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이예주
죽여 버리겠다. 죽이겠다. 하나도 남김없이 찢어발겨 주마!
“……헉!”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증오에 가득 찬 울부짖음에 이예주는 눈을 번쩍 떴다.
그도 모자라 덮고 있던 이불까지 걷어찬 후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던 그녀는 좁아터진 자신의 원룸 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얕게 헐떡거리며 땀에 젖은 머리를 매만졌다.
네 달 전에 귀밑까지 짧게 자른 머리가 어느새 어깨까지 길어, 끈적한 땀과 함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꿈일까.”
방금 전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던 잔상들이 한숨 한 번 쉬자 머릿속에서 호로록 사라졌다.
이예주는 손을 올려 조심스레 자신의 귀를 덮었다.
― 죽여 버린다. 죽이겠다.
꿈은 사라진 지 오래인데 그 울부짖음만큼은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대체 그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고 얼마나 깊은 분노기에 이렇게 곤히 잠든 사람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걸까.
누구의, 누굴 향한…….
미간을 좁히며 꿈과 자신의 최근 신상에 관한 상관관계를 떠올리던 그녀는 이내 거칠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좋지 않아. 매우 좋지 않아.
이런 느낌이 안 좋은 꿈을 일부러 파헤치는 것 따윈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로운 일이다.
땀으로 젖어 눅눅한 시트를 애써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이예주는 습관처럼 침대 옆 탁자 위에 있는 알람 시계를 보았다.
곧 그녀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졌다.
“으아악! 여, 열 시!”
아침 첫 강의는 무려 9시 시작이었고 하루만 더 그 교양 수업을 빠지면 F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우당쾅쾅.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벗어 놓았던 청바지와 후드티를 다시 고대로 주워 입은 이예주는, 화장실에 들어가 대강 물 칠을 하고 선크림만 치덕치덕 바른 후 집을 나섰다.
화장 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는 그녀였기에 그조차 바르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지각에 대한 변명을 하려면 적어도 숙면을 취한 티는 내지 말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오늘만 특별히 발라 주기로 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이렇게 불길한 꿈을 꾼 날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 심신에 좋은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햇빛 한 점 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예주는 잠시 빌라 앞에 서서 하늘을 한 번 바라보다가 심리학 교수직을 맡고 있는 깐깐하고 히스테릭한 노처녀를 떠올렸다.
저번 학기에도 망할 꿈 때문에 여러 번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논의의 여지없이 F와 재수강을 주었던 여자였다.
그 뱀 같은 눈 아래에서 굽실굽실 거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하…… 개 같은 꿈을 꿔서 그런지 오늘 하루도 개똥이 되려나 보다…….”
다시 하늘을 쳐다보며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이예주는 이내 헐레벌떡 달리기 시작했다.
* * *
이예주는 꿈에 민감한 23살의 꽃 처녀다.
아니, 정확하게 꿈으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어쩔 땐 꿈에 영향을 받기도 하니 어쨌든 민감하다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땐 자주 예지몽을 꾸곤 했다.
지금도 종종 꾸는 편이지만 10살이 되기 전까지는 거의 하루걸러 한 번씩 예지몽을 꿨다.
‘남들도 다 꾸는 그깟 예지몽이 뭐 그리 대수냐.’ 한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깟 예지몽 몇 번 꾸는 걸로 능력에 대한 설명은 쉽게 끝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꿈은 범인들의 예지몽보다 조금 더 고차원적이었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10살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그날은 며칠 내내 이어졌던 장맛비가 들이붓듯 쏟아지던 날이었다.
근 10년 만에 내리는 폭우였기에 이예주의 엄마는 안절부절못했다.
딸을 직접 데려다주기 위해 차 키까지 집어 들 정도였다.
학교에 가는 길, 간밤에 강물이 다리에까지 범람해 도보로 20분인 거리를 차 안에서 40분이나 허비했다.
그 와중에 엄마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고 수차례 그녀에게 물었다.
― 예주야, 간밤에 아무 꿈 안 꿨니? 정말 아무 꿈도 안 꿨어?
― 차 돌릴까, 예주야? 오늘 같은 날에는 안 가도 돼.
10살의 이예주는 엄마의 불안한 목소리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체 머리통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었던 건지. 이예주는 아직도 그때의 자신이 의문이었다.
그날이 바로 ‘능력’이 각성되는 날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입을 벌려 엄마에게 차를 돌려서 집에 쿡 박혀 있자고 이야기했을 텐데.
지금 와서 땅을 치고 후회한들 모두 지난 일이었다. 그녀에겐 ‘과거’로 가는 능력은 없으니까.
어쨌거나, 그날 이예주는 간밤에 아주 기묘한 꿈을 꿨다.
너무 기묘해서 엄마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꿈이었다.
꿈에서도 자신은 10살이었고 급박한 물살에 휘말려 어디론가 거세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물살이 굉장히 거셌음에도 그녀의 몸은 배영을 하듯 둥둥 떠내려가는 편안한 느낌이었다.
이대로 잠이 솔솔 올 것 같았기에 꿈속에서 이예주는 물가에 드리워진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는 그대로 정체되어 둥둥 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세게 잡아당겼다.
어린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 위에 어떤 여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그녀는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경악했다.
근 10년은 젊어 보이는, ‘엄마’라고 부르기도 머쓱한 아가씨가 자신을 잡아당기며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뭐해?”
그렇게 물었지만 젊은 엄마는 질문에 대답은 않고 애타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무어라 말을 했다.
엄마는 빠르게 입을 벙긋거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이예주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임이 틀림없다는 사실 하나로 이예주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
꿈속에서 계속해서 물 위를 동동 떠다녔으니 어쩌면 지쳐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엄마의 품에 안기자 이예주의 몸 안으로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었고 그와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다.
아주 괴상하고 기묘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10살의 이예주는 결국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엄마가 원하는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 멍청한 고집을 부린 탓에 그 망할 ‘능력’이 각성된 걸지도 모른다.
무슨 댓바람이 들었는지 학교가 끝나자마자 이예주는 얌전히 엄마가 오길 기다리지 않고 우산을 든 채 신나게 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올라섰다.
그녀가 들고 있던 어린이용 우산을 뚫을 듯이 비가 세차게 내렸다.
도보 옆 도로는 꽉 막히던 아침과는 다르게 요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다리를 건넜다.
그 당시 자신은 스스로 집과 학교를 오갈 수 있단 쓸데없는 자만심에 굉장히 도취되어 있었음이 분명했다.
안 그랬다면 그런 미친 짓거린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쏴아아—
막 다리에서 내려와 강변에 섰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마어마하게 불어서 범람한 강물의 파도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것은 삽시간에 13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고 가벼운 이예주를 덮쳤고, 그녀는 꽥 소리 하나 못 낸 채 그렇게 떠밀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땐 정말 죽을 둥 살 둥 해서 그게 간밤의 꿈이 실현된 것인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아니, 그것을 생각했다 치더라도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꿈에선 그저 둥둥 떠내려갔을 뿐이지만, 현실에서는 몇 번이고 물을 삼키고 자맥질을 하며 황천길을 오갔으니 말이다.
‘꾸르르륵’ 하고 강물 깊숙이 잠겼다가 ‘푸헉!’ 하고 급류 위로 올라올 때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그렇게 속절없이 떠내려가던 중 간신히 수면 위로 드리워진 버드나무 가지의 끄트머리를 잡을 수 있었다.
온갖 대통(大通, 운수가 크게 트임)이 그녀를 따랐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면 인생 10년 살고 꼼짝 없이 근 10년 만에 범람한 강물에 빠져 죽는 처지가 됐을 테니.
고작 10살짜리가 무슨 정신이 있었는지, 당시 이예주는 정말 죽을 만큼의 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었다.
그나마 초등학생 여아의 몸뚱이만 한 가방 때문에 가라앉진 않았지만 한숨 돌리는 것도 잠시, 파도와 같은 강물이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뱉어 내는 물보다 먹는 물이 많아 점차 숨을 쉬기가 힘들던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이예주의 앞에 세 개의 ‘문’이 나타난 것은.
13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정확히 세 개였다. 세 개의 ‘문’ 안에 각기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그것은 문 안에 또 다른 세상이 있고 이예주는 그것을 마치 티브이를 시청하듯 볼 수 있었다.
가장 왼쪽 문 안에서는 해양 경찰로 보이는 사내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정 가운데 문에는 울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가장 오른쪽에 있던 문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병실이 아니었나 싶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이예주는 온 힘을 다해 가운데 문에 무작정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문이 뭔지는 알 바 아니었다. 일단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에.
그리고 눈앞이 새하얘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물속에 집어 던져졌다 꺼내진 죄수와 같이-실제로 물에 잠겼었지만- 뚝뚝 물을 흘리며 집 안에 우뚝 서 있었다.
방금 전 강물에 쓸려 내려가 황천길을 오가던 것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예, 예주야!”
“엄마.”
소리 소문 없이 집 현관에 나타난 아이를 보고 엄마가 기함했다.
이예주는 그런 그녀를 한 번 부르고는 산전수전 다 겪고 고향으로 돌아온 송어처럼 픽 쓰러져 죽은 듯이 잠에 빠졌다.
나중에 깨어나서 듣기로는 이예주는 강물에 쓸려 실종된 지 정확히 9일 만에 불현듯 땅에서 솟은 것처럼 나타났다고 했다.
모두들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던 그때.
그렇게 이예주는 미래로 왔다.
* * *
이예주는 그 후 이틀을 꼬박 앓고 사경을 헤맸다.
이틀 뒤 병원에서 열에 들떠 눈을 떴을 때도 엄마는 울고 있었다.
“예주야! 이놈의 계집애! 엄마가 꿈꿨으면 꼭 얘기하랬지!”
엄마는 방금 잠에서 깬 이예주의 사정은 신경 쓰지 않고 달려들어 엉덩이를 거세게 때렸다.
그녀는 죽다 살아난 설움에 엄마의 구타까지 겹쳐 한참을 엉엉 울었다.
다시는 꿈 얘기를 속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다짐한 후 이예주는 떠듬떠듬 엄마에게 꿈 내용을 이야기해 줬다.
이예주로서는 분명 며칠 전에 꾼 꿈인데 다시 생각하려니 오래전에 꾼 꿈처럼 내용이 흐릿했다.
많은 것을 빼먹었지만 꿈에 10년 젊은 엄마가 나왔다는 얘기만 듣고도 엄마는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린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잠자코 이예주의 이야기를 듣던 엄마는 손을 뻗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뗐다.
“예주야, 잘 들어. 엄마 일족은 대부분 과거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아주 드물게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난단다. 엄마 또한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졌지만 근시일 내의 미래밖에 볼 수 없어서 일족에게 버림받았지. 그런 나를 보듬어 준 게 너희 아버지란다.”
“미래?!”
엄마에게서 생전 처음으로 듣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어린 이예주의 관심은 온통 미래를 본다는 말에 쏠려 있었다.
그녀 또한 예지몽으로 미래를 보기 때문이었다.
“그래, 미래. 네 아버진 해군 출신이었어. 북한과 인접한 지역에서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순직하셨지. 엄마는 그 전날, 너희 아버지의 미래를 보고 가지 말라고 붙잡았지만, 그는 내 말을 믿지 않고 웃으면서 떠났다가 시체가 되어 내게 돌아오더구나.”
그 말을 내뱉는 엄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이예주는 그 안에 짙은 슬픔이 배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래에 관심을 쏟으며 엄마에게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 했던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 나에겐 네 아버지가 전부였어. 네 아버지가 없으면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반푼이였단 말이야. 나는 네 아버지의 흔적이 잔뜩 남은 집에서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었고 결국 네 아버지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지. 10년 전 그날도 이렇게 폭우가 내리치고 강물이 강변 근처까지 범람했었어. 엄마는 집 앞에 있는 다리에서 뛰어내렸고…… 거기서 아주 예쁜 여자아이를 만났단다.”
그 말을 하며 엄마는 그 당시 생각이 떠오르는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이상하지. 분명히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간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눈을 뜨니까 나는 나뭇가지에 걸려서 간신히 매달려 있더라. 그런데 그 가지 끝에 어떤 여자아이가 둥둥 떠 있는 거야. 옷이 찢길 정도로 물살이 거셌는데 이상하게 그 애는 편안한 얼굴로 가지를 잡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금방 가지를 놓고 물에 떠내려가도 괜찮은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
“얘야, 괜찮으냐고. 꽉 붙잡고 있으라고 소리쳤어. 나도 금방 떠내려갈 것 같았거든. 그런데 그 여자아이는 가만히 웃더라고. 물에 둥둥 떠서 가만히 웃고만.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그 애를 꼭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필사적으로 그 애한테 다가갔지.”
예주의 엄마는 거친 물살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손을 뻗었다.
얼른 내 손 잡으렴!
아이는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주의 엄마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대로 여자아이가 손을 놓고 떠내려갈 것만 같아 보였다.
얼른, 아가. 얼른 내 손 잡아.
애타는 목소리로 외치자 여자아이가 이번에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 ……어차피 날 버릴 거잖아.
“그 애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엄마는 최대한 손을 뻗어 그 아이를 잡았지. 잡아서 꼭 품에 안았어. 내가 널 버리긴 왜 버려. 절대 안 버려. 걱정하지 마. 그렇게 계속해서 속삭여 주니까 우리 둘을 덮칠 듯하던 거센 강물이 거짓말처럼 잔잔해지고 주위가 환해졌어. 그때 그 아이가 나한테 말하더라. 곧 다시 만나자고.”
“…….”
“너무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니까 엄마가 자살하기 직전인 사람처럼 다리 난간 위에 서 있지 뭐야?”
“꿈…… 꾼 거야? 그 여자애는 어떻게 됐어?”
이예주가 조심스럽게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묻자 엄마가 우는 듯 웃는 듯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로 그때 그 꿈 같은 일이 아니었다면 하나뿐인 딸과 자신이 살아서 이렇게 미래에 관해 태평하게 얘기 나눌 일은 없었을 것이다.
“꿈꾼 것 같지? 엄마도 꿈인 줄 알았어. 네가 이렇게 멀쩡히 엄마에게 다시 살아 돌아와 주기 전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네. 이렇게 예쁜 여자애를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이예주를 조심히 보듬어 안았다.
그녀는 엄마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용히 그 품에 안겼다.
“예주야, 넌 엄마 일족과 달라. 너는 미래를 보는 것뿐 아니라 네가 본 미래로 갈 수 있고 때로는 과거로도 갈 수 있을 거야. 엄마를 과거로 다시 돌려보냈으니까…….”
“과거? 과거로 갈 수 있어? 과거로 어떻게 가는데?”
“글쎄…… 네가 조금 더 크면 알 수 있을지 몰라. 넌 일단 미래로 왔으니까 그 능력이 각성된 거나 마찬가지야. 엄마가 도와줄게.”
이예주는 그렇게 어이없이 ‘미래로 가는 능력’이 생겼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녀의 능력을 열심히 도와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예주보다도 더 걱정했다.
그녀의 능력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능력은 지독히도 한정되었고, 이기적이었고, 무식했다.
이예주의 능력은 무조건 전진만 했다.
뒤 따윈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 그녀가 정말로 죽기 바로 직전의 상황에 처해야 능력이 실현되어 간신히 미래로 갈 수 있었다.
엄마의 말과는 다르게 과거로 가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전진만 하는 능력에 대해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에는 간밤에 꾸는 예지몽도 조력했다.
꿈이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꼭 꿈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그 후 현실에서 자연히 나타나는 ‘문’만 기다리면 알아서 미래로 왔으니 뒷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엄마는 이예주가 예상치 못한 상황과 장소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녀를 이끌어 상황을 정리했다.
엄마와 함께 사는 동안 번거로운 일이 그녀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모두 ‘엄마’라는 방패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었던 것이 다 엄마의 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예주는 능력을 남발했다.
자의로 실행하는 능력이 아니었기에 남발이라 말하는 것은 조금 웃겼지만.
어쨌든 남들과 다른 점이 때로는 즐겁게 다가오기도 했으니 남발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은 딱 엄마가 죽기 전까지였다.
엄마는 그녀가 능력을 각성한 지 7년 후,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쯤 죽었다.
경찰은 이예주가 학교에 간 사이 엄마가 생활고를 비관하여 집에서 목을 매 죽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