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후론 남자의 염원처럼 그녀와 그의 사이엔 정말 침묵만이 존재했다.
남자는 전처럼 강철 같은 체력으로 무지막지하게 걸어 댔고 그녀는 단순히 오기로 그 뒤를 따랐다.
그 오기가 없었다면 이예주는 숲에 도착하기도 전에 체력 고갈로 나가떨어졌으리라.
헉헉, 숨넘어갈 듯 헐떡대면서도 저 미친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느라 눈두덩이가 시뻘게져 있던 그녀의 질주가 멈춘 것은, 어디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올 때쯤이었다.
다시 숲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어느덧 숲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걷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이예주의 달아오른 눈덩이를 식혀 주었다. 맑은 물비린내가 풍겨 오자 그녀는 정수리가 슬슬 가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숲으로 넘어온 후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씻을 틈이 없었다.
잊고 있었던 제 더러운 몰골이 생각나자 근질거림이 정수리를 넘어서 목, 목을 넘어 등짝, 등짝을 넘어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저기요.”
“…….”
이예주가 앞서가는 남자를 불렀다. 역시나 한 번 불러서는 재깍재깍 대답하는 일이 없다.
이미 몸과 마음이 매우 지친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
“저기, 좀 쉬었다 가면 안 돼요? 좀 씻고 싶은데. 목도 마르고…….”
“…….”
“저기요? 저기요. 저기요, 저기요!”
대답 없는 남자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쿵쿵 걷던 이예주는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선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등에 이마를 박을 뻔한 것을 간신히 면했다.
왜 갑자기 멈춰 서고 난리인데?
남자의 종잡을 수 없는 태도에 있는 성질 없는 성질을 부리며 그녀가 겉은로는 최대한 애원조로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저기요. 저 정말 씻고 싶어요. 머리가 너무 근지럽고 물 보니까 막 뛰어들고 싶고요…….”
“…….”
“헉. 저 이 있나 봐요.”
손톱을 세워 정수리를 긁적거리며 이예주가 별 뜻 없이 중얼거리자 남자가 거칠게 뒤돌아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물론 이가 있다는 말은 그냥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시뻘건 눈 안에 가득 담긴 혐오가 이예주의 꼬인 신경을 건드렸다.
그녀가 긁적긁적 거리며 남자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자 남자가 생각보다 심하게 미간을 구기며 두 발자국이나 물러섰다.
“왜요. 아무렴 정말 이 있을까 봐요?”
이예주가 남자의 과민 반응에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남자가 보기 드물게 험악한 인상으로 짓씹듯 내뱉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시체 썩는 내가 나서 주변을 경계하던 참이었는데.”
“시체 썩는 냄새요?”
마치 끔찍스러운 걸 바라보는 것처럼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길에 그녀는 팔을 들어 제게서 나는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여서인지 별 구린내는 나지 않았다.
대신 몰골이 말이 아니긴 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손톱 끝만 해도 때가 잔뜩 껴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몇 번 더 제 몸에 코를 박고 킁킁대다가 고개를 들고 전혀 모르겠다는 듯 ‘안 나는데요?’ 하고 대꾸했다.
그리고 확인해 보라는 듯이 다시 남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남자가 훌쩍 뒤로 물러서며 그들의 옆에 흐르고 있는 계곡을 가리켰다.
“30분 주겠다.”
“칫, 이 옮을까 봐 그래요? 없어요! 무슨 이가 있어.”
이예주는 괜히 장난기가 들어 때 낀 손을 흔들거리며 남자에게로 더 다가갔다. 그러자 남자가 험악하게 답했다.
“더 다가오면 물에 거꾸로 처박혀서 벼락 맞게 해 주지.”
그녀는 남자의 말에 대꾸 없이 조용히 물가로 다가갔다.
남자에게서 분명 허락을 얻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고 찝찝한지 모르겠다.
이예주는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털어 내며 신발을 벗어 던졌다.
숲속은 덥진 않았지만 무성한 풀 때문에 많이 습해서 땀이 잘 증발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매가 다 찢어져 너덜너덜한 후드티라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멀찍이서 삐딱하게 그녀를 주시하는 빨간 눈깔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청바지라 바지도 못 걷어 얕은 물에 발을 잠시 담구는 걸로 끝이 났다.
힐끗힐끗 남자를 돌아보던 이예주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얕은 물에 담근 발을 빼고 뒤돌았다.
“딴 데 가 있으면 안 돼요?”
남자의 눈썹이 무슨 헛소리냐는 듯 위로 휙 들렸다.
“저 옷도 벗고 싶은데요. 왜 거기 가만히 서 있어요?”
“…….”
“서, 설마 제 맨몸 보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쵸? 맞죠? 말 없는 거 보니 그렇네!”
그녀가 엄한 상상을 하며 남자를 치한으로 몰았다. 그러자 남자가 한숨을 쉬며 방책을 제시했다.
“벗지 말고 해.”
“씻는데 어떻게 안 벗고 해요! 몸도 씻고 땀 냄새도 좀 없애야죠!”
“…….”
“그렇게 안 봤는데 여자 몸이나 훔쳐보려고 하고, 완전…….”
변태 아니야?
그러나 그를 어디론가 보내겠다는 수작 섞인 그녀의 현란한 과민 반응을 바로 묵살하는 말이 이어졌다.
“나도 내 시력을 저하시키긴 싫으니 입 닥치고 씻어. 감전되기 20분 전이다.”
이예주는 군말 없이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감전사라는 말에 이제는 청바지가 물에 젖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얼굴에 물을 끼얹다시피 땟국물을 씻어 내렸다.
비단 남자의 협박이 무서워서 미친 듯이 씻기에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쿠릉, 쿠루룽. 정말로 그녀의 머리 위에 천둥 구름이 까맣게 몰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쉽게 됐군. 1분만 더 버티면 됐을 것을.”
남자가 물에 푹 젖어 비척비척 계곡에서 걸어 나온 이예주를 보고 정말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시계도 없이 어떤 기준으로 시간을 재는 것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남자 때문에 정신없이 물을 끼얹었더니 딱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푸르뎅뎅한 입술을 벌벌 떨며 그녀가 울상을 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요. 근데 이제 구름 치워 주시면 안 돼요? 추워서 햇빛에 좀 말려야겠는데요.”
“비가 오려나 보군.”
“네? 저거…… 그쪽이 몰고 온 거 아니에요?”
남자의 대꾸에 이예주가 멍한 표정으로 먹구름이 잔뜩 껴 있는 하늘을 가리키자 남자가 “내가 왜?” 하고 여상히 대답했다.
“……감전시킨다면서요.”
“비 오는 날에 벼락을 내리치면 계곡을 따라 강 전체가 감전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지.”
남자가 그런 기본 상식도 모르냐는 듯 한심한 어투로 대답하곤 뒤를 돌아 커다란 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이예주는 긴장했던 몸을 탁 풀며 한숨처럼 “개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겁에 질려 미친 듯이 물 칠을 해 댔던 방금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젠 너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 분노도 일지 않음을 느꼈다. 저 망할 놈을 대체 어떻게 엿 먹여야 할까. 어떻게 하면, 대체 어떻게 하면.
투둑.
그때 이마에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이어서 투둑 투둑, 물방울들이 빠른 간격으로 연달아 떨어져 내리자 이예주는 남자가 걸어간 나무 쪽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과연 이 미친놈의 예언이 들어맞았다. 한 방울씩 톡톡 떨어지던 물방울의 양이 급격히 많아지더니 금세 쏴아아 하고 시원한 빗줄기가 떨어졌다.
나무 아래 몸을 피하긴 했지만 물로부터 온전한 건 남자뿐이었다.
안 그래도 물에 꼴딱 젖은 마당에 비바람까지 슬슬 불어오자 이예주는 남자에게 물이 튈 정도로 푸다다닥 몸을 떨어 댔다.
“저기요. 비 많이 오는데 이제 어떻게 해요?”
그녀가 노려보다시피 무뚝뚝하게 앞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칭얼거렸다. 심히 추운 듯 그녀의 입술은 이제 보랏빛에 가까웠다.
이예주가 꼴사납게 벌벌 떨어 대자 남자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이런 한심한 것은 어디서 왔을까, 하는 표정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썩은 내가 아직도 나는군.”
“뭐요? 저 빡빡 씻었어요! 진짜요!”
네 코는 무슨 개코니? 또 썩은 내가 난다는 소리에 이예주가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제 몸 곳곳에 또 코를 박았다.
킁킁. 아무리 냄새를 맡아도 썩은 내는커녕 차갑게 식어 살 내음도 잘 나지 않았다.
“썩은 내는 무슨. 이제 추워서 더는 못 씻어요, 진짜. 그쪽이 참든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 으헉!”
여기서 그만 찢어지자, 라는 소리를 채 내뱉기도 전에 머리 위로 무언가가 털썩 떨어졌다.
이예주는 화들짝 놀라 버둥거렸다. 허겁지겁 떨어진 것을 끌어 내려 보니 옷이었다. 검은 옷.
“어…….”
힐끗 옆을 보니 겉옷이 한 꺼풀 사라진 남자가 보였다.
“잠깐 주변을 돌아보고 올 테니 얌전히 있어라. 꼴사납게 떨어 대지 말고.”
집어 던지다시피 머리에 씌워 준 그의 겉옷을 든 채 멍청히 서 있는 그녀에게로 남자가 읊조렸다.
꽤 어두침침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도 시뻘건 동공이 올곧게 이예주를 향했다. 마치 얌전히 있지 않을 시 혼쭐을 내주겠다는 경고 같았다.
“대답.”
늘 그렇듯 대답을 종용하는 남자의 말에 이예주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집요하게 그녀의 마지막 끄덕임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나무 그늘에서 한 발자국 나섰다.
쏴아아.
빗소리가 한층 더 거세졌다.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나가기엔 빗줄기가 너무 강해 보였다.
물론 저 무지막지한 남자에게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지만.
“저, 저기. 이거 그냥 가져가는 게…….”
괜한 부담에 이예주가 서둘러 남자에게 도로 겉옷을 돌려주려던 차였다. 한발 앞서 나무 그늘을 벗어난 남자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입을 떡 벌린 건.
“저, 저게…….”
빗물이 남자에게 닿지 않았다. 아니, 남자가 있는 곳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남자가 가는 길마다 빗줄기가 열리는 것이다.
지진에 천둥도 모자라 이젠 비까지 남자를 피해 간다.
저 남자 진짜 신이야……? 뭐야? 아무리 초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어떻게 자연까지 마구 부릴 수 있느냔 말이다. 그것도 종류에 상관없이!
나 진짜 대체 뭘 건든 거지?
문득 드는 생각에 휘적휘적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예주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뭔가 자꾸만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솟는다.
이러다가 정말 1000년이나 건너온 어딘지도 모를 땅 한복판에서 객사하지 않을까.
복수는 고사하고 저 미친놈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리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추위와는 다른 의미에서 부들부들 떨던 이예주는 지금이라도 줄행랑을 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문’을 넘었음에도 기어이 그녀를 쫓아온 남자다. 앞으로 또 언제 도망의 기회가 찾아올지 미지수였다.
“그래, 지금이야. 더 늦기 전에…….”
그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휘적휘적 멀어져 가던 남자의 까만 뒤통수가 우뚝 멈춰 선 것은.
믿기지 않지만 그때까지 남자가 걷는 길은 거짓말처럼 비가 멈춰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남자가 있는 곳만 유독 잘 보이는 것이 기괴하기까지 했다.
걸음을 멈춘 남자가 돌연 그녀가 있는 나무를 향해 휙 돌아섰다.
꽤 멀리 떨어졌음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시뻘건 눈동자 때문에 그녀는 ‘히익’ 하고 겁을 집어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