽거리며 무어라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조롱이를 지나, 시뻘건 눈의 미친놈의 까만 뒤통수 또한 지나쳐, 그렇게 환히 그녀를 맞이하는 ‘문’을 향해 뛰어들던 그때.
턱.
강한 힘이 이예주의 팔목을 억세게 휘어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 앞에 강제로 소환되었다.
“어딜 가는 거지.”
“놔, 놔 줘요. 놔 줘요!”
이예주가 잡힌 손을 필사적으로 빼내며 소리쳤다.
그러나 팔을 잡은 손이 이번엔 어깨로 올라오더니 ‘문’을 향해 있던 그녀의 몸을 아예 제 쪽으로 홱 돌렸다.
“어디 가는 거냐고.”
“어딜 가긴! 도망가죠! 어흑, 이거 빨리 놔요!”
이예주는 사방팔방 주체할 수 없이 눈을 굴리며 저를 잡은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그녀를 부여잡은 남자의 손은 풀리긴커녕 어디로도 못 갈 만큼 강하게 그녀를 옭아맸다.
“도망은 무슨. 혼나기 전에 입 다물고 다시 황조롱이한테 업혀 있어.”
“놔요, 나 도망가야 돼! 빨리, 빨리요!”
“인간. 너…….”
“아, 나 죽어요! 으허엉, 제발요. 뱀이 나 쫓아온단 말이에요! 괴물 뱀이……!”
남자의 타이름에도 굴하지 않고 이젠 거의 애원하다시피 놔 달라고 빌던 이예주는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기척에 흠칫 몸을 멈췄다.
스스슥, 스스슥.
무언가 풀과 마찰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 본 소리다.
바로, 꿈에서.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 역시 무언가 느낀 듯 시뻘건 눈동자는 이미 그녀에게서 떨어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틈을 노려 이예주가 다시 그의 손아귀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주인님, 뭔가 다가오는 것 같은데여?”
조롱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주인에게 물었다.
바람이 불어와 이예주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별로 특별한 것 없는 바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뱀 비린내가 풍겨 오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던 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에 따라 소리 또한 다욱 다양해졌다.
스스슥, 쉬익쉬익. 스스슥, 쉬익 쉬익.
이예주는 기름칠 안 한 깡통 로봇처럼 뻣뻣이 굳은 목을 우두둑 꺾어 뒤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돌풍이 그녀의 안면을 강타했다.
멀리서 바윗덩어리 같은 것이 지그재그 물결치듯 남자와 이예주가 있는 방향으로 굴러 왔다.
그것은 눈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가히 놀라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그 바윗덩어리 같은 것이 점점 거리를 좁히더니 마침내 노오란 눈깔을 빛내는 대가리가 되었다.
뱀 대가리가.
“쉬이이이, 쉬이이이, 츠츠츠츠―.”
“아아아악!”
가만히 굳어서 그것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노오란 파충류 눈깔이 꿈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괴성을 지르며 남자에게 달라붙었다.
얼굴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일그러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녀는 그저 필사적으로 남자의 품을 파고들었다.
“흐흑, 뱀이야! 아악, 싫어, 싫어, 싫어! 흐어엉!”
이예주는 악을 썼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그녀를 삼킬 듯 다가온 뱀 대가리가 어쩐지 기척 없이 조용했다.
더불어 남자도.
그녀가 슬쩍 남자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혹시 뱀이 그대로 지나갔나 싶어 뒤를 돌아보던 이예주는, 돌아보자마자 코앞에 위치해 있는 비늘 뭉치에 경기를 일으키며 다시 남자의 품에 얼굴을 박았다.
“꺄아악!”
그러곤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 그의 허리를 두 팔로 양껏 끌어안고 벌벌벌 떨었다.
그때까지 별말 없이 가만있던 남자는 이예주가 진동하는 휴대폰처럼 떨어 대자 그녀의 머리 위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도 하는군.”
“으허엉, 나 죽기 싫어요. 죽기 싫어요!”
남자의 한숨이 꼭 뱀에게 자신을 내던지겠다는 최후통첩 같아서 이예주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빨간 눈동자가 힐끗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이예주의 정수리 위에 불쑥 손을 올렸다.
그는 짐짓 자상한 연인처럼 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디다 놓았어.”
“으으, 뱀 대가리 밥으로 버리지 마요. 버리지 마요…….”
“말 안 하면 산 채로 뱀의 위장 구경을 하게 될 텐데. 그러니 어디다 놓았는지 말해.”
“흐허헝, 뭘요. 뭘 어디다 놔요!”
이예주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남자가 잠시 그녀 뒤에 있는 뱀에게 시선을 주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까맣고 네모난 모양에 네 손바닥만 한 크기라는군. 소리도 난다고 한다.”
“네? 흐흑, 그게 뭔데요…….”
“네가 돌산에서 훔쳐 달아났다는데.”
이예주는 혼비백산한 머리로 대체 제가 돌산에서 훔친 게 뭔지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제가 돌산에서 훔친 것이 무언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가 되새긴 돌산은 훔칠 만한 것이 있기는커녕 사방이 바위와 돌 그리고 끔찍한 돌뱀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줘도 안 가질 산에서 대체 훔치긴 뭘 훔쳤단 말이야!
“저, 저 진짜 모르는데요. 흐흡, 제가 돌산에서 훔치긴 뭘 훔쳐…….”
“아! 까맣고 네모난 거! 저 알아여! 예주 누나가 주인님이랑 처음 계약 맺었을 때! 그때여, 예주 누나가 냇가에 엎어져서 시냇물에 집어 던지는 거 봤는데여?”
그녀의 말을 끊고 조롱이가 옆에서 우렁찬 소리로 고자질했다.
남자의 빨간 눈동자가 다시 이예주에게 향했다.
그녀는 제가 뭘 집어 던졌는지 회상해 보았다.
시내에 집어 던진 것, 집어 던진 것이라…….
번뜩,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기억의 편린이 스쳐 지나갔다.
―아악! 이 쓰잘데기 없는 것아! 이럴 거면 왜 발명돼서 나한테 희망 고문을 줘! 집에 가고 싶어…… 이게 뭐 게임 아이템이야? 왜 내 앞에 나타나서! 네가 반짝거리지만 않았어도 그 괴물 만날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그것은 바로.
“……호, 혹시 휴대폰?”
“…….”
“그, 그건 이미 집어 던졌…… 뭐하는 거예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제 품에 폭삭 안겨 있는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이예주는 ‘히익’ 하고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뒤에 있을 뱀 대가리 생각에 절대 남자에게서 떨어지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뭐해요? 왜 남의 몸을…….”
“어디 있지. 너에게 하나 더 있다고 하는데.”
“헉! 어딜 만지는 거예요! 이 변태……!”
“찾았군.”
이예주의 등을 더듬던 손이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엉덩이와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녀가 발악하기도 전에 남자가 무언가를 찾은 듯 미련 없이 그녀의 뒷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의 손엔 정말로 까맣고 네모난 물건이 들려 있었다.
“이건가.”
“쉬이익, 쉬이익!”
남자가 이예주에게서 빼낸 무언가를 들고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왠지 모를 스산함에 펄떡 고개를 돌린 그녀는 남자의 손에 있던 그것을 뱀 대가리가 입으로 받아 드는 끔찍한 행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 돼! 내 휴대폰!”
“쉬이익, 쉬이이익.”
뱀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녀가 눈을 휘까닥 뒤집은 채 남자의 품에서 떨어져 어마어마하게 큰 괴물 뱀의 입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 행동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나 일어난 일일 뿐, 실제로 이예주는 남자의 두 팔에 꽉 붙들려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안 돼! 내 폰! 내 마지막! 내놔!”
“가라.”
“쉬이익.”
“안 돼에엑!”
이예주가 아까보다 더욱더 격렬하게 반항했지만, 남자는 마치 어린아이 제압하듯 간단히 그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라는 남자의 짧은 명령에 거짓말처럼 괴물 뱀이 그들에게서 몸을 물렸다.
스스슷, 쉬익쉬익.
그리고 왔던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놈은 꿈틀꿈틀 기어 사라졌다.
그 목적지는 돌산이 분명하리라.
“대체 겁도 없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녔는지 모르겠군. 넌 하루라도 사고를 안 치면 좀이 쑤시는 인간인가?”
“…….”
“저건 돌산에 사는 500년 묵은 이무기다. 동물의 숲 최고의 포식자지. 웬만해선 돌산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걸로 유명한데, 어떻게 그것의 여의주를 훔쳐 달아날 생각을 다 할 수가 있지.”
“…….”
“그나마 네게 비슷한 여의주가 하나 더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음 꼼짝없이 잡아 먹혔을 거다. 까마귀를 때려 죽이는 것도 모자라 이무기의 여의주까지…….”
계속해서 이예주를 타박하는 소리를 늘어놓던 남자는 문득 대답 없는 그녀에게서 이상함을 느끼곤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 제 품 안에서 제 옷깃을 꾹 부여잡고 있는 인간 여자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봐.”
“…….”
“이봐, 인간 여…….”
그때 번쩍 그녀의 고개가 쳐들렸다.
남자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 그녀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눈이 그녀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육안으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크게 떠졌다.
많이 놀란 듯 창백한 여자의 뺨을 타고 옥구슬 같은 눈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왜!”
원망이 한가득 담긴 괴성이 그녀의 입을 타고 쏟아져 내렸다.
“왜!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
“아악! 그걸 주면 어떡해요! 어허엉! 내 건데! 내 휴대폰인데! 으흑흑!”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예주는 서럽게 울었다.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휴대폰! 휴대폰을 뺏겼다! 과거와의 마지막 연결 수단이었던 휴대폰을!
비록 배터리가 다 나가 켜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인간들을 만나서 잘 충전시키면, 혹시 과거로 갈 수 있는 매개체가 될지도 모를 휴대폰을!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지금껏 눌러 참아 왔던 눈물들이 휴대폰 하나로 폭발하듯 터졌다.
억울함에 통곡이 절로 나왔다.
“그게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건데! 그걸 왜 얘기도 없이 줘요! 진짜! 흐엉엉!”
“여의주가 너한테 중요한 건가.”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게 무슨 여의주예요! 내 2년 약정 휴대폰이지! 흐윽, 마지막인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데…….”
“여의주는 딱히 다른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무기의 영역 안에 있는 빛을 내는 것들 중에서 이무기가 선택한 물건을 말하는 것이다. 물건이 무엇이든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품으면 그것이 여의주가 되는 것이지.”
이예주는 남자의 말에 입을 삐죽거리다가 이내 또다시 히끅히끅 울어 댔다.
얼마나 울었는지 코가 아주 새빨개져 못난이가 따로 없었다.
그녀의 울음에 남자는 확실히 당황한 듯,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이내 손을 뻗어 이예주의 눈가에 가져다 대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두덩이에 남자의 손이 닿자 시원한 기운이 확 퍼졌다.
남자가 끝을 모르고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마.”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어요. 나한텐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단 말이에요! 으허엉!”
“뚝. 이걸 줄 테니 울지 마.”
다시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이예주를 보며 남자가 제 품에서 무언가를 빠르게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딱딱한 감촉의 무언가가 그녀의 손안에서 덜그럭거렸다.
남자가 다시 한 번 손으로 그녀의 뺨에 떨어진 눈물을 닦아 주며 아이 달래듯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네게 줄 테니 그만 울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