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1)화 (21/319)

그녀는 지난 꿈속에서 자신을 향해 독을 뚝뚝 떨어뜨리며 쉭쉭대던 괴물 뱀을 기억하곤 진저리를 치며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러고 보니 그 초대형 괴물 뱀이 쫓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남자를 그대로 남겨 두고 온 셈이 되었다. 

설마 괴물 뱀에 물려 죽진 않았겠지. 

어쩌면 남자가 벼락을 내리쳐 뱀 대가리를 뱀 구이로 만들어 버리고 그녀의 뒤를 맹렬히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 

“……흐, 흑.”

이예주가 떡이 져서 손가락도 잘 들어가지 않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울먹였다. 

살아남는 게 남자가 됐건 괴물 뱀이 됐건, 어느 쪽이나 끔찍하기 짝이 없다. 

두 괴물 중 누가 이겼건 다시 조우하게 될 시 제 목숨에 위협인 것은 변함없으니 말이다. 

그녀가 떠난 후 둘이 치열하게 싸워 둘 다 뒤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극히 희박했다.

이예주는 앞뒤 양옆으로 보이지 않는 벽이 자신을 조여 온다고 생각했다. 그 벽을 바로 ‘죽음’이라 명명하리. 

그냥 여기서 남자가 올 때까지 기다린 후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것만이 정답일까. 

이왕이면 말이 안 통하는 초대형 돌뱀 대신 그나마 거래를 제시할 수 있는 남자가 살아 있기를 그녀는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그나저나 목숨을 담보로 제시할 거래가 남아 있던가, 자신에게…….

그때, 멀리서 말 달리는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나무 아래 멍청히 서서 제 머리를 잡아 뜯던 이예주가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까만 점이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잘 보이지 않아 한껏 가느다래졌던 이예주의 눈이 이내 화등잔만 해진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커다란 늑대였다. 

하지만 늑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위에 태연히 앉아 그녀를 시퍼렇게 노려보는 남자가 문제였지. 

“허.”

이예주는 기가 막히다 못해 코가 막혀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남자가 마치 오토바이 몰듯 늑대를 부리며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오, 오빠!’ 하고 환호성 지르며 두 팔 벌려 달려 나가야 할 분위기였다. 

두두두두두. 

“아우—!” 

바람처럼 순식간에 달려온 회색 털을 가진 늑대가 우렁찬 포효와 함께 이예주의 앞에 멈춰 섰다. 

????원령공주????에나 나올 법한 거대한 늑대였다. 

그 위에서 남자가 군림하는 왕처럼 오만 방자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단정했던 까만 머리가 바람에 흩날려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남자의 새까만 눈이 입을 벌린 채 멍청하게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시뻘겋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짐승이 이예주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르르릉.”

“워, 진정해라.”

휙, 단 한 번의 동작으로 멋지게 늑대 위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이예주의 앞에 우뚝 섰다. 

늑대를 다독이던 그의 눈이 자신에게 향하자 그녀가 입을 다물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늑대네요.”

“그르르릉! 인간 냄새다!”

다물렸던 이예주의 입이 다시금 떡 벌어졌다. 으르렁거림과 함께 쏟아진 선명한 말소리 때문이다. 

“으르릉, 컹! 인간! 인간이다!”

“늑대, 먹는 것이 아니다.”

새도 모자라 이제 늑대까지 말을 하네. 현기증이 다 나는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순간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그러자 남자가 고맙게도 손을 뻗어 우악스럽게 붙잡아 주었다. 

붙잡아 주었다고 말하기엔 거칠게 붙들린 그녀의 멱살이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였지만.

“어억! 왜, 왜 이러……!”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예, 예?”

“왜 도망쳤지?”

“…….”

“왜 갑자기 눈깔을 까뒤집고 쥐새끼처럼 도망쳤냐 이 말이다.”

이 남자 말하는 것 좀 보소. 잠시 남자를 만나 반가웠던 마음이 종내 바람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눈깔을 까뒤집고 도망쳤다니. 비록 예지몽을 꾸고 정신없이 ‘문’을 넘긴 했지만 그것은 단지 죽기 싫은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일 뿐, 절대로 남자가 칭한 것처럼 흉하게 줄행랑을 놓은 것은 아니다. 

쥐새끼는 무슨. 이렇게 큰 쥐 봤냐, 이 자식아!

그녀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남자에 대한 반발심을 꿀떡 넘겨 삼킨 것은 단지 남자가 쥔 목덜미가 조여서 그런 것이었다. 

절대로 안광이 번쩍거리는 남자의 시뻘건 눈에 겁을 먹어서도 아니었다.

“……하하. 누, 눈깔을 까뒤집고 도망이라뇨. 전 그냥…….”

“입 닥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왜 도망친 거냐.”

“어어흑! 어억!”

이예주가 신소리를 늘어놓으려 하자 남자가 대번 그녀의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어 댔다. 

잠기운도 다 물러가지 않은 상태에서 고개가 앞뒤로 마구 흔들리니 불쑥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남자의 손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아악! 흔들지 마요! 흔들지 마요!”

“네 입으로 도망가지 않겠다고 했다. 네 입으로 내게 도망치지 않겠다 맹세했지. 그런데 감히. 감히 너 따위 것이 날 기만해?”

“어억! 이, 이것 좀 놓고 얘기…….”

“네 도망 길은 죽음뿐이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게 아니라!”

“그래. 마지막이니 어디 한번 마음껏 지껄여 봐.”

남자의 말투나 표정이 하도 단조로워 자칫하면 그가 차분히 그녀에게 도망을 친 이유를 묻는 것으로 오인하기 쉬웠다. 

하지만 시뻘건 눈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찢어발길 것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당장에 죽여도 상관없을 만큼 권태롭고 오만한 목소리로 마지막 변명을 종용하는 것이다. 

꾸르릉, 꾸르릉. 불현듯 하늘이 천둥소리를 내며 어두워졌다. 

왠지 모를 기시감에 이예주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 갔다. 

어흐흑, 혹시 이 남자, 또 벼락 내리치려고 준비 중인 거 아니야? 

그녀는 남자의 손길에 정신없이 고개를 꺼떡거리면서도 통곡할 만큼 후회가 치밀어 올랐다. 

이 미친놈을 만나기 전에 도망쳤어야 됐는데. 고민 따윈 필요 없이 ‘문’을 넘자마자 도망쳤어야 됐다. 

왜 항상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후회가 물밀듯이 찾아오는 것인가.

“어디 한번 지껄여 보래도. 그간 보아 온 정도 있으니 소멸만은 막아 주지. 하지만 재가 된 네 시체는 들짐승이 뜯어 먹을지도 모르겠군. 여기 늑대도 널…….”

“아, 진짜!”

남자의 폭언과도 같은 말에 이예주는 찬물 뒤집어쓴 듯 오한이 들어 몸을 꼿꼿이 세웠다. 

온몸에 힘을 주니 속절없이 흔들리면서 생긴 멀미가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다. 

충분히 도망칠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잡혀 버린 제 멍청함에 피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남자를 향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도망가긴 누가 도망가요! 여기 어딘지도 다 알려 주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

“도망가려면 당신 오기도 전에 도망갔겠죠! 대체 어떤 멍청이가 도망치면 죽인다는 사람한테 도망칠 장소도 다 알려 주고 도망을 가요!”

그 멍청이가 바로 나다! 

이예주는 터져 나오는 오열을 애써 삼키며 결국 비굴하게 남자를 설득하는 것을 택했다. 

그녀의 처절한 외침에 남자의 표정이 조금 의미심장해졌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시뻘건 눈동자가 샅샅이 훑었다. 과연 거짓을 고하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듯싶었다.

“도망이 아니라면 대체 왜 사라진 거지.”

꾸르릉, 쿠릉 쿵. 계속 검은 구름 떼가 몰려오고 천둥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힐끗 위를 올려다보던 이예주는 울기 직전과 같은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도망간 거 아니에요.”

“…….”

남자는 여전히 패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계속해 보라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며 변명을 생각해 냈다. 이대로 벼락 맞고 죽을 순 없었다. 

“그, 그게…… 악몽을 꿨는데요…… 흐흑.”

“…….”

“제, 제가 그런 게 있어요. 그 신기 같은 거요. 신기…… 아, 알죠?”

남자의 한쪽 눈썹이 삐쭉 올라가자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막 꿈에 나와서 알려 주고 그러는 거요. 귀신 나오고 막 그런 거…….”

“너, 무당인 건가?”

“…….”

존재도 잘 모르는 할머니를 팔아 치우며 그녀가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여 댈 때 남자가 간만에 말이 통하는 대꾸를 해 왔다. 

다행히 1000년이 지나도 무당과 같은 미신이 존재하는가 보다. 

물론 이예주는 철저한 무신론자다. 하나님은 물론, 예수도 부처도 그녀가 가진 저주 앞에선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네, 네. 뭐…… 그런 거랑 비슷한 거요! 그냥 악몽을 꾸면 할머니가 나와서 위험하다고 하는데…… 그, 그런 걸 잘 느껴요. 좀 꺼림칙하고 막 그런 거.” 

“…….”

“……귀신이니까 너무 무섭고 불안하고. 으흑, 여긴 너무 외딴 숲이고…… 위험하면 일단 피하고 보는 게 버릇처럼 굳어져서…….”

저도 뭔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를 정도의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그녀가 뒤룩뒤룩 눈알을 굴렸다. 

어느 순간부터 꾸릉꾸릉하며 요란 법석을 떨던 천둥소리가 잠잠해졌다. 

아직 남자에게서 의심의 눈초리가 거둬진 것은 아니나, 벼락이 당장 내리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저승 문턱에서 한숨 돌린 것 같았다. 

그녀는 격하게 안도했다. 

새삼 남자가 저 못지않게 멍청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유도 생겼다. 

어쩌면 이렇게 말 같지도 않는 헛소리에 두 번이나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예주는 이미 머리가 굵으면서 양심 따윈 팔아먹은 지 오래였기에 오히려 더 그럴싸한 변명을 내놓지 못한 제 뇌의 한계가 답답할 뿐이었다.

“……그게 사실인가?”

“네, 네?”

“네가 위험을 감지하는 무당이라는 게 사실이냐고.”

제 얼굴을 뚫어 버릴 듯 쏘아보는 시뻘건 눈빛에 그녀는 침을 꼴딱 넘겨 삼켰다. 

이예주는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

“네! 맞아요. 무당!”

남자가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얼굴에 미심쩍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무당이라면 너같이 어린 인간이 그만한 힘을 흉내 내는 게 가능하겠군. 그보다 이틀간 기척은 왜 숨겼지?”

“이틀이요?”

“그래. 이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기척이 느껴지지 않더군. 오늘마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네 기척이 어디서 느껴지든 간에 바로 죽여 버릴 참이었다.”

“이, 이틀이나 지났…… 헙!”

‘이틀이나 지났단 말이야?’ 하고 따져 물으려던 이예주가 황급히 두 손으로 제 방정맞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남자의 말은 그 호숫가 근처에서 야영했던 날로부터 현재 이틀이 지났단 소리였다. 

벌써 이틀이라니. 왠지 이곳에 온 이후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흥청망청 시간만 흘려보내는 것 같은 기분에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남자의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하루라도 더 흘렀다간 ‘문’을 넘어오자마자 분노한 남자에 의해 벼락이 내리쳤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니 실제로 두피가 다 찌릿찌릿해지는 그녀였다. 

“대답.”

“다, 당연히! 근처에서 기다렸어요! 무서우니까 기척을 숨기고 그쪽 기다린 거죠. 기다렸어요. 진짜, 정말요. 하하…….”

기척을 숨기긴, 숨긴다의 ‘숨’ 자도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그녀였으나 일단 필사적으로 남자를 기다렸음을 강조했다. 

남자의 날카로운 눈빛 아래 두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의 입은 기계적으로 쉴 새 없이 ‘그럼 기다렸고말고요.’를 반복했다. 

남자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이예주의 멱살을 잡고 놓질 않았다. 

등 뒤가 삐질삐질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그녀의 멱살은 높이 솟아올라 있었고, 그들 위에 떠 있는 불길한 먹구름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저도 모르게 통곡을 하며 잘못했다고 자백을 쏟아 내기 바로 직전, 드디어 잡혔던 멱살이 풀리며 그녀의 숨통이 트였다.

“……헉, 헉.”

이예주는 절로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짧게 생각을 하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간사한 혀군.”

“……예?”

“혀가 간사해.”

“…….”

“한 번만 더 속아 넘어가 주지.”

그와 동시에 꾸릉꾸릉하고 그들 위로 잔뜩 껴 있던 먹구름이 거짓말처럼 움직이더니 결국엔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하늘이 맑고 화창하게 개었지만 이예주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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