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허어어…….”
잔뜩 두려움에 물든 그녀가 괴상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바스락바스락, 한 번 들려도 환장할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것도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며.
“엄마야아악—!”
이예주는 그때까지 왼쪽 손에 채울 생각도 못하고 들고 있던 손목시계를 그대로 집어 던지며 냅다 달렸다.
실제 맹수의 앞에서는 그런 행동이 더 위험하다는 기본 상식 따윈 당연히 티끌만큼도 몰랐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겠지만.
그녀는 무조건 소리가 난 방향의 반대쪽을 향해 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풀밭에 툭 떨어진 손목시계가 빛을 반사하며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바스락, 바스락.
풀숲이 흔들리더니 그녀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로 새까만 까마귀 한 마리가 총총 기어 나왔다.
빛나는 손목시계가 마음에 든 건지 잠시 그 주위를 돌던 까마귀가 시계에 가까이 다가가 톡톡, 부리로 유리판을 두드렸다.
몇 번 그 행동을 반복하던 까마귀가 이내 세게 손목시계를 쪼기 시작했다.
파삭, 힘을 이기지 못한 얇은 유리에 금세 금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더 거세게 내리 쪼던 까마귀는 손목시계가 형체를 잃고 더 이상 빛을 반사하지 않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번쩍하고 까마귀의 빨간 눈이 빛났다.
“까악—”
까마귀가 울었다.
그리고 그 까마귀 뒤편의 어둠 속에서 수백 개의 빨간 눈이 덩달아 번쩍하고 빛이 났다.
* * *
이예주는 그로부터 한참을 더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제대로 호흡하지 못할 지경이 돼서야 뜀박질을 멈추고 경보하듯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가끔 벌레 우는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은 온통 고요했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건지 이제 하늘도 숲도 완전한 어둠에 잠긴 상태였다.
“헉, 허억! 망할! 헉…….”
타는 듯한 목을 부여잡고 저주받은 체력을 욕하면서도 그녀는 끝내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멈추면 어디선가 늑대 한 마리가 뛰어나와 자신의 목을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는 과대망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나무 사이를 빠르게 걷던 이예주는 얼마 안 가 걸음을 천천히 늦췄다.
목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따끔거렸다. 그녀는 최대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기 위해 노력했다.
‘왜. 어째서. 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는 거지?’
물론 자신이 남들과 좀 다른, 아니 생각보다 많이 다른.
아니, 정정한다.
진짜 욕 나올 정도로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말이 안 됐다.
도시 한복판을 용암이 덮친 것까지는 진짜 어찌어찌해서 이해하겠다.
말로만 듣던 백두산이 분화한 것일지 모르니까.
‘그런데 말하는 새에다가 사람 머리를 들고 다니며 땅을 움직이는 남자라니?!’
이제 그 남자의 존재가 꿈이 아님을 확실히 인식한 이예주는 자신을 향한 그 진득한 살기를 떠올리자마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 빨간 눈의 미친놈은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것도 대강 상황을 종합해 보아선 자신이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예주는 으스스 떨리는 몸을 두 손으로 끌어안으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끊임없이 발을 놀리던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너덜너덜해진 후드 주머니와 청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휴대폰, 립밤, 집 열쇠…….”
알량한 몸에서 나온 것이라곤 방금 전 읊은 세 개의 물건이 전부였다.
원래는 네 개였지만 겁에 질려 도망치는 와중 손목시계는 잃어버렸다.
그 미친놈 때문에 어딘가 내팽개쳐져 있을 가방도 챙기지 못하고 미래로 와 버렸다.
암담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예주는 한 줄기 희망을 포기할 수 없어 꺼져 있던 휴대폰을 서둘러 켰다.
비록 외국이면 어떻고 많은 시간을 지나쳐 왔으면 또 어떠랴.
전화만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구조 요청을 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리라.
그렇게 그녀는 굳게 믿었다.
그래. 자신이 잠시 미친 거라고. 말하는 새는 사실 앵무새고, 저를 죽이려 들던 그 남자는 그냥 숲에서 살고 있는 정신병자라고.
“하…….”
그러나 이예주는 곧 진실로 울고 싶은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휴대폰은 정상적으로 켜졌지만 액정 화면에는 커다랗게 ‘통신 불가’라는 메시지만이 그녀를 우롱하듯 깜박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지 마, 제발.”
이예주는 간절한 손길로 그로부터 두어 번 더 휴대폰을 껐다 켠 후 비로소 그녀가 있는 지역이 ‘통신 불가’ 지역이라는 것을 납득했다.
그나마 그녀가 가지고 있는 세 개의 물건 중 가장 쓸모 있는 물건이었으나 그마저도 배터리가 간당간당해서 얼른 전원을 꺼야 했다.
이것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최악의 상황에서 써야 할 마지막 보루였다.
휴대폰마저 무용지물이 된다면 자신의 상황은 정말로 답도 없게 되리라.
물론 지금이라고 딱히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예주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관찰했다.
해는 정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졌고 그 자리를 달이 대신 차지했다.
숲속은 어둡고 음침했지만 다행히 달빛이 워낙 환해서 그런지 앞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울창한 나무들 끝에 둥근 달이 휘영청 걸려 있었다.
“뭔 놈의 숲에 별이 이렇게 없어?”
뭔들 마음에 들겠냐마는,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숲치고는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여러 번 자리에서 뱅뱅 돌며 하늘을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던 그녀는 간신히 북극성으로 보이는 빛나는 별 하나를 찾았다.
하긴 별이 많았다면 그것 또한 큰일이었다.
별이라고는 북극성, 북두칠성 빼곤 쥐뿔도 모르는 그녀가 수많은 별들을 헤아리며 방향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북극성…… 이쪽이 북쪽…….”
요리조리 별을 올려다보던 이예주는 방향을 가늠한 후 무작정 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북극성이 맞다면 다행이었지만 만약 아니라 해도 별수 없었다.
그나마 발견한 별 몇 개중 유일하게 밝은 별을 북극성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닥치고 그냥 걸었다.
미친놈이었더라도 일단 사람을 만났으니 이 숲 어딘가 혹은 숲의 끝에 도달하면 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 * *
이예주는 밤이 깊어져 주위가 선득해질 때까지 숲속을 방황했다.
분명 별을 바라보며 똑바로 걸어온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주위를 계속해서 뱅뱅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꾸만 어디선가 그녀를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하염없이 몸을 움츠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눈앞은 간신히 구분할 수 있었지만, 숲은 온통 까마득한 어둠뿐이었다.
안 그래도 아까 전 괜히 바람-바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소리에 꼴불견처럼 달리던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녀였다.
아무도 없는 숲이어서 다행이었지 강의실이나 대학로 근처였다면 쪽팔려서 바로 자퇴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물론 도시에서 그녀가 그런 미친 행동을 할 까닭은 없겠지만.
실없는 생각을 늘어놓으며 그녀는 자꾸만 몰려오는 두려움을 애써 떨쳐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얼굴에 닿는 시선이 갈수록 집요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푸드더덕!
갑자기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푸드덕거리며 이예주를 스치고 날라 갔다.
“꺄악!”
이예주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우습다는 듯 숲 저편에서 더 커다란 소리가 되돌아왔다.
깍, 까악—!
어둠 속에서 작은 빨간 점 두 개가 보였다. 익숙한 새소리였다.
후우, 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이예주는 이번에는 분노로 숨을 몰아쉬었다.
“미친놈의 까마귀. 훠이― 저리 가!”
그녀가 까마귀에게 겁을 주며 소리쳤다.
그러나 어둠 속의 빨간 점 두 개는 사라질 줄 몰랐다.
제자리에서 꿋꿋이 빛을 내다가 대답하듯 ‘까악―’ 하고 한 번 더 크게 울 뿐이었다.
이예주는 잠시 까마귀를 쫓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다 금방 포기했다.
그녀는 더 이상 힘 빼지 말고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말 못하는 짐승들한테 말해 봤자 자신의 입만 아플 뿐이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푸드덕하고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새 때문에 또다시 제자리에 멈춰야 했다.
“까악!”
“아씨! 너 멍청한 거 아니까 가라고, 좀!”
“깍, 까악—!”
반대편에서 다시 반대편으로 날아온 듯 그녀의 앞쪽에 빨간 점 두 개가 보였다.
짜증이 뻗친 이예주는 주위에 던질 만한 것들을 찾다가 결국 제 성질에 못 이겨 허공에다 발길질을 했다.
“아오! 진짜 새대가리 지긋지긋하다! 가라, 좋은 말 할 때!”
“이인까아!”
까악 소리밖에 내뱉을 줄 모르는 것 같던 까마귀가 이번에는 조금 다른 대답을 돌려줬다.
이예주는 짜증에 그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너도 그 참새처럼 말하는 게 아니면 조용히 해! 짜증 나니까.”
푸드드덕! 하지만 그녀는 얼마 못 가 걸음을 또 멈춰야 했다.
“아이씨! 이게 미쳤……!”
“인가아! 까아악—!”
짜증이 솟구치자 참지 않고 내지르려던 이예주는 조금 전보다 선명히 들려오는 단어에 하던 말을 멈추었다.
“뭐, 뭐야.”
“…….”
“너도 말하고 막 그런 거…… 아니지?”
이번에는 그녀의 옆쪽에 있는 나무 위에서 빨간 두 눈이 보였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까마귀가 꽤 가까이 와 있었다.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새의 형체가 언뜻 보였다.
까마귀치곤 잘 먹은 까마귀인 듯 꽤 덩치가 큰 놈이었다.
레이저 빛 같은 빨간 점 두 개가 오롯이 제게로 향해 있었다.
왠지 모를 섬뜩함에 이예주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까마귀가 어떻게 말을 해. 그, 그럴 리가…….”
“인가안! 까악!”
“헉.”
그러나 곧바로 정확하게 들려온 발음에 이예주는 딱딱하게 굳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저 까마귀 새끼가 정말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옆으로 한 발자국 이동했다.
그러자 푸드덕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있던 곳에서 빨간 불이 꺼졌다.
그리고 그녀가 걸음을 옮긴 근처에서 다시 빨간 빛이 보였다.
“눈까아! 까악!”
이번엔 심지어 대답까지 바뀌었다.
무슨 단어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자신을 쫓아오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예주는 미칠 것 같은 심정을 느끼며 주위를 휙휙 돌아보다가 단단해 보이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것마저도 빌어먹을 까마귀 놈의 눈치를 보며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손에 쥔 뭉툭한 나뭇가지가 꽤 무거웠다. 그러나 까마귀 한 마리에게 타격을 주기에는 더없이 충분했다.
“맞기 싫으면 꺼져라. 응?”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이미 말하는 새를 만난 직후였기에 더 놀랄 것도 없었다.
무기가 생기자 마음이 놓였는지 이예주는 까마귀가 앉은 쪽으로 휙휙 나뭇가지를 흔들며 허세를 부렸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녀는 자신의 허세가 먹혔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 들었다.
푸드드덕!
하지만 여지없이 귓가를 스쳐 가는 날갯짓에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게 진짜! 해 보자 이거지?!”
“인가아악! 까아악!”
“그래! 내가 인간이다, 이 새대가리야!”
“눈까아악! 까악!”
“덤벼. 기분도 꿀꿀한데 신명 나게 패 줄 테니까.”
이예주는 누가 들으면 동물 학대라고 손가락질받을 소리를 잘도 뇌까리며 이를 뿌득 뿌득 갈았다.
이래 봬도 왕년에 좀 놀았던 몸이라 이거야. 물론 야구 연습장 한정이지만.
그녀는 무거운 나뭇가지를 어깨에 걸치고선 타격 자세를 취했다.
저 빌어먹을 까마귀가 자신이 움직이는 방향을 향해 날아드니 잘만 치면 안타는 물론이고 홈런도 가능할 것이다.
빨간 쌍 레이저를 날카롭게 주시하며 이예주는 조심조심 걸음을 떼었다.
마치 한 편의 액션 영화를 찍는 듯한 기분으로 날짐승과 기 싸움을 하던 그녀가 이내 후다닥 옆으로 완벽하게 몸을 옮겼다.
푸드덕! 기다렸다는 듯 푸덕거리는 날개 소리가 들리자 이예주는 “으으으!” 하고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무거운 나뭇가지를 힘껏 허공으로 휘둘렀다.
“까아악!”
그와 동시에 ‘뻑!’ 하고 엄청난 타격음이 들렸다.
그녀가 무작정 휘두른 나뭇가지에 정통으로 맞은 건지 근처에서 육중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아야…….”
지이잉―
반작용으로 팔이 저려 왔다.
이예주는 아픔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팔을 털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기절한 건지 죽은 건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까악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로 보아 시원하게 후려갈긴 것만은 확실했다.
“흐흐, 흐흣.”
그녀는 통쾌함에 정체 모를 웃음소리를 내며 육중한 물체가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있는 힘껏 휘둘렀음에도 까마귀는 그녀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뒹굴고 있었다.
홈런은 둘째치고 안타도 아닌 파울이었다.
더 세게 휘두르지 못한 게 후회로 남아 입술을 삐죽이던 그녀는 까마귀 시체에 마음을 달리 먹었다.
어둠 때문에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지만 바닥에 처박혀 있는 까마귀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멀리서 볼 때 까마귀가 아닌 토끼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이다.
도심도 아니고 이 숲속에서 대체 뭘 처먹었길래 새 주제에 이렇게 비대한 거람.
좀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예주는 금방 ‘에비’ 하며 까마귀 시체에서 눈을 떼었다.
차라리 어둠이 자신의 시야를 차단해 줘서 다행이었다.
그 누구라도 제가 나뭇가지로 해치운 동물이 피를 질질 흘리는 끔찍한 꼴을 보고 싶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게 덤비기는. 따라오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 없잖아.”
일말의 양심에 걸려 볼멘소리를 내뱉던 이예주는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이내 두 손을 마주 잡고 잠시 묵념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를 다치게 만든 것이 절대로 잘한 일은 아니라는 점은 알고 있다.
비록 자신에게는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였지만.
원래 있던 세상에서라면 꿈도 꿔 보지 못할 일에 기분이 얼떨떨했다.
나름 간절히 까마귀의 명복 혹은 회복을 빌어 준 그녀는 숙였던 허리를 쭉 폈다.
그런데 분명 까마귀가 졸도한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 번 어두운 형체를 내려다보며 이예주는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다. 자신을 쫓던 괴상한 까마귀가 여기 자신의 앞에 누워 있는데.
대체 피부에 느껴지는 이 시선은 뭘까.
뭐지?
하지만 그녀는 허무할 정도로 금방 그 찜찜함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려던 그녀의 눈앞에 수백 개의 레이저가 번뜩이고 있었으니.
“인간! 까악!”
“눈깔! 까악!”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숲이 떠나가라 외쳤다.
그것들이 동시에 말하자 두루뭉술했던 단어가 명확한 발음으로 들려왔다.
“인! 까악!”
“간! 까아악!”
“눈! 까악!”
“깔! 까악, 까악!”
인간 눈깔.
빌어먹을 까마귀 새끼가 죽기 전까지 애타게 외친 말은 인간 눈깔이었다.
문득 시야가 환해지면서 빨간색으로만 보이던 까마귀들의 모습이 전보다 더 자세히 보이게 되었다.
왜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을까.
징그러운 까마귀 떼들이 나뭇가지마다 빽빽하게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명료한 시선들이었다.
이예주는 멍하니 빛이 나는 쪽으로 까마귀들이 애타게 원하는 ‘눈깔’ 을 굴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문’이 두 개나 열려 있었다.
“……하느님.”
이예주가 평소 믿지도 않은 신을 찾았다.
하느님, 당신이 정말 지구를 만든 장본인이라면.
“여기 정말 엿 같아요.”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