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3)화 (13/319)

“예, 예?”

“나 그 약초 조금만 달라고.”

저거 한국 가서 팔면, 제약계에 한 획을 그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먼 오지까지 가서 약초를 공수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한순간에 돈방석에 앉겠지. 

돈방석이 뭐야. 돈으로 똥도 닦겠다! 

향긋한 지폐 더미 위에 몸을 폭 던지는 자신을 상상하며 이예주가 번쩍번쩍 눈을 빛냈다.

아까 황조롱이가 품 안쪽에서 주머니를 꺼내는 것도 확인했다. 여차하면 달려들어 뺏고 볼 심산으로 그녀가 짓궂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상처를 보러 가까이 다가왔던 조롱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다니까.

“아, 안 돼여! 이게 어, 얼마나 귀한 건데 이, 인간 여자한테…….”

“한 뿌리만. 아니, 이파리 하나만. 하여간 조금만!”

이예주가 벌겋게 눈독을 들이자 황조롱이가 얼른 두 팔을 엑스 자로 만들어 제 품을 감싸 안았다.

“절대 안 돼여! 이거 가져가서 팔려고 그러져! 인간들이 숲에 들어와서 캐 간 게 얼만데! 이런 거 잘못 팔면 시간족보다 그냥 인간들이 더 빨리 달려온단 말이에여!”

“팔긴 누가 팔아? 난 그냥…….”

이예주가 말끝을 흐리다가 전광석화처럼 조롱이를 향해 냅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조롱이가 그녀의 손이 닿기 전에 미꾸라지처럼 피해서 그녀의 뒤쪽으로 유연하게 도망갔다.

“아, 왜 이래여! 안 된다고 했잖아여!”

“아, 거참! 조금만 나눠 갖자! 그거 한 뿌리만 팔아도 얼마야. 돈방석에 앉을 수 있어! 내가 특별히 팔고 3할은 너 줄게. 응?”

“안 된다니까여!”

주머니를 낚아채려는 인간 여자와 그 마수 같은 손길을 피하기 위해 요리조리 몸을 비트는 갈색 머리 소년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 

인간 모습의 황조롱이는 새 모습 때완 또 달랐다. 

이예주보다 작은 것은 여전한데 간발의 차이로 어찌나 잘 피해 달아나는지, 결국 뿔 딱지가 난 그녀가 괴성을 질렀다.

“아 그럼 4할! 그 이상은 안 돼!”

“싫어여! 왜 이래여, 인간 여자!”

“아오! 이게 왜 이렇게 잘 도망가!”

주위를 정신없이 뱅글뱅글 도는 황조롱이 때문에 약이 바짝 오른 이예주는 꾀를 냈다. 

조롱이의 뒤를 쫓아 뱅글뱅글 도는 듯하다가 몸을 돌려 조롱이의 앞쪽으로 달려가 그를 향해 손을 뻗은 것이다. 

갈색 머리칼이 아슬아슬하게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가 싶더니 결국 그녀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꽉 잡혔다. 

“아악! 놔, 놔여!”

“헉, 헉. 이 자식! 드디어 잡았네! 그러니까 좋게 나눠 줬으면 좋았잖아, 이 욕심쟁이야.”

“놔여어! 왜 머리끄덩이를 잡고 그래여!”

“네가 먼저 요정 풀인지 뭔지 주면 그때 놔줄…… 억!”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황조롱이에게 거래를 제시하던 그녀가 말을 다하기도 전에 거칠게 후드가 잡아당겨졌다. 

그 바람에 얼떨결에 조롱이를 잡은 손도 놓치고 그대로 끌려갔다.

“이, 이게 뭐……!”

“뭐 하는 짓이지?”

“주인님!”

이예주는 손을 뻗어 자신의 후드가 다시 빳빳하게 솟은 걸 만지면서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빠알간 동공이 굉장한 불쾌감을 담고 자신을 내려 보는 것이 보였다. 

먼저 휘적휘적 걸어간 거 아니었어? 대체 언제 귀신같이 다가온 거야, 이놈은. 

“왜 신인류를 괴롭히는 거냐.”

“…….”

“대답.”

남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이예주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그러자 그녀 대신 촉새 같은 새 자식이 홀딱 고자질을 해 댔다.

“인간 여자가 자꾸 페어리니틀 강탈해 가려고 해여!”

“강탈?”

남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이예주는 직감으로, 또 경험으로도 그것이 뜻하는 바가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냉큼 고자질해 댄 황조롱이를 향해 눈을 부라리려던 그녀는 남자의 홍안과 마주치자 미친 듯이 도리질 쳤다.

“강, 강탈이라뇨? 전혀요?”

“뺏으려고 했잖아여!”

“내가 언제? 그냥 한번 보자고만 했지. 얘는 농담도. 하하.”

“팔아서 돈방석에 앉는다면서! 그리고 저한텐 3할을…….”

그 입을 닥치지 않을 시, 너를 그 약초처럼 다져 주겠다. 

이예주의 눈빛이 황조롱이에게 말했다. 

그러자 제 주인을 향해 열심히 조잘대려던 갈색 머리 소년이 말끝을 흐리다 끝내 입을 닫았다. 

다행이다. 저 고자질쟁이가 눈치 하나는 재빨라서. 

그녀는 저를 잡은 포식자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보기 흉하니 그만 자신을 놔 달라고 부탁했다.

“봐, 봤죠? 그냥 장난친 거예요. 장난…… 하하, 괴롭히긴요. 전혀요. 저랑 조롱이랑 친해요. 그, 그치, 조롱아?”

“…….”

좋은 말 할 때 대답해라. 

이예주의 눈이 다시 한 번 텔레파시를 내뿜자 침묵을 택하려던 황조롱이가 정말로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우악스럽게 잡은 그녀의 후드를 좀처럼 놔주지 않았다. 

무척이나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귀신같은 놈. 제 애완동물이라고 챙기는 것 봐. 저런 고자질쟁이도 애완동물이라고. 

속으로 남자와 황조롱이를 욕하면서도 이예주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한참이나 붉은 안광을 번쩍번쩍 빛내던 남자는 이예주가 후드티에 목이 조여 갑갑해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내팽겨치듯 내려놓았다.

“가만히 있어도 짐이 되는 마당에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하는군.”

“…….”

“황조롱이 괴롭히지 말고 얌전히 따라오는 게 좋을 것이다.”

있는 정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남자가 이예주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그러고는 그녀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휙 돌아서 긴 다리를 이용해 휘적휘적 앞서가기 시작했다. 

“칫, 쌤통.”

그 뒤로 혀를 쑥 내뺀 조롱이가 뒤따랐다. 그 주인에 그 애완동물이다.

으으! 이예주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는 황조롱이를 보곤 얼른 주먹을 감췄다. 

“아, 빨리 와여! 뭐 해여.”

기고만장해진 황조롱이가 마치 지나가던 개 부르듯 이예주를 불렀다. 

“가! 간다고!”

그녀는 굉장히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하고 뛰듯 걸어 그들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불만에 가득 차 터벅터벅 발을 구르며 걷는 이예주에게로 남자의 홍안이 슬쩍 향했다. 

그러나 툴툴거리기 바빠 그녀는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제 성질에 못 이겨 한동안 말없이 걷던 이예주가 다시 입을 연 건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1시간도 걷지 않은 것 같은데 그녀의 저질 체력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 2, 3시간이면 오를 만한 크기의 돌산에 꼬박 한나절을 쏟아부었던 그녀였으니 이 정도 걸었으면 말 다한 거였다.

“조롱아, 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돼?”

먼저 아쉬운 사람이 입을 연다고, 이예주가 침묵함으로써 암묵적으로 그들을 감싸던 고요함이 깨졌다.

아까 요정 풀인가 뭔가를 뺏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지친 얼굴로 말을 꺼내자 그녀를 돌아보는 소년의 눈빛에 기가 막히다 못해 코가 막힌다는 듯한 감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거든여? 아직 침엽수 지대를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무슨 소리에여.”

“얼마 안 걸었다고? 그럴 리가…….”

이예주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제로 그들은 정말로 얼마 걷지 않았으나, 그녀가 체감하는 거리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마치 한나절을 꼬박 걸어온 사람처럼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한 그녀와는 다르게 남자는 제 뒤통수만 얄밉게 보여 주며 변함없이 전진 중이었다. 

황조롱이마저 지침의 ‘지’ 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이예주는 자신의 저주받을 체력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 나, 진짜 누구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걷고 있는데여!”

황당할 정도로 빠르게 체력이 고갈된 이예주를 보며 조롱이가 다시 떽떽거렸다. 

자신을 탓하는 그 말투에 그녀의 처진 눈이 금방 위로 치켜 올라갔다.

“누구 때문이라니? 나 말하는 거야?”

“그럼 인간 여자 때문이지, 뭐 때문에 주인님이랑 나랑 이렇게 걷고 있는데여!”

“왜?”

이예주가 되묻자 소년 또한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별세계 사람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왜긴 왜여! 인간 여자가 서쪽으로 같이 가자고 졸랐잖아여!”

“응. 그런데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 인간 여자 없었음 저는 휙 날아가면 되고 주인님이야 늑대족 신인류를 타고 이동하셨겠져.”

조롱이가 답답함을 무릅쓰고 이예주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으나 오히려 설명을 듣고 난 후 그녀는 더욱 미궁 속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이라도 그렇게 이동하면 차라리 잘된 일이겠거늘. 

자신이야말로 이렇게 놈들의 뒤를 졸졸 따라 걷는 것이 싫고 귀찮고 힘든 마당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넌 날고 나랑 저 미친…… 아, 아니 저 주인…….”

‘나랑 저 미친놈은 늑대족인지 뭔지 타고 이동하면 되지.’라고 말하려던 그녀는 말을 멈췄다. 

참. 그래서 저 남자를 뭐라고 불러야 좋지?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죽이니 살리니 한 나쁜 놈이지만 한동안은 같이 붙어 다닐 예정이었다. 

물론 이름을 안다 해도 앞으로 살갑게 부를 일도 없을 테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아니, 알고 싶긴 한가? 흐흣. 

그래도 훤칠한 남자의 외모를 생각하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정신적으로 조금, 아니 많이 아픈 사람이라서 그렇지 저런 미남을 마주칠 기회가 매번 오는 것은 아니니까. 

참말로 거시기한 놈이란 말이야. 저 소름 끼치는 눈동자랑 정신만 좀 멀쩡했으면 확 유혹해서 애를…… 

아니, 아닙니다. 

이예주는 상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스읍 하고 침을 삼키고 나서야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어느새 남자가 걸음을 멈춘 걸 못 본 그녀가 남자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시뻘건 눈동자가 이예주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제 음흉한 생각을 들킨 기분에 헉 하고 헛바람을 들이켜자 남자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인간 주제에 신인류를 탄다고?”

“…….”

“네가 감히?”

“……신인류는 주인님만 탈 수 있어여.”

싸늘해진 분위기 탓인지 조롱이가 어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갑작스런 남자의 반응에 당황한 그녀를 무시하고 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더 이상 지껄이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남긴 후 다시 휙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황당함이 도를 넘어 극에 치달음을 느꼈다. 

아, 저 미친놈은 대체 전생에 나랑 무슨 악연이었던 거지? 

내가 뭐, 지한테 물어봤나? 같이 탈 수도 있지! 지는 인간 아니야? 

말끝마다 인간, 인간. 어쩜 저렇게 말을 재수 없게 할 수 있을까?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만난 지 며칠 안 됐는데도 이렇게 말하는 족족 자신을 분노에 떨게 만드니. 

저 왕 재수, 왕 재수, 왕 재수! 으으! 그녀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정말 ‘선 주먹’을 날리고 그냥 도망가 버릴까? 

새까만 남자의 뒤통수를 눈이 돌아갈 정도로 노려보며 이예주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게 아니라면 오직 자신에게 남은 것은 복수다. 

기필코 복수하겠다. 

마냥 복수할 기회가 생기길 기다리던 그녀는 목표를 수정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 반드시 복수한다. 

이제부터 모든 수단을 다해 남자에게서 멀어지거나 복수를 하지 않으면 제 명에 못 살고 먼저 죽을 것 같았다. 

“얼른 와여, 인간 여자.”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이예주의 눈치가 보였는지 조롱이가 조심스레 그녀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 행동은 남자의 말투 때문에 뒷목 잡고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던 그녀의 눈에서 불똥이 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