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9)화 (19/319)

저 남자는 한국이라면 분명 여자들에게 쌍욕을 먹고 덤으로 귀싸대기도 처맞을 것이다. 

대체 어느 나라 남자가 저렇게 여자 대하기를 쓰레기같이 대할까. 싸가지 없게 말하기 대회를 나가면, 1등은 물론이고 심사위원까지 후려칠 사내일세.

그래도 잘생겼으니 상관없겠지? 저 성질머리 밑바탕에 깔려 있는 우월한 외모가 연달아 떠오르자 그녀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더러운 외모 지상주의. 

하지만 외모를 가지고 비꼬기엔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심장이 멎을 만큼. 

아까도 몇 번이나 눈을 슬쩍 굴리며 자신을 홀렸다. 눈 하나 굴리는 것도 어쩜 그리 품위 있고 고고하고 섹시한지……. 

정신 차려, 이예주! 저건 악귀야, 악귀. 악한 것들은 원래 아름다운 법이야. 

아름다움에 현혹되려던 제 어리석음을 일깨우며 그녀는 더욱 높이 가운데 손가락을 치올렸다. 

생각해 보니 저 악귀에게 첫 포옹을 뺏겼다. 그녀로서는 진짜 말 그대로 외간 남자와의 첫 포옹이었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 아빠 모두 친인척이라곤 없는 척박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계셨으니. 

그런 감격스러운 첫 포옹이 까마귀를 피하려다 얻어 걸린 저 싸가지라니. 

뭔가 굉장히 억울한 기분에 분함을 숨기지 못하던 이예주는 혼자 잘도 휘적휘적 걸어가던 남자가 우뚝 자리에서 멈춰 서자 허겁지겁 가운데 손가락을 접었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 까마귀 둥지가 있나 보군.”

“…….”

“가까운 데 있으려나.”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그녀의 얼굴이 단박에 창백해졌다.

“가, 같이 가요!”

이예주는 까마귀 소리에 두말 않고 남자에게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뛰어가는 것도 모자라 남자의 근처에 당도하자마자 덥석,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

“하흑, 진짜 까마귀 새끼 너무 싫어.”

남자의 팔이 대단한 무기라도 되는 듯 꼭 부여잡은 그녀가 겁먹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징징대는 꼴을 보아하니 제가 잡은 게 누구인지 또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남자가 걸음을 멈춘 채 그런 이예주를 어이없이 내려다보았으나, 그녀는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것처럼 되레 당당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왜 안 가요? 빠, 빨리 가요.”

“…….”

남자의 빨간 눈이 대꾸 없이 이예주를 직시했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가 성급히 덧붙였다.

“저기요. 저 까마귀 무섭고 뭐 그런 게 아니거든요?”

“…….”

“제가 밤눈이 좀 어두워요.”

밤눈이 어둡다는 궁색한 핑계를 대는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띌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표정으로 이예주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절박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한숨을 내쉰 그는 “가요, 얼른!” 하는 애원에 가까운 이예주의 재촉에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기요. 저 근데 절대 도망가려던 거 아니에요. 저―얼대.”

“…….”

“진짜예요. 제가 왜 도망을 가려 하겠어요? 하하…….”

이예주는 걷는 와중 뜬금없이 제가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녀의 말에는 강한 부정이 담겨 있었지만 어색한 웃음 끝에 음정이 떨리는 것마저 막을 순 없었다. 

잡힌 팔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한 치도 미동 없이 묵묵히 걷던 남자가 그녀의 말에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았으니 그만 떨어…….”

“밤눈이 어두워요.”

다시 한 번 문제없는 제 시력에 야맹증을 덮어씌운 이예주는 이후 입을 다물고 남자의 곁에 바짝 붙어 걷기를 고수했다. 

제가 느끼기에도 혀를 내두를 만큼 뻔뻔했지만, 까마귀 새끼에게 눈알을 뺏기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녀는 기꺼이 불편함과 부끄러움을 감수했다. 

걷는 중간중간 남자의 짜증 섞인 숨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이예주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렇게 그들은 황조롱이가 불 피워 놓은 야영장에 도착할 때까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걸었다.

“배고프다더니. 나 따돌리고 도망가려고 그랬져?”

몇 시간 만에 이예주를 다시 만난 조롱이는 안 그래도 그녀가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던 문제를 건드렸다. 

그녀는 남자의 팔을 꽉 부여잡고 있던 것도 내팽개치고 재빠르게 조롱이에게로 걸어가 “조용해” 하고 속삭였다. 

“씨잉. 배고플까 봐 먹을 것도 잔뜩 찾아왔는데 따돌릴 생각만 하구!”

“먹을 거? 어디? 어디?”

먹을 것을 가져왔다는 황조롱이의 말에 그녀가 반색을 하고 음식을 찾았다. 잊고 있었던 허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이예주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황조롱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롱이가 한쪽에 쌓아 놓은 생소한 과일 더미를 가리켰다. 그녀는 불 그림자 때문에 보이지 않던 음식을 확인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갔다. 

과일은 모양새가 다양했다. 눈에 익은 사과 같은 것도 보였지만 둥글넓적하거나 별 모양같이 낯선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더 많았다. 

하지만 배고픔에 눈이 뒤집혀서 그런지 하나같이 탐스럽게 익은 것처럼 보였다. 

이예주는 가장 가까이 있는 배 모양의 초록색 과일을 집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생긴 건 풋사과 같아 신맛을 낼 것 같던 과일은 그 걱정이 무색하게 달큰한 향내를 입안 가득 퍼트렸다.

“완전 맛있어!”

게다가 딱딱하지도 않고 혀에 닿자마자 살살 녹는다. 

이예주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울부짖다가 이내 미친 듯이 과일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돌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콜록, 콜록!”

“천천히 먹어여!”

사레에 들려 기침을 하면서도 먹을 것을 입에 쑤셔 넣는 걸 멈추지 않자, 남자가 한심하다는 얼굴을 하고 그녀를 지나쳐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조롱이 역시 남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녀의 등허리를 세게 퍽퍽 내리치며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이예주는 며칠 굶은 아이처럼 부끄러움을 불사하고 먹어 댔다. 곧 턱과 입 주변이 끈적끈적한 과즙으로 범벅이 되었다. 

한참을 우걱우걱 과일을 삼키던 그녀가 볼이 미어터져라 과일을 집어넣은 모양새로 조롱이를 향해 우물거렸다.

“……근데 고기는 없어? 난 육식주의자인데.”

“이 씨! 도망치려던 주제에! 그냥 주는 대로 먹어여.”

“도망치긴! 누가 도망쳐!”

“악! 튀잖아여! 먹기나 해여!”

도망이란 소리에 지레 놀란 이예주가 남자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버럭 소리치자 입안에서 침을 동반한 파편이 우수수 조롱이에게로 쏟아졌다. 

다행히 남자는 조롱이나 그녀의 말에 신경 쓰기보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그제야 안심한 그녀는 입을 다물고 다시 우걱우걱 먹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산같이 싸여 있던 과일 더미들이 이예주의 입속으로 반 정도 사라졌을 때쯤, 그녀는 어느 정도 주린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하…… 살 것 같네.”

부른 배를 두드리며 그녀가 나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살면서 이렇게 걸신들린 것처럼 뭘 먹은 적이 있던가? 

엄마가 죽은 후 하루에 한 끼 이상 거르다시피 해 왔던 그녀는 새삼 자신이 얼마나 풍족한 생활을 했었던지에 대해 고찰했다.

이렇게 생고생을 하며 비렁뱅이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에 비하면 남들 시선 좀 느끼며 대학에 다니는 것은 정말 천국이었다. 

다시금 떠오르는 고향 생각에 이예주가 멍하니 과일 더미를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엄마가 죽은 후로 한참 레토르트 음식의 훌륭함에 빠져 과일은 거들떠도 안 보던 시절이 있었다. 

왜 그땐 과일의 소중함을 몰랐던 것인가, 왜!

“안 뺏을 테니 혼자 다 먹어여.”

그러나 그녀의 눈물 젖은 시선을 잘못 이해한 건지, 옆에서 조롱이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황금색 눈동자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는 걸신들린 여자 한 명이 비쳐졌다. 

자식,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 그녀가 민망함에 딴청을 피우며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둘은 왜 숲에서 헤매는 거야? 나처럼 길 잃은 건 아닐 테고.”

“에, 에?”

“뭐. 사냥 같은 거 하는 거야?”

이예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황조롱이가 우물쭈물 대며 제 주인의 눈치를 보았다.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인가 싶어서 그녀는 괜히 관심 없는 척 과일 더미 중 별 모양의 노오란 과일을 집어 왕 하고 크게 베어 물었다. 

맛은 그냥 밍밍한 코코넛 맛이었지만 껍질을 따로 벗겨서 먹지 않아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식감이었다. 

“여기서 뭐 하냐니까?”

이번에는 새빨간 석류 모양의 과일을 집어 먹으며 이예주가 대답 없는 황조롱이에게 되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맛은 석류와는 전혀 다른, 쌉쌀한 초콜릿 맛이었다.

“주, 주인님의 원대한 목표 때문에 왔어여.”

“원대한 목표? 그게 뭔데?”

“그게…… 그…… 인간들이 숲에 있다고 그래서여. 주인님이 원대하고 포부에 가득 찬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조롱이가 왠지 꺼리는 눈치로 끝말을 흐렸다. 인간 혐오증에 걸린 저 미친놈의 원대한 목표야 안 들어도 알 만했다. 

심리학 시간에 배웠다.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포부가 거대하다. 

정말이지 멀쩡하게 잘생긴 이 남자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예주는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우적우적 과일을 씹으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래? 얼마나 대단한 목표인지 참 궁금하네. 세계 정복 그런 거? 하하…….”

“인간 박멸이다.”

“푸웁!”

뜬금없이 끼어드는 남자의 말에 이예주가 한가득 우물거리던 내용물을 그대로 내뿜었다. 

“아악! 갑자기 왜 그래여! 악, 더러워! 다 맞았잖아여! 아, 진짜!”

그녀의 옆에 앉았다는 죄로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오물을 뒤집어쓴 황조롱이가 죽는다고 눈을 까뒤집었다. 

그러나 그녀는 방금 들은 남자의 말에 꽉 쥐고 있던 과일도 놓친 채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불 건너 반대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이예주의 더럽기 짝이 없는 행태를 보며 불쾌함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왜요?”

“……뭐?”

“왜 그런 미친…… 아니, 그런 짓을…….”

그녀가 황당함에 말까지 더듬었다. 이거 정말 보기 드문 미친놈일세. 정신이 나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심각할 줄이야. 

세계 정복도 우주 정복도 아닌, 인간 박멸. 

마치 모 업체에서 해충을 박멸해 준다는 것처럼 저 완벽한 모양새의 입술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 박멸을 선언했다. 

나 진짜 잘못 걸린 게 아닐까? 저렇게 심각하게 정신 나간 놈일 줄 미리 알았더라면 그딴 구라를 치면서까지 빌붙지 않았을 텐데. 

순식간에 자신을 휘감는 불길함에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왜 미친 짓이지?”

“네, 네?”

“인간 박멸이 왜 미친 짓이냐고 물었다.”

“…….”

그걸 몰라서 묻냐. 왜 그 잘난 얼굴로 그딴 쓸데없는 일에 열을 쏟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문득 그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 달라는 농담이 생각났다. 

이 미친놈에게 완벽히 어울리는 말이다. 그 얼굴 그런 식으로 쓸 거면 진짜 다른 사람에게 양보나 하지.

“아뇨. 미친 짓이 아니라, 왜 그 얼굴을 하고 그런…… 아니, 아닙니다.”

“…….”

남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이제 그녀는 그 사인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어디 한번 계속 지껄여 보란 소리다. 

“아니…… 아니요. 저라면, 저라면 그런 쓸데없는 짓보단 그 시간에 어…….”

돈 많은 여자를 물어서 남은 삶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편하게 지내겠다. 아니면 영화배우나 아이돌이 돼서 어린애들로부터 부를 축적할 테다. 

그것도 안 되면 죽기 전까지 미친 듯이 여자를 꼬드겨서 더러운 외모 지상주의에 한 획을 그으리라. 

“……돈을 벌 거예요. 많이, 아주 많이. 하하…….”

남자의 사나운 기세에 눌려 그 모든 말을 함축한 이예주가 소심하게 대꾸했다. 

그제야 남자의 눈썹이 납득했다는 듯 내려갔지만 이번에는 황조롱이가 눈에 불을 켰다.

“주, 주인님의 포부가 왜 쓸데없는 짓이에여!”

“뭐?”

“인간들은 박멸당해도 싸여!”

“이 쪼그만 게 말하는 것 좀 봐. 인간이 어디가 어때서!”

조롱이의 갑작스러운 인간 박멸 찬성에 이예주가 덩달아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아니, 이것들이 인간을 앞에 두고 왜 그런 기분 나쁜 소리를 하는 건데? 

인간이 지들한테 뭘 그렇게 피해를 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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