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그제야 피식자가 자신을 지칭함을 깨달았다.
피식자 말고 또 저놈들이 말했던 게 뭐였지? 피식자 그리고 먹다. 먹는다고 했다.
하나님! 믿지도 않는 하나님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경악스러운 깨달음이 쉴 틈 없이 이예주의 조악한 정신머리를 후려쳤다.
그러니까 저들이 말하는 피식자는 자신이고, 저들은 자신을 먹는 것으로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단 소리다.
“일단 먹는다! 먹어서 배를 채워서 다시 도망가야 한다!”
“아니다! 포식자가 누군지 모른다. 아직 먹으면 안 된다!”
“이 근처의 포식자는 없다! 우리가 다 먹어 치웠다. 우리가 포식자다!”
“옷 검은색! 사슬 검은색! 검은 파편의 색이다!”
“아빠가 검은 파편이 우릴 죽이려고 쫓고 있다고 했다! 으으, 무섭다!”
남자들의 말이 이예주로 추정되는 ‘피식자’에서 ‘검은 파편’으로 옮겨 갔다.
그녀는 곰곰이 검은 파편이 무엇인지 머리를 굴려 생각해 보았다.
저들이 옷이고 사슬이고 자꾸 검은 파편의 색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다 그 시뻘건 미친놈의 것들이다. 그
렇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이 말하는 검은 파편은 그 남자라는 결과가 나오는데 말이야.
그사이 외눈박이들이 다시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목청들이 큰지 코를 마비시키는 악취보다도 귀가 먹먹해서 죽을 것 같았다.
“검은 파편이 있나 살펴봐야 한다! 아빠가 말했다!”
“아빤 지금 잠잔다! 아빠가 말 안 했다!”
“아빠가 말한 건 옛날이다!”
아빠는 또 뭔 소리야.
필시 덩치만 크고 지능이 낮은 자들임이 분명하다는 추측이 자꾸만 확신에 가까워지자 이예주는 암울해졌다.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런 멍청이들로 시작하다니.
아니, 인간은 맞는 걸까? 어떻게 인간이 장난감처럼 눈을 잡아 빼서 딴 놈들에게 건네주고 또 그 눈을 돌려 사용할 수가 있는 거지.
불현듯 이 세 명의 덩치들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멍청한 토론은 계속해서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그래도 주변에 있는 이 피식자의 포식자를 잡아야 한다! 잡아서 그 포식자 먼저 먹는다!”
“검은 파편이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물도 가져와야 한다! 생식하면 벌레가 배에서 자란다고 아빠가 말했다!”
“맞다! 맞다!”
“아빠가 말했다!”
“맞다! 아빠가 말했다!”
드디어 저 멍청한 이야기가 하나의 결론을 맺었다.
머리가 안 돌아가는 만큼 확실한 행동파인 듯 덩치의 남자들이 서둘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진동이 울려 이예주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름 잠귀가 밝다고 자부하는데 얼마나 피곤했으면 저렇게 큰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했던 걸까.
쿠당탕!
그때 무언가 엎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으악! 아프다! 넘어졌다! 안 보인다! 눈! 눈!”
“눈! 눈을 내놔라! 데이노! 데이노!”
“손잡아라! 내가 일으켜 주겠다!”
그러나 한 명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앞이 안 보이는 또 다른 한 명이 우당쾅쾅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그렇게 여러 번을 반복한 후에야 남자들은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유일한 외눈을 가지고 있는 남자를 따라 그녀의 근처에서 멀어졌다.
커다란 발자국 소리와 함께 악취가 희미해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예주는 꾹 감고 있었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저 세 멍청이들의 몰골 때문이든 악취 때문이든 시퍼렇게 질린 지 오래였다.
뭐 때문이든 간에 세 거지 같은 놈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침을 튀기며 토론을 나눴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도, 도망가야 돼. 당장!”
이예주는 심각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악취가 난다며 모세의 기적처럼 비를 가르고 길을 떠난 남자는 여전히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 ‘문’이 열렸지 않을까 싶어 다시 한 번 샅샅이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문’이 열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무조건 세 멍청이들이 사라진 반대편으로 뛰었다.
쩔그렁!
“어억!”
식인을 하는 또 다른 괴물 같은 것들에게서 벗어나려는 이예주를 붙잡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남자가 고이 채워 나무에 묶어 둔 사슬이었다.
반동 때문에 넘어질 뻔한 몸을 가까스로 다 잡으며 그녀가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쩔컹! 쩔컹!
힘차게 사슬을 잡아당겼지만 나무 밑동을 두어 번 감싸고 있는 검은색 사슬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잡아당길수록 해를 입는 것은 시큰하게 부어오르는 그녀의 손목뿐이었다.
―검독수리 발톱으로 만든 것이라 손목을 자르지 않는 이상 끊을 수 없다.
문득 남자의 조롱기 가득 담긴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예주는 더 이상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제 어깨에 고이 매어져 있는 남자의 검은색 겉옷까지 보이자 그녀는 눈에서 하얗게 불똥이 튄다는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아아아악! 이 미친놈아! 어떻게 이렇게 패 죽이고 싶은 짓만 골라서 할 수가 있니? 응?!”
이예주가 어깨에 잘 여며진 겉옷을 단숨에 잡아채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단순히 옷에 불과했으나 그녀에겐 그 옷이 꼭 빙글거리며 자신을 조롱하던 남자의 얼굴 같았다.
그녀의 닳은 운동화가 그 얼굴을 거세게 짓밟았다.
짓밟는 것도 모자라 아예 옷 위로 올라가 퍽퍽 짓이기면서 울화를 내뱉었다.
“내가 전생에 너한테 뭘 잘못했기에! 사람을 이렇게 개처럼 묶어서! 도망도! 못! 가게!”
깨끗하던 검은 옷이 발에 짓밟혀 금세 흙투성이가 되었다.
검은 옷에 선명한 발자국이 남을 때마다 머리를 꿰뚫는 희열에 그녀가 다시 세게 발을 놀렸다.
“미친놈아! 아악, 이 미친놈아! 이 미친 사슬을! 사슬! 헉, 헉…….”
하지만 그도 얼마 가지 못했다.
몸 좀 움직였다고 그새 저주받은 체력이 바닥이 났다.
이예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헉, 헉…… 흐, 흐흑. 어떡해…… 아아, 어떡해…….”
그녀가 곡소리를 내듯 흐느끼며 망연자실 허공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 놈이 의도한 게 이거였을까. 사슬로 꽁꽁 묶어 어디도 못 도망가게 둔 다음에 식인족 멍청이들 혹은 식인 까마귀에게 잡아먹히도록 하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무책임하게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킬 리가 없다. 암! 그렇고말고!
새삼 남자를 향해 새록새록 피어나는 분노로 이를 갈던 이예주의 시야에 문득 외눈박이들이 옆에 놓고 간 포대가 들어왔다.
그 멍청이들만큼 더럽고 너덜너덜한 자루였다.
“이건 또 뭐야?”
가만히 커다란 포대의 형태를 바라보던 그녀가 그 근처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자루의 군데군데 묻어 있는 검게 바랜 자국이 꼭 핏자국 같았다.
괜한 불길한 생각에 고개를 흔들면서도 포대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불쑥 호기심이 들었다.
그녀가 더러운 것을 집듯 엄지와 검지 끝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자루 끝을 집을 때쯤이었다. 움찔, 포대가 움직였다. 그녀는 흠칫하며 행동을 멈췄다.
안에 대체 무엇이 들었기에. 설마 저들이 먹으려고 자른 시체?
목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이예주는 가까스로 고개를 흔들어 공포심을 떨쳐 냈다.
꽤 커다란 포대였지만 시체를 담았다고 보기엔 포대가 꽉 차지 않고 헐렁했다.
말도 안 된다고 애써 자기 암시를 걸면서도 다시 그것에 손대기가 꺼림칙했다. 괜한 호기심에 눈 버리지 말자.
그녀가 포대에서 시선을 옮기며 다시 어떻게 하면 이 빌어먹을 사슬을 끊고 멍청이 삼 형제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려던 차였다.
움찔.
“헉!”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번엔 방금 전보다 더 크게 자루가 움직였다.
풀과 맞닿은 곳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예주는 포대 움직이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후다닥 물러났다.
안에 무엇인가 들어 있다. 무엇인가 살아 있는 것이, 저 자루 안에.
그녀는 단숨에 겁에 질렸다. 그러자 마치 그런 그녀를 알고 있다는 듯 포대가 미친 듯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흐익!”
기겁한 이예주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모른 채 마구 엉덩이를 쓸며 뒤로 푸다닥 움직였다.
쩔컥, 그러나 그녀의 손을 붙잡는 사슬에 붙잡혀 나무 근처를 벗어날 수 없었다.
사그락, 사그락.
포대가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꿈틀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누렇게 뜨던 그때였다.
투두둑!
“푸하! 답답해 죽는 줄 알았구나, 클클클!”
“꺄아악!”
자루 한구석이 터지면서 무언가 쏟아지듯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쩔컹쩔컹, 이예주가 반사적으로 괴성을 지르며 신들린 것처럼 사슬을 잡아당겼다.
포대에서 무언가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손이었다. 손이 턱 하고 나오더니 또다시 반대편 손이 튀어나와 이미 나온 손을 앞질렀다.
그다음에는 또다시 반대편 손이 턱 하고 앞으로 뻗어 나왔다.
그렇게 무언가가 땅바닥을 기어서 포대 속으로부터 벗어났다.
“아아아악!”
“아가씨, 진정하이. 거참, 목소리 한 번 우렁차구만.”
그 기괴한 모습을 보며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던 이예주는 자루 안에서 튀어나온 것이 말을 걸자 떡 벌렸던 입을 텁 다물었다.
그녀는 겁에 잔뜩 질린 눈으로 포대에서 기어 나와 자신에게 말을 건 무언가를 조심히 살폈다.
아까 멍청이 삼 형제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오랜 시간 씻지 못한 듯 지저분한 몰골을 한 빼빼 마른 사람이었다.
때가 찌든 머리가 부분적으로 희게 센 것이 보였다. 목소리도 그렇고 머리가 센 것으로 보아 노인이었다.
그것도 피죽도 못 얻어먹어 다 죽어 가는 몰골의 노인.
“누, 누구세요?!”
“겁먹을 것 없네. 힘없는 노인이 뭘 할 줄 안다고. 아가씨가 도망간대도 난 쫓아갈 다리조차 없어.”
그렇게 말한 노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죽을 듯이 콜록댔다.
마치 내장까지 토해 낼 기세로 기침을 해 대는 그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허약해 보였다.
이예주는 그제야 경계를 약간 풀고 사슬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던 오른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제아무리 묶여 있는 처량한 신세라 해도 저렇게 약한 노인 하나 정도는 해치울 수 있으리라.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신중한 눈빛으로 노인을 살폈다.
그사이 노인은 기침을 멈추고 엉금엉금 기어가 힘들게 나무에 기대앉았다.
꼬질꼬질한 노인의 상체를 살피던 이예주는 눈알을 쭈욱 굴리다가 노인의 하체를 보고 ‘히익!’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노인의 말처럼 정말로 그의 두 무릎 밑으론 아무것도 없었다.
두 무릎조차 지저분하고 더러운 붕대로 대충 감싸여 있었다. 상처가 곪았는지 그 사이로 누런 고름이 질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의학적인 지식이 전무한 그녀가 보기에도 노인의 상처는 심각해 보였다.
이예주가 끔찍스럽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고는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하, 할아버지. 포대 안에는 왜, 왜 갇혀 있던 거예요? 다리는 왜…….”
“아가씨도 피식자인가? 피식자 신세가 다 그런 거지. 이 근방은 잡아먹을 것이 별로 없어서 꼼짝없이 다리를 내주었어. 그래도 애비라고 저놈들이 아직은 날 살려 둔 거야.”
“애비…… 그럼 그 외눈박이들이 할아버지 아들들이라고요?!”
“그렇지, 클클클. 잘 알아듣는구먼. 똑 부러진 아가씨야.”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이예주에게 답했다. 그녀의 얼굴이 단박에 경악에 질렸다.
뭐? 그러니까, 저 외눈박이 멍청이들이 이 노인의 자식들이라고?
그럼 이 할아버지의 다리는…… 이예주가 뇌리를 가르는 끔찍한 사실에 몸서리를 쳤다.
설마가 사실이 되었다.
식인, 패륜아. 사람을 먹는 놈들이 숲을 배회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외눈박이들이 바보 같은 토론을 할 때 “아빠가 말했다.” 이런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 아빠가 바로 이 노인이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붕어처럼 하염없이 입을 열었다 닫는 것을 반복하는 이예주를 보며 노인이 다시 클클클 웃었다.
“아가씨도 시간족인가 보오. 그래서 포식자가 살려 두었군그래. 나도 시간족이라네. 그래서 살았지. 이 근방의 힘없는 것들은 저놈들에게 뼈도 못 추리고 모조리 잡아먹혔거든.”
이예주는 잠시 머리를 굴렸지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망할 놈의 시간족이고 다리족이고 하는 부족에 대해 한 치도 모른다는 벽이 있었다.
하지만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아들들에게 다리를 잡아먹혔다는 노인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정말로 1000년 후가 이딴 곳이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기필코 과거로, 그녀가 살고 있던 2017년 현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