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7)화 (7/319)

“인간! 눈깔! 까아아악—!”

“엄마아아아—!”

푸드닥, 푸드다닥!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오름과 동시에 그녀는 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앞서 한참을 달린 데다 하루 종일 숲을 헤맨 탓에 온몸이 후들거렸다. 

그러나 귓가에 들리는 “인간 눈깔, 까악!” 소리 때문에 필사적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악! 아악!”

문까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지만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 만큼 까마귀 새끼들이 온몸을 미친 듯이 쪼았다. 

그녀가 전력을 다해 머리를 감싸 안았지만 어찌나 세게 쪼는지 얼마 안 가 후드 소매 부분이 부욱, 찢어지기 시작했다. 

쪼는 것뿐이랴. 날갯짓은 또 어찌나 힘찬지 철썩철썩 머리를 후려치는 까마귀 떼들의 날개에 그녀의 입에서 끊임없이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악! 이 미친놈들아! 으윽! 악! 아파! 꺼져!”

비명을 내지르는 이예주의 입과 코로 빳빳한 깃털들이 수북이 들어왔다 내뱉어졌다. 

푸드덕푸드덕, 자신의 주위를 에워싸는 까마귀 떼들로 인해 그녀는 몇 번이고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나 오로지 살겠다는 일념 하나가 이예주를 ‘문’까지 도달하게 했다.

간신히 문 앞에 도달한 그녀는 문 안의 광경을 살펴볼 새도 없이 무조건 사람이 보이는 쪽으로 괴성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으아아악—!”

‘문’에서 나온 빛이 환하게 이예주를 감쌌다. 

“까악, 까악! 인간! 눈깔! 까아악!”

곧 인간은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 까마귀 떼만이 한참을 푸닥거리며 인간 눈깔을 찾았다.

*       *       * 

“으아아아악—!”

수풀 사이에서 까만 깃털이 덕지덕지 붙은 광인 한 명이 뛰어나왔다. 

확실히 미래를 뛰어넘긴 한 건지 영원할 것만 같은 밤은 사라지고 어느새 숲은 환한 아침을 맞이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런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저 자신의 앞에 사람의 인영이 있다는 것 하나로 신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살았다. 살았어! 

“저기요! 사, 살려 주세요! 미친 까마귀 떼들이 쫓아와요!”

이예주는 무작정 눈앞에 보이는 갈색 머리 소년을 부여잡고 목숨을 구걸했다. 

옷도 너덜너덜하고 머리도 산발이었지만 그녀는 살았다는 흥분감에 거센 콧김을 내뿜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옷이고 행색이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예주는 정신없이 자신이 부여잡은 사람을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저기요! 살려 달라니까요? 미친놈의 새 떼들이 이, 인간 눈깔을……!”

하지만 정신없는 와중에도 경악에 가득 찬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황금안과 마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신경을 자극하는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괴리감? 

그러고 보니 이 황금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최근이었는데. 

뭐지, 이 기시감은? 어디서…….

“너, 사흘 전 그 인간 여자군.”

“아, 아직 소멸 안 했어여?!”

황금색 눈동자에 이어 새까만 눈동자가 이예주에게 향했다. 

그 눈동자 안에 여과 없이 드러난 혐오감과 살기. 

그것들을 그녀가 멍하니 들여다보는데 남자의 눈이 가장자리부터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거참, 다시 봐도 넋 나갈 정도로 잘생긴 남자고 다시 봐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 현상이었다.

“분명 땅을 다시 붙였는데 대체 어떻게 기어 나온 거지?”

그러게요. 왜 기껏 그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더니 마주친 게 네놈일까요? 

차마 입 밖에 내뱉지 못하고 이예주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피부를 뚫을 듯한 살기로 보아 곧 ‘문’이 다시 열릴 것 같다고.

“강한 능력을 가진 인간 중에 너같이 어린 인간이 있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

“뭐, 상관없다. 운 좋게 살아남았을지라도 너희 인간들은 곧 박멸될 버러지 같은 것들이니.”

남자의 폭언과도 같은 주절거림을 들으며 이예주는 며칠 전 인터넷에서 본 유행어를 떠올렸다. 

어쩐지 자꾸 눈에 남는다 했더니. 

그 유행어는 그녀의 운명을 예견한 것이다. 문이 두 개나 있었음에도 이 빨간 미친놈이 있는 문을 골랐으니.

남자의 눈만큼 빨간 입술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기는 다리족이어도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생존을 향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죽어라.”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하. 하…….”

이예주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그런 그녀를 갈색 머리 소년이 정신 나간 인간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둥그렇게 홉뜬 황금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익숙함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빨간색 눈동자를 가진 미친놈을 살피며 ‘문’이 나타날 타이밍을 계산해 보았다. 

이예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때가 아닌 듯 환하게 빛나는 네모가 보이지 않았다. 

능력아, 넌 저 소름 돋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 거니? 다른 땐 기가 막히게 나타나더니, 나한테 대체 왜 이래! 

그때 ‘쿠구구궁’ 하고 구름이 격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늘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에게 고정돼 있는 남자의 형형한 눈에서 시선을 뗀 후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왠지 모르게 다리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감에 몸이 떨렸다. 

방금 전만 해도 쨍쨍하던 하늘이 저 남자와 만난 후부터 달라졌다. 

급격히 구름이 모여들었다. 

좋지 않아. 

이런 현상은 매우 좋지 않았다. 

빠르게 남자와 하늘을 올려다보기를 반복하던 이예주는 문득 두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외국에선 낯선 사람과의 첫 만남을 가질 때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음을 피력하기 위해 멀리 서서 서로를 향해 두 손을 번쩍 쳐들곤 한다는 속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자신이 양인들의 땅에 있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그녀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양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저, 저기요! 잠, 잠시만요!”

“…….”

“저기요! 저 그냥 진짜, 진짜 조용히 갈게요. 이, 일단 진정하시고…….”

하지만 자신을 향한 남자의 안광은 혐오감 그 자체에서 한 점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쿠룽, 쿠룽 쿠궁. 

그사이 그녀의 머리 위는 완전히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인 후였다. 

이예주는 휴지 조각처럼 얼굴을 처참히 일그러뜨리며 금방이고 튀어나올 듯한 울음과도 같은 신음 소리를 참았다. 

어흑. 엄마, 저 미친놈 왜 저래.

“저기요. 제가 진짜 이리로 오려고 해서 온 게 아니거든요?”

“…….”

“저도 어떡하다 보니까 살려고 그런 거지 진짜 그쪽 엿 먹이려고…… 아니, 아니! 아, 아무튼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이예주는 대답 없는 남자를 향해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애걸했다. 

비굴하고 더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능력’ 믿고 패기 있게 살아온 그녀였으나, 땅을 지 맘대로 마구 움직이고 눈동자 색도 휙휙 바꾸는 남자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신중하게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꼴을 말없이 보고 있던 갈색 머리 소년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님, 저 인간 여자가 도망치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여?”

입 닥쳐!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갈색 머리를 향해 험악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고 해서 들고 있던 한쪽 팔을 재빨리 내려 제 입 주위를 매만졌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애써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요. 일단 고, 고정하시고요.”

“…….”

“저는 도망가려는 게 아니라, 진짜 그냥 조용히 사라질게요. 알았죠?”

남자는 대답 없이 무표정했다. 

이예주는 그만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쿠룽, 쿠루루룽. 

그 순간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끊임없이 꾸물대던 천둥소리가 뚝 멈췄다. 

훤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주위가 어두컴컴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제 머리 위를 쳐다보다가 결심을 굳혔다. 

에라, 모르겠다. 

“어? 주인님! 인간 여자 도망가요!”

이예주는 냅다 뒤돌아 달렸다. 

뒤쪽에서 갈색 머리 소년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를 부득부득 갈지언정, 멈추지 않았다. 

번쩍! 콰쾅! 

카메라 플래시처럼 섬광이 번쩍 일더니 뒤이어 굉음이 들려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박질치겠노라는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목이 저절로 뒤로 돌아갔다.

방금 전 자신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항복 표시를 하며 서 있던 땅이 새까맣게 그을린 채 연기를 솔솔 피워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예주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대박.”

그녀는 감탄했다. 

그러나 연달아 ‘번쩍, 쾅! 번쩍! 콰쾅!’ 하며 자신의 뒤를 따라 내리치는 번개 때문에 그녀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진짜 번개였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무에 일자로 내리꽂히는, CG로만 보던 번개. 

맞으면 초능력자가 된다는 그 번개! 

저걸 맞으면 뼈도 못 추리고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린 그녀는 두려움 때문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미친 듯이 나무 사이사이를 넘나들며 달렸다.

“……헉, 헙.” 

이예주는 간신히 남자의 시야에서 벗어나 풀숲으로 몸을 날릴 수 있었다.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 때문에 그녀는 두 손을 들어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신음 소리가 나오지 않았어도 입을 틀어막길 잘했다. 이빨이 저도 모르게 딱딱딱딱 부딪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박. 땅도 가르는 것도 모자라 번개를 내리치는 미친놈이라니. 

진짜 이 연고지도 없는 숲에서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고 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르르 쾅쾅 하고 내리치는 벼락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물론 이예주는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 그딴 것을 가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이가 없다 못해 어이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분을 느낄 뿐이었다. 

“어? 냄새는 아직 있는데. 어디 갔을까여?”

근처에서 들려오는 천진난만한 소년의 목소리에 이예주가 속으로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문! 문! 이 개 같은 문이 왜! 왜 나타나질 않아!’

“근처에 있군.”

풀숲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것 같은 비명을 눌러 참으며 살금살금 움직였다. 

나무, 나무! 나무는 비전도체(菲傳導締)라고들 하지 않는가. 

나무에 딱 붙어서 이동하다 보면 저 환장할 번개도 별수 없을 거야. 

이예주는 무조건 전방에 보이는 나무들 중 가장 둘레가 큰 나무를 향해 낮은 포복 자세로 기어갔다. 

온몸이 후들거려 금방이고 땅바닥에 널브러지고 싶었지만 재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엄청난 생존 욕구가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그만 기어 나와라. 그러면 내 자비를 베풀어 한 번에 끝내 줄 테니.”

저건 악마다. 악마가 헛소리를 지껄인다. 

이예주는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거친 콧김도 최대한 참으며 계속해서 나무를 향해 전진했다. 

얼마 안 가 간신히 나무 밑동에 도착한 그녀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추스르며 숨을 골랐다. 

그러곤 다음 나무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며 이 생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스스로에게 거듭 불어넣었다. 

그것마저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이건 꿈이야, 하하하.’ 외치며 스스로 남자를 향해 두 팔 벌리고 달려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은, 아니 똥색 머리는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주인님! 인간 여자 여기 있어여!”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이예주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어느 틈에 올라간 건지 굵직한 가지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황금안이 그녀를 약 올리듯 목청껏 소리 지르고 있었다.

“조, 조용, 이 똥 덩어리……!”

번쩍! 우르르 쾅! 

번쩍이는 시야가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바로 눈앞에 있던 나무 위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멀쩡하던 나무가 순식간에 새까맣게 타오르더니 커다란 기둥 중간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으앙! 황조롱이 죽어여!”

“아아악!”

그 광경을 보고 혼비백산한 이예주는 괴성을 지르며 무작정 달렸다. 

그렇기에 자신이 ‘똥 덩어리’라 칭한 갈색 머리 소년이 공중에서 ‘펑!’ 하고 새로 변하는 진귀한 장면을 보지 못했다. 

쾅! 콱! 쾅! 

그녀가 지나가는 주변의 나무들이 모두 간발의 차이로 벼락에 맞았다. 

마치 나무 근처로만 이동하려던 그녀의 생각을 꿰뚫고 있는 듯 말이다. 

우르릉 쾅! 

옆도 모자라 도달하기도 전인 바로 앞의 나무가 벼락을 맞고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이예주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아악! 이 미친놈아! 그만해!”

파편이 따끔하게 볼을 쓸고 지나가자 그녀는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계속해서 도망치고 있지만 체력은 벌써 바닥난 지 한참이었다. 

그녀의 허옇게 뜬 얼굴은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초췌하고 경악에 가득 차 있었다. 

제발, 살려 줘……! 

“주인님! 저쪽이여!”

촉새 같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연달아 ‘쾅!’ 하고 등 뒤에 번개가 내리꽂혔다. 

그때 거짓말처럼 그녀의 눈앞에 환하게 빛나는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문, 문이구나! 문아! 

이예주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환히 빛나는 문을 향해 달렸다. 

곧 익숙한 빛이 그녀를 감쌌다. 

다행이다. 날벼락 맞고 뒈지기 전에 문이 나타나서……. 

이예주는 문이 내뿜는 빛에 완전히 잠기기 전에 자신을 바라보며 동그랗게 눈을 굴리고 있는 황금 눈동자를 발견했다. 

“저기여! 저기!”

황조롱이.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그 말하는 새가 침을 튀기며 빨간 눈깔에게 자신의 위치를 일러바치고 있었다.

이예주는 점차 아득해지는 시야를 느끼며 미친 남자보다도 말하는 새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내뱉었다. 

악에 바친 그녀의 눈이 황조롱이를 향해 말했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너만은. 너 참새 새끼, 너만은 죽이겠다.’라고.

쾅!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 땅 위로 번쩍하고 날벼락이 내리꽂혔다.

“어, 어? 사, 사라졌어여! 어?”

인간 여자가 있었다면 새까맣게 탄 시체가 되어 뒹굴었을 자리엔 애꿎은 풀만 잔뜩 타 있었다. 

황조롱이가 황금색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그 주위를 맴돌았다. 

정말 놀라운 인간이었다. 

주인의 분노를 피해 무려 두 번.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이나 도망을 친 것이다. 

아무리 강한 능력을 가진 ‘다리족’이라지만 이렇게 자취도 안남기고 사라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터벅터벅,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내 인간 여자가 사라진 자리 위로 시뻘건 눈을 한 남자가 다가왔다. 

바싹 탄 무성한 풀들이 남자의 발아래 짓이겨져 그대로 바스러졌다. 

“그때와 같군.”

남자가 무심하게 제 발 아래 깔린 잿더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와 같았다. 

인간 여자의 기척이 순식간에 뚝 끊겼다. 그것도 눈앞에서 말이다. 

황조롱이는 번쩍 빛나는 번개 때문에 보지 못했겠지만 남자는 똑똑히 보았다. 

인간 계집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사라지던 장면을. 

그와 함께 기척도 단숨에 사라졌다.

지금껏 수많은 인간들을 죽여 온 그였으나 그 계집만큼 단번에 기척을 감추고 도망가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에? 그때여? 사흘 전이여?”

황조롱이가 어느새 ‘펑!’ 하고 새에서 갈색 머리 소년으로 변한 후 인간 여자를 처음 만난 날에 대해서 물었다. 

“기척이 사라졌다.”

“기척이여?”

“그래. 근방에는 없다.”

“헉!”

근방에 없다면 그 짧은 새에 엄청난 거리를 도망갔다는 소리다. 

겉보기에는 안 그렇게 생겼는데 실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던가.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제 주인에게 고자질하던 자신이 생각나 소년의 황금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느, 능력이 엄청난 거예여?”

“그럴 수도 있겠지.”

겁에 질린 소년과는 다르게 주인은 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심하게 짝이 없는 투로 대꾸했다. 

주인의 동조만으로도 소년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 그럼 다음번에 만나서 보복하면 어떡해여? 주인님 없으실 때나 저 혼자 심부름할 때나…… 히잉, 그 인간 여자는 성격도 더, 더러웠는데…….”

“다음번에 만날 때는.”

완벽한 대칭의 턱을 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남자가 손을 떼고 빽빽한 나무가 가득 차 있는 숲 너머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남자의 시뻘건 안광이 벼락을 내리칠 때만큼 번쩍 빛났다.

“죽이지 않고 생포한다.”

재밌어 죽겠다는 듯 어느덧 남자의 붉은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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