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11)화 (11/319)

“…….”

남자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잠시 생각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통한 건가? 

이예주가 조심스레 남자의 눈치를 보며 미친 듯이 빌었다. 

제발 이 남자가 생각보다 단순하길. 제발 먹혀라, 먹혀라.

“인간들에게 데려다 달라?”

“네!”

“……그리고?”

남자가 되물었다. 

이예주는 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생각보다 너무 잘 먹히는 것 같아 외려 당황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헛소리하는 김에 몇 개 더 추가해 봤자 어차피 죽기밖에 더 하겠냐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 어…… 가는 곳까지 절대! 절대 안전하게 해 주기! 절대 절대 안 위험하게요.”

그녀는 그동안 남자에게 당해 왔던 그 끔찍한 나날들이 떠올라 진저리를 치며 덧붙였다. 

그래, 절대 안전해야지. 

비단 이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지진이랑 번개를 마구 일으키는 이 미친놈이라면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까마귀 떼들과 대형 돌뱀은 무사통과할 것이다.

비굴하고 더럽지만 지금은 살기 위해 ‘적과의 동침’을 해야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 남자 말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다른 사람, 다른 피플(People)을 만나야 돼. 

며칠 내내 별별 희한하고 경악스러운 것들만 봐서 그런지 급격히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이 정도의 그리움이라면, 설사 만나는 사람이 심리학 마녀라 하더라도 두 팔 벌려 격하게 맞이하리라. 

한국으로 돌아가면 열심히, 정말 열심히 학교를 다녀야지. 

심리학 시간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녀서 졸업까지 F란 성적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일단은 집에 가서 가지고 있는 후드티를 깡그리 버리는 것부터…….

“…….”

한국에 돌아갈 생각으로 아련해진 이예주의 의중을 떠보듯 남자가 빨간 눈을 빛내며 한참 동안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 시뻘건 눈이 어찌나 날카롭던지 혹시 다리족이고 뭐고 까마득하게 모르는 것을 들킨 건가 싶어 등허리로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그렇게 영겁 같은 시간이 흐른 후, 이예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목이 졸리고 있으니 제발 후드 좀 놓아주시지 않으렵니까?’ 하고 남자에게 애원하려 할 때쯤, 그가 먼저 더러운 것을 떼어 놓듯 그녀를 내팽개쳤다.

“어흑!”

“황조롱이.”

“예, 예? 주인님!”

“수상한 기척이 느껴진다. 잠시 다녀올 테니 감시하고 있도록.”

바닥에 흉한 꼴로 널브러진 이예주가 날카로운 풀에 쓸린 팔을 문지르며 일어나기도 전에 남자가 휑하니 숲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녀는 남자가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아픈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내가 물건이야, 내동댕이치게! 

앞니까지 튀어나온 살벌한 욕지거리를 간신히 넘겨 삼키며 그녀는 남자의 손에 잔뜩 늘어나 이마를 덮은 후드를 뒤로 휙 넘겼다. 

좀 전까지 겪은 수모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남자가 사라진 지금, 화를 내는 것보단 도망가는 것이 우선이다. 

이예주는 ‘문’을 찾아 재빨리 사방팔방 고개를 휘저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문’이 없었다. 

방금의 수위 정도면 진짜 죽을 뻔한 위험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망할 놈의 ‘문’은 대체 뭘 기준으로 하는 건지 이렇게 필요한 때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아! 미치겠네, 진짜!”

이예주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외쳤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갈색 머리 소년이 금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그녀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도망가려고 그러져?”

“…….”

이예주는 말없이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를 외면했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이 쪼그만 새에게 자신을 감시하라고 시켰다. 

그냥 두고 가면 또 고자질할 가능성이 다분하니 기절이라도 시키고 가야 하는 건가? 

어느새 황조롱이는 새가 아닌 14살, 15살 남짓인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귀여운 외모의 소년과 주변에 널려 있는 나뭇가지를 의미심장하게 번갈아 바라보며 그녀가 아동 학대 성향이 다분한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새대가리, 아니 똥색 대가리가 얄밉게 쏘아붙였다.

“이제 도망 못 갈걸여?”

“…….”

“진짜 도망 못 가여. 어디로도 도망 못 갈걸여?”

“뭐? 왜!”

방금 전까지도 소년의 말은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예주가 금방 돌변해서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주인님이 인간 여자의 기척은 완벽하게 읽으실 거예여.”

“…….” 

“그리구 저보고 인간 여자 감시하랬잖아여. 인간 여자가 내민 조건을 생각해 보신다는 거예여!” 

“…….”

“그런데 또 도망가 버리면, 진짜 죽일 걸여? 그땐 인간 여자가 능력이 강해서 어디로 도망친다 해도 소용없떠여.”

“말도 안 돼!”

이예주가 소년에게 침을 튀기며 격하게 외쳤다.

“말도 안 돼! 나한텐, 나한텐 문이, 문이…….” 

“말했잖아여. 인간 여자 기척은 앞으로 어디에서든 느낄 수 있다고. 주인님이 원래 그런 건 확실하세여.”

“하하, 네가 뭘 잘 몰라서 그래. 나한텐 네 주인도 잘 모르는 필살기가…….”

“주인님은 인간 여자 잡는다고 서쪽으로 가시다가 갑자기 여기로 방향도 틀으셨는걸여. 인간 피 냄새 때문에 머리 아프다고 저 보고 먼저 가서 피 냄새 없애라고 시키신 거예여.”

“…….”

이예주는 소년의 말에 아연실색한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된다. ‘문’을 넘어 도망가도 잡힌다고? 

그녀의 얼굴이 남자에게 후드를 잡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을 때처럼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어제 돌뱀을 피해 ‘문’을 넘어 다시 이 저주받은 숲으로 돌아왔을 때, 걷다가 쓰러지더라도 이곳에서 졸도하듯 잠드는 게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숲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했어야 하는데. 

이 바보야, 바보야……! 

“바보. 그렇게 죽기 싫으면 인간들한테 데려다 달라 할 게 아니라 죽이지 말라는 조건을 내걸었어야져.”

“…….”

“칫, 매번 내 말 안 들어서 주인님만 잔뜩 화나게 만들구. 쌤통이에여.”

“……닥쳐. 촉새한테 그딴 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왜 촉새에여! 용맹한 황조롱이! 달리는 쥐도 단번에 낚아챌 수 있는 용맹한 황조롱이라구여!”

덩달아 그녀의 앞에 주저앉아 쫑알대는 갈색 머리 소년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을 느끼며 이예주가 우울하게 대꾸했다. 

황조롱이 말처럼 그녀가 바보, 멍청이라 죽이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시간을 벌려고 했다. 

그 시뻘건 눈의 남자가 무슨 대답을 강요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당장 살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껄여 댄 헛소리였단 말이다. 

다리족이니 능력이니, 그런 소리 전혀 알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알아내 남자에게 알려 줄 생각도 없다. 

다만 다른 인간들이 있다는 남자의 말에 번쩍 귀가 뜨였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원초적이고 무식하기까지 한 믿음이 생기기도 했다. 

이제 어쩌나. 남자의 질문에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테고, 그러면 꼼짝 없이 죽는다. 

낯선 곳까지 기어 와서 죽어야 되다니. 이 개 같은 팔자야. 이 더러운 세상아…….

“팔이나 마저 줘 봐여.”

“…….”

“히잉. 약초 다 떨어졌잖아엽! 구하기도 힘든 건데 아까워 죽겠네. 조심 좀 하지, 씨이…….”

제멋대로 그녀의 오른쪽 팔을 마구 끌어당긴 소년이 붙여 두었던 약초가 모조리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소년이 주섬주섬 제 상의 안주머니에서 쌈지 같은 것을 꺼내 매듭을 풀고 그 안에서 다시 푸르죽죽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초목 특유의 떨떠름한 냄새가 훅 풍기는 걸로 보아 풀을 찧어 뭉친 것이 확실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여. 인간 여자가 쓸모 있다고 생각되면 더 오래 살 수 있을 거예여. 그래도 주인님이 관대하셔서 시간족들을 잡는데 협력하는 일반 인간들은 아직까진 살려 두고 계시거든여.”

“…….”

되도 않는 위로를 건네며 소년이 주머니에서 꺼낸 풀을 이예주의 팔 위에 조심스럽게 붙였다. 

따끔따끔하고 시원한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가 잠든 사이 부스럭대며 잠을 방해한 것이 바로 이 쪼그만 것이었나 보다.

병 주고 약 주기다. 그때 도망갔어야 할 것을……!

“아! 아아!”

“엄살은. 좀 참아여!”

“아악! 따가워! 살살해라, 좋은 말 할 때.”

이예주가 짓씹듯 말을 내뱉자 역시 사심을 담았던 듯 소년의 손길이 움찔하더니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고통이 줄어들자 그녀는 멍하니 그가 하는 짓을 바라보았다. 

촉새같이 제 주인에게 고자질만 잘 치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황조롱이는 섬세하게 상처를 치료해 나갔다. 

약초를 올려놓을 때마다 자신이 아픔에 움찔움찔 떨 때면 덩달아 울상을 짓기도 했다.

“많이 아파여? 피 많이 났어여. 저도 날개 찢어졌던 적이 있는데여. 진짜 아파서 죽을 뻔했어여.”

“…….”

“근데 그때 기적처럼 딱 주인님이 나타나신 거 있져? 주인님은 너무 멋져여. 주인님은 정말 대단하세여! 그때 정말 죽을 뻔했는데. 주인님이 제 날개에 손대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넌 이름이 뭐야?”

이예주는 미친놈을 찬양하는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러자 소년의 황금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름이여?”

“응, 이름.”

그녀의 물음에 주절거림을 멈춘 황조롱이가 몇 번 눈을 끔벅거리다가 답했다.

“……없는데여?”

이예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 왜?”

“그냥 없떠여.”

“왜?”

“그냥여.”

“그니까 왜? 니네 주인 있잖아. 애완동물 이름도 안 지어 주고 뭐 했대?”

“아, 그냥 없어여! 주인님이 이름 붙이는 건 멍청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셨단 말이에여!”

“이게. 이름이 뭐가 멍청……!”

“그리구 저 애완동물 아니거든여?!”

이예주의 막말에 갈색 머리 소년이 눈을 부릅뜨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인간 여자는 통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갸웃거리며 황조롱이의 속을 뒤집어 놨다.

“네가 애완동물이 아니면 그럼 뭔데?”

“아! 진짜!”

답답하다는 듯 소년이 제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쳐 댔다.

“계약자여! 신인류라구여! 신인류라고 저번에 얘기해 줬잖아여!”

“신인류? 아아…….”

이예주는 신인류에 대해 되묻다가 이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인류. 

애완동물한테 열심히 말을 가르치는 걸 여기선 그렇게 부르는 건가. 신기하네. 

그런데 앵무새 말고 이런 새도 말을 배울 수 있나? 

그러고 보니 사람 모습으로 변신도 하네. 뭐, 천년 묵은 너구리 같은 건가?

이예주가 저 홀로 인간으로 변할 수 있고 말도 잘할 수 있는 황조롱이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릴 때쯤, 그녀가 생각보다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귀신같이 알아챈 황조롱이가 눈을 번뜩이며 덧붙였다.

“계약은 동물들도 주인님에게 조건을 내걸고 하는 거예여. 애완동물도 아니고 노예 같은 것도 아니에여.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여!”

“그럼 나도 신인류겠네? 나도 네 주인이랑 방금 계약했잖아.”

이예주의 말에 갈색 머리 소년이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인류는 인간은 안 돼여. 인간이 아닌 생물만 가능한걸여.”

“왜? 그런 인간 차별이 어디 있어!”

“주인님이 인간을 싫어하시니까 그렇져.”

“아…….”

그렇지. 그놈은 인간을 마구 죽이고 심지어 자신까지 죽이려 들던 살인마였다. 

참, 숲에 이런 정신병자를 풀어 놓다니 별세계다. 

집으로 돌아가면 대체 지금 자신이 있는 지역이 어딘지 잊지 않고 꼭 한번 찾아봐야겠다. 

“나도 뭐, 네 주인한테 ‘주인님’ 이러면서 굽실댈 생각은 절대 없으니까…… 그보다 네 이름, 내가 지어 줄까?”

“예, 예?”

“이름 말이야. 계속 새대가리니 똥 대가리니, 그렇게 부를 순 없잖아. 흠…… 촉새, 황조롱이, 말하는 새…….”

“이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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