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6)화 (16/319)

“내가 왜 멍청이에여! 그냥 없떠여! 우린 그냥 대륙이라고 부른단 말이에여!”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하자 황조롱이 또한 황금안을 치켜뜨며 떽떽댔다. 

이예주는 환장할 것 같았다.

“뭔 미친놈의 대륙이야, 대륙은! 너 지구 위에 사는 새 맞아? 어떻게 제 나라 이름도 모르냐, 어휴.”

“지구? 주인님의 땅 말이에여?”

“아악! 거기서 네 주인은 또 왜 나와! 아오, 이 황답답이. 아오!”

“씨! 내가 왜 황답답이에여!”

이예주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거세게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쳐 댔다. 

답답한 건 매한가지라는 듯 조롱이 또한 그녀를 따라 제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내리쳤다. 

이건 뭐, 상식이 통해야 말을 하든 말든 하지. 

생각보다 더 심한 새의 멍청함에 이예주는 몸서리를 쳤다. 그녀는 제가 그린 세계지도라고 칭하기 뭐한 덩어리들을 발로 거칠게 쓱쓱 지워 댔다. 

그때, 말없이 씩씩대던 조롱이가 번뜩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소리쳤다.

“아! 혹시 그거, 예전 지도 말하는 거예여?”

“뭐 또.”

이예주가 귀찮다는 듯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러나 황조롱이는 그녀의 무시에도 굴하지 않고 기발한 것을 떠올린 것처럼 기쁘게 조잘대었다.

“옛―날에 인간들이 아주 많이 살았던 옛날 시대에는 예주 누나가 그린 것처럼 대륙이 많았다고 들은 적 있어여. 세 개보다 더 많이여.”

“…….”

“근데 세기말 용암 폭발 이후로 그 많던 대륙들이 다 사라지고 남은 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대륙뿐이래여.”

쓱싹쓱싹 땅바닥을 쓸던 이예주의 발이 황조롱이의 말에 뚝 멈췄다.

“……뭐?”

“에, 에?”

“방금, 뭐라 했어? 세기말…… 뭐?” 

“세기말 용암 폭발이여. 저도 그냥 소문으로만 들어서 안 거예여. 그때 인간들 엄청 많이 죽었대여. 거의 멸망할 만큼. 인간 말고 다른 생물들도 많이 죽었는데, 미리 알고 여기 동물의 숲으로 대피한 종들이 많아서 동물들은 인간들만큼 피해가 많지 않은 거랬어여. 헤헤.”

조롱이의 말을 듣던 이예주의 머릿속에 그날의 광경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그날, 그녀가 기나긴 암경을 넘어서 이곳으로 온 날. 

텅 빈 원룸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귀갓길에 혼잡스러운 길거리를 발 닿는 대로 걸어 다니다가 용암 덩어리가 대형 빌딩을 덮치는 광경과 맞닥뜨렸다. 

그리고 ‘문’을 넘어 여기 이 빌어먹을 숲에 도착했다. 

용암을 마주친 후 긴 암경을 건너서 여기로. 여기로…….

“예주 누나, 괜찮아여? 갑자기 왜 그렇게 얼굴이 심각…….”

“지, 지금! 지금 몇 년도야?”

“예, 예?”

“지금 몇 년, 몇 월, 며칠이냐고!”

이예주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황조롱이에게 날짜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화에 신경이 쏠려 지금이 ‘문’을 건넌 날로부터 며칠이나 지났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미래로 이동했을 때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파악하는 것은 그녀에게 가장 예민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번엔 평소와는 달리 숲이라는 공간이 ‘문’ 너머에 펼쳐진 탓에 놓친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생각해 보면 지금껏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 

미래로 이동했는데 뜬금없이 외국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됐다. 

“뭘 그런 걸 묻고 그래여? 몇 월 며칠? 그런 건 잘 모르구여. 올해는 세기말 용암 폭발 이후로 1002년째져.”

“…….”

이상한 걸 다 묻는다는 얼굴로 조롱이가 순순히 대답했다. 

설마. 설마, 아닐 것이다. 세기말 용암 뭐?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게 한국에서 본 용암과 겹치는 것일 리 없다. 

한국이야 예전부터 백두산이 폭발하니, 뭐니 했었으니까. 정말로 화산이라도 폭발했을지도 모르고……. 

아니, 말도 안 된다. 한국이 아이슬란드도 아니고 화산은 무슨 화산이야. 

그런데 대체 도시 한복판을 덮친 용암은 뭐라 설명해야 하지? 대체 뭐야? 대체 이게 뭐야!

꼬르르르륵! 

그때 제발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저를 좀 돌봐 달라는 듯 위장이 거센 소리를 내며 아우성쳤다. 

하지만 이예주는 엄청난 혼돈에 휩싸여 제 몸이 굶주리든 요동을 치든 느낄 수 없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그리고 자꾸만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배 많이 고파여?”

그녀가 입을 떡 벌린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자 배고픔에 탈진한 것으로 착각한 황조롱이가 당황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예주 누나, 배 많이 고픈가 봐여. 주인님 아직 안 오셨는데 어쩌져.”

“…….”

꼬르르르륵! 

그러나 대답하는 것은 그녀의 입이 아닌 위였다. 한 번 더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자 황조롱이가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못했다.

“히잉. 누나 그럼 여기 꼼짝 말고 있어야 되여. 근처에서 과일 나무 냄새가 나니까 후딱 가서 과일 몇 개 따 올게여. 좀 있음 해 져서 위험해여. 그니까 꼼짝 말고 앉아 있어여. 알았져?”

“…….”

“조, 조금만 참아여! 금방 올게여!”

패닉 상태인 이예주를 몇 번이고 돌아보며 걱정하던 황조롱이가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펑!’ 하고 변신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녀는 여전히 혼돈 속을 헤맸다. 

황조롱이가 사라지자 이예주의 주변이 완전한 침묵 속에 잠겼다. 

그녀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건 그 순간이었다.

“휴, 휴대폰!”

유레카를 외치듯 휴대폰을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숲은 여전히 고요하고 풀과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남자나 황조롱이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거의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그 미친놈에게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인지 이유 따윈 몰랐다. 그냥 들키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고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하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군말 없이 자신의 감을 따르기로 했다. 

다시 한 번 샅샅이 주위를 둘러본 이예주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죽여 황조롱이가 사라진 반대편으로 몸을 틀었다. 

남자가 이런 자신을 본다면 분명 죽인다고 또 난리를 피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옮기는 게 많이 망설여졌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굳힌 그녀는 힘차게 다리를 움직였다. 

도망가는 게 아니니 저는 떳떳하고 당당했다. 다만 들키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프라이버시가 존재할 뿐.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할 거 아냐? 그래도 숙녀인데. 

변명처럼 되뇌며 이예주는 후딱 돌아올 생각으로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그래, 잠깐 확인만 하고 금방 돌아와 얌전히 있으면 제아무리 초능력 쓰는 미친놈이어도 알 길이 없을 테다. 

완전 범죄를 확신한 그녀가 곧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숲은 다시 침묵 속에 휩싸였다. 

주변에 호수가 있다는 남자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정말로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물 냄새가 물씬 끼쳐 왔다. 

이예주는 거의 뛰다시피 걸어 냄새의 근원지에 도착했다.

주위가 어둑어둑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거대한 호수가 거짓말처럼 숲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자연호(自然湖)는 처음 보는 그녀였다. 반대쪽 숲이 안 보일 정도로 그 크기가 엄청났다. 

멍하니 맑고 찰랑거리는 물을 바라보며 ‘이대로 찝찝한 옷 따위 다 벗어 들고 물속으로 뛰어들까.’ 하고 갈등하던 이예주는 애써 조롱이가 꼼짝 말라 신신당부했던 장소를 벗어난 목적을 상기하고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일단은 확인하고 재빨리 돌아가서 시치미를 떼는 게 먼저다. 

그다음에 남자를 살살 구슬려서 구워삶든 어쨌든 간에 반드시 호수로 돌아와 몸을 씻으리. 

그녀는 씻을 생각에 혼돈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바지 뒷주머니에 고이 모셔 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해서 정말 위급할 때 아니면 사용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돌뱀한테 목숨을 걸어 가며 가까스로 지켜 낸 남의 휴대폰을 냇가에 내던지는 바보 같은 짓거린 하지 않았을 텐데. 이 바보, 이 멍청아……! 

이예주가 바보 같은 제 머리를 탓하며 눈물을 머금고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띠리링, 발랄한 벨 소리와 함께 전원이 문제없이 켜졌다. 

다행이다. 사실은 앞서 생각했던 것보다 배터리가 꽤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망상은 액정이 보이자마자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바탕 화면이 켜지자마자 동시에 텅 빈 배터리 칸이 위태롭게 반짝였다. 

낭패스런 기분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재빠르게 메뉴 버튼을 눌렀다. 

금방이라도 배터리가 닳아 전원이 꺼질 것 같은 긴박감에 메뉴에서 달력을 누르는 손이 거침없었다. 

그래, 날짜만 확인하고 바로 끄면 전화 한 통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힘내, 휴대폰아. 

그리고 곧 휴대폰 화면 안에 달력이 열렸다. 

이예주는 아까 조롱이의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 자신을 덮치는 것을 알았다.

“……이, 이게 뭐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휘둥그레 떠진 눈으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온몸이 떨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3…… 3019…… 3019년……?” 

정말로 제가 시각장애인이 된 것일까. 그러나 손바닥에서 빛나는 화면 안은 아무리 보아도 3019년, 5월이었다. 

3019년? 

2019년도 환장할 판에, 3019년?

혹시나 어둠 때문에 눈이 침침해서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그녀는 한 손으로 눈을 세게 비벼도 보고 뒤로 가기를 눌러 달력 어플을 아예 꺼 버리고 다시 켜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휴대폰의 달력은 여전했다. 여전히 3019란 끔찍한 숫자는 변함없이 이예주의 망막에 맺혔다.

“진짜 미쳤나 봐.”

그녀가 완전히 얼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는 사이, ‘띠로롱’ 하고 휴대폰이 갑자기 꺼져 버렸다. 

“……시발.”

배터리가 드디어 다 됐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3019년이란 미친 연도 수와 붕괴되다 못해 가루가 된 정신머리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필히 휴대폰의 고장이 분명하다. 

그래, 휴대폰의 고장이 틀림없을 거야. 암경을 넘어 봤자 기껏해야 한두 달 지나 온 거겠지. 고장이 나서 숫자 2가 3으로 바뀐 것이 분명할 거야. 

근데 왜 불길하게 3017도 아니고 3019야? 왜 아까 황조롱이가 말했던 1000이란 숫자 뒤에 붙은 2마저 일치하는 거냐고. 

게다가 휴대폰 고장이라니 말도 안 되었다. 제 몸은 긁히고 찢어져도 마지막 희망이란 생각에 휴대폰만은 고이 모셔 온 이예주였다. 

며칠 전 한국에서 멀쩡히 사용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기스 하나 나지 않은 상태 그대로 꺼 두기만 했다, 이 말씀이다. 

멀쩡하던 휴대폰 달력이 왜 뜬금없이 1000년이나 지난 날짜를 가리키는 거지. 

지금까지 이 2년 약정 휴대폰을 사용하면서 날짜 부분에서 고장이 났던 적이 있던가. 

없다. 단 한 번도, 잔고장조차 없던 튼튼한 ‘메이드 인 코리아’ 휴대폰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눈이 정말 어떻게 돼서 잘못 본 게 아닐까? 

눈을 그렇게 여러 번 비비고 똑똑히 보았는데도 잘못 봤다고? 아니야. 정말 잘못 본 게 틀림없을 거야. 

그러나 조롱이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올해가 세기말 용암 폭발 이후로 1002년째져.

2017+1002=3019. 

재수 없고 불길하게 하필 3019란 숫자가 정확히 일치했다.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세기말 용암 폭발’이란 말이 자꾸만 가시처럼 목을 찔렀다. 

1000년. 

1, 2년도 아니고 한두 달은 더더욱 아니다. 

무려.

“……1000년을 넘어왔다고?”

춥지도 않은데 자꾸 한기가 들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1000년? 1000년을 건너뛰었다고?”

“…….”

“하, 하. 하, 이 미친년아…….”

하도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 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청난 두려움이 끝없이 뒤를 이었다.

“너, 너…… 대체 어디로 온 거야?”

“…….”

“아악! 진짜! 너 대체 어디로 온 거냐고—!”

이예주가 그대로 제자리에 무너지며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됐다. 말도 안 돼. 1000년이라니. 이게 뭐 천년의 사랑이야? 

꿈이야.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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