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5)화 (5/319)

떨어지는 도중 가속도가 붙어 이예주는 엄청난 속도로 붉은 점의 정체와 가까워졌다.

밝았던 그녀의 표정 또한 단계적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미친.”

코를 찌르듯 톡 쏘는 냄새의 정체가 유황임을 깨닫고 나서야 이예주는 붉은 점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용암 못 보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구덩이의 끝은 용암이었다. 

새빨간 불덩이들이 살아 있는 듯 꿀렁꿀렁 움직이다가도 허공을 향해 ‘퓩!’ 하고 침을 뱉는 것이 보였다. 

분명 서울 한복판을 뒤덮는 거대한 용암덩어리를 피해서 암경을 건너온 것이 방금 전이었다. 

그런데 왜 꿈에서조차 미친놈의 용암에 시달려야 하는 건지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 뜨거워.”

이예주가 훅 하고 안면을 강타하는 뜨거움에 인상을 찌푸렸다. 

또 한 번 느끼는 거지만 꿈치고 참 정교했다. 그 생각은 용암에 빠른 속도로 가까워질수록 더욱 굳어졌다.

“아, 너무 뜨거운데?”

“아! 아 뜨거워!”

“아악! 겁나 뜨겁잖아!”

견딜 만하다는 듯 여유롭던 그녀의 표정이 시시각각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빨리 꿈에서 깨고 싶었다. 생각보다 엄청난 뜨거움에 그녀는 몸을 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인의 마음을 배반한 몸뚱이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용암 한가운데를 향해 떨어지는 와중이었다. 

“콜록, 콜록!” 

더운 공기 때문에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목과 폐 전체가 홧홧했다. 

‘이거 뭐야? 이거 너무 실제 같잖아!’

온몸을 감싸 안는 열기에 이예주가 입을 벙긋댔다. 

멍하니 붉은 바다를 바라보던 그녀가 공포에 질려 몸을 덜덜 떨 때쯤이었다. 

꿀렁거리는 용암 바로 위로 하얗게 빛나는 ‘문’이 생긴 것은. 

“……문?”

제가 보고도 너무나도 현실성이 없어 그녀는 어렵사리 두 손을 들어 땀에 흠뻑 젖은 눈가를 세게 비볐다. 

그리고 다시 크게 눈을 뜨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비볐는데도 ‘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껏 꿈속에 미래로 가는 ‘문’이 나타난 적 있던가? 

“이거 꿈…… 아니야?”

이예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꿈에 ‘문’이 나타났던 적은 단 한 번도, 그 비슷한 꿈을 꾼 적도 없었다. 

그럼, 이게 꿈이 아니라고? 

치이익― 

그때, 제멋대로 펄럭이던 머리카락 한 뭉치 끝이 계란 프라이 굽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나는 것은 머리카락뿐이 아니었다. 입고 있는 후드의 소매 자락 끝에도 빠알간 불씨가 매달렸다. 

이 천불 같은 열기가 꿈이, 꿈이 아니다. 

방광과 염통이 다시금 쫄깃쫄깃해지기 시작했다. 문득 아까 풀어 준 새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 미, 미안해여! 그, 그래도 많이 아프진 않을 거예여! 금방 녹을 테니까!

“시발.”

꿈이 아니라고? 꿈이, 꿈…… 뜨거워, 뜨거워!

“으아아아악—!”

이예주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 와서 멈춰 보려고 몸에 힘을 잔뜩 줬지만 가속도가 붙을 대로 붙은 그녀의 몸은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용암과 가까워졌다.

“아아아아악—! 살려 줘어억—!”

용암 바로 위에 위치하던 ‘문’이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덥석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비명을 넘어 초고음파로 변질되던 이예주의 목소리도 뚝 끊겼다.

*       *       *

그 시각, 지상 위에서는 퍼덕퍼덕 힘겹게 날갯짓을 하는 작은 황조롱이 한 마리가 갈라진 땅 사이로 푸다닥 솟아올랐다. 

“헉, 헉! 아구구, 황조롱이 죽네. 아구구, 헉헉…….”

간신히 풀숲 위에 털퍼덕 주저앉은 채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황조롱이는 곧 눈앞에 멈춰 선 커다란 신발에 숨 고를 새도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주인님!”

“너답지 않군.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다 잡히다니.”

장신의 남자가 황조롱이 앞에 우뚝 선 채 오만한 권력자의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간을 향해 불타올랐던 피처럼 새빨간 눈은 어느새 사라지고 심연처럼 깊은 검은색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남자의 앞에 서 있던 황조롱이는 ‘펑!’ 하는 작은 폭발음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곧 ‘콜록, 콜록!’ 하는 기침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방금 전까지 풀숲 위에 서 있던 황조롱이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금안을 가진 갈색 머리 소년이 발가벗은 채 마법처럼 나타났다.

남자의 명치에 닿을까 말까 한 작은 갈색머리 소년이 콜록콜록 마른기침을 하며 연기를 손으로 휙휙 휘저었다. 

그러곤 빠른 속도로 주머니에서 옷을 꺼내 주섬주섬 주워 입고는 잔뜩 울상을 지은 채 대답했다.

“죄, 죄송해여, 주인님…… 주인님이 인간 기척이 난다고 하셔서 여기 왔는데 주, 죽은 줄 알고 가까이 갔다가…….”

“인간이 얼마나 영악한지 매번 보고도 모르나. 까딱했으면 위험할 뻔했다.”

“그, 그래도 그 인간 여자 진짜 이상했어여! 갑자기 뿅 나타났어여! 바람도 안 불었고 나무들도 안 움직였고 소리도 안 들렸는데! 진짜 ‘뿅’이여!”

소년이 열심히 방금 전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인간 여자를 떠올리며 작은 입을 재잘거리자 남자의 미간이 슬쩍 굳었다. 

“……다리족인가. 웬만큼 능력이 강한 놈들은 다 죽인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남아 있나 보군. 쥐새끼 같은 것들. 

뒷말을 살벌하게 덧붙이며 남자가 이를 갈았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의 가장자리에 다시금 불그죽죽한 핏발이 섰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이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해여, 주인님…… 저, 저 때문에…….”

주인의 분노를 부축인 것이 꼭 자신의 탓인 양 생각되어 황금안(黃金眼)에 망울망울 죄책감이 들어찼다. 

잔뜩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인 소년의 머리를 커다란 손이 턱 덮었다.

“네 잘못 아니니 되었다. 저것들 뒤처리하고 따라오도록. 곧 냄새 맡은 까마귀들이 몰려올 테니.”

“까마귀들이여?”

소년이 반문하며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남자의 눈은 언제 불그죽죽했었냐는 듯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무뚝뚝하고 차가웠지만 자신을 향해 그 어떤 감정도 담지 않고 있음을 소년은 잘 알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남자의 시뻘건 눈빛에 담긴 살기를 그대로 마주 본 그 인간 여자가 조금 불쌍해졌다. 

그러나 소년은 애써 고개를 털며 자신의 주인이 칭한 ‘저것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의 머리가 갈라진 땅 주위에 뽑아 놓은 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 끔찍한 장면에도 불구하고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인간 여자와는 다르게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는 이가 없었다. 

“까마귀들 때문에 친히 뽑아 오신 거예여?”

“그래. 인간의 눈깔만큼 맛있는 게 없다더군.”

그것들을 몸뚱이와 분리해 냈던 수고가 떠오른 건지 남자의 얼굴이 불쾌하게 굳어졌다. 

소년은 미처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뒤처리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핏자국을 지워야 까마귀 이외의 다른 육식동물들이 접근하지 않는다. 

그러려면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냇물까지 힘껏 달려가 부지런히 물을 퍼다 부어야 했다. 

그렇다고 피 냄새가 완전히 가시진 않겠지만 그것까진 까마귀들이 감내해야 할 사항이었다. 

자신이라면 주인과 계약을 할 때 둥지까지 인간들의 머리를 가지고 올 것을 조건으로 내세울 텐데. 

멍청한 까마귀들이 그것까진 생각지 못한 듯싶다.

“사막을 건너야 하니 서둘러라.”

“에? 사, 사막이여?”

“그래. 다리족 인간 몇 명이 사막을 건너려다 죽은 것을 까마귀들이 목격했더군. 서쪽으로 간다.”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의 머리에서 손을 뗀 남자는 잠시 인간 여자가 빠진 땅 구덩이를 흘겨보았다.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가 무심하게 반짝이자 ‘쿠구구궁―’ 하고 지진이 일듯 땅이 진동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단 한 번도 갈라진 적 없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구덩이가 사라졌다. 아니, 갈라진 땅이 다시 붙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인간 여자가 빠진 구덩이의 입구가 완전히 봉쇄됐다. 

그 인간 여자가 자리에 있었으면 기겁을 하며 까무러쳤을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갈라진 땅이 원상태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던 남자는 잠시 멈칫하고 뒤로 돌아 다시 한 번 땅을 바라보았다. 

잠자코 남자가 하는 모양새를 바라보던 소년이 금안을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여, 주인님?”

“기척이 사라졌다.”

말을 내뱉고 나니 더욱 확신에 찬 듯 남자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남자의 날카로운 눈이 인간 여자가 서 있던 땅에 내리꽂혔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생명의 기척이 뚝 끊겼다. 

아무리 용암에 불타 소멸된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목숨은 생각보다 질겼다. 

때문에 지옥 불에 빠지고도 한참 후까지 그 기척이 불쾌하게 바스락거리곤 했다. 

강한 능력을 가진 인간일수록 용암 속에서 더 오랫동안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 인간 여자의 기척은 그가 눈치챌 새도 없이 어느 순간에 뚝 끊겼다. 

마치 용암에 닿기도 전에 녹아 버린 것처럼. 

가느다란 눈으로 집요하게 풀밖에 없는 땅을 훑던 남자는 이윽고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고 다시 몸을 돌렸다.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깟 인간 여자 하나 따위가 아니었다. 

기척이 빨리 사라지든 더디게 사라지든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는 곧 소멸될 버러지 중 하나에 불과했다.

“소멸됐을까여?”

“그렇겠지.”

다시 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뒤를 허겁지겁 따라붙으며 갈색 머리 소년이 제 주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소년은 곧바로 들려오는 단정적인 대답에 울상을 지었다. 

“마, 많이 아팠을까여?”

“…….”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침울한 얼굴로 인간 여자를 슬쩍 떠올렸다. 

자신이 쪼아 댈 때는 아픔에 질색하더니 막상 소멸되기 직전에는 쉽게 자신을 놓아주던 정말 이상한 인간이었다. 

― 그래. 가라, 가. 너 다음번에도 내 꿈에 나와서 쪼면 진짜 죽는다.

그 말을 내뱉은 인간은 분명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듯이.

꿈이라니. 그 이상한 인간 여자는 혹시 자신이 소멸되는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소년의 주인에게 소멸당한 인간들 중에서도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간일 것이다. 

왠지 모르게 드는 측은함에 소년이 입술을 삐쭉였다.

이미 소멸되었다지만 많이 아프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소년의 생각이 우습기 짝이 없다는 듯 주인에게서 차가운 핀잔이 되돌아왔다.

“죽이지 않으면 인간에게 먹힌다.”

“…….”

“그 더러운 것에게 먹히고 싶은 건가.”

“그, 그래도…….”

남자는 어느새 소년보다 한참을 앞선 상태였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쌀쌀맞은 소리에 소년이 서둘러 남자의 뒤를 쫓았다.

“……그래도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닌 것 같았어여…….”

소년이 작게 인간 여자를 변명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을 들은 건지 아닌 건지 남자는 기다란 다리를 이용해 휘적휘적 걸어갈 뿐이었다.

*       *       *

“어억!”

이예주는 꾹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헉, 헉…….”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정도로 거세게 뛰던 심장 때문인지 입술 사이로 연신 거친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미친 듯이 자신의 얼굴과 팔, 몸뚱이를 더듬었다. 

피부가 녹아들 정도로 뜨거웠던 기운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정신없이 몸뚱이를 더듬거리던 이예주는 자신의 몸이 성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떨어지는 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느덧 지상에 멀쩡히 서 있었다.

멍한 머리로 환하게 빛을 내며 자신을 꿀떡 삼켰던 ‘문’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꿀렁거리는 용암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금방 녹을 거란 새의 말이 떠올랐고 용암에 얼굴부터 처박히기 바로 직전에 ‘문’이 열렸다. 

문. 

그래, 문. 

이예주는 금방이고 ‘끼약!’ 하고 터져 나올 것 같은 비명 소리를 삼키며 휙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딜 봐도 사방이 온통 어둠에 잠긴 숲, 숲, 숲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광활하고 거대한 나무들을 피해 위를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기 바로 직전인 듯 빨간 노을이 하늘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구덩이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분명 해가 쨍쨍한 한낮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문’을 넘어 어느 시간이 지난 미래에 온 것이 확실했다. 

‘문을 넘다.’

그 단락에 생각이 멈추자 이예주는 허겁지겁 왼손에 채워져 있던 시계를 풀었다.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버클이 몇 번이나 손톱 밑을 찌른 후에야 그녀는 간신히 시계를 풀 수 있었다.

이예주는 제 왼쪽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세게 비벼도 보고 손으로 제 머리를 ‘쿵!’ 하고 내려친 후에도 들여다보았다.

“마, 말도 안 돼…….”

하지만 그런 그녀를 약 올리듯 어두운 사위에도 불구하고 불그죽죽한 흉터가 선명하게 제 존재를 증명했다. 

절대로 꿈이 아니라고 흉터의 주인에게 계속해서 부각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손이 덜덜 떨렸다.

“하, 이게 꿈이 아니야?”

이예주는 다시 한 번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미친년아……. 대체 어디로 온 거야?” 

이예주의 얼굴이 점점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머릿속에서 말하는 새와 컬러 렌즈를 낀 것처럼 눈이 시뻘겋게 변하던 남자. 

그리고 후끈하게 꾸물대던 용암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더 이상 구겨질 수 없을 만큼 온 근육을 이용해 얼굴을 일그러뜨린 후, 이예주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대체 어디로 온 거냐고—!”

어디로 온 거냐고! 어디로 온 거냐고! 온 거냐고……. 

그녀가 참지 못하고 내뱉은 비명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나무 사이사이로 울려 퍼졌다. 

푸드드득! 

멀리서 새 떼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나무들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지만 그녀는 그런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충격에 휩싸여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녀는 멀리서 ‘아우우우―’ 하고 늑대 울음소리 비슷한 게 들리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맞아, 여기 숲 한복판이었지. 

말하는 새가 나올지언정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 그림자는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이었다. 

그것을 자각하자 기다렸다는 듯 늑대, 호랑이, 곰 따위의 맹수가 줄지어 생각났다. 

이렇게 거대한 서양풍의 나무들이 한국에 있을 리 없을 테니 자신은 어디 외국에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가끔 티브이를 틀면 나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같은 것을 연달아 떠올리던 그녀의 안색이 점차 하얗게 질려 갔다. 

숲속이라면 포식자가 있기 마련이다. 더더군다나 한국도 아닌 외국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방금 전까지 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숲이 흉흉하게 그녀를 압박하는 것 같았다.

바스락.

“헉!”

그때, 등 뒤에서 작게 들리는 소리에 이예주가 짧게 숨을 들이켜며 휙 몸을 돌렸다. 

그러나 등 뒤에도 여전히 방향을 알 수 없는 숲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영혼이 나간 듯하던 그녀의 두 동공에 어느새 두려움이 물씬 차오르기 시작했다. 

‘숲에서 조난당할 때 대처 방법이 뭐가 있었더라.’

굳어 버린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며 그녀는 제 몸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멀리서 ‘아우우우!’ 하고 늑대 울음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천천히 발소리가 나지 않게 긴장한 몸을 움직이던 그녀는 바스락하고 이번에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다시 휙 몸을 돌렸다. 

숲은 해가 빨리 진다더니, 아직 하늘은 빨간 노을이 그득한데 지상은 어느덧 어두침침해져 있었다. 

나무 너머가 잘 보이지 않자 이예주는 단숨에 겁에 질렸다. 

‘지, 진짜 어디 풀숲에 늑대라도 있는 거 아니야?’

어딘지도 모를 자신의 미래가 맹수에게 잡아 먹혀 죽는 거라니. 이럴 수는 없다. 

어둠에 잠긴 숲속을 바라보며 온몸을 달달달 떨어 댈 즈음이었다.

바스락! 

그녀가 보는 앞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더 이상 잘못 들은 걸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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