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그녀가 불쑥 그를 채근했다.
세기말 폭발 이전에도 시간족이란 인간들이 살았다니, 필히 그 시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과거로 다시 되돌아가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흠, 세기말 폭발 이전 시대라…… 그건 팔족 땅에 가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팔족? 팔족이요? 팔족 땅이 어딘데요?”
“팔족 땅은 서쪽 대륙에 있지. 나도 몇 번 간 적이 있어. 완전히 죽은 땅이지. 현 팔족 족장의 할애비가 세기말 용암 폭발 때 팔족 땅의 시간을 멈췄거든. 그 작자는 죽었어도 족장의 애비는 아직 살아 있을지 몰라. 그렇다면 뭐 아는 게 있을지도…… 한데 아가씨는 그런 것을 왜 물어보는 겐가?”
“아니. 그냥…… 그냥요. 그냥…… 할아버지 말을 들으니 궁금해져서요.”
“원, 싱겁기는…….”
언제 격정적인 감정을 쏟아 냈냐는 듯 노인이 다시 흐리멍덩한 회색 눈을 하고 켈켈켈 웃어 댔다.
“그럼…… 할아버지 아내 되시는 분은 어떻게 되셨어요?”
“으응?”
“그 가까운 미래밖에 못 본다는 할아버지 신부요. 벌써 돌아가신 거예요?”
괜히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가까운 미래밖에 보지 못했던 불완전한 눈족이라 저 같은 돌연변이를 낳은 건가.
그래도 눈, 코, 입 멀쩡히 달고 태어나게 해 주어서 이예주는 엄마에게 무척이나 감사했다.
할아버지의 패륜아 자식들처럼 외눈박이에 그것도 모자라 그 눈알 하나를 형제와 나눠 써야했다면…….
끔찍한 가정들을 애써 털어 내며 그녀가 노인 쪽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흰자가 선명치 못하고 누래서 동공의 경계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노인의 눈이 다시금 이질적인 이채를 띠었다.
기분 나쁜 눈빛이다.
저렇게 빼빼 마른 노인의 몸 어느 곳에서 저렇게 기괴한 오라가 풍길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애들 엄마가 제 새끼들 몰골을 보고 기절했던 것은 생각나는군. 클클클.”
“왜요? 돌연변이라서요?”
“그랬겠지. 제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비명도 질렀는걸.”
이예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확실히…… 세 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외눈박이에 눈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럴 만도 할 것 같았다.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문득 궁금해진 점을 물었다.
“돌연변이는 시간족끼리 결합 시에만 태어나는 거예요? 왜 태어나는 거예요?”
“대부분 그렇다네. 다리족 내에서 연구를 하던 놈들이 유전자 변이니 어쩌니 했었던 것 같은데…… 그쪽으로는 문외한인지라 왜, 어째서 태어나는 건지 난 잘 모르겠네. 날이 갈수록 인류의 씨가 마르고 있으니 그저 저런 괴물 같은 것이 태어나도 자식이라고 키울 수밖에.”
노인의 말에 이예주가 우울한 얼굴을 했다.
엄마도 그랬을까? 괴상한 능력을 각성한 자신을 보며 괴물을 낳았다고 한탄했을까?
“……우리 엄마도 할아버지 아내분이랑 같았어요.”
“……뭐어?”
“우리 엄마도 가까운 미래만 볼 수 있어서 일족에게 버림받았대요.”
그리고 또 나를 위해 그 능력마저 버리고 죽었어요.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뒷말을 삼키며 이예주가 애써 웃을 때였다.
노인이 기괴하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샅샅이 이예주를 훑은 그가 성급하게 외쳤다.
“그럼 자네 부친은? 아가씨 부친은 어떤 사람이었나, 응?”
“글쎄요. 아빠는 잘 몰라요. 제가 태어나시기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엄마 말로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럼, 그럼! 아가씨도 미래를 볼 수 있나?”
“예? 미래요?”
“그래, 미래! 볼 수 있어, 없어? 얼른 대답해!”
“어, 어…… 뭐, 가끔 꿈에서 볼 때도 있어요. 어렸을 땐 자주 예지몽을 꿨었는데 크고 나선 별로…….”
노인의 득달같은 물음에 얼떨결에 대답한 그녀는 또다시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능력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다 죽어 가던 노인이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힘 있게 펄떡이는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예지몽은 능력 발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곤 했지만, 삶에 있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간밤에 꾼 꿈이 들어맞으면 놀랍고 신기하긴 했지만 그것은 사실 ‘문’을 넘는 것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한 것에 가까웠다.
그녀가 미래를 본다는 사실을 듣고 극히 흥분을 한 노인의 반응에 이예주는 적잖이 당황하여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예지몽이야 뭐, 남들도 다 꾸는 거잖아요? 미래를 내다보는 것도 아니고…….”
“아니! 자네의 능력은 그렇게 치부할 수 없어! 포식자가 아가씨를 이렇게 살려 둔 이유가 다 있군그래. 자네, 지금껏 포식자에게 검은 파편이 언제 어디에서 올지 이야기해 줬지? 그렇지?”
“예? 무슨…… 아니에요! 무슨 그런 걸 제가 어떻게 알고서 얘기해요. 제 코가 석 자인데.”
“아니야! 날 속일 생각 말게. 아니라면 어린 네가 이렇게 멀쩡하게 있을 리 없지! 포식자에게 팔 한 짝 잡아먹히지 않고 이렇게 멀쩡할 리 없단……!”
“할아버지!”
이예주가 점점 도를 넘어서는 노인을 보며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곤 말을 끊었다.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제 몸 제가 멀쩡히 챙긴 데 뭐 보태 준 거라도 있어요? 그리고 뭐가 멀쩡해요! 여기, 여기! 긁히고 다쳐서 소매까지 다 찢어졌구만!”
“…….”
“그리고 포식자는 무슨 포식자! 할아버지 아들들도 그렇고 자꾸 마음대로 추측하는데요. 전 동료랑 같이 있었어요! 동료, 친구, 몰라요? 프렌드, 프렌드 말이에요! 저도 그 사람도 식인은 안 해요! 모두 할아버지 부족 같은 줄 알아요?”
포식자고 피식자고 이예주는 아직까지 그 체제를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미래를 알려 줘? 무당도 아니고.
설사 그녀가 미래를 금방금방 내다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절대 그 미친놈을 위해 미래를 말할 일 따윈 없을 것이다.
그녀가 생각보다 격하게 화를 내자 노인이 무안했는지 큼큼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끝내 미련을 못 버린 듯 슬쩍 이예주의 사슬을 가리켰다.
“그러면 그 사슬은 무엇인가?”
“이거요? 이건…….”
낭패다. 제 입으로 동료, 친구라고 강요한 마당에 사슬이라니. 세상 어떤 동료가 길동무를 개처럼 사슬에 묶어 놓는단 말인가.
정말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
난감한 기분에 아랫입술을 한 번 꾹 깨물며 이예주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저 할아방구가 자꾸 물고 늘어지지 않을 정도의 변명을 해야 되는데.
이렇게 사슬에 묶인 자신이 명백한 증거일진대 대체 무슨 변명이 먹혀들 수 있을까.
“이건…… 제가 숲에서 길을 잘 잃어버려서 동료가 친히 장만해 준 거예요.”
“…….”
“제가 알아주는 길치거든요. 그런데 길을 찾으려고 계속 움직이다 보니 자꾸 동료랑 길이 자꾸 어긋나서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동료가 가져왔어요. 친! 히! 요! 하하, 이거 쉽게 끊어지지도 않는 거래요. 길도 안 잃어버리고 좋겠죠?”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그녀는 철면피를 뒤집어쓰고 노인에게 사슬의 장점을 피력했다.
노인이 안쓰러울 정도로 떠들어 대는 그녀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반복해 강조하자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그렇군. 내 실수했네, 아가씨. 미안하이.”
“됐어요.”
“그런데 검독수리 발톱으로 만든 사슬이로군. 이거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인데. 내 잠시 만져 봐도 괜찮겠나?”
“그러시든가요.”
시큰둥한 태도로 노인에게 대꾸하며 이예주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휙 돌렸다.
노인이 조심스럽게 팔로 기어 와 근처에서 사슬을 만지작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든지 말든지 시선을 딴 데로 옮긴 그녀는 외눈박이 형제들이 사라진 쪽과 그녀를 개처럼 묶어 놓은 남자가 사라진 쪽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하늘은 시뻘건 노을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의 말 때문에 심통이 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예주의 얼굴이 초조함으로, 초조함에서 울상으로 시시각각 뒤바뀌었다.
대체 그 미친놈은 오긴 오는 걸까? 남자의 까만 뒤통수가 벌써부터 까마득해진 것 같았다.
이대로 자신을 두고 떠나 버린 것은 아니겠지?
나쁜 놈. 떠날 거면 고이 떠날 것이지 왜 엄한 사람을 묶어 두고 떠나느냔 말이다.
그것도 이렇게 위험에 노출해 둔 채로!
“이 인간…… 언제 오는 거야, 대체. 오긴 오는 거야? 아, 진짜! 언제 와아…….”
그녀가 우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자의 욕을 하면서도 내심 그가 외눈박이들보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모순된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남자는 식인은 안 할 테니 죽을 걱정은 해도, 뜯어 먹힐 걱정은 없을 게 아닌가.
남자가 사라진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기에 바빠 그녀는 제 옆에서 노인이 실실 웃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검독수리 발톱이라…… 쉽게 끊어지진 않겠군그래.”
썩은 동태 눈깔 같은 노인의 동공이 번쩍하고 음험하게 빛났다.
* * *
“검은 파편! 주변에 없다! 검은 파편!”
“아빠! 아빠는 어디에 있나. 아빠를 잃어버렸다!”
“아빠는 피식자랑 함께 있다! 흐흐! 먹이! 먹이와 함께 있다! 먹이를 뜯자! 씹어 먹어서 배에 저장해야 한다!”
이예주가 황혼을 바라보며 오지 않는 남자를 향해 원망을 연달아 토해 내고 있을 때 멀리서 쿵쿵하는 커다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멍청이들의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졌다.
“헉, 할아버지! 오나 봐요!”
이예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노인과 그의 아들들이 오는 방향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곧 죽으려는 사람처럼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노인이 그녀의 목소리에 “으응?” 하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래…… 내 아들들이 오는구만.”
노인이 다 빠진 이빨로 클클클 웃었다. 웃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쿵쿵,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외눈박이 형제들이 오는 쪽 숲속에서 푸드덕하고 새 떼가 날아올랐다.
잔뜩 겁먹은 눈으로 그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예주의 기대에 부응하듯 날아오르는 새 떼 뒤로 삼 형제가 커다란 덩치를 드러냈다.
엄청난 악취가 다시 그녀의 약한 비위를 자극하며 코를 마비시켰다.
“새다! 먹을 거! 먹을 거!”
가장 왼쪽에 있는 외눈박이가 그사이 날아오르는 새 떼 중 한 마리를 잡았는지 퍼덕이는 갈색 새를 들고 방방 뛰며 좋아했다.
커다란 덩치가 뛰어 대니 이예주가 있는 나무 아래까지 진동이 울렸다.
눈도 없는 주제에 날아오르던 새를 잡아채다니. 정말로 괴물 같은 것들이었다.
딱딱하게 굳어서 그들의 행태를 살피던 그녀는 얼마 안 가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새를 잡고 방방 뛰던 놈이 “아아―.” 하고 입을 쩍 벌리더니 그대로 새를 가져가 뜯어 먹는 역겨운 장면을 말이다.
와그작! 우둑우둑.
꽤 큼지막했던 갈색 새가 순식간에 머리부터 몸통의 반까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해 풀썩하고 몇 개의 깃털들이 허공을 가르며 휘날렸다.
와그작와그작, 입술 사이로 피를 질질 흘리며 사탕 먹듯 새를 먹던 외눈박이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으흠! 맛있다! 이거 맛있다!”
놈이 우렁차게 소리 지를 때마다 입에서 새의 파편이 튀었다.
이예주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불현듯 그녀의 옆에서 다 죽어 가던 노인의 목소리라곤 믿기 힘든 커다란 악다구니가 들려왔다.
“팜레드! 애비가 생식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잖느냐! 기생충 때문에 또 배가 아프다고 발악해서 형들 가는 길을 늦출게야!”
이예주가 목이 꺾일 만큼 급하게 노인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곧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 할아방구 뭐지? 마치 사고 치고 돌아온 아들을 혼내는 아버지처럼 정답게 저 외눈박이들을 부르고 있었다.
생물학적으로는 저들의 아버지가 이 노인이 맞긴 맞았다.
그러나 저 멍청한 놈들은 노인의 다리를 생으로 뜯어 먹은 파렴치한…….
“어어! 아버지! 안 먹었다! 팜레드 안 먹었다!”
노인의 고함 소리에 놀라 새를 잡아먹던 외눈박이가 반쯤 먹은 새를 내던지며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그 덕에 눈이 없는 육중한 몸이 비틀거리더니 기어이 쿵, 세게 자빠졌다.
동시에 그가 등에 지고 있었던 나뭇가지들도 같이 우르르 땅바닥에 쏟아졌다.
“이 멍청한 것!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데이노냐, 에니오냐?”
“아빠! 데이노다! 데이노가 눈 가지고 있다!”
“팜레드를 일으켜 주고 눈을 주어라! 저것은 눈이 있어도 앞가림 못하는 병신이니, 원.”
“알았다!”
눈을 가지고 있는 외눈박이가 우렁차게 대답한 후 착실히 노인의 말을 실행했다. 자빠진 제 형제를 일으키고 제 이마에서 눈을 빼어 건넸다.
그리고 데이노와 팜레드는 사이좋게 바닥에 널브러진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그사이 나머지 외눈박이 한 명-에니오-이 기세 좋게 이예주와 노인이 있는 곳까지 뛰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