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4)화 (4/319)

북쪽 대륙 동물의 숲? 

그녀는 다시 한 번 제 개꿈에 감탄했다. 

23년 평생 판타지 소설의 ‘판’ 자도 접하지 않은 이예주였다. 

남들이 한 번씩 다 읽어 보았다던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조차 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다른 장르의 소설들을 즐겨 보았던 것도 아니다. 

이예주는 원래 태생 자체가 공부나 글하고는 담을 쌓은 성격이었다. 

때문에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설정된 꿈이 신기하다 못해 기가 찰 지경이었다. 

심신이 급 피로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 동물의 숲. 누가 지었는지 참 개똥같이 지었다.”

이예주의 꿈은 사춘기 중학생처럼 예민했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스쳐 가듯 알게 된 것도 곧잘 꿈속에 나타나곤 했다. 

이번 꿈도 필히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것을 토대로 했음이 분명하렷다.

길을 지나칠 때 가끔 들렸던 서점 혹은 《동물의 왕국》따위의 프로그램을 생각하며 그녀가 혼잣말을 하자 손에 잡힌 새대가리가 다시 시끄러운 목소리로 떽떽거렸다.

“주, 주인님을 모욕했어! 주인님이 우리 신인류를 위해 친히 지어 주신 숲의 이름을! 이, 인간 주제에! 인간…….”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또 ‘인간 주제에’라고 하네? 이걸 그냥 콱, 조용히 안 해?!”

“…….”

푸덕거리며 분을 내뿜던 황금색 눈알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휘둥그레졌다. 

새는 서슬 퍼런 인간 여자의 눈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주, 주인님이 우리를 위해 지어 주신 이름인데…… 주인님이…….”

“주인이고 나발이고 지금부터 내 말이 곧 법이다.”

이예주는 제가 내뱉고도 그 말이 맘에 들었는지 다시 한 번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내 꿈이니까 내 말이 곧 법이지. 

하지만 이 쪼그만 새 놈은 그녀의 말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지 황금색 눈깔을 뒤룩뒤룩 굴리며 다시 한 번 반항을 시도했다.

“대륙은 주인님 거예엽! 인간 주제에 주인님을 자꾸 무시하고 깔보고! 그러니까 주인님이 분노하시는 거예여, 인간 여자!”

“이 새대가리가 또 인간, 인간 거리네. 듣는 인간 기분 나쁘니까 좋은 말 할 때 집어치워라? 앙?”

이예주가 또 눈을 부라리자 조막만 한 부리가 다시 입을 다물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 그럼 인간을 인간이라 부르지 뭐라고 불러여…….”

“누나.”

“예?”

“누나라고 불러.”

제가 생각해도 뻔뻔스러운 대답이었다. 

새 또한 기가 막혔는지 황금색 눈 가득 황당함이 떠올랐다. 

시시각각 변하는 금안이 언뜻 보면 귀엽기도 했다. 

“그, 그치만 주인님은 신인류가 인간보다 위대하다고 말씀하셨는데여.”

“신인류가 뭔데?”

다시 거론되는 ‘신인류’라는 단어에 이예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새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신인류는 주인님과 계약을 맺고 인간처럼 말하고 변신할 수 있는 동물들이에여. 주인님은 신인류가 인간보다 더 현명하고 월등하다고 하셨어여!”

조막만 한 부리에서 힘차게 튀어나온 설명에도 이예주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인반수, 뭐 그런 건가? 

하지만 그녀는 금방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깊게 생각해 봤자였다. 어차피 꿈속인 것을.

“신인류는 주인님께 선택받은 위대한 동물들이에여! 우리는 주인님의 사명을 받들어 주인님을 가까이 모실 수도 있어여! 에헴. 전 그중에서도 주인님의 여행에도 동참한…….”

“됐어.”

“……예, 예?”

이예주는 새의 장황한 말허리를 단칼에 끊었다.

“신인류에 대한 설명은 됐고. 그보다 ‘누나, 죄송해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해 봐.”

“에, 에?”

“내가 너한테 쪼인 데가 아파서 죽어도 누나 소리 듣고 꿈에서 깰 거니까 빨리 누나라고 부르라고!”

“으어어어! 어, 어지러워여! 흐어, 흐어어!”

이예주가 윽박지르며 새를 쥔 손을 탈탈 털어 댔다. 

그러자 새가 또다시 “아구구! 황조롱이 죽어여!” 하고 앓는 듯 비명 질렀다.

“누나라고 불러!”

“으허어어! 놔, 놔주떼여! 놔주떼여! 이제 곧 주인님 오세여!”

“부르라니까? 빨리 누나 죄송하다고 말해!”

“나, 나보다 어린데 어떻게 누나라고 해여!”

“이게 약을 파네? 또 맞고 싶지?”

“으어어어! 놔, 놔주떼여! 주인님 오면 죽어여! 진짜 죽어여!”

“스읍! 빨리 안 불러?”

“주인님 오면 죽는다니까여!”

죽는다니까여! 죽는다니까여! 죽는다니까여……. 

몸집도 작은 게 어찌나 악을 지르는지 고요한 숲속에서 새의 비명 소리가 두 번이나 메아리쳤다. 

그 소리에 숲속에 숨어 있던 새 떼가 푸드덕하고 하늘로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정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이예주가 새를 잡고 흔들던 손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알밤을 준비하려던 때였다. 

흠칫. 손안에 있는 작은 몸통이 눈에 띄게 움찔거리며 경직되었다. 

아직 손도 안 댔구만, 엄살은. 이예주가 비죽 웃으며 황금색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지금껏 쉴 새 없이 구르던 금안이 조금 이상했다. 

그녀의 협박에도 잠시 주춤거릴 뿐 굴하지 않던 황금색 눈동자가 두려움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 

곧이어 진동하는 휴대폰을 쥔 것처럼 손안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나, 나, 난 몰라여…….”

“……응? 뭘?”

“나, 난 죽는다고 말했어여. 나, 난 몰라여. 히잉.”

황조롱이가 울상을 한 채 안쓰러운 꼴로 이예주를 마주 보았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그녀는 그저 어벙하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너 누나라고 부르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

“누굴 바보로 알고…….”

“그 손 놓아라.”

그때였다.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스산히 움직이는 바람을 타고 이예주의 귓가에 꽂힌 것은. 

손안에서 “헉. 주, 주인님.” 하고 새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예주는 제게 명령하는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벅저벅.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속에서 커다란 인영이 걸어 나왔다.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커다란 키였다. 

멍하니 새로 등장하는 꿈속의 인물을 바라보던 그녀는 숨을 멈췄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얼마 전까지 갇혀 있었던 암경을 그대로 담은 것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시커먼 눈동자였다. 

그것은 블랙홀처럼 이예주를 빨아들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다음에 보인 것은 눈동자만큼 새까만 머리칼과 더 없을 만큼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코였다. 

동양인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체구가 컸고 그렇다고 서양인이라고 보기에는 검은 머리칼과 대조되는 피부가 매우 하얬다. 

동서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처럼 생긴 완벽한 외모의 남자였다. 

그는 양손에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서 있는 상태였다. 

아니, 모델 양반. 무거운 짐 꾸러미를 잔뜩 이고 이 험한 산길을 헤매다니. 

역시 이것은 스물 셋의 천연기념물을 안쓰러이 여기신 꿈 신의 계시인……. 

“분명 다 죽였는데도 어디서 자꾸 구린내가 나더라니.”

“…….”

“쥐새끼처럼 여기 숨어 있었구나.”

위에서부터 남자를 샅샅이 훑던 이예주는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짐 꾸러미를 확인하고 다시 헉, 숨을 멈췄다. 

그것은 남자의 빛나는 외모에 숨을 멈췄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새가 자신의 눈을 쪼아 애꾸눈으로 만든 걸까. 그런 게 아닌 이상 지금 보이는 게 사실일 리 없었다.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분명 머리‘들’이었다. 

짐 꾸러미라고 여겼던 여러 개의 사람 머리들이 우악스럽게 머리채만 잡힌 채 남자의 손에서 달랑거렸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몸뚱이와 분리해 낸 듯 목의 단면이 일정치 않았다. 

더운 피비린내가 이예주가 서 있는 곳까지 훅 끼쳐 왔다. 

남자의 손에서부터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덩어리들만 봐도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불현듯 남자의 붉은색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너희 인간들은 영 머리가 안 돌아가는지 아무리 주제를 상기시켜 줘도 자꾸만 기어오르더군.”

“…….”

“신인류는 너 같은 더러운 인간이 손댈 존재가 아니다. 대체 얼마나 더 죽여야 그 텅 빈 머리통에 각인될는지 원.”

“…….”

“그런데 넌 겁도 없이 내가 친히 데려온 신인류를 가지고 놀고 있구나.”

남자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꿈틀거렸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검은색 눈동자를 좀먹는 것처럼 남자의 동공 한가운데서부터 붉은색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곧 검은색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남자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그가 들고 있는 시체들의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피와 같은 시뻘건 색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변화에 이예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넌 이렇게 대가리조차 남겨질 자격이 없다.”

“…….”

“그래, 너같이 냄새 나는 것에겐 그냥 소멸이 어울리겠군. 소멸.”

모욕적인 남자의 언사에도 그녀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뿐 아니라 그 어떤 인간이어도 자신을 향해 여과 없이 내뿜어지는 남자의 지독한 혐오감과 살기를 느낀다면 입도 뻥긋할 수 없을 것이다.

남자가 한쪽 팔을 휙 들어 그녀를 향해 시체 머리들을 던졌다. 

데구루루. 

자신의 발치로 머리들이 굴러 왔다. 그 모습을 보고 이예주는 분명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어찌 된 일인지 입을 떡 벌린 채 여전히 굳은 상태였다.

언제부터인지 오금이 저려 왔다. 

그 저림은 점차 다리를 타고 스멀스멀 위로 기어 올라와 마침내 그녀의 온몸을 침식했다. 

이예주는 굳어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뇌를 필사적으로 굴리며 생각했다. 

‘이, 이건 꿈이야. 그치? 이건 꿈이야. 꿈이고말고. 암, 분명 꿈인데…….’

“죽어.” 

이상하다, 저 남자. 저 시뻘건 눈깔이 왜 이렇게 진짜 같을까?

멍청하게 서 있는 그녀의 눈과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가 정확히 마주쳤을 때였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부터 ‘쿠구구궁’ 하고 울리는 진동이 그녀의 신경을 뒤흔들었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은 엄청난 속도로 진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스와아― 장활한 나무와 풀들이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지진?’

이예주가 간신히 ‘지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쯤, 그녀의 몸은 이미 타의로 인해 심각할 정도로 휘청휘청 거리고 있었다. 

이예주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빨간 눈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남자의 붉은 입술 한쪽 끝이 비릿하게 올라가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람 머리들을 뽑아 쥐고 나타난 저 미친놈이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다고. 

하지만 무슨 짓을 하는 걸까?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려고 노력하며 남자를 향해 입을 떼려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곧 무산되고 말았다. 

물어보기도 전에 궁금함이 해결됐으니. 

이예주의 밭밑 땅이 쩍 하고 갈라졌다. 동시에 진동하는 휴대폰처럼 흔들렸던 그녀의 몸도 진동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밟고 있던 땅 안쪽에서 시커먼 구덩이가 아가리를 벌렸다. 

이예주의 주둥이도 덩달아 벌어졌다. 

그녀는 그 속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푹 꺼졌다. 

“아아아아! 떠, 떨어져여어어!” 

이예주는 엄청난 속도감으로 속절없이 떨어졌다. 

번지 점프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마치 번지 점프를 할 때 같은 속도감이랄까. 

아직도 탄내가 가시지 않는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거세게 흩날렸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쫄깃쫄깃하고 염통과 방광이 바짝 조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새삼 눈앞에서 멀어지는 구덩이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성장판도 다 닫혔을 텐데 웬 벼랑에서 떨어지는 꿈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하지만 거참 꿈 한번 겁나게 생생했다. 

이렇게 심장이 덜컹덜컹할 정도로 떨어지는 속도감이라니.

손에 잡힌 새가 제 손에 잡혔던 때보다 더 격렬하게 몸을 뒤틀었다. 

푸덕푸덕! 

“아아아악!”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작은 몸으로 귀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새 때문에 이예주는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흉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야, 조용히 해.”

“아아아악! 지금 조용히 하게 생겼어여! 주인님이 분노하셨어여! 그냥 죽음도 아니고 지옥 불에 소멸된다구여! 흐엉엉! 이게 다 인간 여자, 당신 때문이에여!”

“뭐 어때. 꿈인데 좀 떨어질 수도 있지.”

“그럼 난 놔줘여! 난 놔 달라구여! 난 죽기 싫어여어어어!” 

이예주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 현실감에 헛웃음을 지으며 지랄 발광을 하는 새를 손에서 풀어 주었다. 

작은 새는 풀려난 줄도 모르고 그녀와 같이 떨어지다가 이내 푸드덕푸드덕하고 금방 균형을 잡으며 날아올랐다. 

새는 멈추고 이예주는 계속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얼마나 빠르게 떨어지는지 공중에 멈춰 있는 황조롱이와 금세 거리가 벌어졌다.

“그래. 가라, 가. 너 다음번에도 내 꿈에 나와서 쪼면 진짜 죽는다.”

이예주가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지만 새대가리가 용케도 그 말을 들은 건지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미, 미안해여! 그, 그래도 많이 아프진 않을 거예여! 금방 녹을 테니까!”

“…….”

“미, 미안해여! 미안해여!”

미안하다고 말로는 계속 쫑알대면서도 새는 부지런히 그녀가 떨어진 구덩이 위로 날아올랐다. 

그 얍삽한 행실을 지켜보며 이예주는 차오르는 욕을 애써 꿀꺽 삼켰다. 

어차피 이도 잠에서 깨어나면 다 개똥으로 남을 추억이리라. 

“아, 시원하다―!”

늙은이처럼 내뱉으며 이예주는 편안한 마음으로 떨어지는 감각을 만끽했다. 

꿈이지만 무언가 하고 싶었던 것 하나를 해치운 기분이 들었다. 

기실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죽음과 가까워지려고 발버둥 치던 때에 이예주가 가장 원했던 방법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방법이었다. 

엄마가 죽은 것이 전부 제 탓이라는 그 사실 하나가 생선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서 하루하루 그녀의 숨통을 죄던 나날들이었다. 

날카로운 공기와 바람이 필요했다.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몰아치면 답답함도 그 바람에 쓸려 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높은 곳에서 투신하는 것만큼은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아니, 시도는 해 보았다. 학교 옥상에 무려 세 번이나 올랐지만 세 번 모두 미수로 그쳤다. 

떨어지는 도중 ‘문’이 열려도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이예주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모든 투신 시도가 미수에 그쳤던 이유들이 그저 변명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실은 너무 무서웠다.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볼 때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조차 어기적댈 정도로 얼마나 겁에 질려 있었던가.

그래도 돌이켜 보면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그 짓거리를 세 번이나 반복한 후 이예주는 자신에게 저주받을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소공포증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나저나 이번 꿈은 참 괴상하기 짝이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참! 그 미친놈이 대체 뭔 짓을 했길래, 내 꿈에서 내가 이렇게 당하는 거야?”

‘놔주기 전에 새 자식한데 물어볼걸…….’

미련이 뚝뚝 남는 목소리로 후회했지만, 이미 구덩이 입구는 까마득하게 멀어져 작은 구멍처럼 간신히 보일 듯 말 듯 한 상태였다. 

시뻘건 눈의 미친놈을 떠올리고 보니 이예주는 꿈이 평소와는 다르게 참 이상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속에서 이렇게 자신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아니,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예지몽에서 제3자의 눈으로 대강 상황만 파악하든가 혹은 꿈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곤 했으니 굳이 꿈속에서까지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까지 떨어지기만 하는 거야. 빨리 바닥에 처박히든지 해야 꿈에서 깰 거 아니야!”

슬슬 떨어지는 것도 지루해지자 이예주가 괴팍하게 소리 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알았다. 

처음 떨어질 때 차가운 역풍이 머리카락을 미친 듯이 흔들어 놓았던 것과 달리, 이젠 제법 따듯한 공기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이제 끝인 건가? 

이예주는 역풍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기 위해 ‘읏차’ 하고 공중에서 제비를 돌았다. 

한참을 끙끙거린 후에야 간신히 몸의 방향을 위에서 아래로 뒤집을 수 있었다.

“……뭐지?”

아주 멀리서 붉은 점이 보였다. 

붉은 점에 가까워질수록 따듯한 역풍은 ‘따듯’에서 점점 ‘뜨뜻’으로, ‘뜨뜻’에서 점점 ‘후끈’으로, ‘후끈’에서 점점 ‘화끈’으로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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