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2)화 (12/319)

이예주가 정말로 당장 이름을 붙여 줄 기세로 턱을 괴고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름을 붙여 준다는 말에 당황하던 황조롱이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뜯어말렸다.

“괘, 괜찮아여! 이, 이름 같은 거 필요 없는데…….”

“이름이 필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가만있어 봐. 넌 촉새같이 고자질을 잘하니까, 음. 황촉새 어때? 뜻은 황조롱이 플러스 촉새로…….”

“에엑! 싫어여!”

인간 여자의 작명 센스에 황조롱이가 진저리를 쳤다. 

“싫어? 그럼, 황나불은 어때? 주둥이를 겁대가리 없이 잘 나불거린다는 뜻이야. 아니면 황간신, 간신 같은 새라는 뜻이지.”

“아악! 싫다구여! 그게 뭐예여!”

“음…… 또, 황배신, 황꼰지름, 황구라, 황비겁, 황철새, 황…….”

“아, 진짜! 다 싫어여! 다 이상해! 그게 뭐야!”

“아 씨! 더럽게 까다롭네!”

머리를 쥐어 짜내며 이름을 지어 주었으나 번번이 걷어차이자 이예주가 뿔이 나서 빽 소리 질렀다.

“대충 지어 부르는 게 이름이지! 조롱이. 조롱이 됐지? 그냥 조롱이라 부를게.”

“조롱이여?”

“그래. 네가 황 씨 들어가는 거 다 싫다며. 황 빼고 조롱이라 부르면 되겠네. 예뻐. 조롱아, 됐지?”

“너무 애기 같은 이름인데…….”

“예뻐 예뻐. 조롱이. 재롱부리는 것 같아, 킥.”

이예주는 결국 조롱이로 타협을 보았다. 그래도 이전에 나열된 이름보단 나은 건지 조롱이로 명명된 소년은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 침울한 얼굴이 체념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예주는 “조롱아, 조롱아.” 하며 신경 쓰지 않고 제가 새로 붙여 준 이름을 불러 보았다. 

계속 부르다 보니 입에도 잘 달라붙고 재롱떠는 아이의 모습과 황조롱이의 떽떽대는 모습이 겹쳐 보여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녀가 혼잣말하듯 조롱이를 중얼거리다가 킥킥대던 그 순간이었다.

“물건이나 생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고대부터 인간이 제 소유물을 주장하기 위해서 행했던 짓거리지.”

“……엄마, 깜짝이야!”

“주인님!”

대체 어느 틈에 온 건지 고개를 휙 들자 남자의 새빨간 눈이 웃고 있는 이예주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었다. 

갑자기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 이 자식은 왔으면 기척을 내야지 왜 엄한 사람을 놀래키고…….

“역시 때를 가릴 줄도 모르고 영역을 확장하려는 본능은 어린 것이건 늙은 것이건 매한가지구나.”

“…….”

“저급하기 짝이 없군.”

“…….”

“황조롱이는 네 소유가 아니다, 인간.”

정말로 더러운 것을 본 것처럼 이예주를 바라보는 남자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쏟아지는 폭언에 억울함이 북받쳐 올라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이름 짓는 게 뭐 어때서? 이름 하나 부르는데 왜 영역 확장이니 뭐니까지 나와야 하는 건데? 

그러나 그녀가 남자를 향해 참지 않고 한마디 하려 하는 것보다 조롱이가 한 발 더 빨랐다.

“주인님! 잘 다녀오셨어여?” 

“그래. 인간의 기척인 것 같았는데 거리가 너무 멀었는지 어느 틈에 사라져 있더군.”

“헤헤, 기다리고 있었떠여.”

남자의 눈이 이예주에게서 떨어져 조롱이에게로 향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뻘겋던 눈이 조롱이에게 향하자 변화했다. 

마치 눈 녹듯 핏빛이 사라지고 심연의 검은색이 그의 눈동자를 점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남자의 눈이 그의 머리카락과 같은 새까만 색으로 변했다. 

너무 새까매서 동양인의 눈이라고 볼 수도 없는 그런 색이었다. 

눈동자 색깔 하나 변했을 뿐인데 남자의 인상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수려하고 번듯한 얼굴에 검은 눈동자가 자리 잡자 남자에게선 특유의 무뚝뚝함만 느껴질 뿐, 살기와 혐오감 같은 다른 감정은 일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황조롱이를 내려다보는 그 눈은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 놀라운 변화에 이예주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기척을 뒤쫓아서 바로 서쪽으로 가야 하니 서둘러 채비해라.”

“그런데 주인님, 인간 여자도 함께 가는 거예여? 정말이여?”

“…….”

조롱이의 질문에 남자의 무감한 눈이 이예주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남자의 눈이 자신에게 꽂히자마자 물 위에 물감이 번지듯 가장자리부터 다시 시뻘건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 이것 봐. 왜 나 볼 땐 저렇게 소름 끼치게 변하는 건데? 지가 무슨 카멜레온이야? 눈동자 색이 휙휙 바뀌게? 

이예주가 멍하니 카멜레온의 보호색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사이 완전히 새빨갛게 변한 눈으로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귀찮게 됐군.”

“…….”

“굳이 데려가 봤자 짐만 될 텐데.”

“그, 그래도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지도 몰라여. 인간 여자 중에서 이렇게 강한 능력을 가진 인간은 없었잖아여? 에, 또 그렇게 나쁜 인간 같지도 않구…….”

진짜 짐 덩어리를 보는 것처럼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너랑 같이 있기 싫어서 미치고 환장하겠거든? 그니까 놓아 달라 했을 때 놓아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았을 거 아니야. 

이예주는 그런 남자의 태도에 울분이 솟아 항변하려고 입을 벌렸으나, 시뻘건 눈이 번쩍하고 빛나자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일단 서쪽까지 데려간다.”

“…….”

그녀가 남자의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그래, 더럽고 치사하지만 이 남자한테 붙어서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거야. 그러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테고 잘하면 사람들한테 이 미친놈의 악행을 말할 기회도 생기…….

“그곳에서 다리족 놈들을 잡은 후에 같이 죽여 버려도 늦지 않겠지.”

“…….”

“제 목숨보다 동족을 중요시하는 계집이니 동족과 같이 죽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겠군.”

“…….”

“이만 일어나라.”

“네! 주인님!”

황조롱이가 남자의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재빨리 따랐다. 

그러나 이예주는 다시 덜컹덜컹 심장이 떨려서 차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좋아 죽어? 누가 동족이고 또 누가 좋아 죽어? 누가! 

혹시 저 남자가 시간을 벌고 도망가려는 자신의 계획을 눈치챈 걸까? 

서쪽에 도착하자마자 같이 죽인다니. 

뭐든 쥐뿔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 남자가 자신을 찢어발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를 따라나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저 자식은 자비도 관용도 없는 놈이다. 

자고로 지나가는 비렁뱅이에게라도 온정을 베풀면 3대가 풍족해진다는 설이 있다. 

하물며 자신은 비렁뱅이도 아니고 숲속에 조난당한 불쌍한 여성이건만! 저 자식의 머리통은 오로지 그런 불쌍한 여성을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게 확실했다. 

어느새 꽤 멀어진 남자의 까만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녀가 주변에 있는 주먹만 한 돌멩이를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먼저 선빵을 날릴까? 심장까지 쥐어 잡은 채 그녀의 전신을 덮친 감정은 바로. 

분노였다.

“빨리 와여! 얼른여!”

그러나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이예주를 향해 시끄럽게 손짓을 하는 조롱이 때문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손에서 돌멩이를 내려놓았다. 

하. 일단 살았으니 저 남자에게서 도망칠 기회는 앞으로 많을 것이다. 

어쩌면 저 미친놈에게 엿을 먹일 기회도 올지 모른다. 

그래. 일단은 살았고 어찌 됐든 남자와 같은 편이 되었으니. 자다가 날벼락 맞고 죽을 일은 없을 테다. 

“빨리여! 빨리!”

초췌한 얼굴로 비척비척 뒤따라 걷는 그녀를 향해 조롱이가 한 번 더 소리쳤다. 

닥쳐. 이예주가 입모양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까지 그녀는 자신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안이함만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야흐로 여행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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