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4)화 (14/319)

“너!”

“……에, 에?”

“인간 여자라고 부르지 마.”

듣는 인간 기분 나쁘니까. 

마치 남자를 향해 하는 말인 듯 이글거리는 두 눈을 남자의 뒤통수에 고정한 채 이예주가 씹듯이 내뱉었다.

“그, 그럼 인간을 인간이라 부르지, 뭐라 불러여……?”

“예주 누나.”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단언했다. 

그러자 조롱이가 어벙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갸웃댔다.

“예주 누나여……?”

“그래. 누나.”

“싫어여.”

하지만 천진난만한 얼굴에서 기다렸다는 듯 거절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싫어도 불러.”

“나보다 한참 어린데 어떻게 누나예여! 사기꾼! 말도 안 돼.”

그녀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자신보다 키가 작은 조롱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14, 15살. 중학생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가 않는다. 

뽀얗고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얼굴이다. 

그에 비해 이예주는 성인이 된 이후 딱히 친구라 부를 이가 없어 남들이 개강 파티니, 과 모임이니 할 때 원룸에 처박혀서 홀로 자작하며 청승을 자주 떨었다. 

그렇기에 솜털이 가시고 젖살이 빠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워낙 얼굴에 번들거리는 것을 바르기 싫어하는 성격 탓에 그나마 피부 하나만은 여드름 자국 하나 없이 뽀송뽀송하게 지켜 냈지만 그게 다였다. 

‘능력’이라고 부르고 ‘저주’라 쓰는 특별함 때문에 온갖 산전수전들을 겪어 온 그녀의 얼굴엔 언제나 또래에게 없는 근심이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학창 시절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딱히 겉늙은 것은 아니었으나, 처음 보는 사람 대부분이 그녀를 원래 나이보다 두어 살 높게 보곤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조롱이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네가 나이 많아 봤자 얼마나 많은데? 쪼그만 게. 떽, 누나한테 거짓말 치면 혼난다.”

“인간 여자는 몇 살인데여?”

“인간 여자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누나.”

“아, 몇 살인데여!”

“나? 올해로 23살.”

그렇겐 안 보이지? 내가 동안 소리 좀 듣는 편이야. 

헛소리를 덧붙이며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조롱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조롱이 소년은 ‘누나, 너무 어려 보여서 친구인 줄 알았어여.’ 하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 대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또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어려여. 너무 어린데여…….”

“넌 그럼 몇 살인데?”

“전 올해로 어…… 70…… 71? 72? 1인가 2인가 그래여.”

“……뭐?!”

17살을 잘못 들은 줄 알고 이예주가 멍청하게 되묻자, 조롱이가 꼬물꼬물 일곱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72살인가 그렇다구여. 사실 더 먹었을지도 몰라여. 나이는 신인류로 각성한 이후부터 셀 줄 알게 된 거 거든여.”

“……거짓말.”

70, 뭐? 이게 어딜 봐서 70살을 먹은 외모란 말인가. 

이예주가 완전히 별세계 사람 바라보듯 조롱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쑥스러운 듯 제 갈색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풋풋한 사춘기 나이 대의 남자아이였다. 

“대박. 무슨 조류가 인간보다 오래 살아? 말도 안 돼.”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인간보다 오래 사는 동물 중에 떠오르는 것은 지네나 바다거북 같은 장수로 유명한 동물뿐이지, 이렇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살은 새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길을 거닐 때 자주 보던 참새, 비둘기 따위를 연달아 떠올리며 그녀가 믿기지 않는 눈으로 다시 조롱이를 살펴보았다.

“평범한 새 떠올리고 있져?! 전 평범한 조류 아니에엽! 신인류라고여, 신인류! 인간보다 더 위대한 신인류라고 몇 번을 말해여!”

“……그래, 뭐.”

미심쩍은 표정을 보고 귀신같이 생각을 알아맞힌 조롱이가 다시 ‘신인류’를 강조하며 난리를 치려 하자 이예주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는 표시를 보여 주었다. 

하긴, 말도 하는 새인데 나이 몇십 살 먹은 게 뭐 대술까 싶다. 

용암 한 번 잘못 피했다가 평생 가 못할 진귀한 경험을 다 하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쪼그마한 새가 70살이 넘었다니.

문득 그녀의 눈길이 한참 앞서 말없이 휘적휘적 걸어 나가고 있는 검은 뒤통수에게로 옮겨 갔다. 

그럼 저놈은 대체 몇 살이야? 

이렇게 말도 잘하고 늙어 빠진 새가 주인님이라고 부를 정도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일단 확실한 것 같은데. 

곰곰이 남자의 얼굴과 나이를 대조해 보던 이예주는 금방 포기했다. 

얼굴만 가지고 나이를 알아맞히는 능력은 없을 뿐이거니와 왕재수의 나이까지 알아서 좋을 게 뭐가 있냐는 심보였다. 

“그래도 누나라고 불러.”

“에엑?”

“누나.”

나이가 어쨌든 중요한 건 ‘누나’란 말이었다. 암, 이 조그만 것한테까지 제가 인간 여자라고 무시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왕 같이 붙어 다니기로 한 이상 서열은 확실히 잡아 놔야 했다. 

이예주는 예전에 엄마와 같이 살 때 키웠던, 자신을 저보다 아래라 여기고 깔보았던 강아지를 떠올렸다. 

그놈은 그녀가 ‘손’ 해도 손을 내밀기는커녕 건방짐이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이예주가 ‘봉구, 손, 손.’ 하는 것을 되레 주인인 양 가만히 바라보곤 했던 것이다. 

또 기가 막히게 약아 빠져서 엄마한텐 어찌나 녹듯이 앙앙거리며 애교를 떨던지. 

수컷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가증스러움이 녀석에겐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동물을 혐오하고 동물을 골탕 먹일 생각으로 동물 다큐를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 

이예주의 동물에 관한 관심은 봉구가 죽은 후 자연스레 끊겼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녀에겐 서열에 대한 민감한 기억이 남아 있어, 가끔 원룸으로 들어가는 골목에서 마주치는 길고양이와도 한참 동안 눈싸움을 하곤 했다. 

“하, 인간 여자가 저한테 존칭을 써야지 제가 왜 인간 여자한테 누나라고 불러여?!”

어릴 적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추억에 잠겨 있는 것도 잠시, 황당함이 극에 달한 목소리로 조롱이가 다시 떽떽거렸다. 

이예주는 왠지 모르게 저조해진 기분 때문에 그에 동조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시큰둥하게 답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봐. 너랑 나랑 누가 더 나이 많게 생겼는지.”

“여기 지나가는 인간이 어디 있어여!”

“네 주인.”

“이익! 주인님은! 주, 주인님은……!”

이예주가 턱짓으로 앞서 걷는 남자를 가리키자 조롱이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말을 더듬었다. 

무언가 그녀에게 반박할 말을 찾는 것 같지만 딱히 생각이 안 나 속이 타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주인님은, 주인님은 인간 아니에여…….”

그 말에 격하게 동감하며 이예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꾸했다.

“그래. 하지만 난 인간이고 넌 동물이야.”

“에엑? 전 신인류인데여?”

“어쨌든 본질은 동물이잖아? 인간이랑 동물의 시간은 다르기 마련이야, 암.”

“그런 게 어디 있어여! 싫어여! 아무튼 전 누나라고 안 부를래여.”

반항이 길어지자 이예주의 참을성도 점차 바닥을 드러냈다. 그녀는 눈살을 지그시 찌푸렸다. 

아니, 이 조그만 게 누나라고 부르라면 부를 것이지,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어쩐지 이 새 자식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가 다 있었다. 

이 자식은 봉구를 닮았다. 제 주인을 업신여기는 봉구 자식.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애완동물 말이다.

이예주는 가던 길에 우뚝 멈춰 선 후, 옆에서 걷던 조롱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왜 이래여.”

갑작스레 눈빛이 변한 그녀 때문에 잔뜩 당황한 황조롱이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인간 여자에게 뒷목이 잡혀 코앞까지 훅 끌어당겨졌다. 

그녀는 황조롱이를 잘근잘근 씹듯이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 냈다.

“좋게 말할 때 ‘누나’ 하면서 알랑거리는 게 좋을 텐데. 네 주인을 보아하니 앞으로도 계속 너한테 날 맡길 눈치야. 감시든 뭐든 말이야. 네 주인이 잠깐 자리를 비울 때마다 수시로 너랑 나 둘만 남겨 둘 텐데 그때 네가 만약 별생각 없이 내가 나이가 어리다는 걸 기억하고 나한테 ‘야’ 혹은 ‘인간 여자’라고 그 촉새 같은 입을 조잘대면 내가 어떻게 나올까? 난 너한테 뭔가 대단한 걸 바라진 않아. 그냥 ‘누나’ 한 마디면 너나 나나 좋아질 거다, 이 소리지. 네가 그래도 나보다 훨씬 어리게 생겼는데 내가 너한테 ‘조롱 할아버지’ 하는 건 너무 웃기잖아, 안 그래? 그니까 내 말은 한마디로 요약해서 만약 네가 굳이 꼭 누나라고 부르기 싫다면…….”

“…….”

“……앞으로 네 주인이 없을 때마다 지옥을 볼 수 있을 거란 소리야.”

“…….”

“하하. 내가 때리는 기술이 꿀밤뿐인 줄 알겠지만 꿀밤 말고도 그밖에 손목 때리기도 있고 고속도로라고 네 이마를 쥐어짜는 그런 것도 있는데. 아, 그건 벌써부터 알 필요 없어. 차차 겪어 보면 알겠지…….”

이예주가 말을 끝내고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와 정반대로 조롱이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마 몇 번 꿀밤을 맞아 본 경험을 토대로 그녀가 말하는 기술이 얼마나 끔찍할지 절로 상상이 가는 듯했다. 

이예주가 그런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치곤 다시 걸음을 재개하자 뒤에서 씩씩대는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깨끗이 서열을 정돈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쾌해진 그녀가 발걸음을 가벼이 놀릴 때였다. 

다다다다 소리가 들리더니 이예주보다 뒤에 서 있던 조롱이가 그녀를 지나쳐 제 주인에게로 울먹이며 달려갔다.

“씨이! 주인님! 저 인간 여자……! 아, 아니, 저 예주 누나 완전 악마예요, 악마! 히잉!”

아니, 저, 저게……! 

말이 끝나자마자 고자질을 하러 제 주인에게 달려가는 새 자식의 행태를 보고 이예주가 뒷목을 잡았다. 

저게 진짜 뜨거운 맛을 덜 봤구나! 저걸 그냥! 

그녀가 조롱이의 촉새 같은 행태에 이를 갈며 어떻게 되돌려 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발칙한 소리를 해 대는 황조롱이의 말을 들은 남자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남자의 시릴 듯 차가운 눈을 보자 이예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 또 어떤 언어폭력으로 염통을 아주 쫄깃하게 만들어 주려나. 그녀가 내심 덜덜 떨 때였다.

남자의 눈이 순식간에 변했다. 

아니, 왜 나 볼 때만 저렇게 징그러운 빨간색 눈깔을 하는 거야? 

이예주는 방금의 상황도 잊고 정신없이 남자의 변하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좀체 적응이 안 됐다. 

눈만으로도 사람을 차별하는 능력이 있는 건가? 

“스읍― 인간, 황조롱이 괴롭히지 말라 했지 않느냐.”

마치 장난꾸러기 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것 같은 경고 소리를 시작으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몸에 다시 바짝 기합이 들어갔다.

“응?”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신인류는 인간보다 위대하다느니, 감히 주제 파악을 못한다느니 하며 쏟아 낼 것만 같았던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뒤로 돌아 다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바짝 굳었던 몸에서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저 남자 왜 저래? 아까까지만 해도 저 말하는 새대가리를 끔찍하게 끼고 돌더니. 황조롱이의 고자질에도 예상외로 별 말이 없다. 

그때 얄밉게도 혀를 쑥 내민 조롱이를 본 이예주가 험악한 인상으로 한쪽 손을 들어 목을 그어 보였다. 

그러자 황조롱이가 사색이 되어 제 주인 뒤에 가까이 붙었다.

내심 남자의 행동에 안심하면서도 이예주는 끝내 불만과 억울함을 버리지 못했다. 

“……씨이. 왜 나한테만 뭐라 해.”

그래. 고자질이든 뭐든 중점은 그거였다. 제 입장에선 똑같이 싸운 건데.

“누군 엄마 없는 줄 알아?”

홀로 중얼대던 이예주는 금방 눈에서 독기를 잃고 풀이 죽었다. 

아, 맞다. 엄마 없지, 참……. 

망할 황조롱이. 

왠지 모를 울적함에 그녀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그들을 쫓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예주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도끼눈에 당황해서 ‘인간 여자’에서 ‘예주 누나’로 호칭을 바꾸었던 황조롱이의 목소리가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록 저 망할 황조롱이를 일러바칠 엄마는 없지만 그래도 이겼다. 

그것은 마치 봉구를 이긴 듯한 기분과도 같았다. 

완전히 억울함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절로 나오는 웃음과 후련함을 만끽하며 이예주는 다시금 힘차게 발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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