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주는 다시 생각나는 악몽 같은 일들에 경기 일으키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로 앞에 외눈박이 형제 놈들이라도 있는 것처럼 겁에 질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등허리를 부여잡고 그 품에 파고들었다.
“내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진짜!”
그녀는 그때 당시 하지 못했던 남자에 대한 원망을 퍼부으며 울먹였다.
정말이지 다시 한 번 그 외눈박이 놈들을 만나게 된다면 차라리 죽을 것이다.
그 끔찍하고 역겨운 악취가 아직도 코에 맴도는 듯해서 그녀가 남자의 등에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아이 같은 그녀의 칭얼거림에 남자가 짧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다 죽여 버렸으니 울지 마라.”
“……예?”
“뼛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시켰다.”
뼛가루조차 뭐……?
징징거림을 멈춘 이예주가 멍하니 남자의 말을 되새겼다.
그러고 보니 그 노인네가 어떻게 되었는지 통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분명 사슬 때문에 나무에 거하게 머리를 처박고 쓰러진 후 노인네가 구렁이처럼 징그러울 정도로 빠르게 기어 오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엔, 그 이후엔…….
퍽!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을 시뻘건 것이 덮쳤다.
그래, 그랬다. 노인의 머리가 터졌다.
그 자리에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고 누리끼리한 뇌수들이 쏟아져…….
기어이 노인의 마지막을 기억해 낸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으, 으헉!”
“……또 뭐가 문제지?”
이예주가 흠칫하며 짧은 괴성을 지르자 남자가 짜증이 가득 담긴 어투로 물었다.
“그 노, 노인 있잖아요.”
“노인?”
“네. 그 노인! 그 노인네 혹시…….”
그녀가 제발 꿈이길 바라며 말끝을 흐렸다.
제발 자신이 말도 안 되는 꿈을 꿨길. 제발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어물을 제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길.
그러나 들려오는 남자의 답은 이예주의 간절한 바람을 아주 간단히 묵살했다.
“아. 그 다리 없는 버러지를 말하는 것이군. 대가리를 터뜨려서 죽였다.”
우욱. 남자의 말에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이예주는 구역질도 마음껏 하지 못했다.
토사물을 쏟으면 바로 물에 처박아 주겠다는 남자의 지엄하신 전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써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삼키느라 희멀건 한 얼굴이 경련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머리를 터뜨렸냐고? 그야 그 더러운 것의 대가리가 위치한 곳의 중력을 높여서 압박하여…….”
“그만! 말하지 마요! 말 안 해 줘도 돼요!”
한탄과도 같은 중얼거림을 잘못 이해했는지 친절히 노인의 죽음에 대해 설명해 주려던 남자의 말을 급히 막으며 이예주가 꽥꽥 소리 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미친 거 아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이제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새삼 남자의 무시무시함을 똑똑히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노인 말고 나머지 외눈박이들은 어떻게 죽었는지는 생각도 하기 싫다.
진짜 이러다가 도망은 고사하고 노인네처럼 끔찍하게 개죽음당하지 않을까.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불안감과 무섬증에 그녀가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였다.
“슬프겠군. 제 동족이 눈앞에서 죽었으니.”
불쑥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이예주가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슬프긴요? 그런 놈들은 죽어도 싸요! 어떻게 같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그것도 산 채로! 으으…… 지옥에서도 천벌 받을 놈들.”
“천벌이 뭐지?”
“뭐긴 뭐예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볕 좋은 날 길 가다가 벼락 맞는…… 헙!”
평소와 다르게 자연스럽게 질문해 오는 남자 때문에 별생각 없이 속에 있는 말을 꺼내던 이예주는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는 그녀의 발칙한 발언에도 말없이 찰박찰박 물 위를 걸었다.
그의 눈치를 살살 살피던 그녀는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앞의 말을 부정했다.
“하하, 당신은 아니고요. 그니까, 음. 음…… 그니까 아주 악질적이고 재수 없고 짜증 나는 인간들이 벼락 맞는 벌을 받는 건데, 어…….”
“…….”
“근데 그쪽은 어차피 해당도 안 되네요. 번개를 막 내리꽂는 사람인데 어떻게 번개를 맞겠어요…….”
이예주가 짐짓 아쉬워 죽겠다는 듯 말하며 울상을 지었다.
이런 악의 축 같은 인간이 천벌도 못 받는다면, 그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우울한 얼굴로 신의 공정성을 불평하던 그녀는 다시금 허리에서 들려오는 속살거리는 소리에 삐죽거리는 것을 멈췄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네? 뭐가요?”
“같은 종족이 죽었는데도 화나거나 슬프지 않느냔 말이다.”
아, 같은 종족은 누가 같은 종족이라는 거야! 내심 아까부터 거슬리는 말에 이예주는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제가 남자에게 쳐 놓은 ‘다리족’이란 거짓말을 떠올리고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대신 이 남자가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것에 트집을 잡아 물고 늘어지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들이 죽은 것에 슬픔보다는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끔찍함만 들 뿐이다.
남자가 그들을 죽였다는 데엔 화도 나지 않았다. 분명 사람을 죽인 것은 크나큰 범죄이고 죄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딱히 살아 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21세기 서울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가?
어쨌든 이곳은 인적이 드문 미래의 어느 숲이고 그녀에게는 글로 쓴다면 몇십 장을 써 내릴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경찰이나 법 같은 일반적인 판단 기준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을 다 떠나서 그들이 죽은 것은 꼭 죗값을 치른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했다.
“글쎄요. 그 사람들이 저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것만 생각하면, 으으. 불쌍하다는 생각도 안 들어요. 그렇다고 해서 잘 죽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
“만약 당신이 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그놈들에게 먹혔을 거 아니에요? 아악! 도망도 못 가고! 다신 사슬에 묶을 생각 말아요. 사슬에 ‘사’ 자도 꺼내기만 해 봐, 그냥 콱!”
“……콱?”
“콱…… 깨물어 버릴 거예요. 진짜…….”
그녀의 같잖은 헛소리에 남자는 한동안 대꾸하지 않았다.
나름 농담이라고 내뱉은 말에 상대방의 반응이 싸하자 무안해진 이예주는 괜히 먼 산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한참 후에야 느릿하게, 그러나 어딘가 찬기가 조금 가신 말투로 대답했다.
“……알겠다.”
“네?”
“특별한 때 말고는 사슬에 더 이상 묶지 않으마.”
“진짜요? 진짜죠,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어요!”
이왕이면 특별한 때도 빼 달라고 이예주가 졸라 댔지만 그것에 대해서 남자는 끝끝내 함구했다.
쪼잔한 놈. 불퉁거리긴 했지만 이내 그녀는 기분을 풀고 웃었다.
그 특별한 때가 오기도 전에 자신은 남자에게서 도망쳐 다시 과거로 돌아갈 것이다.
서쪽 대륙. 팔족이 사는 곳이 서쪽 대륙이라 했다. 서쪽 대륙에만 가면 분명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방법을 찾은 것 같아 싱글벙글해진 이예주는 꽤 여유로워진 얼굴로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잠시 기절한 사이 벌써 밤이 깊어졌다.
남자가 걷고 있는 물 위로 달빛이 쏟아져 아름답게 반짝였다. 마치 빛들이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근데 우리 왜 물 위를 걷고 있는 거예요?”
이예주가 아름다운 주위를 둘러보며 기분 좋게 질문을 하자 남자가 “지름길이다.” 하고 인정머리 없을 정도로 짧게 대꾸했다.
물 위가 꼭 동화 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예쁜 풍경이라면, 반면에 어두운 밤하늘은 공기 좋은 숲임에도 불구하고 별 하나 없이 텁텁하기 짝이 없었다.
전에도 한 번 느낀 거지만 뭔 놈의 숲에 별이 이렇게 없나 싶을 정도로 까맣고 넓은 하늘은 텅텅 비어 있었다.
밝고 커다란 달마저 없었더라면 숲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에 휩싸였으리라.
아무것도 없는 까만 밤하늘이 문득 남자의 까만 뒤통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통수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는 전체적으로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있는 편이다.
피부색과 입술을 제외하면 머리카락부터 옷, 신발까지 모두 검은색이었다. 눈동자도 밤하늘처럼 까맣게 빛날 때가 있었다.
물론 이예주가 그것을 본 적은 극히 드물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끔 본, 빨갛게 물들기 전의 까만 눈동자는 남자와 아주 잘 어울렸다. 아주 잘.
“참, 저기 근데요. 이름이 검은 파편이에요?”
그녀가 밤하늘을 보다가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여과 없이 내뱉었다.
“……뭐?”
“그 노인이 있잖아요. 검은 파편인지 뭔지에 대해서 알려 줬는데 꼭 그쪽 말하는 것 같았단 말이죠…….”
“그리고.”
“네?”
“그 인간이 그것 말고 또 뭘 말했지.”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예주는 다시금 입을 열고 쫑알댔다.
“그리고 또, 뭐 신의 아이? 그쪽이 신의 아이 어쩌구래요. 헉, 그러고 보니 정말 신이에요? 그쪽 같은 사람 아니, 인간…… 아, 하여튼! 그쪽 같은 존재가 신이면 어떡해요?”
세상 다 망하겠네…… 그녀가 정말로 큰일이라는 듯 울상을 지었다.
인간 박멸이 꿈이자 목표인 이 미친놈이 신이면 정말 인간 멸종이라는 것이 실현될지도 모른다.
안 되는데! 인간 멸종을 일으키든 말든 자신만은 1000년 전으로 돌아간 후에 일어나야 될 일이다. 그전에는 안 된다!
과거로 돌아가서 제 명대로 살다가 죽고 싶은 게 현재 그녀의 1순위 소원이었다.
“신? 웃기는군. 내가 버러지들 따위의 신이라는 소린가.”
“……에? 신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하다못해 이젠 물 위까지 걷고!”
“…….”
“아, 혹시 초능력자예요? 맞죠? 초능력자. 맞네! 어쩐지. 당신이 신일 리가 없죠. 그쪽 하는 거 보면 딱! 초능력 가진 사이코…….”
“람(Ram).”
남자가 이예주의 말을 단칼에 끊어 내고 짧게 무어라 내뱉었다.
“네? 뭐라고요?”
“그쪽이 아니라 람이다.”
“람?”
남자의 말을 그녀가 가만히 따라했다.
람. 남자의 이름인 듯했다.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면서도 절묘하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이런 무자비한 인간에게 저렇게 외자의 아기자기한 이름을 붙이다니, 남자의 부모가 누군지 참 알 것도 같았다.
“칫, 이름은 저급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나 행하는 짓거리라면서요?”
뒤끝 많은 이예주가 남자에게 당했던 수모를 잊지 않고 조잘대었다.
그 말에 부아가 났는지 그녀의 다리를 감싸 안아 지탱하고 있는 남자의 팔에 꽉 힘이 들어갔다.
“이름 아니다.”
“네? 그럼 이름 아니면 뭔데요?”
“너희 인간들이 날 부를 때 그렇게 지칭하더군. 고대 인간들의 언어로 신의 파편이란 뜻이라는데. 어리석은 것들. 존재도 않는 저들의 신 따위로 날 격하시키려는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그러나 정작 웃기다고 말한 당사자는 전혀 웃기지 않은 말투로 무뚝뚝하게 읊조렸다.
말투에서 짙은 살기가 묻어났다. 남자가 불쾌함을 토로하는 동시에 주변의 온도 또한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단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예주는 오싹 소름이 돋아 축 늘어져 있던 두 손으로 제 팔을 문질렀다.
“그, 그래도 예쁜 이름이잖아요.”
“…….”
“람. 외자에 깔끔하니 입에도 착착 붙고. 그냥 이름 삼아도 될 것 같은데, 왜요? 람, 람.”
그녀가 애써 남자를 위로한답시고 헛소리를 덧붙이며 몇 번 더 반복해서 불렀다.
그 모습이 꼴사나웠던 건지 남자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같이 어린 인간이 왜 무리에서 동떨어졌는지 모르겠군.”
남자의 말에 불현듯 현실감각을 깨우친 그녀가 우울한 얼굴을 했다.
“……그러게요. 진짜 전 왜 여기까지 온 걸까요.”
이예주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쯤이면 마른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맥주 한 캔 까 가지고 티브이 앞에 진을 치고 있을 시간이다.
그때는 그 답답한 원룸이 유일한 천국이었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