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2)화 (22/319)

일단 살았다. 

남자가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벼락 맞고 죽지는 않을 듯했다. 

그런데 한 번만 속아 넘어가 준다니? 

남자의 말을 곱씹던 이예주는 덜컹 심장이 내려앉음을 느꼈다. 혹시 거짓말임을 눈치챘나? 

남자의 앞에서 그녀란 존재는 거짓투성이였다. 

그가 쫓는 중인 ‘다리족’이란 종족에 대해서도 모름은 물론이고 무당은 둘째치고 조상도 믿지 않는 이예주였다. 

그런데 뭘 속아 넘어가 준다는 거지? 거짓말을 다 안다는 말인가?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눈치를…….

“크르르릉.”

남자의 모호한 말에 기어이 눈물을 쏟아 내기 직전이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그녀는 바로 등 뒤에 남자가 타고 온 거대한 늑대가 버티고 있음을 알아챘다. 

뒤통수에 내뱉어진 사나운 콧김에 이예주가 기겁을 하고 몸을 움츠릴 때였다. 

멱살이 놓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그녀의 불쌍한 후드가 휙 거칠게 잡아당겨졌다. 

“먹는 것이 아니라 했을 텐데.”

억, 짧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강한 힘에 끌려간 이예주는 남자의 딱딱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방금 제가 서 있던 자리 위에 거대한 회색 늑대가 입을 쩍 벌린 채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희게 질렸다. 

“크르릉, 인간. 인간은 잡아먹어야 한다, 주인. 주인은 인간 싫어한다.”

“명령을 어길 셈인가.”

남자의 차가운 말에 늑대가 으르렁거렸다. 

이예주는 팽팽하던 후드가 느슨해지자 남자가 제 후드를 잡아당겨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로부터 구해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뿐, 야생동물의 으르렁거림에 그녀는 다시 겁에 질렸다. 

남자가 아무리 인간들 사이에서 드문 장신일지라도 거대한 늑대 앞에서, 그것도 들짐승의 누린내를 풍기는 야생 늑대 앞에서는 한입거리밖에 안 돼 보였다. 

그때 그가 그녀의 후드를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늑대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던 커다란 늑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를 감추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것도 모자라 마치 호랑이를 만난 강아지 새끼처럼 낑낑거리는 게 아닌가. 

그녀가 어안이 벙벙해 눈을 끔뻑거리는 사이 남자가 다시 차갑게 명령했다.

“부르기 전까지 숲에 처박혀 있도록.”

“그르릉! 싫다, 인간. 주인……!”

“그만. 더러운 인간을 네 등에 태우고 사막 횡단까지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끼잉, 끼잉.”

남자의 말에 순한 양처럼 낑낑대던 늑대가 잠시 애원하듯 회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휙 뛰어갔다. 

그 모습이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 같아서 이예주는 한없이 당황스러웠다. 

그녀를 향해 사납게 드러냈던 살기가 남자의 앞에선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뿐이랴. 말하는 짐승이 조롱이 외에 또 있다는 것도 놀라울진대 그 사나운 야생 늑대가 남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고 보면 이 숲에서 만나는 것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향해 숨기지 않는 적의와 살의를 내비쳤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남자에겐 이유 없는 복종과 존경을 바친다. 주인님이라고 꼬박꼬박 불러 대며. 

대체 왜 이런 미친놈에게? 새삼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다시 보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왜 보내는 거예요?”

“……뭐?”

이예주의 말이 불쾌한 듯 남자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그녀는 미처 그 미미한 표정 변화까지 잡아내지는 못했다.

“타고 가려고 데리고 온 거 아니었어요?”

“…….”

“마침 다리도 아프고 잠도 오니 잘됐는데. 저 정도 덩치면 둘 다 태울 수…….”

이예주는 늑대가 순식간에 사라진 숲 쪽을 가리키며 떠벌 떠벌 거리다가 문득 뺨에 닿는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운이 넘쳐 나는가 보지. 헛소리도 지껄일 정도면.”

남자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이예주를 차갑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더니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신경 안 쓰겠다는 듯 휘적휘적 먼저 걷기 시작했다. 

제자리에 서서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이예주가 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거 일부러 그러는 거 맞지?”

아무리 되뇌어 봐도 골리는 걸로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라면 왜 기껏 저 혼자 신나게 타고 온 이동 수단을 다시 돌려보낸단 말인가? 

저는 이곳에 올 동안 편하게 타고 왔으면서 자신은 다시 노예처럼 발로 걸으란 소리 맞지? 

뒤늦게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그녀가 이를 사리물며 잠시나마 늑대의 이빨로부터 구해 줬던 고마움을 빠득빠득 지워 내고 그 자리에 다시 증오와 복수를 채웠다. 

쪼잔한 놈. 늑대 타고 쉽게 가면 가냘픈 숙녀도 배려하는 거고 저도 좋을 것을. 대체 저놈은 뭘 먹고 살았기에 저렇게 좀생이일까나. 

이런 한심한 건 처음 본다는 남자의 눈빛을 떠올리며 이예주가 있는 힘껏 발을 놀리며 남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벌써 꽤 멀어진 까만 뒤통수를 향해 조심스럽게 가운데 손가락을 흔들었다. 

기필코 복수하겠다. 당한 만큼 갚아 주리라. 

어린아이처럼 댓 발 나온 입으로 분을 삭이며 이예주는 남자를 향한 복수의 투지를 불태웠다. 

“저기요. 근데 조롱이는요?”

터벅터벅. 

한참 동안 남자의 뒤를 한 발자국 떨어져 따라 걷던 이예주는 문득 조롱이가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무심결에 내뱉었다. 그러고는 곧 아차 싶었다. 

남자가 먼저 말하기 전엔 절대 먼저 말을 섞지 말자고 다짐한 지 몇 분이 지났다고 고새를 못 참고 먼저 입을 연 꼴이 되었다. 

이 망할 놈의 기억력.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자책하는 와중, 남자가 무심하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뻘건 눈빛이 빨리도 물어본다는 듯 한심함을 가득 품고 있었다. 

“심부름 보냈다.”

“심부름이요? 갑자기 심부름은 왜요?”

“알 것 없다.”

이런 싸가지! 자신의 말을 칼같이 끊어 내는 남자의 말에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욕설을 꾹 눌러 참았다. 

말을 건 내가 멍청이요.

염불 외우듯 중얼거리며 몇 번 심호흡을 한 그녀가 다시 무뚝뚝하게 걸어가는 남자를 향해 굴하지 않고 입을 뗐다.

“저기요. 근데 혹시 저 가고 막…… 뭐 나타나진 않았죠?”

이예주는 돌뱀이 나온 악몽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남자의 빨간 동공이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를 향했다. 

그래도 이 남자라면 지진을 일으키거나 번개를 내리쳐 그 끔찍스러운 괴물 뱀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예지몽까지 꿀 정도면 빌어먹을 뱀 대가리가 그녀와 굉장히 가까운 곳까지 당도했던 게 분명했다. 

남자가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으로 미래까지 부득부득 자신을 쫓아왔으니 어쩌면 이미 괴물 뱀과 만나 한차례 격투를 벌인 후 뱀을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예주는 자신보다 머리통 한 개 반 정도 더 큰 듯한 남자를 올려다보며 내심 속으로 애원했다. 

제발 자신을 쫓는 정적 중 한 명이 제거되었기를.

“막 그런 거 있잖아요. 여기는 숲이니까 산짐승도 많고…….”

“…….”

“아니면 그…… 뱀 같은 거?”

빠르게 걷는 남자의 보폭을 최대한 쫓으며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남자는 워낙 얼굴이 무표정해서 감정의 변화나 동요 따위를 눈치채기 힘들었다. 

그나마 얼굴을 마주 보고 있어야 기분이 나쁜지, 분노했는지 간신히 알아챌 수 있는 판국이었다. 

그러니 말도 없이 앞만 보고 일정한 속도로 걸어 대는 그의 기분을 그녀가 알아챌 리 없었다. 

대답 없이 계속 걷기만 하는 남자를 보며 애가 탄 이예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풀숲에 풀 뱀 같은 거 많이 살잖아요? 저 뱀 진짜 싫어해서요. 혹시 모르니까…….”

“아무것도.”

“예?”

“너 말고 아무것도 내 앞을 막는 것은 없으니 입 다물고 걸어.”

드디어 기다리던 남자의 대답에 그녀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그럼 그 괴물 뱀이 아직도 살아 있단 소린데. 그럼 아직도 그 빌어먹을 게 날 뒤쫓는단 소리야?

“정말요? 정말 아무것도요? 거짓말 아니죠? 정말……!”

“스읍, 입.”

남자가 다시 한 번 입을 열 시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향해 안광을 빛내자 비로소 이예주의 입이 다물렸다. 

대신 혼란스러운 심정을 대변하듯 그녀의 까만 두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남자의 말에는 거짓이 없는 듯했다. 의심 많은 놈이 저렇게 단정 짓는 것을 보면 정말로 뱀을 마주치지 않았단 소리다. 

그렇다면 자신의 꿈이 개꿈이란 말이냐. 그것도 아니다. 

잠에서 깼을 때 ‘문’이 나타난 걸로 보아 능력이 제대로 시동된 것이 확실했다. 

그럼 이예주가 ‘문’을 넘자마자 그녀를 쫓아 근처까지 당도했던 돌뱀 또한 방향을 틀었다는 말인데……. 

꿈에서 봤던 노오란 뱀 눈깔이 떠올랐다. 분명 자신을 바라봄에 있어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의 눈빛이라기보단 더 집요하고 지저분한 얄팍함이 그 쭉 찢어진 동공에 떠올라 있었다. 

이건 동물 다큐멘터리만 4년 가까이 찾아보았던 이예주의 생존 감각이다. 

뱀의 눈알부터 독이 분명한 점액질을 뚝뚝 떨어뜨리던 독니까지 생각의 폭이 넓어지자 그녀는 불쑥 헛구역질이 치솟았다.

안 돼. 정말 인정하고 싶지만 그 뱀 대가리, 분명 자신을 쫓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징그럽고 기다란 몸뚱이로 꿈질꿈질 기어 와 끝내 날카로운 독니로 자신을 찢어 삼킬 것이다. 

미친놈도 모자라 괴물 뱀까지 자신을 쫓고 있다니. 

이예주는 헛구역질과 더불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뱀의 아이큐가 대체 몇이었더라. 

뱀이 사람 얼굴도 기억할 정도로 지능이 높았던가? 

아니, 그딴 건 다 필요 없다. 새도 늑대도 말하는 마당에 고작 뱀 대가리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쫓아오는 것이 뭐 대수랴. 

이게 다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 저주거늘. 

이 능력 때문에 언제 한 번 꼼짝없이 죽을 날이 올 줄 알았다. 이 나쁜 능력, 능력! 능력! 

“입 다물라 했지, 발까지 멈추라곤 안 했는데.”

문득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이예주가 능력에 관해 피를 토하듯 절규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도 자신을 쫓고 있을 괴물 뱀에 대한 고뇌 때문에 어느덧 발걸음마저 늦춰졌나 보다. 

남자가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삐딱하게 선 채 시뻘건 눈을 빛내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따라오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휘적휘적 걸어갈 땐 언제고 걸음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바로 알아채고 눈을 부라리는 남자다. 

그래, 이놈도 결국 자신을 죽이려는 놈이다. 잠시간의 동맹일 뿐 자신을 죽이기 위해 벼르고 있는 괴물 같은 놈이라는 것을 자꾸만 깜빡깜빡 잊어버린다. 

쉬이 떼어 낼 수 없는 끔찍한 존재들 때문에 이예주가 착잡한 표정으로 남자가 있는 곳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동맹이라고 해 봤자 뱀에게 쫓기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저 남자가 과연 그녀를 구해 줄지도 의문이다. 

어쩌면 옳다구나 하고 뱀의 아가리 속으로 자신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사내임이 분명해 이예주의 평평한 미간이 와작 일그러졌다. 

아니, 아니다. 도망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놈의 행태를 보았을 때 자신은 아직 살려 둘 가치가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도와주지 않으려나? 

그러나 이예주는 남자의 앞에 섰을 때 아주 귀찮고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빛을 읽은 후 그가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깨끗이 지워 버렸다. 

역시 미련 없이 자신을 내던지고도 남을 놈이다. 그러기 전에 살 구멍은 만들어 놓아야 할 텐데. 

막상 숲을 나와서 화창한 하늘 아래 아름다운 풍경을 안주 삼아 걷는 것은 좋았지만, 여기는 안전하지 않아 보였다. 

돌뱀이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여기처럼 개방된 장소에선 금방 그녀를 알아볼 것이다. 

대가리를 뒤흔들며 쉭쉭대는 뱀 생각에 창백해진 이예주가 덥석 남자의 소맷부리를 붙잡았다.

“저기요. 우리 다시 숲으로 가면 안 돼요?”

“뭐?”

“여긴 너무…… 너무 허허벌판이에요.”

남자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목(古木) 들판으로 온 건 인간, 너다.”

“네?”

“여긴 숲의 동쪽 끝이다. 서쪽으로 가는 길과 정반대지. 네 덕에 서쪽으로 간 인간들을 쫓는 것도 사흘이나 지체됐다.”

“…….”

“너 같은 능력을 가진 또 다른 인간들을 만나면 곧바로 죽을 것을 알긴 아는군그래. 살고 싶어 발악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인 걸 보니.”

짜증이 잔뜩 담긴 말투에 남자의 소매를 잡은 이예주의 팔이 스르르 떨어졌다. 

그녀는 제 멍청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심각하게 되돌아보았다. 

그새 또 까먹었다. 이 남자의 혀에는 가시가 달려 있다는 걸. 

자신은 분명 뱀 대가리의 독니에 찢겨 죽든지 이 자식의 혀에 찔려 죽든지, 둘 중 하나일 팔자렷다.

“어차피 들판만 지나면 지겹도록 숲을 가로질러야 하니 이제 더 이상 헛소리 말고 부지런히 걷기나 해.”

더 빨리 죽기 싫으면. 남자가 덧붙이며 휙 소리 나게 뒤돌아서 제 말마따나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이예주가 정반대까지 기어 온 탓이란 소리다. 

그녀는 제 잘못인 것을 인정하고 아무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의 꽉 쥔 주먹이 눈에 띌 정도로 부들부들 떨릴 뿐이다. 

그것은 돌뱀에 대한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감정으로 인한 것이었다. 

아, 제발 저 뒤통수 한 대만 누가 좀 때려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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