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평탄한 하루였다. 비록 월초마다 이어지는 줄 야근이 시작됐고 여전히 제멋대로 구는 생산팀 직원들과도 싸워야 하는 데다 오늘은 배송 분실 건까지 있었다고 해도, 감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욕을 삼키기 위해 또 메모장을 켜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간중간 깜박이는 라잇톡 알림 한 번이면 상쇄됐으니까.
당연히 상대는 은석이었다.
퇴근 후 2호선답지 않게 몇 자리가 비어 있는 지하철에 앉아 하루 종일 은석과 나눈 메시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모든 게 다 완벽했던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몽글한 기분에 찬영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핸드폰을 들어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보낸다.
정찬영: 보고 싶어
곰돌♥: 나도
곰돌♥: 지금 보러 갈까?
돌아오는 답은 찬영의 마음을 다 아는 듯 항상 같았다. 찬영은 슬핏 웃으며 액정 화면을 쓸어내렸다.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정찬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안돼
정찬영: 어제도 그런 말해서 봤잖아
곰돌♥: ㅜㅜ
정찬영: 서로 일은 열심히 해야지
손잡는 것만으로도 간질거리던 마음은 어느새 배로 불어나 점점 욕심을 드러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갈수록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이 커져 이제 집에 가야지, 서로 몇 번씩 그런 말을 주고받고도 찬영은 한참을 은석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는 했다. 그러면 은석이 찬영을 단단하게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런 식으로 틈 없이 붙어 있을 때마다 찬영은 정말이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충만함이었다.
포옹만으로도 이 정도다 보니 찬영은 당연히 은석과 곧 마지막 진도까지 뺄 욕심이 가득했다. 은석도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십 대 후반 성인 둘 간의 연애임을 감안하면 오히려 진도는 느린 편이었으니 슬슬 분위기를 잡아도 괜찮을 타이밍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고백과 함께 한 키스를 제외하면 연애는 두 사람의 성격에 맞게 제법 느긋하게, 그러나 순탄하게 흘러갔다.
문제가 생긴 것은 어느 날 찬영이 키스하던 도중 은석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부터였다. 은석이 움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게 느껴졌다.
주머니에 뭘 넣어 놓은 거겠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려 애썼지만 군대까지 다녀온 성인 남자가 그게 뭘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동안 어림짐작으로 좀 큰가 보다, 가볍게 여겼던 찬영은 방금 만진 감촉을 되새기다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큰 정도가 아니었다.
이게… 안에 들어온다고? 가능한 일인가?
사람 일은 모른다지만 일단 당장은 도저히 무리일 것 같았다. 끝까지만 넣지 말자고 할까. 그런 말을 대놓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나. 머리를 팽팽하게 굴리는 사이 분위기는 이미 애매해져 있었다.
찬영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은석은 배가 고프니 밥이나 먹지 않겠냐며 뜬금없는 말을 했다. 누가 봐도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 꺼낸 소리로 보였지만 그 순간은 어쨌든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뒤로 분위기가 잡힐 때마다 찬영은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한다, 덥다(겨울이었다)와 같은 핑계를 대며 도망쳤다.
언제까지 시간을 끌지는 모르겠다. 올해 안으로는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지금은 안 될 뿐이지.
날씨는 추워진 지 오래였지만 올해는 아직 한 달 넘게 남아 있었다. 찬영은 생각했던 계획들을 조금 뒤로 미루어 두었다. 아직은 둘이서 할 게 많았다. 예를 들면 레비아라든가….
* * *
숫자 하나에 웃고 울어야 하는 밸런스 패치의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소식을 듣자마자 공식 홈페이지로 달려가 패치 노트를 읽고 있는데, 길드원들은 이미 내용 확인을 마쳤는지 단체 채팅방 알림이 시끄러웠다.
정선빈: 야 ㅆㅂ 밸패 실화냐?
정선빈: (사진)
2-13. 거너
- [대시 점프]의 이동 거리가 증가됩니다.
이건… 누가 봐도 화낼 만한데.
점프의 이동 거리가 어쩌고 하는 내역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설마 싶어 패치 노트에서 직접 거너를 찾아봤지만 정말로 저 한 줄이 끝이다.
예로부터 밸런스 패치 기간 한정으로 OP 직업을 구별하는 유구한 방법이 존재했다. 패치 노트에 아무 내용이 없을 때 안도하는 직업은 적폐, 아무 내용이 없어 화내는 직업은 애매한 직업, 아무 내용이 없으니 접겠다는 직업은 망직업. 일단 아수라는 아무 내용이 없어 다행인 직업 중 하나였다. 거너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좋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아마 애매 그 이하가 아닐까. 길길이 날뛰는 선빈을 보고 있자니 추측이 확신에 가까워졌다.
잠깐. 그러면 세에레 파티원 중 과반수가 성능이 별로인 직업이라는 소리였다. 이래서 딜은 충분하다 하면서도 3페이즈 트라이가 오래 걸린 걸지도 모르겠다.
임혜지: 왜
임혜지: 그래도 상향 먹었네 ㅋㅋ
정선빈: 이딴 게...상향?
임혜지: 점프가 체감은 제일 잘됨
임혜지: 저번에 받아봐서 암 ㅎ
서보은: ㅋㅋㅋㅋ
곰돌♥: 근데 진짜 유틸 상향이긴 해
곰돌♥: 점프 거리 길어지면 짤패[4] 피하기 좋아서
최ㅇㄹ: 애초에 이번엔 창술 어쌔 빼고 제대로 상향 받은 직업 없지 않나여?
김도텐: 굿
김도텐: 솔직히 상향 받을 만 했어 ㅎㅎ
서보은: 상향 진짜 개부럽다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나 했는데 뒤늦게 동명의 직업이 어쌔신이라는 게 떠올랐다. 길드원 중에서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상향을 받은 직업이었다.
이동은: 윈런은 이번에 아무것도 없대요?
곰돌♥: ㅇㅇ 없어
박태경: 어우
박태경: 바람기운 범위라도 돌려주지
서보은: ㄹㅇ;
임혜지: 갱생님도 접으신다더만
갱생이라면 레전드 서버 한계의 탑 기록에서 은석에 이어 윈드 러너 2위를 달성한 유저였다. 워낙 은석이 넘을 수 없는 벽이어서 그렇지 갱생의 기록도 55층으로 절대 낮은 스펙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사람마저 접는다니. 확실히 지난 너프 이후 윈드 러너에 망조가 든 모양이었다.
곰돌♥: 아 그분
곰돌♥: 들었음
정선빈: 나였어도 접음
정선빈: 밸패하는 꼬라지 봐라
임혜지: 아님 그냥 님도 다른 직업 키우러 ㄱㄱ
임혜지: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접으면 되니까
서보은: 접으시면 뭐 부캐 하나 더 생기는 거죠
곰돌♥: ㅋㅋㅋ
김도텐: 농담 아니고 어쌔신 어떰?
김도텐: 이번에 상향도 됐는데
곰돌♥: 어쌔 괜찮아보이긴 하더라
…뭐라고?
정찬영: 안돼!!!
정찬영: 윈런 버려?
김도텐: 냉정하게 이제 버릴 때 됐지
정선빈: 그래 윈런 같은 거 이제 버려
정찬영: ㅠㅠㅠ
템 세팅이든 레벨 업이든 은석에게 도움을 받으면 받았지 보탬이 된 적은 없지만 그건 싫었다. 윈드 러너가 아닌 다른 직업을 본캐로 잡는 은석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다. 가볍고 자유로운 바람을 모티프로 한 윈드 러너는 스킬 구성도 은석과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은석이 윈드 러너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옆에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데.
임혜지: 뭐임 진짜 갈아탐?
곰돌♥: ㄴㄴ 그럴 일 없음
곰돌♥: 어차피 내가 좋아서 하는 거라
곰돌♥: 상향해주면 좋은 거고
곰돌♥: 아님 말고 ㅋㅋ
정찬영: 휴
정찬영: 형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서보은: ㄷㄷ
서보은: 역시 윈런의 아버지
서보은: 진짜 낭만으로 게임하시네
정선빈: 하긴 뭐
정선빈: 저기 석궁 좋아서 레인저하고 있는 애도 있으니까^^
임혜지: ?
임혜지: 열 받으니까 빡치게 하지 마라
이동은: 근데 선빈 형도 거너하시잖아요
이동은: 거너가 그런 말하기는 좀...
정선빈: 넌 뭐냐?
정선빈: 갑자기 훅 들어오네;
정찬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선빈: 그래도 파이터 너프 정의 구현 ㅅㅅㅅ
1티어도 모자라 0.1티어라고까지 불리던 파이터는 이번에 대폭 너프를 먹었다. 딜은 물론이고 유틸까지 박살 난 수준임에도 워낙 평소 이미지가 별로였던 탓인지(원래 유저 수가 많으면 또라이도 많은 법이다.) 파이터 유저가 아무리 울며 드러누워도 타 직업 유저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오히려 ‘파이터 더 너프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개추 ㅋㅋㅋㅋㅋㅋㅋ’ 같은 글이 하루에도 몇 개씩 인기글에 올랐다.
물론 파이터의 성능이 압도적으로 좋았던 것도 맞고 간만에 온더넷이 잘했다고 평가받을 만한 밸런스 패치인 것도 맞았다. 주는 것 없이 밉기만 한 도부를 생각하면 찬영도 그 글에 추천을 누르러 가야 마땅할 텐데, 글쎄. 파이터 유저의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윈드 러너 너프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내 직업만 아니면 돼’ 식의 유저들도 여럿 끼어 있는 것 같아 착잡하기도 했다.
게다가 찬영의 생각에는 아수라도 곧 비슷한 꼴이 될 것 같았다. 아직까지 상향 평준화를 경계하는 레비아의 특성상 앞으로의 밸런스 패치도 너프 위주일 것이다.
그동안은 온더넷의 아들, 파황[5]이라고 불릴 정도로 파이터가 위로 튀어나와 있어서 방패가 되어 주었으나, 표면상으로라도 너프를 먹었다면 다음 차례는 엘레나와 아수라였다. 아수라는 엘레나보다 뉴비 수도 많았으니 더욱 사려야 했다. 당분간 찬영도 아웃벤은 직업 게시판과 팁과 노하우 게시판 정도만 드나들 예정이었다.
임혜지: 걔는 너프 더 먹어야 돼
임혜지: 아직 상위권임
최ㅇㄹ: 인정이요
정선빈: 야 근데 생각해보니까
정선빈: 윈런 너프 롤백도 안 해주는데 딜 메꿀라면 사격도 레결해야 되는 거 아니냐?
서보은: 갑자기요?
보은의 말대로 정말 갑자기였다. 흠. 레결 단어를 본 찬영이 턱을 괴었다. 전에 이런 얘기가 나왔을 때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지금은 은석의 의중을 훤히 알고 있다 보니 그저 재밌기만 했다.
정선빈: 아니 너네도 반지 한 번 껴보라고^^
정선빈: 체감 ㅈㄴ 큼
임혜지: ㅋ
서보은: 근데 사격 스펙이면 진짜 체감되긴 할 듯
서보은: 지금까지 안 하신 게 더 이상함
김도텐: 그러니까 정찬영이랑 하라니까
곰돌♥: ㅋㅋㅋ
이동은: 은석이형 저번에 할 생각 전혀 없다고 하시지 않았나
정찬영: 맞음
정찬영: 그리고 윈런이 너프돼봐야 사격인데
정찬영: 형 딜이 딸리진 않을 것 같음
정선빈: 에이 무슨 소리야
정선빈: 챙길 수 있는 건 챙겨야지
정찬영: 어그로 끌기 싫다잖아 ㅎㅎ
임혜지: 뭔...
임혜지: 연예인도 아니고;
곰돌♥: ㅠㅠ
정찬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도텐: 시골이라 그래
찬영이가 하기 싫다더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은석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빠르게 다른 화제로 넘어간 채팅방을 보며 찬영은 은석이 결혼 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를 떠올렸다.
‘나랑 결혼할래?’
기분 좋게 은석이 타 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있던 찬영은, 그 말에 놀라 컵을 엎을 뻔했다.
‘…형은 무슨 레결을 진짜 결혼하는 것처럼 말해.’
레비아 속에서의 결혼을 말한다는 걸 아는데도 그 단어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좋았다. 좋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좋다고 덥석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난 게임에서 결혼할 생각 없어.’ 하던 날의 앙금이 남은 채였다. 은석에게는 안타깝게도 업보였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유치한 뒤끝인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바로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남을 서운하게 만들었으면 본인도 돌려받을 각오 정도는 해야지. 괜한 심술이 생겼다. 찬영은 일부러 그때의 은석과 비슷하게 말하며 거절했다. 어그로가 끌릴 것 같으니 좀 더 생각해 보겠다는 이유였다.
뻔히 찬영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을 은석이 어떻게 반응할까. 당황하는 모습을 기대한 것과는 달리 은석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재미없네….
실망하려던 차에 슬그머니 도착한 인게임 우편에는 웨딩 패키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여캐용인 퓨어 화이트 웨딩 패키지가 아닌 남캐용인 블랙 웨딩 패키지였다. 아직까지 레비아가 동성 캐릭터 간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걸 찬영 편으로 보낸 걸 보니 사격 캐릭터에 웨딩 드레스를 입힐 모양이었다.
결혼 하나 때문에 성별 전환권을 쓸 생각인가? 한 번 결혼하면 이혼하기 전까지 여캐로 지내야 할 텐데. 피스당 백만 원은 가볍게 웃돌 만큼 비싼 코디도 많으면서.
보자마자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하기야 급한 사람이 성별 정도는 양보해야지. 어차피 조금만 놀리다 받아 줄 생각이었던 찬영은 흐뭇한 마음으로 블랙 웨딩 패키지를 캐시 창고에 고이 모셔 두었다.
다음 날부터는 뿌리기 버프 중 하나인 장미 꽃잎이 왔다. 장미 꽃잎은 그렇게 비싼 가격이 아닐뿐더러 캐시가 아닌 마일리지로도 구매 가능한 품목이었다. 보스 입장 전 도핑을 할 때 여기저기 팔랑거리는 꽃잎을 볼 때마다 귀엽다 싶어 기분도 좋아졌다. 그래서 한 번도 반송하지 않고 꼬박꼬박 받았다. 매일 자정마다 우편을 수령하다 보면 인게임 출석 이벤트 보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요즘은 또 일부러 길드원들이 사냥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남는 장미 꽃잎을 뿌려 주는 게 겜생의 낙이었다. 처음에는 ‘?’ 하고 말던 길드원들은 그 많은 장미 꽃잎이 어디서 났는지 알게 된 이후부터 재수 없으니 그만 좀 뿌리라며 ‘ㅡㅡ’를 날렸다.
그런데 그 상황에 결혼 콘텐츠 개편 기념 이벤트가 뜬 것이다.
[수다] 결혼 이벤트 최종 정리 [23]
바뀌는 거
웨딩 홀 맵 개편
하객 수 제한 변경(5명->20명)
동성끼리도 결혼 가능
결혼식 보상 추가
(신랑신부 - 부부 전용 탈것, 기념 샴페인, 웨딩 케이크 / 하객 - 답례품, 웨딩 케이크)
이벤트 기간 내 결혼할 경우 영원한 사랑 칭호 교환권 증정
(칭호 효과 - 30일간 경험치 획득량 +20%, 장비 드롭률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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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3) 등록순 최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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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 결혼되게 바뀐 게 제일 좋음 나도 여캐 여친도 여캐여서 그동안 결혼 못하고 있었는데 ㄱㅇ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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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둘 중에 한 명이 성별 전환권 쓰면 되는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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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ㄴ 여캐 코디가 훨씬 예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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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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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서 전환권 쓸 때 갖고 있는 옷도 다 성별 전환 시켜줘야 한다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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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그러면 성별전환권 10만원해도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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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안해줄 듯 ㅋㅋ 여캐옷이 훨씬 비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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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커플이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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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ㅈㄴ 박탈감 드네 ㅋㅋㅋ
똑같이 몇 만원 냈는데 경험치 20%에 드롭률 15%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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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뭐 얼마 차이난다고... 박탈감 느낄 정도까지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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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이 깡패인 게임에서 경험치 20%면 의미 크다고 생각함
콘텐츠 개편 방향이나 이벤트 보상은 좋았다. 다만 이미 결혼한 유저에 대한 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사실 아무리 30일 기간제 칭호라고 하더라도 아직 만렙 유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경험치 획득량 +20%는 분명한 메리트가 있었다. 만약 만렙이라고 해도 상위 보스를 도는 유저라면 장비 드롭률 +15% 효과를 욕심낼 만했고.
당연히 수백, 수천 명의 항의가 쏟아졌지만 온더넷은 언제나 그랬듯이 무시로 일관했다. 이혼할 때는 결혼 유지 기간에 따라 수수료로 골드를 내야 한다는데, 그걸 노린 이벤트인 것 같기도 했다. 음모론 같은 게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최근 골드 시세가 하락하면서 슬슬 유저들 사이에서도 골드 인플레이션 얘기가 돌고 있었으니까.
아직 만렙이 아닌 선빈과 혜지는 경험치 버프 효과를 위해 이혼했다가 다시 결혼한다고 했다. 그 덕에 아군 길드 내에서는 재결합 커플이라고 불리는 중이었다.
[메가폰] 쟝쮸: 진짜이것만함<< 오늘 생일이래요 축하드립니다
[메가폰] 진짜이것만함: ㄱㅅ합니다 쟝쮸님 혹시 시간 되시면 저랑 결혼하실래요?
[메가폰] 건하낭: 님은 무슨 청혼을 데이트 신청처럼 함
이벤트가 열린 직후부터 여기저기서 청혼과 결혼 알림이 난무했다. 시골 서버인 레전드가 이 정도라면 도시 서버인 글로리나 키로스는 더 많은 커플이 탄생했을 것이다. 온더넷은 과연 얼마나 벌었을까. 웨딩 티켓과 패키지의 가격을 생각해 보면 사옥 창문 몇 개씩은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모두가 결혼 문제로 시끄러운 판국에 찬영은 어땠느냐 하면. 나름대로 결혼 이벤트도 열렸겠다, 은석이 이제 다시 말을 꺼내지 않을까 생각 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은석의 반응은 기대를 벗어났다. 별다른 말 없이 오늘도 장미 꽃잎만을 우편으로 보냈을 뿐이다.
혹시 먼저 말해 주길 바라는 건가? 은석의 성격에 자존심을 내세운다거나 하는 것도 아닐 테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단톡에서 레결은 안 내킨다고 말했으니 이벤트를 빌미로 다시 얘기를 꺼냈다간 찬영에게 부담이 될 거라고 여기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할 거라면 칭호도 챙길 겸 슬슬 말해야 할 텐데….
솔직히 찬영은 경험치 획득량이나 장비 드롭률 추가 효과보다는 칭호 자체가 욕심났다. 영원한 사랑이라니. 칭호 이름이 이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얻을 수 없다는 점이 칭호를 더욱 특별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삶의 많은 것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타이밍이다. 언제 얘기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은석에게서 라톡이 왔다.
곰돌♥: 나 지금 강화할 건데 보러 올래?
정찬영: 강화?
정찬영: 뭐 누르는데?
곰돌♥: 상의인데 잠깐만
곰돌♥: (사진)
곰돌♥: 이거
+15 잊히지 않는 약속의 상의
전설 등급
요구 레벨 150
직업 궁수
거래 5회 가능
힘 +220
민첩 +265
추가 옵션
민첩 +13%
민첩 +10%
민첩 +13%
초월 옵션
민첩 +8%
민첩 +8%
사진을 본 찬영의 입이 벌어졌다. 초월 옵션이 유효 두 줄인 것도 모자라 심지어 이탈이라니. 한 줄 이탈 난 추가 옵션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은석의 아이템은 이미 수십 번을 봤는데도 아직까지 이런 옵션을 보면 적응이 안 됐다. 이러니까 아이템 보는 눈만 높아지지. 정작 찬영이 끼고 있는 장비는 희귀 등급이 대다수인데.
찬영은 제 장비 창을 떠올리며 입을 다셨다. 빨리 전설로 다 바꾸든가 해야겠다. 물론 이 서버에 적당한 매물이 언제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정찬영: 헐
정찬영: 바로 갈게
헤드셋을 연결하고 길드 보이스 코드에 접속했다. 은석은 얼마 전 선빈이 만든 강화 채널에 홀로 있었다. 찬영이 들어가자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왔어?>
“보자마자 왔지. 형 지금 강화할 거야?”
<일단 애들 중에 더 올 사람 있나 물어보고.>
“선빈 형은 바로 오지 않을까? 완전 좋아할 것 같은데.”
<걔야 뭐.>
너무 당연한 소리를 했나. 웃은 은석이 화면 공유를 켰다. 채팅으로 강화 시작을 알린다.
[길드] 사격: 강화 방송 보러오실 분?
[길드] 보틀: 뭐 강화?
[길드] 비테마죽: 저요
[길드] 보틀: ㄱㄷ 바로 감
[길드] 보틀: 아직 누르지마
[길드] 사격: ㅋㅋㅋ ㅇㅋ
[길드] 갓말이: 아니 저 형은 무슨 매크로인줄;
레비아 채팅에는 분명히 키워드 알림 기능이 없을 텐데. 그런데도 강화란 말에 달려오는 선빈을 보면 찬영이 모르는 사이 잠수함 패치[5]라도 이뤄진 게 아닌지 의심이 됐다.
[길드] 빨강색: 강화 얼마치 함?
[길드] 사격: 300억
[길드] 보틀: ㅁㅊ
[길드] 보틀: 야 나 심장 개빨리 뜀;;
[길드] 빨강색: 그정도면 병원을 가셈
[길드] 빨강색: 병인듯
300억이면 무려 삼백육십만 원어치 강화다. 그러니 강화병이 있는 선빈이 저렇게 흥분할 만도 했다. 찬영만 해도 벌써 조마조마한 기분이었으니까. 미리 옆에 물 한 잔을 떠 두었다. 시작도 전에 초를 치고 싶지는 않지만…. 그동안 은석의 강화 전적을 보면 오늘도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곧 보이스 코드에 길드원들이 들어왔다. 은석은 인벤토리에서 상의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옵션을 봤는지 혜지가 기겁을 했다.
<옵션 미친 뭐임? 우리 서버에 저런 매물이 있었음?>
<뭔데요? 헐, 미친.>
<또 본인이 직접 돌린 거 아니냐?>
<이건 돌린 게 아니라 산 거야.>
<샀다고? 서버 이동도 안 열렸는데 누구한테?>
<방토 님한테서.>
방토?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닉네임이었다. 기억을 되살리느라 찬영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이 동명이 답을 내놓았다.
<그 사람 레전드 쪽 파티 아님? 그, 세에레 퍼클 파티원 중에.>
<맞아.>
그제야 누구인지 생각났다. 레전드라는 말을 듣자마자 조용히 듣코[7]만 하겠다던 태경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길드] 딜하는프리: ?
<방토님은 레전드는 아니지 않아요? 어디더라. 길드 완전 처음 들어본 데였는데.>
<썸머 길드. 본인이 길마야. 그리고 그분은 괜찮으신 분 같던데.>
보통 거래하면서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파악할 만큼 긴 대화를 하나? 지금껏 찬영이 경험한 거래는 판매자가 계좌를 알려 주면 구매자가 입금한 뒤에 아이템을 받으면 끝이었다. 사적인 대화는 한 톨도 없었다. 랭커들끼리의 거래는 뭔가 다른 건지 궁금해진 찬영이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별말은 안 했어. 크리스탈 몇 개 쓰셨나 그 정도만.>
<오, 얼마나 쓰셨길래.>
<근데 상의 만들고 팔 거면 왜 만드신 거래요? 그분도 궁수 아닌가?>
<궁수 맞음. 내가 방금 랭킹 검색해 봄. 아처네.>
<뭐 아처? 아니, 왜 이렇게 주변에 멀쩡한 직업이 없어?>
<원래는 직접 쓰시려고 했는데 아래 크리스탈 돌리다가 현타 오셨다더라.>
<초옵 뽑는 건 인정이지.>
아래 크리스탈이라면 초월 옵션을 재설정할 수 있는 ‘그린 크리스탈’을 의미할 것이다. 초월 옵션은 워낙 잡다한 옵션이 많아 직작하게 되면 다들 이건 미친 짓이라고 한다던데. 찬영은 아직까지 그린 크리스탈을 돌려 본 적이 많지 않아서 체감이 잘 안 됐다. 어쨌든 저만한 옵션을 띄웠는데도 현타가 왔다면 적게 쓴 건 아닌 모양이었다.
크리스탈을 최소한 수천, 수만 개는 돌려 봤을 고인물 길드원들은 비록 퍼스트 클리어를 가져간 상대라고 해도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지 잠시간 묵념하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강화 방송이 시작되었다.
맵에 골드를 뿌리던 사격 캐릭터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하라는 강화는 안 하고 골드 주머니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그러고 있는다. 동명이 답답했는지 불쑥 물었다.
<뭐 하냐?>
<강화하기 전에 기도해야 돼.>
<그런 거 다 미신이야.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돼.>
<내가 돌려 보니까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기분이라도 낫더라.>
망한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걸 보니 마음이 짠하다. 선빈도 옆에서 거들었다.
<형도 나중에 강화할 때 저거 다 하고 있을걸?>
<절대 안 하지. 애초에 난 직작을 안 해. 문장도 영웅인데.>
“과연.”
찬영이 웃음을 흘렸다. 항상 섣부른 단언은 경계해야 한다. 나중에라도 스펙업 욕심이 생긴다면, 시골 서버에서 동명의 지금 발언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강화] 장비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강화] 장비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강화] 장비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강화] 잊히지 않는 약속의 상의가 파괴되었습니다.
[강화] 장비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강화] 장비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강화] 장비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강화] 장비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강화] 장비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강화] 잊히지 않는 약속의 상의가 파괴되었습니다.
150제 약속 장비는 골드 도둑이었다. 은석이 한 번 강화를 누를 때마다 골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아니, 눈이 녹는 속도도 이렇게까지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찬영은 물론이고 옆에서 보던 길드원들이 더 안타까워하며 대리 강화까지 시도했지만 여전히 실패와 파괴만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채팅 창과 보이스 코드 여기저기서 ‘멈춰’, ‘제발 그만해’와 같은 절규와 탄식이 들려왔다. 관심은 이제 미신과 유사 과학으로 쏠렸다.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니야?>
“다 같이 판교 방향으로 절이라도 해야 하나….”
<강화 한 번 하는데 뭘 그렇게까지 해.>
<저거 한 번 누를 때마다 만 얼마씩 날아간다고 생각하면 그럴 만하죠.>
<김동명이 저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까 정성이 부족하다는 거임.>
<정성이고 나발이고 이제 제발 좀 가 줬으면 좋겠다.>
선빈이 혜지에게서 약속 상의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길드] 비테마죽: ?
[길드] 비테마죽: 그 발언
<뭔 그 발언임. 자, 다들 줄 서세요. 5억 안에 25강 띄워드립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선빈이 강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강화] 잊히지 않는 약속의 상의가 파괴되었습니다.
상의가 아주 깔끔하게 날아갔다.
<아 씨발.>
<선빈이 형이 가라고 해서 하늘로 가 버린 거잖아요.>
놀랐는지 순간 욕부터 튀어나온 선빈에게 보은이 말했다.
<진짜 개쓰레기 같은 게임이네?>
<레비아 한두 번 함? 음성인식 게임인 거 모름?>
<오키. 이제 가란 말 다시는 안 한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지 이내 보이스 코드가 조용해졌다. 강화를 누를 때마다 실패하고 성공하는 효과음만 계속 반복되던 도중, 동명이 허 웃으며 침묵을 깼다.
<이제 진짜 아무도 가라고 안 하네.>
<아니면 가라고 하지 말고 보내 달라고 하든가.>
<그거 좋네. 보내 줘라.>
[강화] 잊히지 않는 약속의 상의가 파괴되었습니다.
<아니, 바로 터지는 거 뭐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길드] 딜하는프리: 보내달라 해서 보내드렸습니다
[길드] 딜하는프리: 뭐 이런 건가
<누구야. 누가 보내 달라고 했어?>
채팅을 본 선빈이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안타깝게도 범인은 장비 주인 당사자였다.
마이크 너머로 은석이 웃는 소리가 났다. 웃어? 그 소리를 들은 선빈이 역정을 냈다. 누가 보면 이게 선빈의 장비이고 은석이 대리 강화 중인 줄 알겠다.
은석은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왜 이렇게 스트레스받아 해. 너네가 돈 쓰는 것도 아니잖아.>
<뭔 소리야. 파괴되는 것만 봐도 토 나와. 내 거였으면 이미 울었어.>
<전 오히려 형이 너무 반응 없으신 것 같음.>
찬영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마음 편하게 먹으면 다 이렇게 돼.>
<강화하는데 마음이 어떻게 편할 수가 있음? 기대 안 한다고 하면서 기대 존나 하는 게 사람 심리 아님?>
<하도 터지니까 이제 기대도 안 되더라. 어차피 터지겠지 싶고.>
아…. 그런 거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졸지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동명이 쯧, 혀를 찼다.
<레비아가 문제네.>
<차라리 다시 찬영이한테 맡기면 안 됨?>
“견갑할 때 진작 해 봤지. 내가 해도 똑같이 안 가.”
스스로 금손이냐 아니냐를 따진다면 금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올 스트레이트 20강에 170억 골드로 25강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경력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찬영에게는 적어도 은석이 강화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개인별 확률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의 계정 락 앞에서는 초심자의 행운도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파괴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찬영의 심장도 같이 터지는 것 같았는데, 그게 몇십, 몇백 번 반복되자 점점 무뎌졌다. 당사자인 은석이 워낙 부처처럼 구는 탓도 있었다.
[강화] 잊히지 않는 약속의 상의가 파괴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장비마저 파괴됐다. 은석이 복구용으로 준비해 둔 잊히지 않는 약속의 상의 스무 벌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사라졌다. 골드도 마찬가지였다. 삼백육십만 원을 버는 건 어려운데 300억 골드를 쓰는 건 너무 쉽다.
<야, 힘내라.>
과정이 어쨌든 결과만 좋았으면 다 좋았을 텐데. 묵묵히 강화 창을 끄고 화면 공유를 종료한 은석을 향해 선빈이 위로했다. 혜지도 말을 얹었다.
<원래 이런 건 뜨면 이기는 거임.>
<뜨면 이기는 거라고요? 그거 어디서 굉장히 많이 본 논리 같은데.>
<도박 중독 신고는 1366이요.>
<아니, 솔직히 레비아가 도박이냐? 인생이지.>
<원래 인생이 도박 아님?>
<그것도 맞긴 해.>
[길드] 딜하는프리: 여기 죄다 도박 중독자들이네
[길드] 비테마죽: ㅋㅋㅋㅋㅋㅋ
이래서 은석을 비롯해 모든 고자본 고스펙들이 직작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정작 은석 본인은 지키지 못하는 말이었지만) 입을 모아 말하는 걸까. 게임에 쓸 수 있는 여윳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살 수만 있다면 무조건 사는 게 좋다는 건 운빨 요소와 거래 기능이 존재하는 모든 게임에서 통용되는 진리였다. 아마 운에 따라 격차가 너무 심해서겠지. 요즘 은석이 강화하거나 크리스탈을 돌리는 모습을 누구보다 가깝게 지켜본 찬영은 그 진리를 신처럼 모시는 중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장비를 바꾸려고 들자 얘기가 달라졌다. 사람도 없고 매물도 없는 시골 서버에서는 돈이 있어도 원하는 스펙의 장비를 살 수가 없었다. 왜 은석이 기회만 오면 이 서버를 나가야 한다는지 알 것 같았다.
자연스레 찬영은 한 달에 두 부위씩 지르고 싶은 마음을 강제로 억누르고 총알을 모아야 했다. 최근 맞춘 장비라고는 친창 중 한 명이 취업 준비 때문에 아이템을 정리한다고 했을 때 간신히 물어온 장갑 하나가 다였다.
차라리 마법석 패키지를 살까 고민했는데, 이미 마법석 패키지가 나오자마자 7단계를 풀로 맞췄다는 은석이 앞으로 마법석 수급은 계속 풀어 줄 거라며 만류하는 통에 그 생각도 접었다.
그렇게 해소되지 못한 스펙업 욕심만 자꾸 차오르는 상황에서 넣고 있던 적금 세 개 중 한 개가 만기가 됐다.
안희원 ▶ 레비아 온라인 레전드 서버
아이템 캡처.jpg
투사 24강 33퍼 영원 상하의+25강 23퍼 영원 견갑 통으로 500에 팝니다
흥정 절대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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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레전드 서버 블루북에 24강 영원 상하의와 25강 영원 견갑을 합쳐 총 오백만 원에 거래한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비싼가? 저 정도 아이템은 경매장에서 거래된 적이 없어서 시세를 모르겠지만 나름 살 만해 보이는데….
거의 눈이 돌아가 블루북 메시지부터 보낼 뻔했지만 지난번 보조 무기를 샀을 때 선빈이 하도 구박했던 게 생각나 겨우 참았다. 이러니까 여기도 혐사꾼[8]이 있는 것 같다고 했었나.
원래 현실에서도 뭘 모르고 사면 호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게임도 현실과 비슷했다. 다른 부서도 아니고 구매팀에서 근무하면서 조사도 없이 비싸게 사고 싶냐는 말을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것도 도시 서버처럼 경쟁력 있는 매물이 넘치거나 마음이 덜 급할 때 가능한 이야기였다.
찬영은 해운대 바다 앞에서 은석에게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하드 데스 아이 버스도 태워 줄 수 있다던 말. 은석이 서버 종료 때까지 접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후로도 사라지지 않은 목표는 그사이 더 나아가 은석과 같은 파티를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버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세에레 파티원들처럼 사격 캐릭터와 동등한 입장의 격수로 가기를 원했다. 그러려면 하루라도 빨리 장비를 맞춰야 했다.
그렇지만 보자마자 혹했을 만큼 좋아 보이는 아이템 판매 글에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았다는 점이 걸렸다.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은석에게 아이템을 찾고 있다고 귀띔도 했는데 저걸 못 봤을 리 없는 은석이 아무 말도 없었다는 것도 그렇고.
결국 선빈에게 라톡을 보냈다.
정찬영: (사진)
정찬영: 이거 사려는데 어때
정선빈: ?
정선빈: 설마 진심으로 물어보는거임?
순도 100%로 진심이었는데…. 머쓱해진 찬영이 앞이마를 문질렀다. 선빈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정선빈: ㅋㅋㅋ 넌 진짜
정선빈: 앞으로 내 허락없이 템 사지마라
정선빈: 아님 고은석한테 꼭 물어보고 사
정선빈: 어떻게 된 게 비싼 것만 집어서 골라옴;
정찬영: 그정도야?
정선빈: ㅇㅇ 저거 올라온지 2주는 됐을걸
정선빈: 괜히 안팔리는게아님
정찬영: ㄷㄷ.... 몰랐음ㅠ
정선빈: ㅉㅉ
정찬영: 아
정찬영: 나 적금 만기된거있어서 템 뭐라도 사고싶은데
정찬영: 왜 이렇게 살만한 게 없지
정선빈: 템 살 때 급하게 사는 거 아님
정선빈: 어차피 그 파티 나올 것도 아니잖아
정선빈: 당장 하드 갈 거 아니면 파티원들하고 스펙업 속도 맞춰가면서 하셈
정선빈: 아님 뭐 나오게?
정찬영: ㄴㄴ 그건 아닌데
정찬영: 하드 데아 가고 싶어서
정선빈: 몇인팟으로?
몇인 팟? 찬영이 원하는 건 솔플이었다. 은석에게 버스도 태워 줄 수 있을 만한 스펙을 원했다. 수줍게 마음을 전하자 선빈은 ‘ㅋ’ 하나를 날렸다.
정선빈: 포기해 그냥
정선빈: 템 전부다 갈아엎어야할 듯
정선빈: 그리고 데아는 딜찍 안 되면 솔플 비추임
정선빈: 노말이랑 차이 ㅈㄴ 심함
정찬영: 그런가ㅜㅜ
정선빈: ㅇㅇ 그래서 나도 임혜지랑 둘이 가잖아
하드 데스 아이를 딜로 찍어 눌러 솔플할 수 있을 수준이라면 얼마나 세져야 할까. 선빈이나 혜지의 스펙으로도 2인 팟을 간다면 그 둘을 합친 만큼은 되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갑자기 목표치가 확 오른다. 그 정도라면 찬영이 알기로는 은석밖에 없었다.
정선빈: 아니면 고은석이랑 둘이 가
정선빈: 버스 받음 되지
정찬영: 형한테 버스해주고 싶음 ㅠ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는 건 이제 알겠다. 그래도 하나씩 차근차근 장비를 바꾸다 보면 언젠가는 하드 데스 아이 버스를 운영할 만한 스펙도 되어 있지 않을까?
정선빈: 굳이? 걔를?
선빈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찬영은 개의치 않고 답장을 보냈다.
정찬영: 형이 템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정찬영: 지금 바로 안 사도 뭐부터 바꿔야 하는지는 보게
정선빈: 흠
정선빈: ㅇㅋ 보코 가자
화면 공유를 누르기 전 찬영은 끼고 있는 장비를 재차 점검했다. 일단 가장 최근에 맞춘 장갑은 은석에게도 괜찮다고 인정을 받았으니 자랑스럽게 보여 줄 수 있다. 무기나 보조 무기,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아군 길드에 들어오기 전 처음으로 33억 골드라는 나름 거금을 주고 산 반지는 조금 애매할 수도 있겠고…. 나머지는 레비아를 시작할 때 자리만 채우는 식으로 맞춘 장비여서 가장 먼저 바꿔야 할 듯했다.
<제일 최근에 샀다는 게 뭐였지?>
“나 장갑.”
<그럼 일단 장갑은 빼고…. 보조도 비싸게 사서 그렇지 평생 갖고 갈 만하고. 신발 빼고.>
“무기는 어때?”
<무기 너 20강인가?>
“어.”
<그럼 당장 급한 건 아니네. 근데 무기 지금 거 팔고 새로 사는 게 제일 효율 좋기는 할 듯?>
“오, 진짜?”
<매물 없으니까 기대하진 말고.>
들뜨던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선빈이 다시 말했다.
<일단 무기는 두고 다른 부위부터 보자.>
그 뒤로는 장비 창을 켜 두고 하나씩 상세 정보를 보는 식이었다.
선빈과 찬영 둘뿐이던 보이스 코드는 곧 둘만 뭘 하나 보러 왔다는 은석과 혜지에 나원까지 들어오며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템 진단을 해 주기에는 지나치게 호화로운 멤버 구성이었다.
찬영이 장비 하나를 공개할 때마다 고인물들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이미 장비 상태를 낱낱이 알고 있을 은석도 즐기는 중인지 거기에 동참했다.
레비아에 대해서 하나도 모를 때 온튜브와 아웃벤만 보고 맞춘 장비들이니 어쩔 수 없다 싶으면서도 다음 아이템으로 넘어가는 마우스 질이 점점 느려졌다. 상세 정보가 잘 보이지 않도록 바로바로 치우고 있는데도 나원의 눈은 매서웠다. 나이가 어리면 원래 동체시력도 좋은가?
<뭐예요, 이건?>
이번 타깃은 견갑인 모양이다.
“견갑.”
<견갑인 건 아는데…. 직작하신 거예요?>
“아니. 샀지.”
나원은 그 뒤로 대답이 없었다. 설마 이런 걸 돈 주고 샀나 답답해서 사라진 건 아니겠지. 보다 못했는지 선빈이 물었다.
<너 이거 얼마에 샀어.>
“2억 골 정도 했을걸?”
초창기 산 장비 중 가장 비쌌지만 찬영 나름대로는 가성비 있게 잘 샀다고 생각하는 아이템이었다.
<이딴 걸 2억 골?>
…아닌가?
경악하는 선빈을 보니 아닌 것 같다.
<이것도 산 건 아니지? 직작이지?>
견갑을 얼른 넘기기 위해 33억짜리 반지를 보여 줬더니 선빈의 목소리는 더욱 딱딱해졌다. 혜지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밑에 거래 가능 횟수 안 보임? 1회밖에 안 되는 거 보니까 누가 봐도 산 거구만.>
<저런 걸 사서 직작하는 게 더 문제긴 하네요.>
<얼만데.>
“33, 아니다. 30억 골.”
찬영은 슬그머니 산 가격보다 더 낮춰 불렀다.
<30억 골?>
이것도 정가가 아닌가?
“쌍영웅에 30억 골드면 그렇게까지 비싼 건 아니지 않아?”
<야, 이거 전설도 아니고 영웅이야. 강화도 18강이고. 30억이면 치킨이 스무 마리는 나오는데.>
찬영이 조심스레 항변했지만 선빈의 말에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 되었다. 나원이 냉정하게 최종 판정을 내렸다.
<초옵도 별로라 비싸긴 해요.>
<들었지? 넌 어디 가서 호갱 안 당하게 조심해라.>
이런 평가까지? 맡고 있는 업무를 생각하면 더없는 굴욕이었다. 쪼그라든 찬영을 변호하듯 은석이 나섰다.
<지금까지 썼으면 됐지. 직작 하는 것보단 나아.>
<그래. 나도 레비아 처음 할 때는 이상한 거 사고 그랬어.>
<하긴 저거 안 사고 치킨 스무 마리 먹어 봐야 살만 찌긴 할 듯요.>
<무슨 소리야? 치킨은 살 안 쪄. 다 영양분이야.>
<개소리 한다 또.>
“지금 그럼 뭐부터 바꿔야 돼?”
점점 산으로 가는 대화에 찬영은 선빈에게 다시 이 자리에 모인 목적을 상기시켰다. 이제 와서 그때의 장비 판매자들에게 ‘비싸게 산 것 같으니 환불해 주세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앞으로 뭐부터 사야 하느냐였다.
<답이 없다. 그냥 다 갈아엎자.>
“자꾸 그럴래?”
<그냥 기본 우선 순위로 가야죠. 무기랑 보조, 신발, 장갑까지는 돼 있다 치고.>
“그럼 방어구가 먼전가?”
<차라리 문장 크리스탈 돌리는 게 낫지 않음? 아직 영웅이더만.>
<문장을 돌리라고? 이건 뭐 거의 악만데?>
<근데 솔직히 체감은 제일 크긴 할걸요.>
<떴을 때 기준이지, 그건. 안 뜨면 바로 나락이야.>
문장은 교환 불가 장비라 반드시 직접 크리스탈을 돌려야만 했다. 그러나 크리스탈로 등급 업을 하고 유효 옵션을 뽑는 일 모두가 운빨이다. 자칫하면 N백만 원 무과금이라는 개억까를 당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반대로 레드 크리스탈 한 개 만에 등급 업과 함께 종결 옵션을 볼 수도 있고.
물론 후자의 확률은 복권 1등 당첨 확률보다도 낮았다. 찬영은 이성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운이 제게 찾아올 리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아니면 차라리.
“블북에 있는 거 사는 건 진짜 오바야?”
<뭔 또 블북이야. 개오바라니까.>
<블북?>
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선빈이 찬영 대신 대답했다.
<그 24강 상하의랑 25 견갑 통 판매하는 거. 그거 500에 사 오겠다잖아.>
<아아.>
<그거 좀 비싸던데요.>
<좀이 아니라 양심 없게 비싸지.>
선빈에 이어 나원까지 비싸다는 말이 나왔다. 비싼 건 알겠지만 매물 없는 걸 감안하면 살 만한 정도인 줄 알았는데.
<비싸서 그렇지 가격 내려가면 살 만은 해.>
템 진단에 이어 장비 구매까지 탈탈 털리기만 하던 찬영을 은석이 편들어 주었다. 역시 은석밖에 없다. 간만에 화색이 돈 찬영이 물었다.
“얼마까지?”
<한 400? 아니다. 300 후반.>
300 후반…. 지금은 500인데. 찬영은 조용히 좌절했다. 암만 이 사람들에 비하면 뉴비라지만 진짜 시세를 모르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근데 흥정 절대 안 된다고 돼 있잖아.>
<그거 원래 흥정 가능이었어. 내가 얼마까지 되냐고 물어보고 나서 바꾼 것 같은데.>
<와, 그래서 바꿨다고? 양심 개터진 새끼네.>
혜지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 말대로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버티고 있으면 매물이 없으니 비싸게라도 사 가겠지, 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문의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사격이니까.
어쨌든 수요 공급 논리가 있는데 시장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잠깐. 그럼 선빈이 보조 무기 가격을 듣고 혐사꾼이니 뭐니 분통 터져 했던 것도 같은 논리인가?
<한 한 달은 안 팔려 봐야 정신 차리지.>
<그냥 마음 급하게 먹지 말고 무조건 존버 해. 여긴 존버가 답이야. 쫄리면 지가 알아서 가격 내리게 돼 있어.>
“근데 그러다 팔리면 어떡해?”
<절대 안 팔릴걸?>
“혹시라는 게 있긴 하잖아.”
<그럼 다른 거 찾으면 되지.>
영 미덥지 못한 대답이었다. 당장 세지고 싶은 상황에서 돈이 있는데도 쓰질 못하는 게 답답했다. 매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아무리 수중에 충분한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가 대비 백만 원 이상 차이가 난다는데 지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옆에서 비싸다고 그토록 말린 아이템을 사 버리면 길드원들의 호의도 무시하는 셈이 되어 버린다.
결국 찬영은 그 돈을 그대로 자유 입출금 통장에 옮겨 놓기만 했다. 레전드 서버에서 잔뼈가 굵은 건 길드원들이었으니 장비를 맞추는 데 있어서는 전적으로 믿어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찬영이 은석의 집에 와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은석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날아온 우편에는 아이템 세 개가 첨부되어 있었다.
보낸 이: 외위
보낸 날짜: 0000/00/00
우편 제목: 1
우편 내용: (내용 없음)
첨부 아이템: +24 갈망하는 영원의 상의
보낸 이: 외위
보낸 날짜: 0000/00/00
우편 제목: 2
우편 내용: (내용 없음)
첨부 아이템: +24 갈망하는 영원의 하의
보낸 이: 외위
보낸 날짜: 0000/00/00
우편 제목: 3
우편 내용: (내용 없음)
첨부 아이템: +25 갈망하는 영원의 견갑
블루북에서 본 장비들이다. 보낸 이의 닉네임을 보니 더욱 확실했다. 이 사람이 갑자기 모든 물욕이 사라져 팔던 아이템을 기부하고 싶어졌을 리는 없고, 짚이는 데는 하나뿐이었다. 고은석. 화장실에 다녀온다더니 아무래도 몰래 거래를 하러 갔다 온 모양이다.
통으로 오백이라고 했었나. 찬영은 마우스 왼쪽 버튼을 몇 번이고 딸깍거렸다. 모른 척 돌아와서는 의자에 앉는 은석을 부른다.
“형이지?”
“뭐가?”
“이거.”
찬영이 목을 까딱이며 아직 수령을 누르지 않은 아이템 위로 마우스 커서를 올렸다. 마치 그 우편과는 전혀 관련 없다는 듯 무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석을 외면한 채 이어 말했다.
“이거 블북에서 오백 하던 거잖아. 형이 사서 내 쪽으로 보내 달라고 한 거야?”
“오백은 아냐. 훨씬 더 깎았어.”
오백은 아냐? 걸려들었다. 본인이 사서 보낸 건 맞다는 소리였다. 의도대로 자백을 받아 냈지만 말하고 아차 하는 은석을 보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너 그거 계속 갖고 싶어 했잖아.”
“그래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참을 수 있었다. 참고 있었다. 오백에서 깎아 봐야 얼마나 깎았으려고. ‘흥정 절대 XX’라고 단호히 써 놓았던 사람이 오십만 원은 깎아 줬을까. 그래도 사백오십만 원이다. 그냥 받기에는 너무 비쌌다.
은석에게 장비를 받을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는데. 스펙업 욕심을 너무 드러냈나? 찬영이 눈을 찡그렸다.
“…너한테 버스 받고 싶어서 준 건데. 별로야?”
아니, 여기서 버스 얘기가 왜 나와. 은석은 묘하게 시무룩해 보였다. 더 뭐라고 하려던 찬영이 당황했다.
“꼭 별로라기보다….”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장비를 선물 받아 버스를 태워 주는 게 말이 되나? 그럴 거면 은석이 그냥 부캐릭터를 하나 더 파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혼란스러워진 찬영이 어영부영하던 사이 은석이 잠시만, 하더니 순식간에 우편 수령을 클릭했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수령과 동시에 장비의 거래 가능 횟수가 1씩 더 까여 2회 남았다.
목적을 이룬 은석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평화롭게 미소 짓고 있었다.
또다. 또 이 얼굴에 당했다.
은석의 손에서 마우스를 도로 가져와 상세 정보를 살핀 찬영이 끄응, 신음했다. 블루북에서 거래 가능 횟수까지는 제대로 못 봤는데. 아무래도 외위라는 사람이 직접 만든 아이템은 아닌가 보다.
장비는 거래 가능 횟수가 2회 남았을 때부터 아이템 가격 하락에 영향을 미치고, 1회부터는 시세가 박살 났다. 그때 산 사람은 얼마에 구매했든 간에 다시는 되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대로 은석에게 돌려주는 것도 문제였다.
차라리 돈으로 줄까?
끙끙대고 있는데 은석이 어차피 매물도 없는 김에 대충 쓰다가 나중에 더 좋은 매물이 나왔을 때 팔면 되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팔리면 본인은 그 돈을 가져가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찜찜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게 제일 나은 선택지 같아 찬영도 수긍했다.
일단 아직도 블루북에 아수라 장비만 뜨면 연락을 보내오는 선빈에게 채팅을 했다.
[길드] 앞으로맑음: 선빈 형 아직 있음?
[길드] 보틀: ㅇㅇ?
[길드] 앞으로맑음: 나 이제 아이템 안 봐줘도 될 듯
[길드] 보틀: 오 뭐 삼
[길드] 앞으로맑음: 그 지난번에 봤던거
[길드] 앞으로맑음: [+24 갈망하는 영원의 상의] [+24 갈망하는 영원의 하의]
[길드] 앞으로맑음: [+25 갈망하는 영원의 견갑]
[길드] 빨강색: ?
[길드] 보틀: ?
[길드] 보틀: 설마 진짜 500에 산 건 아니지?
[길드] 보틀: 찬영아 난 너 믿어
[길드] 앞으로맑음: ㅋㅋㅠ ㄴㄴ 은석이 형이 흥정함
[길드] 보틀: 그럼 믿을 만하지
[길드] 보틀: 얼마냐?
찬영도 정확히 얼마인지는 듣지 못했다. 은석이 마시던 물을 내려놓고 채팅을 쳤다.
[길드] 사격: 300 중반 정도
[길드] 보틀: ㅁㅊ
[길드] 보틀: 어케 함
300 중반이라니. 절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시작이 500이었던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네고였다. 놀란 눈으로 은석을 돌아보자 어깨를 으쓱거린다. 진짜 어떻게 한 거지?
[길드] 사격: ㅋㅋㅋ 아무도 문의안왔었나 봄
[길드] 사격: 먼저 쪽지 주던데?
[길드] 사격: 거기서 더 깎았음
[길드] 보틀: 역시 이 서버는 존버가 답이다
[길드] 빨강색: 아니 그럴거면 흥정x라고 써놓지나 말든가
[길드] 빨강색: 가오도 없나 ㅋㅋ
[길드] 앞으로맑음: 그니까
저렇게 바로 꼬리를 내릴 것 같았으면 진작 찬영도 찔러볼 걸 그랬다.
[길드] 도텐: 근데 견갑 23퍼
[길드] 도텐: 그거 그대로 쓸 거임?
[길드] 앞으로맑음: ㅇㅇ
[길드] 보틀: 아 25강 23퍼는 좀 오반데
[길드] 앞으로맑음: 돌리는 게 더 오바야
[길드] 앞으로맑음: 이대로 써야지
[길드] 보틀: 맛만 보자 ㅎㅎㅎ
[길드] 보틀: 크리스탈 한개 지원해줌
[길드] 비테마죽: 한개면 그냥 잡옵되고 끝나는 거 아닌가여ㅋㅋ
[길드] 보틀: 원래 이런 건 잡옵 만들고 시작해야함
두 줄 짜리 유효 옵션을 없애 버리면 더 잃을 것도 없으니 크리스탈을 돌리지 않겠냐는 얄팍한 계산이다. 찬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길드] 빨강색: 또 시작이네
[길드] 빨강색: 할 거면 차라리 문장부터 ㄱㄱ해
[길드] 보틀: 문장은 ㅇㅈ
기왕 크리스탈을 돌릴 거라면 문장이 가장 우선이긴 했다. 그래도 아쉬운데…. 찬영이 장착한 견갑을 곁눈질했다. 구매한 아이템은 건드리는 게 아니라지만 원래 완성되지 않은 아이템을 보면 완벽하게 완성하고 싶은 게 게이머의 마음이었다.
게다가 동명이나 선빈의 말대로 25강을 23%로 쓰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절대로 설득당한 건 아니고.
“근데 견갑도 어차피 크리스탈 돌려야 하는 거 아니야? 25강인데.”
“이거 돌리고 싶구나.”
슬쩍 물었더니 은석은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문장부터 하고, 견갑은 나중에 해. 그때 돌리는 거 도와줄게.”
“뭘 또 도와줘. 괜찮아.”
도와준다고 하면 크리스탈을 지원해 준다는 뜻일 텐데. 도움은 이미 넘치게 받은 뒤였다. 그리고 찬영도 은석만큼은 아니어도 크리스탈을 돌릴 돈 정도는 충분히 갖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크리스탈 돌리기가 시작되었다.
문장은 무기나 보조 무기처럼 공격력 옵션이 나오는 장비였다. 단 보스 공격 시 데미지나 방어력 관통은 안 나왔고 공격력만 나왔기 때문에 추가 옵션이든 초월 옵션이든 노려야 할 옵션은 정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선빈뿐만 아니라 동명과 보은도 같이 화면 공유를 재촉했다. 찬영은 화면 공유를 하는 대신 마이크를 꺼 달라고 부탁했다. 멸망전을 각오했으니 크리스탈을 돌리는 동안 예민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덕에 길드 보이스 코드는 강화 방송치고는 웬일로 조용했다. 대신 채팅 창이 아주 시끄러웠다. 특히 레드 크리스탈 17개 만에 전설 등급이 되었을 때는 렉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원래 되는 날은 쭉쭉 되는 법이다. 전설이 이렇게까지 빨리 떠 줬으니 옵션도 어쩌면 바로 뜰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양심 없는 소리에 반박하듯 처음으로 뜬 33%는 민첩이었다.
[길드] 도텐: 아 또 민첩임?
[길드] 도텐: 민첩 삭제 좀
[길드] 사격: ?
[길드] 비테마죽: ?
[길드] 빨강색: ?
[길드] 도텐: 이런 ㅋㅋㅋ
[길드] 도텐: 길드에 민첩투성이네
다음은 힘이었다. 힘 33%를 본 찬영이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다른 거 돌릴 때나 힘 좀 주지.
힘은 아수라의 주 스탯이었지만 물리 공격력과 비교하면 효율이 너무 낮았다. 힘 33%라고 해 봐야 물리 공격력 한 줄 정도 되려나. 만약 세 줄 중 두 줄이 물리 공격력이고 나머지 한 줄이 힘이었다면 절하고 썼을 것이다.
[길드] 보틀: 찬영아 힘내^^
[길드] 보틀: 아 힘은 이미 넘치는구나 ㅎㅎ
[길드] 앞으로맑음: ㅋㅋㅋ
[길드] 도텐: 와 이걸 참네
[길드] 빨강색: 나였으면 찾아가서 욕했음
[길드] 앞으로맑음: ㄴㄴ
[길드] 앞으로맑음: 나 사격 계정 아이디랑 비번 다 아는데
[길드] 앞으로맑음: 방금 보틀 추방해버릴까 고민함
[길드] 갓말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갓말이: 사실 조금도 참지 않았던 것임
“진짜로 추방해 줘?”
크리스탈을 돌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어나 있던 은석이 찬영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찬영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은석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겠지만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보니 농담인 것 같았다. 하기야 이 정도 장난은 친한 사이에 얼마든지 칠 수 있으니까. 찬영도 가볍게 어울려 줄 마음으로 장난스레 길드 채팅을 쳤다.
[길드] 앞으로맑음: 저기요 보틀님
[길드] 보틀: 왜
[길드] 앞으로맑음: 은석이 형이 형 추방해주냐는데? ㅋㅋㅋ
[길드] 보틀: ㅇ?
[길드] 보틀: 에이 농담이겠지 ㅎㅎ
[길드] 앞으로맑음: 왜
[길드] 앞으로맑음: 진짜일수도 있지
뒤에서 은석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은석에게 추방시켜 달라고 할 마음은 없었지만, 혹시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24시간만 지나면 다시 길드에 가입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일을 저질러도 얼마든지 뒷수습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길드] 앞으로맑음: 조심해 형
[길드] 앞으로맑음: 원래 오는 데는 순서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 없는 거야
[길드] 보틀: ㄷㄷ;;
[길드] 보틀: ㅌㅌ함
[길드] 빨강색: 오
[길드] 빨강색: 드디어 쟤 안 볼 수 있는거임?
바로 도망가 버리는 선빈을 보자 통쾌해졌다. 애인이 길드마스터면 이런 점도 좋구나. 역시 길드원들을 놀리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
그 뒤로도 레드 크리스탈 150개를 더 돌렸지만 물리 공격력은 단 한 줄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지력과 체질 세 줄이 한 번씩 떴다. 생각해 보면 동일 스탯 세 줄을 띄울 확률도 정말 낮은데. 그건 당장 동일 스탯 33% 추가 옵션만 달려 있는 장신구가 경매장에 얼마에 올라와 있나 검색해 보면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옵션이 왜 문장에서는 유독 잘 뜨는 느낌인 걸까. 아무래도 맵이 문제인 것 같아 장소를 옮겼더니 이번에는 마법 공격력 33%가 나왔다.
옵션을 확인한 찬영이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마우스 커서가 마법이라고 쓰인 부분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길드] 갓말이: 와 개주작겜 진짜로
[길드] 갓말이: 그게 왜 거기서 나옴?
[길드] 도텐: ㄹㅇ
[길드] 도텐: 이건 서광진이 해명해야지
서광진은 레비아 온라인의 총괄 디렉터 이름이다. 여느 MMORPG의 디렉터가 그렇듯 유저들이 장비를 강화하거나 크리스탈을 돌릴 때마다 “광진이 형 제발” 같은 말로 소환되고는 했다.
마법 공격력 세 줄이 물리 공격력 세 줄과 확률이 같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뼈가 아팠다. 메가폰으로 아이템을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원래 이런 옵션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크리스탈을 돌릴 수 있는 자만이 물리 공격력 세 줄을 차지할 수 있는 법이었다.
[길드] 보틀: 왜왜 뭔데
[길드] 보틀: 뭐 좋은거 뜸?
[길드] 보틀: 아 마공
[길드] 보틀: 채팅만 보고 물공 세줄 뜬 줄 알았네
[길드] 보틀: 놀랬자나 ㅡㅡ
[길드] 앞으로맑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와중에 선빈은 뒷북을 치고 있었다. 찬영은 그저 웃기만 하고 다시 크리스탈을 돌렸다.
[길드] 도텐: 근데 33퍼가 원래 이렇게 잘뜸?
[길드] 비테마죽: 제 경험으로는 아님
[길드] 보틀: 원래 33퍼 한번씩 다보고 나면 다음에 좋은 거 줘
[길드] 앞으로맑음: 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길드] 갓말이: ㅠㅠ
[길드] 앞으로맑음: 사실 아직까지 이 정도면 괜찮긴 해 ㅋㅋㅋ
어쨌든 전설로 등급 업은 했으니까 지금도 무과금은 아니었다. 사십이만 원이 땅을 파면 나오는 돈도 아니고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이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할 발언이었으나, PC든 모바일이든 가챠 요소가 들어간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 정도 금액으로 직접 최고 등급까지 띄웠다면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을. 교환 가능 장비는 절대 직작 하지 말고 무조건 구매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몇 개 돌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크리스탈이 다 떨어졌다. 찝찝한 상태로 남겨 두기보다는 오늘 끝을 보고 싶은데…. 고민하던 찬영은 캐시샵에 들어가 이십일만 원을 추가 충전했다. 레드 크리스탈 대형 패키지 네 개만큼의 가격이다. 160개면 이 안에 유효 옵션 두 줄은 띄울 수 있겠지? 머릿속에서 행복 회로가 돌아갔다.
그러나 역시 레비아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자에게는 좋은 옵션을 주지 않았다. 크리스탈이 세 개 남을 때까지 물리 공격력의 물 자도 보이지 않아 찬영이 얼마를 더 충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수라의 문장
전설 등급
요구 레벨 100
직업 아수라
거래 불가
힘 +15
물리 공격력 +10
추가 옵션
물리 공격력 +13%
물리 공격력 +10%
물리 공격력 +10%
초월 옵션
물리 공격력 +7%
민첩 +4%
무지성으로 추가 옵션 재설정 버튼만 누르던 찬영이 입을 틀어막았다. 뒤쪽으로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눈을 씻고 봐도 물리 공격력 세 줄이었다.
미쳤다…. 와, 진짜 미쳤다.
은석이 손바닥을 내민 위로 짝짝짝 하이 파이브를 하면서도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얼굴에 열이 오른 게 느껴진다. 물리 공격력 33%의 기댓값만 얼마더라. 이게 말이 되나. 단돈 육십삼만 원만에 이루어 낸 쾌거였다.
오늘 크리스탈을 돌리길 잘했다. 레비아 하기를 잘했다. 게임 하길 잘했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레비아인으로서의 피가 들끓었다. 벅찬 느낌에 심장까지 찌르르 떨려와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짚고 있는데 어느새 의자로 되돌아간 은석이 찬영을 지켜보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왜냐고는 묻지 않았다. 나올 대답이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옵션을 띄운 이후부터 폭발한 채팅 창은 한껏 위로 올라가 있었다.
[길드] 보틀: ?
[길드] 갓말이: 헐 ㅁㅊ
[길드] 도텐: 뭐임?
[길드] 도텐: 이게 되네;;
[길드] 비테마죽: ㄷㄷㄷㄷ 이제 다뒤졋다
[길드] 비테마죽: 나메 딱대
[길드] 보틀: 아니 진짜 버그 아니냐고
[길드] 보틀: 쟤 계정에 뭐있다니까?
[길드] 갓말이: 앞으로맑음 서광진 조카설...
[길드] 빨강색: ㅋㅋㅋㅋㅋㅋㅋ ㅊㅊㅊ
[길드] 빨강색: 기댓값보다 훨씬 이득봤네
[길드] 보틀: 야 안되겠다
[길드] 보틀: 나도 크리스탈 돌리러 감 ㅅㄱ
[길드] 앞으로맑음: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길드] 앞으로맑음: 진짜 감사합니당
[길드] 앞으로맑음: 세상 모든 게 다 아름다움
문장의 추가 옵션이 완성되었으니 한계의 탑 기록도 경신할 수 있겠지. 얼마나 세졌을까 상상만 해도 두근거렸다. 이 기회에 아래쪽도 돌려 버릴까? 초월 옵션의 등급 업 확률은 추가 옵션보다 훨씬 낮다지만 오늘처럼만 된다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길드] 도텐: 이제 마이크 켜도 됨?
[길드] 앞으로맑음: 그럼 당연하지
[길드] 앞으로맑음: 형이 말할 때마다 박수 서비스도 가능
[길드] 도텐: 아니 그건 됐고;;
[길드] 사격: ㅋㅋㅋ
[길드] 보틀: 근데 진짜 잘가긴 했음
[길드] 보틀: 고은석이 문장 추옵 띄우는데 얼마 썼더라 ㅎ
[길드] 사격: 그런 게 뭐가 중요해
[길드] 사격: 찬영이가 빨리 뜬 게 중요하지
[길드] 사격: 둘중에 한 명이라도 잘 가는 게 나음
[길드] 앞으로맑음: ㅜㅜㅜ
[길드] 빨강색: 참사랑이네
[길드] 보틀: ㄹㅇ
[길드] 보틀: 60만원vs1700만원
[길드] 보틀: 주의 : 추옵만임
[길드] 빨강색: ㅋㅋㅋㅋㅋㅋㅋ
뭐라고요? 천칠백만 원?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띄운 추가 옵션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찬영이 경악했다. 말이 천칠백만 원이지 그 돈이면 차 한 대 값이다.
이 형은 왜 잘된 게 단 하나도 없어? 게임이 접으라고 등을 떠미는 수준이라고는 들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삐걱거리는 목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자 은석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거 아니야.”
“아냐?”
[길드] 사격: 뭔 1700이야;;
[길드] 사격: 아님
처음에는 금액이 금액이니만큼 선빈이 MSG를 좀 쳤겠거니 했다. 그런데 은석의 반응을 보니 어딘가 묘하다.
갑자기 선빈의 말에 대한 신뢰도가 일직선으로 상승했다. 신경 쓸까 봐 또 거짓말을 치는 건가. 아무래도 전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찬영은 은석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은석이 다시 말했다.
“진짜 그 정도는 안 썼어.”
[길드] 보틀: 어 영상도 있어^^
[길드] 보틀: 화공 켜서 보여줘?
그러나 은석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을 선빈이 진실을 밝혔다. 찬영은 손가락으로 모니터 속 채팅 창을 가리켰다.
“선빈이 형이 영상도 있다는데?”
“…….”
이제 변명을 포기했는지 은석은 말없이 타자를 쳤다. 뭐라고 썼는지나 볼까. 웃음을 참으며 화면을 본다.
[길드] 사격: 앞으로 화공 절대로 안함
[길드] 사격: ㅅㄱ
[길드] 보틀: ㅇㄴ
[길드] 보틀: 바로 지운다
[길드] 빨강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문장 추가 옵션으로만 천칠백만 원을 썼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 돈이면 새로 하드 나이트메어 3~4인팟 격수 하나쯤은 너끈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방금은 웃고 넘겼는데 계산하자마자 숨이 턱 막혀 왔다.
설마 한 번에 쓴 건 아니겠지?
프로 과금러들은 현질 효율을 따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찬영이 에이나인 때부터 지켜본 것에 따르면 그건 다 착각이다. 심지어 쓰는 돈의 단위가 다른 랭커들도 그랬다. 그들만큼 돈을 쓰면 쓰는 대로 강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유저 층도 드물었다. 물론 은석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서도….
“형.”
“응?”
“내가 형 꼭 하드 데보 버스 해 줄게.”
찬영이 굳게 말했다. 언젠가가 아니라 머지않은 미래에. 도핑을 떡칠하든 장비를 더 맞추든 보조를 데려가든, 어떻게 해서라도 은석의 손해를 메워 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은석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대해야겠네, 하고 느슨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 * *
찬영은 은석의 집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손에는 팝콘과 맥주가 들어 있는 편의점 비닐 봉투가 걸려 있었다. 도어록 비밀번호쯤이야 은석이 알려 준 지도 오래되었으니 이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하는 까닭은 다른 데 있다.
성인 둘이서 늦은 시간에 집 데이트를 한다고 하면 보통은 그렇고 그런 의미로 보겠지. 지난번의 일이 떠오른다.
지금까지는 은근슬쩍 피해 왔지만 이번에는 찬영도 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 해 온 상태였다. 찬영은 주머니 안에 있는 포일 포장지를 만지작거렸다. 잡히는 건 콘돔과 젤 두 가지였다. 몇 개나 필요할지 몰라서 손이 닿는 대로 집었다.
지금의 상황을 은석이 알았다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웃다가 뭘 그런 걸 신경 써, 했겠지만…. 그럴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다.
원래부터 집 데이트를 계획했던 건 아니었다. 황금 같은 주말 오후인 만큼 서울 근교로 같이 드라이브라도 나갈 생각이었다. 북악스카이웨이라든가, 남한산성이라든가, 송도라든가…. 사실 유명하지 않더라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살랑살랑 아름다운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옆에는 항상 은석이 있을 것이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릴 때마다 옆으로 슬쩍 뻗어 오는 손이 좋았다. 그걸 갖고 이리저리 장난을 치고 있으면 은석은 못 말리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했는데, 이따금 그 표정을 보기 위해 일부러 장난을 치기도 했다.
‘미안해. 오늘 늦을 것 같아. 직원이 집안 사정이 생겼다네.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집에 먼저 가 있어.’
부풀었던 기대는 은석의 전화에 금세 쪼그라들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은석이 약속을 취소했을 리가 없다. 분명 대타를 구할 상황도 안 됐겠지. 알면서도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실망감은 가시질 않았다.
이럴 거면 직접 보러 갈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드라이브를 기대했던 것도 드라이브 자체보다는 같이 갈 사람의 영향이다.
찬영이 물었다.
‘내가 그쪽으로 가면 안 돼? 들어올 때 같이 들어오면 되잖아.’
‘나도 그러면 좋긴 한데…. 일하고 있으면 신경 거의 못 써 줄 거라서.’
너 서운하게 만들기 싫어. 은석이 덧붙였다.
은석이 운영하는 카페는 찬영도 몇 번 들른 적이 있다. 내부는 시간대를 막론하고 항상 손님이 많았다. 바쁠 은석에게 뭘 기대하고 가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있어도 상관없는데.
그러나 반대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사무실 한편에 은석을 덩그러니 앉혀 놓고 혼자만 바쁘게 일한다? 찬영 역시 은석과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알았어. 대신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와.’
‘들어갈 때 전화할게.’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었다.
은석은 제가 없어도 편하게 왔다 갔다 하라고 했지만 주인 없는 집에 막 드나들기는 민망했다. 당연히 이 집에 혼자 와 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현관문 앞에서 은석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결국 찬영은 도어록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급하게 나갔을 테니 좀 어질러져 있을 만도 한데 집 안은 평소와 같이 잘 정돈된 채였다. 그럼에도 은석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거실이나 주방, 욕실, 안방, 그리고 컴퓨터 두 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 작은 방까지.
집 안을 서성이다가 그런 흔적들을 보게 될 때면 둘이 함께 있을 때가 생각났고, 동시에 은석이 아주 많이 보고 싶어졌다. 특히 작은 방이 그랬다. 이 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게 작은 방이라 그런가.
지난주만 해도 여기 앉아서 강화를 하고 레드 크리스탈을 돌렸는데.
찬영은 똑같이 생긴 의자 중 오른쪽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바탕 화면에 있는 게임은 레비아 온라인 하나뿐이다. 주로 찬영이 썼던 컴퓨터라 그렇겠지만 왼쪽의 상황도 별로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은석에게서 레비아가 아닌 다른 게임을 한다고 들은 적은 없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왼쪽 컴퓨터를 켜 보니 방금 전 봤던 화면과 거의 똑같았다. 총 열 개도 안 되는 아이콘 사이 게임이라고는 단 하나, 레비아만이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흔하다는 ROL, 고급시계, 배틀 로얄은 물론이고 스콘을 비롯한 게임 플랫폼, 하다못해 모바일 게임을 PC에서 돌리기 위한 앱 플레이어 프로그램조차 없다.
이걸 은석이 접었으면 좋겠다던 사람들이 좀 봐야 할 텐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인다.
찬영은 은석의 컴퓨터 바탕 화면을 캡처해서 아웃벤에 올리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본인들이 그렇게나 관종 같다며 씹어대던 사격이 레비아에, 더 나아가 윈드 러너에 얼마나 진심인지 하나하나 근거를 짚어 주며 키보드 배틀을 뜨는 상상도 했다.
…이런 건 역시 좀 이상한가?
고개를 가로저은 찬영이 다시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고 나오기 전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본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사냥이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항상 둘이 같이 있던 방에서 홀로 있으니 레비아고 뭐고 쓸쓸하기만 했다.
언제 오려나. 보고 싶다.
천천히 오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사실은 은석이 얼른 왔으면 싶었다.
* * *
거실 한가운데 소파에 앉아 있다가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져서 눈을 떴더니 은석이 있었다. 잠이 덜 깬 탓에 반응이 느려진 눈을 몇 번 깜박이던 찬영이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언제 왔어? 전화한다며.”
“전화했는데 안 받길래.”
“아…. 무음 모드였나 보다. 미안.”
찬영은 소파 팔걸이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예상대로 핸드폰은 무음 모드였고 부재중 전화 표시가 떠 있었다.
“더 안 자도 돼?”
“됐어. 이제 잠 안 와.”
말과는 달리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뻘쭘해진 찬영이 헛기침을 했다. 팔자 좋게 누워 있기까지 했던 걸 보니 집 앞에서는 그렇게 긴장을 해 놓고 아주 푹 잤나 보다.
그러고 보니… 집 안도 온통 어두웠다. 불을 끈 기억은 없는데. 은석이 껐나.
멍하니 앉아서 거실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은석이 볼에다 뽀뽀를 했다. 소리 없는 뽀뽀는 볼을 이어 눈가에도 여러 번 쏟아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행동을 끔벅 지켜보다 어이가 없어진 찬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마음이었는데. 아직도 만족을 못 했는지 한차례 더 하려는 걸 장난스럽게 밀어낸다.
“어허. 누가 형 마음대로 뽀뽀하래.”
“하면 안 되는 거야?”
“안 되지, 그럼. 내 볼은 비싸. 앞으로는 허락받고 해.”
찬영이 턱을 치켜들었다. 물론 말만 그랬지 은석이 원한다면 언제든 허락해 줄 의향이 있었다. 찬영도 은석의 얼굴에 마음대로 뽀뽀해야 하니까.
“한 번만 더 하면 안 돼?”
“하고 싶어?”
“응.”
“그럼 딱 한 번만이야.”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눈을 감고 볼을 가까이 대 주자 기다렸다는 듯 냉큼 입술이 맞닿는다. 늘 그랬듯 따뜻하고 말랑했다.
저녁은 은석이 집 근처에서 사 왔다는 초밥으로 때웠다. 식사를 하면서 알았는데 은석이 집에 도착했던 시간은 찬영이 일어났던 시간보다 훨씬 일렀던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걱정돼서 들어왔다가, 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내려가 초밥을 포장해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찬영은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점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깨우지 그랬어, 했더니 그러기에는 너무 곤히 자고 있었다는 말이 돌아왔다.
어쩐지 집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도 너무 늦었다 싶었는데. 갑자기 미안해진다.
하루 종일 고생했을 은석을 먼저 씻으라 보내고 뒷정리를 했다. 다음으로는 찬영이 씻었는데, 다 씻고 나서 보니 수건이 화장실에 없었다. 집주인인 은석에게 물어보기 위해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는데 바로 앞에 수건과 갈아입을 옷이 놓여 있었다. 옷부터 들어 올리자 어딘가 익숙한 무늬가 눈에 띈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그 답은 나와서 은석과 마주했을 때 바로 알 수 있었다. 색만 다른 커플 잠옷이었다. 일부러 맞춰서 사 온 걸까? 그렇다면 대체 언제?
“잘 어울리네.”
은석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찬영은 괜히 손가락으로 잠옷을 문질러 보았다. 재질은 잘 모르겠지만 감촉이 부드러웠다.
잔뜩 젖은 머리는 은석이 말려 주었다.
먼저 수건으로 머리를 꾹꾹 누른 은석은, 찬영의 머리카락을 결대로 살살 쓸어 넘겨 가며 바람을 넣었다. 머리카락 사이 드라이어를 집어넣고 대충 몇 번 흔들고 마는 찬영보다 배는 섬세한 손길이었다. 적당히 뜨뜻한 바람을 느끼던 찬영이 드라이어를 끄는 소리에 눈을 떴다. 만져 보니 머리가 뽀송뽀송하다. 아주 만족스러운 한편으로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다.
“형이 머리 말려 주는 거 습관 돼서 큰일났어.”
“그게 왜. 앞으로도 내가 계속 말려 주면 되지.”
“누가 보면 난 손도 없는 줄 알겠네. 이러다가 형 없으면 머리도 못 감게 되고 막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러게. 안 되겠다. 평생 같이 살아야겠다.”
좀 어리광을 피운 것뿐인데 돌아온 대답이 지나치게 말랑하다. 심장이 덜컹거렸으나 이런 말에 내성이 없는 찬영은 못 들은 척 넘겼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를 볼 차례였다. 팝콘은 은석에게 떠넘기다시피 하고, 찬영은 맥주캔 하나만을 든 채 그 옆에 앉았다.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거론되는 이 영화는 멜로 장르로, 서로 끔찍이 싫어하던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일을 같이 하게 되면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여러 번 봤다는 은석은 그래도 화면을 열중해서 보고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이탈리아는 마치 그림 같았다. 현실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겠지만….
“예쁘긴 하다.”
“한 번 갈까?”
찬영은 고개를 돌려 은석을 보았다. 요즘 엄청나게 바빠 보이던데. 이렇게 휴무를 막 정해도 되는 건가? 아무리 직원을 따로 두고 있다고 해도.
“형 바쁜 거 아니었어?”
“아무리 바빠도 너한테 뺄 시간이 없겠어?”
“뭐야, 그 말은.”
“나보다는 네가 더 시간 빼기 힘들걸.”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유럽으로 간다면 최소 며칠은 잡고 가야 할 텐데 회사원은 장기 휴가를 내는 게 쉽지 않다. 명절을 빼거나 샌드위치 데이에 연차를 붙인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지만…. 회사에서 별로 안 좋아하려나?
어찌 됐든 이제 명절에 외로울 일은 없겠지.
“형이랑 가면 다 좋을 것 같아.”
물끄러미 엔딩 크레디트를 보던 찬영이 중얼거렸다.
“이탈리아?”
“그것도 그렇고, 그냥 전부 다. 같이 하면 다 좋을 것 같아서.”
꼭 어디를 가지 않더라도 은석이 옆에 있다면 뭐든 즐거울 것 같다. 찬영은 맥주캔을 쥐고 가만히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 다른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은석에게 하루 종일 옆에만 있어 달라 하고 싶었다. 피차 일하는 입장에서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맨날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이 있으면 되지.”
그래도 산뜻한 대답은 듣기 좋았다. 흐흐 웃은 찬영이 은석에게 좀 더 파고들었다. 입술에 입을 맞춘다. 장난처럼 몇 번을 반복하자 은석이 짧게 웃고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대로 입술을 가르고 혀가 들어온다. 입천장을 나긋이 간질이며 키스는 점점 깊어졌다. 어어…. 찬영이 움찔 뒤로 물러났으나 어차피 소파 위였다.
자연스럽게 몸이 소파 좌석으로 넘어갔다. 은석의 한 손은 찬영의 목 뒤쪽, 다른 한 손은 등을 감싸듯 안았다. 소파는 충분히 넓었지만 그렇다고 성인 남자 둘이 서로를 껴안고 엎치락뒤치락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은 안 됐다. 떨어진다, 싶었을 때쯤 은석이 다시 찬영의 몸을 끌어 올렸다.
처음은 상체가 붙었고 다음은 하체였다. 동시에 바지 아래 뭔가 닿는 게 느껴졌다. 닿는다기보다 찌른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했다. 단단하게 선 크기를 직감하고 찬영은 등이 오싹해졌다. 지난번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고, 다정하게 시선을 맞춘 뒤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갑자기? 지금은 아무리 봐도 옷을 벗거나 벗기거나 할 때지, 이대로 멈출 때는 아니다. 찬영이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물었다.
“이 상황에?”
“무서워하는 것 같길래.”
“…….”
그렇게나 피해댔으니 티가 났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갓 스무 살도 아니고 스물일곱도 다 지나가는 겨울에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나. 심지어 찬영은 연애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민망해진 찬영이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무섭긴 무슨. 하나도 안 무섭거든?”
“아니었어?”
“당연하지. 원래 오늘 하려고 온 거야.”
마지막 말을 할 때는 목에 잔뜩 힘을 주었다. 자존심 때문에 약간 오버하긴 했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찬영은 슬쩍 아까 벗어 둔 옷이 있을 방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여기까지만 하고 말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콘돔이나 젤 같은 걸 가져왔을 리가 없다. 하고 싶은 마음으로 따지자면 은석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은석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침대로 가자.”
찬영이 호기롭게 말했다.
* * *
안방 침대는 소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널찍했고 푹신했다. 잠옷의 단추가 하나둘씩, 그러나 빠르게 풀려 나갔다. 가슴팍 위로 긴 손가락이 닿자마자 온몸이 조여들 듯 긴장했다. 주변만 조금 건드린 것뿐인데 돌기가 금세 위로 솟아올라 빳빳해진다. 배와 옆구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도 이상했다.
찬영은 불규칙적으로 커지는 제 숨소리를 들으며 어깨를 비틀었다. 곧 눈과 코, 인중, 입술, 턱, 뺨, 귀, 목으로 수없이 애정 어린 입맞춤이 떨어졌다. 아까도 분명 이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옷을 벗고 있어서인지 뭔가 달랐다.
…원래부터 이렇게 예민했었나? 생전 처음 겪는 감각이다. 쪽쪽거리는 소리와 다정한 웃음이 가뜩이나 달아오른 몸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넋 놓고 있는 사이 바지와 속옷이 벗겨졌다. 혼자만 완전한 나신이라는 사실을 채 수줍어하기도 전에 은석이 능숙하게 귀를 샅샅이 핥고 깨물었다. 깨문다고 해 봐야 약한 강도라 아프지는 않았는데 혀가 귀 안과 가까워지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잠깐만, 당황한 찬영이 화들짝 솟아오르며 몸을 뒤로 뺐지만 은석은 평소와 다르게 찬영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으, 응, 읏, 찬영은 눈을 질끈 감으며 허덕였다. 고작 귀 하나를 건드렸을 뿐인데 눈앞이 캄캄했다. 온몸에 끈끈하게 열이 오른다. 와중에 허벅지와 사타구니 근처로 닿는 성기는 소파에서보다 훨씬 노골적이었다.
숨이 차서 몇 번을 헉헉거리던 찬영은 입 밖으로 신음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민망함에 입술을 팍 깨물자 끈질기던 애무가 멈추고 입가로 은석의 손가락이 닿는다.
“소리 듣고 싶어.”
그런 말을 하며 은석은 볼을 쿡쿡 찔렀다. 찬영이 거의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자 옅게 웃는 얼굴은 사정없이 말갛고 고왔다. 은석은 종종 찬영을 보며 말랑말랑하고 귀엽다는 낯 뜨거운 소리를 해댔지만…. 찬영이 보기에 진짜로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쪽은 은석이었다. 그러니까 은석이 말하면 뭐든 들어주고 싶은 거지.
가져온 콘돔과 젤은 이미 은석에게 이실직고한 지 오래다. 그대로 일회용 젤 몇 개를 뜯은 은석이 찬영의 다리를 벌려냈다. 젤 여러 개를 쏟아붓다시피 한 은석의 손가락이 좁은 안을 풀듯 부드럽게 쑤셨다.
하나둘 늘던 손가락은 마침내 세 개까지 들어왔지만 오랜 시간을 거쳐서인지 아프다거나 거슬린다거나 하는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뭉근한 감각에 기분이 좋았다. 은석이 몽롱하게 취해 끙끙거리던 찬영의 구멍 안쪽 이곳저곳을 눌러 보던 때였다. 찬영이 크게 숨을 들이켜며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여기가 좋아?”
은석이 반색했다. 구부린 손가락이 방금 찬영이 반응한 곳을 거의 잡고 만지듯 집요하게 문질렀다. 허억, 배와 사타구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요도구에서 쿠퍼액이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찬영은 입술을 발발 떨며 몸을 잔뜩 말았다. 계속되는 자극에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지만 처음을 손가락으로 가 버리고 싶지는 않아 필사적으로 참았다.
이 정도면 바로 넣어도 될 것 같은데. 전부 들어오더라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만용인지도 몰랐지만 얼른 은석의 것을 넣고 싶었다. 더는 참기 어려운 지경까지 가자 찬영이 다급하게 은석의 팔을 붙잡았다.
“손가락, 흐으, 응, 말고.”
“말고?”
“형 거, 빨리이, 아! 넣어 줘.”
“지금 넣으면 아플걸.”
찬영이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아파도 상관없다는 의사 표시에 은석은 간신히 참고 있는 것처럼 낮게 그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 없다고 알려 줘야 했다. 조바심이 난 건 찬영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마음의 준비 따위로 낭비한 시간이 아까웠고 은석과 얼른 온전히 연결되고 싶었다.
아래로 들어온 손가락을 빼고 허겁지겁 은석의 바지와 속옷을 내렸다. 크다기보다 거대하다고 표현해야 마땅할 성기를 더듬거리며 제 엉덩이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은 콘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꼴을 본 은석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찬영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고은석은 고은석이어서, 옆에 놓아둔 콘돔을 뜯고 제 성기에 씌우는 일을 잊지 않았다. 다만 너무 오래 인내한 탓인지 찬영의 다리를 붙드는 손에는 힘이 강하게 들어가 있었다.
입구 근처를 비비던 두꺼운 귀두는 충분히 풀린 걸 확인하자마자 내부를 꿰뚫고 들어왔다. 방금 전 그토록 기대했던 일이었다. 아…. 아, 묵직한 느낌에 찬영의 눈과 입이 헤벌어지고 엉덩이가 들렸다. 동시에 분출만을 기다리던 성기가 하얗게 정액을 토해 냈다.
느끼는 지점이고 뭐고 간에 안이 다 짓눌리는 느낌은 심하게 자극적이었다. 그런데도 다 들어온 게 아닌지 은석은 목과 등을 쉴 새 없이 쓰다듬으며 찬영의 안으로,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미 숨을 쉬고 내쉴 때마다 배 안을 꽉 채운 듯한 부피가 느껴지는데도 끝이 없었다.
찬영이 머리를 휘휘 흔들었다. 넣고 보니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여기서 움직이기까지 하면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이게 어떻게 돼? 레이드도 처음엔 어려운데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섹스도 그렇게 되나? 그렇다고 해도 단언컨대 이 정도로 막막했던 적은 없다.
조금만 움직여도 세차게 퍼득거리는 찬영에 은석이 허리 짓을 멈췄다. 그리고 찬영의 뺨과 눈가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힘들어?”
힘들다고 하면 곧장 멈춰 줄 기세였다.
“힘든, 게… 아니라아, 흑!”
굳이 따지자면 힘들기보다는 좋은 쪽에 가까웠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몸뚱이가 자꾸만 바들바들 떨며 옴죽거렸다.
찬영의 반응을 본 은석이 그제야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 고백할 때도 저렇게 웃었는데.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찬영이 멍하니 생각했다.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은석은 좀 더 거침이 없어졌다. 단단한 성기가 찬영이 느끼는 극점만을 가차 없이 찔렀다. 허리가 제멋대로 들썩였다.
찬영의 것은 두 번 더 사정한 뒤에도 내내 서 있었다. 사정 직후 물렁해지려고만 하면 은석이 다시 세웠기 때문이다. 매끈한 손이 기둥을 훑고 끝을 마음껏 주무를 때면 온몸이 다 허물어졌다.
“하아, 앗, 흐으, 응, 아…!”
찬영은 자꾸만 간지러운 느낌에 은석에게 매달렸다. 이미 안을 빠듯하게 채운 성기가 움직이며 선단 끝을 내벽의 요철에 비빌 때마다 그 간지러움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짜릿함을 잊지 못한 찬영이 쾌감을 좇으려 허우적거렸다. 얼핏 신 느낌이기도 했고 한기 같기도 했고 번개를 맞은 것 같기도 했다.
발가락을 오므리는 것 정도로는 견디지 못한 발이 마구 힘을 주고 밑의 이불을 차댔다. 시트가 엉망으로 주름졌다.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을 만큼 거센 감각인데도 은석과는 계속 가까이 붙어 있고 싶었다. 이대로 몸이 터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도리어 제 쪽에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하…. 깊게 숨을 내쉰 은석이 찬영의 허벅지를 그러쥐고 바짝 당겼다. 곧 한계까지 들어와 있던 성기가 말도 안 되게 깊은 곳을 찧으며 배 안이 섬찟할 만큼의 충격이 닥쳤다. 아… 힉, 찬영이 이불을 움켜쥐며 등을 뒤쪽으로 젖혔다. 엉덩이가 경련하듯 달달 떨렸다. 입 밖으로는 우는 소리 비슷한 게 나가고 있었다.
“형, 나, 아, 제발, 흑, 으으응, 아아….”
기분이 좋다는 말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막힌 희열감이었다. 이러다 섹스 도중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겁을 집어먹은 찬영이 주춤 물러서려 하자 은석이 달래듯 속삭였다. 괜찮아, 보기 좋아, 예뻐, 사랑해. 쏟아지는 쾌락에 어느 순간부터 기억나는 건 그런 말들뿐이었다. 보기 좋다고?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은석은 찬영의 귀를 녹아내리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했다. 말도 안 되게 듣기 좋았다.
“더… 듣고 싶어. 계속해 줘.”
울음을 참으며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자 사근사근 간지러운 단어가 이어졌다. 저도 잘 모르는 곳 어디가 어떻게 예쁜지 짚어 주는 말을 듣고 있으니 귀 끝이 오싹하게 저렸다. 찬영은 온통 새하얘진 머릿속에도 더듬더듬 은석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은석이 좋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 * *
간밤의 여파인지 목이고 허리고 다리고 엉덩이고 온몸이 얼얼했다. 몇 번 움직여 본 끝에 찬영은 침대를 벗어날 생각을 단념했다. 대신 갈라진 목소리를 작게 가다듬었다.
바로 옆을 돌아보면 은석이 있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자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보통은 찬영이 취해서 먼저 자 버리거나, 밤이 되기 전에 집에 돌아가거나 했으니까.
은석은 잘 때도 숨소리가 골랐다. 말끔한 볼을 살살 집어 당기던 찬영이 곧 은석의 눈썹뼈와 눈 옆, 볼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눈두덩이 아래 곱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찬영의 입술을 살살 간질였다.
자기 전, 늘어진 찬영을 씻겨 주면서 은석이 한 말이 있었다.
‘나랑 하면 다 좋을 것 같다고 했지.’
‘응.’
‘나도 그래, 찬영아. 너랑 하는 건 다 좋아.’
그 말이 찬영에게 얼마나 사랑스럽게 들렸는지는 은석 본인도 모를 것이다. 잠이 들 때까지 내내 저를 끌어안고 토닥이던 포근한 온도도.
찬영은 은석의 귀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댔다. 어제 은석이 했던 것처럼 귀 끝을 물자 움찔 고개가 흔들린다.
…깬 건가? 숨을 죽이고 있던 찰나 몸이 확 당겨졌다. 감았다 뜬 눈앞에는 은석의 얼굴이 있었다.
“뭐해.”
“형 자고 있는 거 아니었어?”
“한참 전에 깼어.”
말한 은석이 찬영을 끌어안았다. 어쩐지. 방금 잠에서 깼다기에는 지나치게 또렷해 보인다고 했다. 찬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아까도 자는 척했던 거야?”
“너 뽀뽀할 때? 깨 있었지.”
“와, 난 형 자는 줄 알고 한 건데….”
“그런 것 같아서 모른 척했어. 일어난 거 알면 멈출까 봐.”
대답이 제법 파렴치하다. 찬영은 금세 헤벌쭉해져 은석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자고 있는 은석도 좋지만 역시 깨어 있는 은석이 좀 더 좋았다. 이렇게 바라보고, 대화하고, 안고 있는 것만으로 깊은 충족감이 피어오른다.
은석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 된다는 거 아는데 집에 가지 말라고 하고 싶다.”
“왜 안 되는데? 나 출근할 때 힘들까 봐?”
“아침에 오 분이라도 더 재워야지.”
“그래도. 하룻밤만 더 자면 안 되나?”
아침잠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 안 되는 생각이었다. 은석의 집에서 찬영의 회사까지는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도 잠깐의 헤어짐이 아쉬워서 그런가, 여기서 회사까지 여덟 시 사십 분까지 도착하려면 새벽 몇 시에 알람을 맞춰 두면 될지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찬영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은석과 눈을 맞췄다. 이제는 정말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형이 말했던 거 있잖아. 그거 하자.”
“뭘?”
“레결.”
결혼 이벤트 기간은 화요일이 끝이었다. 물론 이틀만이라도 더 놀릴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사르르 웃는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으니 애틋함이 솟구쳤다. 사실 별것도 아닌 고작 게임 결혼이다. 어그로 끌릴 것 같으니 안 한다던 사람은 어디로 가고?
어차피 이럴 거였으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업보니 뭐니 하지 말고 은석이 처음 말했을 때 진작 하자고 할걸. 그럼 이 얼굴을 조금이라도 빨리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은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찬영의 귀에 달큰하게 속삭였다.
“그냥 같이 살까?”
“같이? 여기서?”
“여긴 너 다니는 회사랑 너무 머니까 가까운 데로.”
차라리 정말 그럴까. 찬영은 냅다 그러자고 대답하고 싶어졌다.
같은 서울 지역 내라고 해도 이사가 아주 큰 일이라는 것도, 그리고 같이 산다는 건 이렇게 덜컥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집에 오면 은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니. 그런 일이 매일이라니. 현실적인 생각들은 모조리 뒤로 밀려 나갔다.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제안이었다.
찬영이 한술 더 뜨며 말했다.
“내일 바로 부동산 가자.”
“리스트 뽑아 볼게.”
“같이 찾아보면 되지. 어차피 주말인데.”
거듭되는 직진에 은석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저를 끌어안는 단단한 팔을 느끼며 찬영은 눈을 감았다. 일단 지금은 이대로 붙어 있고 싶었다.
<랜선 연애 법칙 끝>
* 각주 모음
[1] 딜컷: 데미지가 높은 스킬의 쿨 타임이 돌 때까지 딜링을 멈추고 기다리는 것. 보스 몬스터가 특정 체력이 되면 사용하는 까다로운 패턴을 최대한 덜 보기 위함.
[2] 니선겜 악깡버: ‘네가 선택한 게임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의 줄임말.
[3] 누칼협: ‘누가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함?’의 줄임말.
[4] 짤패: 잔돈을 말하는 속어 짤짤이와 패턴을 합친 말로, 치명적이지 않은 보스의 공격을 총칭함.
[5] 파황: 직업명 파이터와 성능이 매우 좋은 캐릭터를 뜻하는 게임 은어 황제를 합친 말.
[6] 잠수함 패치: 유저들에게 별다른 공지 없이 게임 내의 수치나 기능을 변경하는 패치를 말함.
[7] 듣코: 듣다+보이스 코드. 마이크를 켜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만 한다는 뜻.
[8] 혐사꾼: 혐오스럽다와 장사꾼을 합친 말로, 주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아이템을 판매하는 장사꾼에 대한 멸칭으로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