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
몇 번째인지 모르는 한숨을 내뱉으며 이예주는 우울한 얼굴로 호숫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지고 물 위로 커다랗고 둥근 달이 호수 속으로 쏟아지듯 비춰졌다.
원체 달이 밝은 탓도 있지만 물에 반사되는 달빛 때문에 주변은 숲 한가운데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환했다.
어떻게 보면 끝내주는 광경이기도 했다.
물론 1000년 전, 한국이라는 전제하에서.
다시 ‘1000’이라는 끔찍한 숫자를 되새기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진짜 1000년이나 되는 미래를 건너온 건지.
이예주는 휴대폰이 꺼지고 난 후 몇 번이고 확인했던 왼쪽 손목을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시야가 밝은 탓에 보기 흉한 붉은 흉터가 선명히 꿈틀거렸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하는 데 제 역할을 똑똑히 해내던 흉터가 지금만큼은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용암을 피해서 ‘문’을 넘었다. 그건 그녀가 10살 이후로 매번 행해 왔던 생존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쩐지 암경이 꽤 길더라니.
깜깜한 암경 속에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또 얼마만큼을 건너왔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두 달도 아니고 무려 1000년을 넘어왔단다. 1000년.
“……하.”
살고자 하는 마음이야 인간에게 당연히 있는 기본 욕구 중 하나겠지만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들과 차이 나도록 낙오되긴 싫었다.
그래, 이건 완전히 낙오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그때 그 자리에서 그리운 동향인들과 함께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걸.
“아니야, 아니야!”
이예주가 죽는다는 생각에 광인처럼 도리질을 쳤다.
재수 없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제 어떡하니, 이예주야. 생각을 해 봐, 생각을.
“……집으로 갈 수는 있을까.”
그녀가 울적한 얼굴로 흉터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과거’로 가는 능력은 없다. 이미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차라리 그 뭐냐, 차원 이동 같은 그런 능력이라면 어떻게 방법을 찾아 헤매겠지만 이예주의 경우는 그냥 답이 없었다.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더 있을 리도 없겠지만 만약 있다 쳐도 제 몸만 움직일 줄 알 뿐, 남을 미래나 과거로 돌려보내 줄 수는 없을 테다.
그러고 보면 참 재수도 없지. 자신이 정말로 1000년이나 되는 엄청난 ‘미래’로 왔다면 비약적인 과학의 발전으로 타임머신 또한 개발되지 않았을까?
많고 많은 곳 중에 왜 하필 인적이라곤 티끌도 없는 숲 한가운데냐, 이 말이다.
그렇다고 현 상황이 좋은 것 또한 아니다.
간신히 말이 통하는 인간 같은 형상을 만났다 했더니, 하나는 말하는 새대가리요, 다른 하나는 틈만 나면 자신을 죽이려 하는 미친놈이다.
그 미친놈은 지독한 인간 혐오증도 가지고 있다.
기분 나쁘게 평소엔 괜찮다가 자신만 보면 동공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헉.”
문득 이예주가 헛바람을 들이켜며 숨을 멈췄다.
이곳에 망연자실 앉아 있은 지 얼마나 됐더라?
훤한 달빛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주위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제야 꼼짝 말고 있으라던 조롱이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금방 돌아가서 아무 짓도 안 한 것처럼 시치미를 떼도 모자랄 판에 몇 시간이고 호숫가 근처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조롱이가 그랬다. 이예주가 내민 조건을 남자가 생각해 보는 중이니 다음번에 도망치면 진짜 죽인다고. 진짜 죽인다.
덜컹, 어딘가에서 그녀의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죽인다는 말이 정말로 인터넷에서 흔히 쓰이는 그런 농담이면 좋으련만.
일련의 경험들로 그것이 장난이 아닌 진짜 사망을 뜻함을 몸소 체험한 그녀는 순식간에 겁에 질려 덜덜 떨기 시작했다.
“으…… 허어어…….”
이예주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시뻘건 눈에서 살기를 철철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가 눈앞에 훤히 그려진다.
산 넘어 산이 아닌 산 넘어 태산이다.
해라도 덜 졌으면 배가 아파 볼일을 보고 왔다며 능청을 떨었겠지만 해가 완전히 진 지금은 빼도 박도 못한다.
죽음뿐이다. 그녀는 이 망할 숲에 와서 전에 없던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왜…… 왜……! 으흑헉흐!”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예주는 절규를 토해 냈다. 공포와 자괴감으로 뒤범벅된 감정들이 해일처럼 그녀를 덮쳤다.
제 앞에 닥친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눈물조차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절망했다.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전무하고, 간신히 남자를 속여 죽음을 모면한 자신은 제 발로 다시 죽음을 택한 것과 진배없었다.
모든 게 다 엉망이 되었다.
자, 이제 어떡할 거냐, 이예주야.
얌전히 돌아가서 그 미친놈에게 도망간 게 절대 아니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 싹싹 빌든가, 아니면 이대로 그 남자가 찾아내기 전에 도망가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어서 일어나, 어서.
그녀는 제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머리와는 달리 몸뚱이는 1000이라는 숫자를 인식하자마자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래로 와 집도 돈도 없이 대체 뭘 하려고.
1, 2년도 아니고 1000년.
끔찍하기 짝이 없다. 고려 시대가 1000년 전이었나, 통일신라 시대가 1000년 전이었나.
뭐가 됐건 지금이 1000년이나 지난 후라면 자신은 살아 있는 고대 유적인 셈이다.
나이 또한 1023살.
참 나, 하루아침에 꽃다운 스물셋에서 고조할머니 뺨치는 1023살이 되다니.
아니, 현재는 3019년으로 추정되니 2까지 더하면 1025살쯤?
72살이라며 뻐겨 대던 조롱이는 이예주에 비하면 이제 막 생성된 정자에 불과했다.
“정자…….”
이예주가 쪼그마한 올챙이 대가리를 한 조롱이를 떠올리며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때 같으면 헛소리로라도 스스로를 위로할 그녀였으나, 아무리 헛소리를 지껄여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울적한 얼굴로 제 머리를 쥐어뜯기 위해 손을 올리던 그때였다.
부스럭―
근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뭐지? 지금껏 주변에서 소리가 난 이후로 굉장히 좋지 않은 일들만 일어났기 때문에 이예주는 작은 바람 소리에도 꽤 예민하게 굴게 되었다.
그녀가 소리 나는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 혹시 그 미친놈이 기어이 자신을 잡으러 이곳까지 온 것일까?
그러고 보니 조롱이가 밤 되면 위험한 동물들이 많다고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 짧은 새에 오만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쯤.
부스럭, 풀숲에서 더 정확한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어정쩡한 상태 그대로 몸을 굳혔다.
주위가 훤해 풀숲이 움직이는 것까지 분명히 보였다.
이대로 조롱이가 있는 데까지 무작정 뛸까?
그러나 그러기엔 제 방향감각에 믿음이 가질 않았고 시뻘건 레이저를 쏘며 분노할 남자를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에 질려 복귀와 도망 사이에서 갈등할 무렵이었다.
부스럭부스럭, 풀숲이 더욱 심하게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왕!”
“으악!”
그대로 어둠 속에서 무언가 확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괴성을 지른 이예주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자 하얀 뭉텅이 같은 게 꼬리를 흔들며 그녀의 근처로 달려왔다.
“하아…… 뭐야.”
그녀의 발치를 뱅뱅 돌며 꼬리를 흔드는 하얀 뭉텅이는 바로 강아지였다.
일순 온 신경을 점유했던 긴장이 확 풀렸다. 그녀가 허탈감에 주저앉다시피 쭈그려 앉았다.
“이 쪼그만 게 사람을 놀래키고 있…… 봉구?”
킁킁, 끊임없이 자신의 발치에서 냄새를 맡으며 주위를 탐색하듯 빙빙 돌아 대는 강아지를 바라보던 그녀는 눈에 익은 모습에 제 눈을 의심했다.
언제였더라. 엄마가 돌아가시기 한참 전에 키웠던 게 분명하니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일 것이다.
그녀의 유일한 애완견은 애견 숍에서 데려와 키운 지 꼬박 4년을 채우고 달리는 차에 치여 명을 달리했다.
그리하여 이예주에게 죽음에 대한 첫 충격과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겨 주었다.
그 이후로 이예주는 애완견은 물론, 동물 자체를 기피하다시피 했다.
물론 봉구자식과의 습관 때문에 길고양이 혹은 유기견들과의 기 싸움은 매번 해 왔지만.
그 외에는 이웃이 키우는 애완동물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그녀였다.
어쨌든 천국에 당도해서 천국의 암컷과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아도 한참 전에 낳았을 녀석이 어찌 된 건지 이예주의 앞에서 반갑게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곳이 ‘미래’라는 사실도 잊고 그녀는 울컥했다.
“봉구야!”
“왕!”
“……봉구, 우리 봉구!”
“왕왕!”
감격에 젖은 이예주가 격하게 봉구를 외치며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그녀의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듯 하얀 강아지가 세차게 ‘왕!’ 하고 짖었다. 그 덕분에 봉구에 대한 환상이 바로 깨졌다.
“뭐야. 너 봉구 아니잖아.”
“헥헥, 왕!”
“……하. 봉구 아니잖아! 봉구 자식이 너처럼 그렇게 꼬박꼬박 대답할 리가 없어!”
잊고 있었던 녀석의 특성이 비슷한 강아지를 보자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렇다.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단단히 없던 봉구 자식은 이예주의 애완견 노릇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주인의 부름에 답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개 껌으로 바닥을 땅땅 두드리며 불러도 오지 않던 개‘님’이셨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확실히 봉구보다 약간 작은 것 같았다.
게다가 강아지 볼 터치인지 뭔지를 엄마가 직접 염색하다 실패해 오른쪽 볼만 분홍색이었던 봉구와는 다르게, 눈앞의 강아지는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얀 털을 자랑했다.
“봉구 아니구나……. 하긴 여기 1000년 후지. 봉구가 살아 있을 리가…….”
같은 점이 있다면 봉구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같은 사모예드 종이라는 사실뿐.
잠시간의 반가움은 사라진 채 어느덧 울적함만 남은 얼굴로 이예주는 저를 향해 열심히 꼬리 치는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우리 봉구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그랬더라면 엄마가 사다 놓은 개 껌도 안 숨기고, 물통도 꼬박꼬박 채워 주었을 텐데.
밥그릇에서 사료 몇 개 빼는 일도 하지 않고…….
물론 봉구가 밥 먹는 와중 사료를 빼다가 두어 번 호되게 물린 후 다시는 봉구 밥그릇에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너 밤늦게 왜 여기 있어?”
“헥헥헥, 왕!”
“너 진짜 봉구랑 똑같다. 그냥 봉구라고 부를게. 괜찮지? 이 봉구 자식아.”
저 홀로 묻고 답하는 와중에 강아지가 탐색을 마치고 가까이 다가와 이예주처럼 주저앉았다.
그녀는 물릴까 싶어 몇 번을 주저주저하다가 끝내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짝퉁 봉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체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건지 낯선 이가 머리를 쓰다듬는데도 강아지는 가만히 그녀의 손길을 받았다.
정말 봉구와 천성부터가 다른 개였다.
“네 주인은? 주인 없어?”
“……왕!”
“너도 나처럼 길 잃은 거야?”
대답할 리 없는 것을 알면서도 연달아 질문하며 강아지를 쓰다듬던 이예주는 손에 닿는 온도가 섬뜩할 만큼 차갑게 느껴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봉구가 특별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어렸을 때 만진 녀석은 따끈따끈했다. 특히 아랫배를 만질 때의 촉감은 뜨끈하고 몽글몽글하니 꼭 털에 감싸인 뜨거운 만두를 만지는 기분이었는데.
“오랫동안 헤맸어? 되게 차갑다, 너.”
오랫동안 헤맨 것치곤 강아지의 상태가 지나치게 깨끗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숲의 싸늘한 밤공기에 노출된 짝퉁 애완견이 안쓰러워 몇 번을 더 쓰다듬으며 강아지와 제 팔자를 한탄할 따름이었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불쌍하다. 주인이 여기 숲에다가 버린 거야? 외국엔 그런 거 별로 없댔는데…… 아! 여기 미래지.”
“…….”
“미래에도 애완견이 있네, 참.”
아직도 미래를 실감하지 못한 듯 중얼거리던 이예주는 문득 스치는 생각에 강아지에게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자. 손!”
“왕!”
애완동물의 ‘손’은 죽어서도 한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집착하는 것을 보면.
봉구는 이제 없어서 못 받겠지만 아쉬운 대로 기 싸움을 걸지 않는 강아지에게나마 꼭 받아 보고 말리라.
“자, 봉구. 손!”
그녀가 한 번 더 손을 흔들며 훈육을 종용했다.
이런 건 주인이 교육시키지 않았는지 강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땅바닥을 툭툭 쳐서 강아지의 주의를 끌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스읍! 봉구. 손 줘야지? 손 말이야, 손…… 억!”
“크리쳐는 신인류가 아니라 위험하다.”
그때, 거칠게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이예주가 괴성을 지르며 뒤로 발랑 자빠졌다. 아니, 자빠지려던 차였다.
무언가가 강하게 제 허리를 붙들어 잡지만 않았어도 흉하게 넘어져 뒤로 코가 깨졌으리라.
시야가 뒤바뀌더니 하얀 강아지는 사라지고 눈앞에 새빨간 색이 가득 찼다.
이게 뭐야? 상황 파악을 못하고 어수룩하게 있던 그녀는 한 번 더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불그스름한 입술이 움직인다. 미간마저 잘생긴 그의 이마에 약간 주름이 져 있었다.
남자다. 시뻘건 눈의 미친놈이다. 이 남자가 왜 이렇게 코,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