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5)화 (1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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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헉, 헉.”

“…….”

“저기요. 저 진짜 더 이상 한 걸음도 못 걷겠어요.”

“…….”

“저기요. 저기요!”

“…….”

“아, 몰라! 나 이제 한 발자국도 못 가.”

비척비척 남자와 조롱이의 뒤를 따라 걷던 이예주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기어이 제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자신의 생에 이리도 쉼 없이 걷기만을 반복하던 때가 있었던가. 

조금만 쉬자고 말을 꺼낼라 치면 서슬 퍼렇게 홍안을 빛내는 남자가 무서워 끝없이 걷기만을 반복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정신없이 문을 넘어 다니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서울에서 이 빌어먹을 숲속으로 건너온 이후부턴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그녀였다. 

정정한다. 물은 딱 한 모금 마셨다. 

저 미친놈과 합류하기 전, 냇가 근처에서 기절하듯 잠들었을 때 딱 한 번. 

그 이후로는 물은 물론이고 음식 구경도 못한 이예주였다. 

그런 상태에서 이 저질 체력을 가지고 남자의 뒤를 놓치지 않은 것 만해도 기적이었다. 

벌써 해가 지려는 듯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대체 언제까지 걷기만 하는 건가. 아무리 짐 덩어리 취급을 한다지만 밥은 먹여 가며 데려가야 할 것 아니야! 

저 망할 인간은 물 한 모금 안 마시고도 어쩜 저렇게 쌩쌩한 걸까. 예전에 잠시 생각했던 먼치킨설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다. 

‘또 까탈을 부리려나 보다.’라고 생각한 듯 이예주를 힐끗 돌아본 조롱이가 아예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은 그녀를 보고 당황하여 자리에서 멈춰 섰다. 

조롱이의 그 뽀얀 얼굴도 어느덧 강행에 지친 건지 약간 피곤함을 띠고 있었다. 

황조롱이마저 자리에서 멈추자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무시하고 제 갈 길만 가던 남자가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언제 보아도 적응되지 않는 시뻘건 눈동자가 저 자신에게 향하자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 내렸다. 

남자가 저를 떼어 놓고 가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제발 자신은 놓고 저들끼리 가 버렸음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만큼 진실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못 갈 상태였다. 

꼬르르륵! 

자리를 잡고 땅바닥에 주저앉자 몸이 순식간에 편함에 적응하더니 이내 힘차게 영양분을 달라며 주인을 보채기 시작했다.

평소의 이성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 적나라한 소리에 얼굴을 붉힐 그녀였으나 이젠 얼굴을 붉힐 힘조차 남지 않았다.

남자에게 제 배꼽시계가 들리든 말든 이예주는 넋이 나간 얼굴로 계속 앉아 있기를 고수했다.

한참이 지나가도 인간 여자가 일어날 생각을 안 하자 남자가 저벅저벅 그녀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뒤를 조롱이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남자가 직접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이예주의 몸이 다시 긴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일어서지 않았다. 

대신 제 앞에 우뚝 선 남자의 발을 보며 청승맞은 얼굴로 애원했다. 제발 자신을 두고 꺼지라고.

“저 진짜 못 가요…….”

“4시간밖에 걷지 못했다.”

남자가 그것밖에 못 걸어서 한이 맺힌 사람처럼 차갑게 말했다. 

이예주는 남자의 발치를 바라보던 시선을 어렵사리 쳐들었다. 

뭐? 4시간이나 걸었다고? 네놈한텐 고작 4시간이겠지만 나는 몇 날 며칠을 걷고 도망가고 뛰는 것을 반복한 참이야! 

그녀가 그 욕설 섞인 말을 쏟아 내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남자의 헛소리에 대꾸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꼬르르르륵! 

대신 볼멘소리보다도 더 정확한 배꼽시계로 답했다. 

남자가 그 확실한 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 근처에서 쉬어 가겠다. 근방에 호수가 있는 것 같군. 둘러보고 오지.”

“어! 주인님 제가 갔다 올게여!”

“됐다.”

황조롱이가 제가 가겠다고 나서자 남자가 단칼에 그 제안을 잘랐다. 

그러고는 시뻘건 눈을 흘끗 움직여 넋이 나간 이예주를 가리키고는 마저 명령했다.

“잘 지키고 있어라. 도망가지 못하도록.”

“예? 옙! 잘 지킬게엽! 다녀오세여, 주인님. 헤헤.”

끼리끼리 잘도 노시네요. 

넋이 나간 와중에도 빈정거림을 잊지 않은 그녀는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근처 나무 아래로 엉금엉금 기어가 힘없이 기대앉았다. 

남자의 말처럼 도망가기 딱 적절한 시기였으나 그 힘마저 오롯이 걷는 데 고갈해 버린 이예주였다. 

으이구, 멍청아. 멍청이도 이런 상멍청이가 없을 것이다. 

“많이 힘들어여?”

초췌한 그녀에게로 다가오며 조롱이가 제법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어리니틀은 치료해 주는 것 말고도 움직일 때 쉽게 지치지 않도록 몸도 보양해 주는데, 이상하네여. 인간 여…….”

습관처럼 그녀를 향해 ‘인간 여자’라 칭하려던 황조롱이는 인간이란 단어가 시작될 때부터 눈을 까뒤집으며 노려보는 그녀 때문에 재빨리 입을 다물고 정정했다.

“예주 누……나한테는 잘 안 통하나 봐여.”

“…….”

이예주는 말할 기운도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요정 풀인지 뭔지의 신비한 효능에 대한 조롱이의 설명에 귀가 쫑긋 서는 것까진 막지 않았다. 

거참, 신기하기 짝이 없는 풀이네. 역시 서양이 다르긴 다른가 보다. 한국으로 치자면 천년 묵은 산삼과도 같은 건가? 

붙이는 것만으로도 몇십 분 만에 상처가 낫는 것 하며 그것도 모자라 기운도 북돋아 주다니. 

어쩐지 한 20분, 30분만 걸어도 졸도하듯 쓰러져 그에 상응하는 시간을 휴식으로 보내야 하는 그녀가 장장 4시간을 쉴 틈 없이 걸어 댄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생각할수록 탐나는 약초로다!

“조롱아, 너 이리 와서 앉아 봐.”

그녀가 눈빛을 달리하며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그런 이예주의 변화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황조롱이는 군말 없이 다가와 앉았다. 

미소년 같은 얼굴이 참으로 순진무구했다. 

얄미워서 한 대 때리고 싶은 촉새인데도 끝내 시원한 보복을 하지 못하는 건 아마 이런 귀여운 얼굴에 한없이 약하기 때문이리라.

“거기 네 앞에 있는 나뭇가지 좀 줘 봐.”

“왜여?”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이예주에게 나뭇가지를 건네며 조롱이가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 대신 착실히 나뭇가지를 받아 들고 흙바닥에 무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그녀의 앞에 삐뚤빼뚤 일그러진 두 개의 원형이 그려졌다. 

흉할 만큼 대충 그린 세계지도였다. 

아시아를 뭉뚱그려 그린 원 하나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대강 길쭉이 이어 붙인 괴상한 원 하나뿐이었으니.

“자, 봐 봐.”

이예주는 그래도 내심 한반도는 세심하게 그렸다고 자화자찬하면서 조롱이에게 제가 그린 그림을 야심 차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이게 뭐예여?”

“뭐긴? 보고도 몰라?”

“모르겠는데여?”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황금빛 눈동자 안에 호기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멍청한 새를 속으로 욕했다. 

절대로 제 그림 실력이 미흡한 탓은 하지 않았다.

“자, 여기가 아시아 대륙. 여기가 북아메리카, 여긴 남아메리카 대륙. 여기가 내가 살던 나라야. 여기 보여? 내가 설명하려고 좀 크게 그리긴 했는데 아무튼 이렇게 생겼어. 한국이란 나라야.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는 반도라서 한반도라고도 불러.”

“…….”

“여기 가면 있잖아. 네 요정 약초 그거 엄청 비싸게 팔 수 있어. 응? 여기가 크기는 작아 보여도 은근 알이 실한 나라거든. 앞으로 시장 가능성이 다분한 나라라는 뜻이야. 우리가 그 약초를 가져다 팔면 웬만한 부자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돈방석에 앉을 수 있어. 여기 알아?”

말을 다 들은 후에도 한참을 어벙한 표정으로 있던 황조롱이가 “알아, 몰라!” 하는 그녀의 재촉에 퍼드득 도리질을 쳤다. 

이예주는 그제야 구겨진 미간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리 글로벌 시대라곤 하지만 이 쪼그만 새가 한국까지 알 턱이 없겠지. 

그녀는 제법 관대함을 가지며 다시 조롱이를 향해 부드럽게 질문했다.

“그럼 이 숲은 어디에 있는 거야? 우리가 있는 지금 이 숲 말이야. 동물의 숲이니 뭐니 하는 거. 음, 열대우림도 아니고 정글도 아니니까 브라질이나 적도 근처는 아니겠고. 나무 많은 나라가 어디지? 캐나다?”

“…….”

“캐나다가 어디냐면 여기. 여기 밑은 미국이고. 미국은 알겠지? 설마.”

그녀는 대강 그려 놓은 북아메리카 대륙을 반으로 나누는 선을 찍 그은 다음 위아래를 나뭇가지로 콕콕 짚었다. 

그렇게 짚어 보고 나니 실로 한국과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대체 자신은 어떻게, 또 무슨 일로 한국에서 이곳까지 온 걸까.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간다. 

얌전히 암경 건너 미래에 도착하면 될 것을, 왜 애먼 곳까지 와서 사람을 이렇게 생고생시키고 난리냐 이 말이다. 

정말로 고생도 이런 고생이 따로 없다. 

“하…….”

우울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쉰 이예주는, 문득 그때까지도 말이 없는 황조롱이를 떠올리곤 휙 고개를 들었다.

“왜 말이 없어? 여기 어디냐니까?”

“……저기, 예주 누나.”

“왜.”

“이거 혹시 세계지도예여?”

믿을 수 없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황조롱이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예주의 미간이 다시금 짜증으로 구겨졌다.

“그럼 이게 세계지도가 아님 또 뭐야? 아, 너무 대충 그려서 그래?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대충 여기가 어디인지는 짚을 수 있을 거…… 뭐 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조롱이가 그녀의 손에서 나뭇가지를 획 낚아챘다. 

그러곤 그녀를 따라 하기라도 하듯 말없이 제 앞 땅바닥에 무언가 직직 그려 대기 시작했다. 

황조롱이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이예주가 당황하는 것도 잠시, 민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조롱이의 그림이 완성됐다. 

“자, 봐여.”

“응?”

이번에는 황조롱이가 이예주를 이끌었다. 그의 그림은 양옆이 긴 모양의 제법 큰 타원이었다.

“……이게 뭐야?”

방금 전의 황조롱이가 내뱉은 말 고대로 이예주가 내뱉었다. 

그러자 조롱이가 다시 나뭇가지를 뻗어 제가 그린 타원 안에 찍찍 구역을 나누었다. 

“동, 서, 남, 북. 우리가 있는 이 숲이 여기 북쪽 대륙 동물의 숲이에여. 동, 서 쪽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고 중앙 대륙은 사막이에여. 온통 모래뿐이에여. 그래서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려면 꼭 사막을 건너야 해여. 남쪽은 주인님이 거처하시는 곳이랑 눈족 인간들이 주거하는 곳으로 나눠져여.”

“…….”

이예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꾸 없이 장황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이게 뭔데?”

“뭐긴여. 대륙 지도져.”

“아, 대륙이고 뭐고 됐고.”

그녀가 조롱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제 답답함을 호소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니까 내 말은 여기가 어떤 나라냐고. 나라, 컨트리(Country). 나라 이름이라도 있을 거 아냐?”

“이름 없어여.”

그러나 되돌아오는 건 단호하기 짝이 없는 새의 대답뿐이었다.

“나라 이름 몰라?”

“아니여. 없는데여?”

“아오, 이 멍청아! 나라 이름이 없긴 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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