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Late Night
정찬영: 거의 다 온 듯?
정찬영: 터미널 바로 옆인 거 같은데
은석이 형: 알았어
해운대시외버스터미널은 도시 이름값에 비해 아주 작았다. 보조 터미널 정도로 쓰는 건가. 하기야 스무 살쯤 부산에 버스를 타고 왔을 때도 이쪽으로는 안 왔던 것 같다. 워낙 KTX 노선이 잘 뚫려 있기도 하고.
문이 열리자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뒤쪽으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아이보리색 코트에 검정색 티셔츠, 그리고 청바지. 특별할 건 전혀 없는데 한눈에 들어온다. 은석이 하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던 찬영이 그대로 정지했다. 그래 봐야 벌써 눈앞이다. 은석은 자연스럽게 찬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밥은?”
“안 먹었어.”
“그럼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이 시간에?”
어리둥절해진 찬영이 물었다. 연 데가 있긴 하나? 웬만한 식당은 진작 다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먹고 싶은 게 전혀 없었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아침의 두유와 과자 몇 개뿐인데 배가 하나도 안 고팠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딱히 없는데.”
“그래도. 밥 안 먹었다면서. 뭐든 말해 봐.”
“뭐든?”
찬영이 은석의 말을 되풀이했다. 이 년 동안 구매팀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절실히 배운 원칙 중 하나가 협상 테이블에서 ‘뭐든’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상대 쪽에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니까.
“그럼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이스크림?”
“맥버거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그러니 이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거지. 허를 찔린 표정을 보고도 찬영은 모른 척 맥버거만을 고집했다.
그렇게 간 해운대 맥버거에서, 성인 남자 둘이 앉아 달랑 아이스크림 하나만 시켜 먹었다. 아이스크림 중에서도 제일 싼 800원짜리 소프트콘을 먹고 있으니 은석의 마음엔 영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산까지 와서 왜 이런 걸 먹어.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어? 회라든가.”
“너무 늦었어. 그리고 나 차 오래 타서 밥 생각 하나도 안 나. 점심도 엄청 많이 먹었고.”
“점심 뭐 먹었는데?”
“그냥 회사 식당에서 나오는 거 먹었지. 오리불고기랑, 유채나물이랑, 쌈이랑….”
오리불고기는 내일 점심 메뉴였고 유채나물과 쌈은 생각나는 대로 불렀다.
찬영의 거짓말이 서투른 탓인지 본인의 눈치가 너무 빨라서인지 은석은 찬영이 메뉴를 줄줄 읊는 모습을 묘한 눈으로 보았다. 찬영은 등을 뻣뻣이 세우고 딴청을 피웠다. 어차피 직접 털어놓지 않는다면 모를 것이다. 은석이 독심술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에야. 원래 이럴 때일수록 뻔뻔하게 나가야 했다.
그래도 쫄리긴 해서, 찬영은 괜히 창밖을 보며 말했다.
“오션 뷰만 좋은 줄 알았는데 씨티 뷰가 더 좋네.”
말하고 나자 금세 민망해졌다. 맥버거가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이 층짜리였기 때문에 씨티 뷰라 할 만큼의 뷰가 없었다. 기껏해야 반대편 건물 같은 층이 보이는 게 다다. 그것 말고는 근처에 바다가 있겠다, 대충 분위기만 나는 풍경 정도.
은석이 그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가서 보면 다를걸? 바다 갈래?”
같이 걷자. 또 그렇게 웃는다. 치사하게. 은석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한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같이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찬영은 대답 대신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모두 털어 넣었다. 마음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 * *
둘은 별다방과 도넛 가게를 지나, 해변 근처 호텔과 콘도에서 나오는 야경을 향해 계속 걸었다.
내일이 주말도 아닌 평일 밤인 데다 여름 성수기도 아니라 그런지 거리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낙곱새집이나 맥줏집에서 취해서 나오는 사람들과는 종종 부딪혔다. 서울에서 살면서 사람과 부딪히는 데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찬영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때마다 은석이 감싸듯 찬영의 팔을 잡고 끌었다.
마지막으로 횡단보도를 건너자 눈앞에 바다가 보였다. 계단 몇 개만 내려가면 모래사장이고 바다다. 해변에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찬영은 파도가 치는 바로 앞까지 성큼성큼 나아갔다.
녹색의 밤바다는 끊임없이 물결 지어 넘어오다 끄트머리에서 흙과 뒤섞이며 하얗게 부서졌다. 그 광경을 보며 찬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바다는 원래도 좋아했지만 지금은 보이는 모든 것들이 반짝거린다. 좋아하는 풍경에, 좋아하는 소리에, 바로 옆에는.
고개를 돌리자 은석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한동안 그대로 고요하게 있었다. 내내 기대하느라, 또는 가라앉느라 널뛰기를 하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것도 같았다.
은석이 먼저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래서. 퇴근하고 바로 온 거야?”
“어.”
“놀러?”
어떤 의도를 갖고 물어보는 건가 싶어 대답하기 전 찬영은 은석의 눈치부터 살폈다. 퇴근하자마자 오긴 했다. 그 과정 속에는 당장 은석에게 말할 수 없을 사연도 있었다.
해운대까지 오는 건 그렇다 쳐도. 도착하면 밤 열두 시가 다 돼 있을 게 뻔한데 무턱대고 만나자고 한 건 좀 이상했나. 역시 놀러 온 거라고 하는 게 나을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캄캄한 버스 안에서 네 시간 반 동안 다짐했던 마음들이 금세 흩어진다.
그러기엔 찬영은 이미 여기까지 내려와 있었다. 은석의 얼굴을 보고 말해야겠다는 각오 하나로. 그걸 위해 무려 당일 연차도 허락받았다. 지금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때였다.
고개를 흔든 찬영이 또렷하게 말했다.
“아니. 형 때문에 온 거야.”
“나 때문에?”
“형이 접는다고 했잖아. 나한텐 아무 말도 안 해 주고.”
마지막 말은 생각보다 더 은석을 타박하는 조로 나갔다. 그래서는 안 됐다는 것처럼. 혹은 어린애 투정 같이 들리기도 했다. 자각한 찬영이 순간 입술을 다물었다 뗐다. 솔직해질 때라고는 했지만 불쑥 서운함부터 쏟아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기야 어차피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으니까 상관없나.
“아무 말도 안 해 준 건 아니지 않나? 접을까 물어도 봤고….”
“그것보다 더 전에. 혜지 누나한테 길마 넘겨받을 건지 물어봤다며.”
은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찬영은 기세를 몰아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데아 때 나한테는 이제 시작이라고 접을 생각 말라고 했으면서.”
“찬영이 넌 그때 나이트메어 트라이도 하기 전이었으니까. 난 할 거 다 해 봤고.”
“뭐래. 알피지에서 할 거 다 해 본 게 어딨어. 형 약속 장비는 25강 아직 남았잖아. 세에레도 본섭에서 안 깨 봤고. 한탑도 도부 기록 깨야 하고.”
순 억지였다. 약속 장비 올 25강은 전 서버를 기준으로 잡아도 아직 달성한 사람이 없다고 운영진이 오피셜로 말했다고 들었다. 세에레 트라이는 동은의 탈퇴 때문에 엎어진 지 오래고, 도부의 한계의 탑 기록은 이론상으로든 실전상으로든 현 시점 유저가 낼 수 있는 최상의 수치였다. 찬영이 도부를 아무리 싫어한다 해도 그건 바뀌지 않았다.
전 직업 중 한계의 탑에 가장 유리하다는 직업에, 그 직업을 가장 잘 다룬다는 파일럿이, 아이템이 공개된 유저들 중에서는 가장 스펙이 높다는 도부의 계정으로 수백 번을 넘게 도전해 만들어 낸 기록이다. 심지어 기록을 세운 파일럿 당사자인 나단조차 다시 성공할 자신은 없다고 했다.
스스로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우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찬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형이 뭐 때문에 접는다는 건지는 알아. 너프는 그렇다 치고. 라면 님이 세에레 파티 나간다고 하셨을 때 나도 다 듣고 있었으니까. 탈퇴하신 것도 그것 때문인 것 같고.”
“그걸 들었어?”
“어. 형 한숨 쉬는 것까지 다 들었어.”
“…….”
“근데 내가 계속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을 땐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다른 사람한테 먼저 듣게 한 게 서운해.”
이쯤 되자 너무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싶어(사실 스물일곱씩이나 먹어 놓고 유치한 건 맞았다.) 찬영이 부연했다.
“혜지 누나나 선빈 형이 형이랑 오래된 것도 알고, 부마라서 알려 줘야 했다는 것도 알고. 내가 꼭 알아야 한다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내 마음이 그래.”
“그랬어?”
“당연하지. 형 솔직히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안 했으면 부산에 있다는 것도 말 안 했을 거잖아.”
아니야? 확인하듯 바라보자 은석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시선을 잠깐 아래로 내리더니 다시 입을 연다.
“일단. 부산 내려왔다는 건 너한테 따로 말하려고 했어. 안 그래도 임혜지가 먼저 말했다길래 좀 더 빨리 말할 걸 그랬다 싶긴 했는데.”
“…진짜?”
섭섭했던 마음이 시작부터 누그러졌다.
“혜지한테 말한 건 그거밖에 없어. 부산에 있어서 접속 안 되니까 길드 스킬만 부탁한다고. 길마 넘기니 마니 했던 건 그때 그냥 한 말이야.”
“그럼 접을까 나한테 보냈던 거는.”
“너한테 제일 처음 말 꺼낸 거야. 정선빈이나 임혜지보다 먼저 알리고 싶어서.”
“와….”
제가 제일 처음이었다는 말까지 듣고 나자 당장 할 수 있는 반응이 그것밖에 없었다. 찬영은 발바닥에 꾹 힘을 주었다. 다른 데 집중하지 않으면 그대로 히죽 웃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우선 완전히 착각했다는 건 알겠다. 부산 얘기야 말할 것도 없고. 은석이 저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멋대로 단언했던 것도.
“미리 다 말해 줬으면 됐는데.”
“내가 너무 늦게 말했어?”
“그럼. 엄청 늦었지.”
약간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 얘기를 진작 들었다면 찬영은 부산에 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게임에선 안 보이지, 길드 스킬도 안 찍혀 있지. 혜지 누나한테 물어보니까 형 접을 것 같다 그러지. 형 같으면 안 놀라? 길마 가져갈 거냐고 물어봤다질 않나.”
“길드 스킬 안 찍혀 있었어?”
“혜지 누나 본인 피셜로 까먹었었대. 그건 이미 미안하다 했어. 형 딱 그날에 나한테 접을까 라톡 보낸 거 알아?”
“하필 타이밍도 최악이었네.”
당황한 것처럼 웃고 있어도 은석이 실제로 난처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에.”
“나 만약에란 말 별로 안 좋아해.”
“그럼 그냥 할게. 내가 접어도 못 보진 않을 거야. 연락도 자주 할 거고 너만 괜찮으면 만나기도 할 거니까.”
접어도 괜찮을 거라고 찬영을 달랠 생각부터 하고 있는 걸 보면. 이 형 또 이러네. 찬영은 복잡한 시선으로 은석을 보았다. 여전히 다정하고 화사하고, 오늘은 심란해지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형 진짜 접을 생각이야?”
“내가 안 접었으면 좋겠어?”
누군가는 게임 접는 게 뭐 얼마나 큰일이라고 황당해할 거라는 정도는 안다. 그러나 동시에 찬영은 게임 정모로 만나 친해졌다는, 이 애매한 사이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잘 알았다. 모르긴 몰라도(그러고 보니 찬영은 은석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사는 곳이 그리 가까운 것 같지도 않고, 하는 일도 별 접점은 없어 보인다. 나원과 동명처럼 같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다.
제대로 된 공통 화제라고는 게임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접으면 끝이었다. 심지어 찬영은 은석의 게임 지인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지 않은 사이였다. 그런 관계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대화의 흥미가 점차 사라지고 한때 알았던 지인 정도가 되기까지.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지키진 못했지만 찬영이 수십 번 되새겼던 말이었다. 지금이야 친하다 생각하겠지만, 나중에는 만나도 ‘형 윈런 다시 상향된 거 알아? 아 진짜? 나메 버그도 이번에 패치됐어. 아 진짜?’ 같은 대화나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서히 멀어지다 점차 연락이 끊기고, 은석이 뭘 하고 지내는지도 길드원들에게 띄엄띄엄 건너 듣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그것조차 모르게 되겠지.
그런 건 싫었다.
“응.”
찬영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템은 다 팔아도 돼. 근데 게임은 접으면 안 돼.”
“안 돼?”
은석이 갸웃했다. 찬영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템 다 팔면 아무것도 못 할 텐데.”
“그럼 이번엔 내가 버스 태워 줄게.”
“어디까지?”
“좀만 있으면 나 하드 데아 버스도 될걸?”
물론 버스 기사라고 할 수준이 되려면 장비를 적어도 두세 개는 갈아치워야 하겠지만. 일부러 과장을 보탰다. 두 개 정도는 한 달 치 급여로 어떻게든 될 것도 같으니까. 솔플로 하드 나이트메어까지 다니던 은석에게 메리트가 있으려면 적어도 하드 데스 아이 수준은 되어야 했다.
“세에레도 돼?”
그걸로도 모자랄지도.
“아니, 그거는 좀 어렵지….”
아직 패턴이 뭔지도 모르는데. 찬영이 우물쭈물대자 은석이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너무한 거 아닌가. 세에레를 버스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존재하기는 하나. 비트주세요 스펙으로도 안 되겠다.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민망함보다는 웃는 은석이 좀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럼 안 접을게.”
웃음을 멈추고 난 은석이 시원하게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할 말은 이제 끝이야? 의미를 알 수 없어 찬영은 눈을 깜박였다.
“접지 말라는 말 하려고 부산까지 내려온 거냐고 묻는 거야.”
은석이 다시 한번 설명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심 은석이 게임을 접지 않기를 바라긴 했었으니까. 그러나 은석의 말처럼 그 말 하나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냐면….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서울에서부터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은석이 지금껏 보여 줬던 다정함이 정말 찬영의 착각이었는지 물어보려 했었다. 어쩌다 보니 아직 그런 말은 하나도 하지 못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찬영은 다시금 집안 사정 핑계를 대며 연차를 허락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회사 컴퓨터로 버스표를 예매하고, 마음만큼 빨리 가 주지 않는 시계를 초조하게 보고 있던 때를 떠올렸다. 집과 반대 방향의 지하철을 타고 강변역에 내려 동서울터미널 34번 승차장에 섰을 때를 떠올렸다.
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은석이 다른 사람보다 우선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게임을 접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 반대로 게임을 접어도 멀어지지 않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니까 찬영은 은석과 명확히 특별한 이름을 붙인 관계가 되고 싶었다. 앞서 했던 모든 말들은 지금의 결론 때문이었다.
주변의 모든 소음들이 사라지고 막연하게 끓던 감정도 마침내 명료해진다. 은석은 찬영이 고민하는 내내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니 심장이 쿵, 쿵 하고 뛰었다. 별안간 세상에 은석과 저 단둘만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찬영은 홀린 듯 말했다. 아니.
“형이 좋아.”
“…….”
“앞으로 계속 더 좋아질 것 같아. 그 말 하려고 왔어.”
지금은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그건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소리 때문이기도 했다. 할 말은 이제 끝이냐고 은석이 은근히 기대하는 말투로 물어왔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은석이 지금도 웃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봐. 형도 나 좋아하잖아.
그 얼굴을 보자 이제야 확신이 생겼다. 찬영이 은석의 몸을 당겼다.
“이번엔 취한 거 아니야.”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아마 은석이 더 잘 알 것이다. 은석의 눈이 곱게 휘었고 이내 가까워진 얼굴이 붙었다. 그날의 뽀뽀보다야 진했지만 키스라기엔 지나치게 가볍고 달달한 입맞춤이었다.
* * *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리 모드로 되어 있던 핸드폰이 연달아 울렸다. 라톡, 라톡, 하는 소리는 대여섯 번은 반복된 후에야 멈췄다. 그 소리에 움찔 놀란 찬영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설마 지금 시간에 회사나 거래처는 아니겠지. 안타깝게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소속된 부서가 부서이다 보니 주말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연락 오는 사람이 왕왕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정이 넘었는데 지나치게 매너가 없지 않나. 일적인 라톡이 맞다면 내용이 ‘하루아침에 공장이 날아갔어요’ 급은 되어야 했다. 아니라면 화가 날 것 같았다. 물론 그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간 라톡이 아니라 전화부터 왔을 테니 답은 뻔하다.
일단 핸드폰부터 무음으로 바꿔 둬야겠다.
찬영은 은석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면을 켰다. 이 시간에 연락한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나 볼까. 상단 알림창은 온갖 광고들과 애플리케이션 업데이트 알림이 뒤섞여 있었다. 빠르게 밑으로 스크롤을 내린다. 온튜브, 온더넷, 오늘의 날씨, 라잇내비게이션, 캐시만보기, 고글 업데이트…. 별의별 알림을 지나 맨 아래에서 바로 위. 라잇톡 미리보기에 떠 있는 이름은 의외로 선빈이었다. [너도 올래?]
…어딜?
그보다 선빈이 갑자기 왜? 채팅방 이름을 보니 단체 채팅방도 아닌 1:1 채팅방이다.
정선빈: 야
정선빈: 찬영아
정선빈: 설마 벌써 자니?
정선빈: 아니지?
정선빈: 그 혹시
정선빈: 다음 주 주말에 길드원들끼리 모일 것 같은데
정선빈: 너도 올래?
“회사 연락이야?”
눈을 찡그리는 찬영을 본 은석이 물었다.
“아니. 선빈이 형. 길드원들끼리 모일 건데 올 거냬.”
정찬영: 아니 라톡을 대체 몇개나 보낸 거야ㅋㅋ
정찬영: 회사에서 연락온 줄 알고 놀랐잖음
정선빈: ㅎㅎ
정찬영: 어디서 모이는데?
정선빈: 몰라?
정선빈: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홍대로 얘기중이긴 해
홍대라면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2호선 구간이라 환승할 필요도 없으니 더 편했다. 누가 오는지만 물어보고 간다고 할까. 당연하게 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다가, 찬영은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뭐가 이렇게 자연스럽지?
길드 단톡에서 선빈의 이름이 보이지 않은 지도 꽤 되지 않았나? 이 상황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길드 정모 얘기부터 한다고? 어딘가 의심스러웠다.
고개를 든 찬영이 은석에게 물었다.
“근데 선빈이 형 요즘 레비아 접속은 해? 난 이 형도 접은 줄 알았어.”
“그거 말인데….”
대답하는 은석의 표정이 이상했다. 동시에 라톡이 또 왔다. 잠시만. 찬영은 손바닥을 들어 은석의 말을 막았다.
정선빈: 이동은이랑 임혜지랑 권나원 김동명은 확정
정선빈: 고은석은 되면 알려준댔음
이 멤버면 동명을 제외하고는 세에레 트라이 파티 전원이었다. 심지어 동은까지 껴 있었다. 선빈과 싸우고 길드 탈퇴까지 한 사람이 길드 정모에 온다니. 그럼 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제야 감을 잡은 찬영이 선빈에게 다시 메시지를 썼다.
정찬영: 화해한거지?
정선빈: 뭔 화해
정찬영: 모른 척 하지 말고
정찬영: 형이랑 라면님 싸웠잖아
정선빈: ?
정선빈: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정선빈: 야 솔직히 싸우진 않았어;;
정찬영: 응 나도 그때 보코에 있었음
정선빈: 그래? ㅎㅎ 그럼 할 말 없고
정찬영: ㅋㅋㅋㅋㅋ
정찬영: 어차피 좀만 눈치 있었으면 다 알았을걸? 길드원들
정찬영: 둘이 너무 티 나가지고
정찬영: 동명 형도 나한테 물어보던데 뭔 일이냐고
정선빈: ㅇㄴ 김동명도?
정선빈: 개미안하네 갑자기
선빈의 메시지를 보면 상황은 확실히 전부 정리된 듯했다. 물밑으로 얘기가 오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찬영은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툭툭 두드렸다. 물론 길드원들끼리 화해했다면 정말 잘된 일이었다. 잘됐긴 한데. [고은석은 되면 알려준댔음] 이 라톡이 너무 거슬렸다.
아무리 봐도 둘이 화해했다는 걸 은석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밖에 안 읽히는데. 그동안 선빈이고 은석이고 모조리 접어 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했던 것들이 기억나 찬영은 볼에 바람을 넣었다 뺐다 했다.
게다가 은석은 방금 전까지도 분명 접을 것처럼 말했다. 그걸 막으려고 뭐라고 했더라. 은석이 접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찬영은 장비를 새로 살 생각까지 했다.
혹시 이 형… 처음부터 접을 생각도 없던 거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찬영이 핸드폰을 내리고 은석을 날카롭게 보았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찬영이 뭐라고 할지 짐작한 듯 은석은 그저 난처하게 웃고 있었다.
“선빈 형이랑 라면 님이랑 화해했다는데?”
“그렇다더라.”
“형 접으려고 했던 것도 이거 때문 아니었어? 그럼 나한테 접는다 했던 거 다 뻥이야?”
“다는 아니고….”
“방금은?”
대답이 없다. 그것만으로 대답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찬영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와. 뭐야. 어이없어.”
“속이려던 건 아니야.”
은석이 얼른 말했지만 이미 신뢰성 제로였다. 옛말에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고, 그 말이 맞았다. 배신감이 마구 몰려온다.
“원래는 안 접는다고 바로 말하려고 했어. 진짜야.”
“그런데.”
“버스 태워 줄 수 있다고 계속 말하는 게 귀여워서.”
“아니….”
귀여워서 조금만 놀리려던 게 이렇게 됐다는 의미다. 비겁하다. 이런 말로 넘어가 주고 싶진 않은데 얄밉게도 마음이 풀렸다.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아서 민망하기도 했다.
아이템은 팔아도 되지만 게임은 접으면 안 된다고 애타게 말했을 때, 찬영은 은석이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던 것도 내내 웃고 있던 것도 전부 봤다. 어쩐지 신나 보인다고 했다. 그게 다 연기였다니. 그리고 귀엽다고 생각했다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너 온다 했을 때부터 접을 생각은 없었어.”
마침내 전의를 상실한 찬영이 맥없이 말했다.
“말이라도 빨리 해 주지. 길드원들 다 걱정했는데.”
“나도 오늘 들었어. 갑자기 동은이한테 연락 왔더라.”
“진짜? 화해한 지 얼마 안 된 건가?”
“아마도.”
“잘되긴 했네.”
어쨌든 결과가 좋으니 된 건지도.
돌아다니기엔 시간이 늦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들어가긴 아쉬웠다. 은석도 다르지 않은지 해변가에 널린 숙소들을 모두 지나쳤는데도 거기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대신 두 사람은 지난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어떤 마음이었는지에 대해 말했다. 찬영은 술버릇이라고 덮어 두었던 그 날의 입맞춤이 그러고 싶었던 충동에서 비롯된 실수였고, 사실 쪽팔리단 술버릇은 다른 것이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이 말을 했을 때 은석은 눈에 띄게 좋아했다).
은석이 준 립밤과 인형이 아직까지 자취방 책상 위에 놓여 있다고 말했고, 양평에서 은석을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이 어땠는지도 말했다. 당사자 앞에서 봄 벚꽃 어쩌고 하기엔 민망해서 적당히 단어를 바꾸긴 했지만. 지금도 그 감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은석의 주변은 봄이었다.
그동안 주변 풍경은 계속 바뀌었다. 바다와 모래사장으로 들어찼던 왼쪽이 포장마차로 변하고, 도로 옆 작은 꽃길로 변하고, 야경이 보이는 주거 단지로 다시 변했다.
특별한 목적지가 있진 않았지만 찬영은 그래서 좋았다. 날씨도 더할 나위 없이 선선했고 멀리 어디에서는 오래된 팝송이 잔잔하게 들렸다. 은석에게 차를 가져오지 말라고 했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내내 은석과 가까이 붙어 걷고 있으니 손이 가끔 부딪치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찬영은 괜히 손가락 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옆으로 더 비켜서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확 잡아?
스물일곱까지 겪어 온 연애 경험들은 당최 어디로 갔는지 기껏해야 손 맞닿는 일 하나에 온 신경이 다 쏠린다.
생각해 보면 직전에 입술도 맞댔는데. 유치원생들도 손을 잡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했다. 합리화 끝에도 망설이던 찬영이 결국 큼큼거리며 은석의 손을 잡았다. 은석은 기다렸다는 듯 그 위로 깍지를 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얽혔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긴장한 목부터가 뻣뻣했다. 볼이 조금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쪽을 슬쩍 보자 왜, 모르는 척 물어온다. 찬영은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대신 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 * *
차가 없어 멀리 걷지는 못하고 둘은 바닷가로 돌아왔다. 내려오느라 고생했다며 은석이 잡아 준 호텔은 해변과 일 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알 법한 유명 호텔 체인이었다. 구석구석 딸린 부대 시설과 로비 인테리어는 열 시간도 못 있는 게 아까울 만큼 보기 좋았다.
거기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들어선 방은 오션 뷰이기까지 했다. 통창으로 된 객실은 커튼 하나만 걷어도 바다가 보였다. 다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멀리 보이는 곳을 제외하면 바다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새까맸다.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은석은 그 새까만 바다가 보이는 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만 찍어도 남들이 말하는 인생 샷이 백 장은 나올 것 같다. 찬영은 말없이 숨을 죽이고 은석을 눈에 담았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잘 안 보이네.”
“아침에 일어나면 잘 보이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은석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찬영은 별로 아쉽지 않았다. 물론 바다가 잘 보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바다라면 어차피 가까이서 실컷 보고 온 뒤였다. 게다가 찬영은 지금 한껏 얼어 있었다. 그야 고백 이후 둘이서 처음 들어온 곳이 호텔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
“응?”
“아냐. 나 일단 씻고 올게.”
…아닌가?
적어도 은석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긴장하고 있는 건 찬영뿐인 듯했다. 원래는 집에 가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 상황에서 그랬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분위기가 아니라 찬영의 마음을.
뭘 상상한 것도 아닌데. 홀로 변태가 된 요상한 기분으로 찬영은 손과 발부터 꼼꼼히 씻었다. 목에 수건을 두르고 세수도 시작하려는 도중, 세면대 위로 동그랗게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싶더라니. 코 밑으로 손을 대자 새빨간 피가 묻어나왔다.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했다. 그렇다고 이럴 일인가?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잠 며칠 안 잤다고 코피나 흘릴 만큼 기본 체력이 달린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체력이 없으면 퇴근 후 꼬박꼬박 일일 퀘스트와 사냥을 하는 일정 자체가 무리였다.
“다 씻었어?”
“아니, 나 잠깐만.”
들어온 지 꽤 됐는지 문밖에서 은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티셔츠에 피가 묻으면 안 되는데.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터미널로 갔으니 따로 챙겨 온 옷이 있을 턱이 없다. 허둥지둥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는 사이 은석은 이미 화장실로 들어와 있었다. 바닥에 코피 두 방울이 더 떨어졌다. 오늘 처음으로 은석의 얼굴이 굳었다. 화가 난 거랑은 좀 다른 것 같긴 한데.
“별거 아냐. 그냥 피곤해서 그래.”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얼떨결에 한 변명은 변명이 아니라 진실에 가까웠다. 상대에겐 통하지도 않을. 찬영은 게걸음으로 휴지 쪽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머쓱하게 코를 눌렀다.
피는 얼마 되지 않아 멎었지만 찬영은 은석에 의해 그대로 침대에 눕혀졌다. 걱정이 과하다. 누가 보면 코피가 난 게 아니라 쓰러지기라도 한 줄 알겠다.
“집에 안 가도 돼?”
“신경 쓰지 마.”
당연히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찬영은 부스럭부스럭 몸을 한참 뒤척거렸다. 그걸 보고 답답해한다 여겼는지 은석은 호텔로 들어오는 도중 끊겼던 대화를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아까는 주로 찬영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은석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대학 사 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고,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카페를 열었다고 조곤조곤 설명하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동업자 때문에 고생했었다는 건 열이 받았지만. 은석은 그때의 일은 자세히 말하지 않고 두세 문장 정도로 뭉갰다.
“그땐 나도 사람 보는 눈이 없었어서 그래.”
“근데 형이 이런 말 하는 거 되게 신기하다.”
“좀 깨?”
“아니. 원래 처음이면 다 그렇지. 어차피 형 나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언젠가의 은석도 사격이라는 이름으로 찬영에게 한 말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은석에게도 서툴렀던 시절이나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찬영은 기분이 좋았다. 알던 모습과는 달라 신선하기도 했고 좀 더 가까워진 느낌도 들었다. 앞으로 알아가고 싶은 건 더 많다.
눈과 비와 맑은 날 중 어떤 날씨를 가장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꽃은 좋아하는지, 좋아한다면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잘 때는 얌전한 편인지. 주량은 얼마고 찬영처럼 남들에겐 말하기 쪽팔린 술버릇은 없는지. 아무 일정도 없이 쉬는 날엔 뭘 하는지(아마 레비아겠지만). 일할 때는 어떤 얼굴을 하는지. 어떨 때 가장 잘 웃는지까지도.
라떼나 IPA 맥주처럼 맞춰 주려는 게 아닌 은석 본연의 취향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걸 다 들으려면 일주일을 다 써도 모자랄지도 모른다.
“나 내일 어떻게 돌아가냐.”
침대에 느긋하게 누워 있으니 뒤로 밀어 두었던 현실이 슬금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모레까지도 주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출근은 해야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회사에 연차를 쓰겠다고 했을 때 집안 사정이라는 핑계가 그토록 잘 먹혔던 건 주말과 붙여 쓰지 않아서가 아닐까.
KTX는 또 자리가 없겠지. 다시 버스를 타고 네 시간 반을 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올라올 때보다 마음은 편할 것 같다. 중간중간 은석과 연락해도 되고.
“돌아가는 비행기 예매해 줄게.”
“비행기?”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교통수단은 하나 더 있었다. 국내선을 타 본 적이 없어서 비행기 생각은 아예 안 하고 있었는데.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할인 운임이 적용되는 티켓 가격은 KTX보다도 쌌다. 평일이라 그런지 자리도 넉넉했다.
“나 진짜 비행기 생각은 하나도 못 했어.”
“요즘은 많이들 타고 다니던데.”
올 때도 비행기를 타고 왔으면 좀 더 오래 볼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기라도 할걸. 찬영은 한동안 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애틋했다. 내일 돌아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으려나. 이번 주까지는 부산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헤어지기 아쉽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은석이 고개를 기울였다.
“뭘 헤어져?”
“응?”
“표는 내일 오후로 두 장 예매할 건데 괜찮지?”
두 장? 찬영이 눈을 깜박거렸다.
“형 그때 부산에 오래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아, 그거. 아니. 너 갈 때 같이 서울 가려고.”
“사정 있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돼? 가족분들한테 말씀 안 드리고?”
“괜찮아. 이미 다 뵀으니까.”
진짜 괜찮은 게 맞나. 어쩐지 얼굴 한번 뵙지 못한 은석의 부모님께 죄송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당사자인 은석이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은석과 같이 서울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찬영도 좋았다.
“표는 내가 예매해 놓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자.”
‘이 상황에서?’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도 은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잠이 오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잊고 있었지만 찬영은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잔 데다 오늘은 밤을 새운 상태로 업무까지 마친 참이었다.
아까 코피 때문인지 하얀 이불 위 얹어진 손은 거의 세 살짜리 아이 대하듯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자장가라도 불러 줄 기세네. 은석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던 찬영의 눈꺼풀 아래로 산더미 같은 피로가 덮쳐 왔다. 이대로 자면 안 되는데…. 힘을 주고 몇 번 깜박거려도 스르르 감긴다. 정말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아 찬영이 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자기 전에 나랑 하나만 약속해.”
“뭔데?”
“형 이제 섭종까지 접으면 안 돼.”
계속 토닥이던 손이 멈췄다. 빨리. 보채자 알았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 웃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확실히 대답을 들은 찬영은 만족했다. 그 밖의 다른 일이라면 내일 생각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일어나면 은석이 옆에 있을 테니까.
곧 온전한 밤이 찾아왔다.
* * *
그날로 며칠 되지 않아 동은은 아군에 다시 가입 신청을 넣었다.
[길드] 맛업는라면 님이 길드에 가입하셨습니다.
[길드] 사격: 동은이 사정 잘 정리됐다고 해서 다시 데려옴
[길드] 맛업는라면: 안녕하세요ㅜ
[길드] 맛업는라면: 다들 죄송합니다
[길드] 도텐: 오 다시 복귀한 거임?
[길드] 맛업는라면 님의 지위가 변경되었습니다.[소콜->탈퇴금지]
[길드] 보틀: 어 너 이제 사정 있어도 못 나가~
[길드] 보틀: ^^
[길드] 빨강색: ㅁㅊㄴㅇ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비테마죽: 어그로 ㅅㅌㅊ;
[길드] 갓말이: ㄹㅇ 저였으면 탈퇴금지 보고 바로 탈퇴함
[길드] 앞으로맑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앞으로맑음: 그래도 복귀하셔서 다행
길드원들은 자세한 사정을 몰라서 그런지 유쾌하게 웃어넘기는 분위기였다. 은석이나 선빈, 혜지도 따로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기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자세하게 알려 줘 봐야 동은을 포함해 길드원들이나 길드 분위기에 별로 좋을 것 같진 않다.
[길드] 사격: 뭐야 직위명 언제 바뀜
[길드] 맛업는라면 님의 지위가 변경되었습니다.[탈퇴금지->소콜]
[길드] 사격: 나 왜 솔잎눈인데
은석의 채팅을 본 찬영이 길드원 목록 창을 켰다. 기존에는 대장-부대장-행동대장-행동대원-신입으로 되어 있던 직위명이 솔잎눈-이백프로-닥터체리-탈퇴금지-소콜로 바뀌어 있었다. 언제 들어와서 저걸 다 바꿨대.
[길드] 보틀: 에이 솔잎눈이 얼마나 맛있는데 ㅎㅎ
[길드] 갓말이: 이와중에 부마 직위는 이백프로임ㅋㅋㅋㅋㅋ젤 나은 거
[길드] 도텐: 이백프로 먹을 빠엔 차라리 솔잎눈 열 개 먹음
[길드] 사격: ㅋㅋㅋ 형 솔잎눈 먹어본 적 없지?
[길드] 도텐: 어케알았음 ㄷㄷ
[길드] 사격: 먹어봤으면 그런 말 못 함
[길드] 빨강색: ㅋ
[길드] 사격: 일단 다시 바꾼다
[길드] 길드원의 직위명이 변경되었습니다.
별 상관없어할 줄 알았는데. 웬만하면 다른 사람에게 맞춰 주던 은석도 솔잎눈은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드물게 진심으로 질색하는 모습이 웃기고 귀여웠다. 고은석은 솔잎눈을 싫어한다…. 찬영이 되새김질을 하며 작게 웃었다. 사 줄 생각도 안 해 봤지만 일단 머리에 넣어 두긴 하는 게 좋겠다.
[길드] 보틀: ㅜ
[길드] 빨강색: 그럴 줄 알았음 길마 ㅅㅅㅅㅅㅅㅅㅅㅅㅅ
[길드] 맛업는라면: 섭종하기 전까지 탈퇴 안 할게요 형
[길드] 보틀: ㅡㅡ 당연히 그래야지
[길드] 보틀: 또 탈퇴한다? 그럼 너는 진짜
[길드] 빨강색: ㅋㅋㅋ또 시작이네
[길드] 빨강색: 말은 저렇게 해도 정선빈 엄청 서운해했음
[길드] 보틀: 단톡도 들어와 빨리
[길드] 보틀: 현기증 날 것 같으니까
[길드] 맛업는라면: 맞다
[길드] 맛업는라면: 아무나 저 초대좀 해주세요
[길드] 사격: 내가 해줄게
선빈과 동은이 복귀하자 조용해졌던 단체 채팅방도 다시 활성화되었다. 전과 같이 복작복작한 분위기에 찬영은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아군은 역시 이러는 편이 좋았다.
곰돌: 이제 좀 편하네
곰돌: (이모티콘)
은석도 비슷한 마음인지 개인 톡을 보내왔다. 하얀 메시지 박스 안에서 신난 곰돌이가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었다. 하기야 은석은 좀. 다른 상황도 있었고 여러 가지로 고생하긴 했지. 이건 팔이 안으로 굽거나 제 눈에 안경 같은 게 아니라 길드원들 모두가 인정할 만한 사실이었다.
정찬영: 잘 됐지
정찬영: 형이 진짜 제일 고생 많았고
곰돌: (이모티콘)
또 곰돌이 캐릭터 이모티콘이다. 이번엔 손등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는 곰돌이였다.
역시 저장명을 ‘곰돌’로 바꾸길 잘했다. 아무리 봐도 은석은 곰보다는 차라리 여우 과인 것 같지만 일단 저 이모티콘을 쓰는 게 귀여우니까. 뿌듯해진 찬영이 화면을 쓰다듬은 다음 물었다.
정찬영: 형도 이번 정모 갈 거야?
곰돌: 응 가야지ㅋㅋ
곰돌: 동은이랑 정선빈한테도 얘기해줘야겠네
곰돌: 만나서 같이 갈까?
같이 가자고 하려던 건 어떻게 알고.
정찬영: 안 그래도 그거 물어보려고 했어
정찬영: (이모티콘)
찬영이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은석이 보낸 것과 같은 캐릭터의 이모티콘으로.
시간은 부지런히 흘러갔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길드 정모 당일이었다. 찬영은 은석과 함께 선빈이 찍어 준 곳으로 향했다. 정모 장소는 예상했던 대로 홍대입구역 근처였다. 메뉴는 무난하게 삼겹살인 듯했다.
가장 먼저 온 선빈과 동명이 손을 흔들고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수저통 옆에 놓인 플라스틱 메뉴판을 들고 살피는 사이, 혜지와 함께 처음 보는 남자 한 명이 고개를 숙이며 등장했다. 누구인지 묻기도 전에 은석이 ‘동은이 왔어?’ 하고 반겼다.
“둘이 같이 온 거야?”
“얘가 도저히 못 들어가겠다고 해서 내가 끌고 옴.”
“진짜?”
“아니 그렇게 쫄 거면 나가지를 말든가. 안 나갔으면 될 거 아냐.”
투덜거리던 선빈은 곧 아, 하며 테이블 아래를 보았다. 조용히 하라고 혜지가 다리를 친 모양이다. 선빈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나원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이라고 해 봐야 정해 둔 약속 시간보다는 이전이었다. 사람이 이만큼 모이면 지각 빌런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인데. 늦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신기했다.
오늘 처음 본 동은은 그냥 애였다. 스물셋이라더니 딱 봐도 어린 티가 났다. 편하게 하셔도 돼요, 라는데 목을 이쪽저쪽으로 비트는 걸 보면 본인이 더 불편해 보였다. 여기 오기 전에 은석에게 동은이 낯을 조금 가린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무래도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저질렀던 일이 있어서인가.
나원은 가만히 있을 때의 무표정함 때문인지 동은보다는 덜했지만, 옆에서 동명이 시답잖은 장난을 칠 때마다 새초롬해지는 얼굴을 보면 동은과 동갑이라는 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대학도 졸업했으니 요즘은 그 나이 또래와 만날 일이 좀처럼 없어 스물셋이 얼마나 어린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길드원들이 왜 동은과 나원에게는 약하게 구는지, 선빈이 동은에게 왜 먼저 잘못했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찬영이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주문한 삼겹살을 반 이상 먹어 치우고, 술도 어느 정도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동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다 나와 주실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요. 은석이 형한테도, 다시 안 받아 주셔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거든요.”
“이게 다 너라서 그래. 정선빈이었으면 얄짤 없다.”
“그럼. 알아서 혼밥 해야지.”
“뭐? 좀 섭섭하다?”
혜지와 동명의 말에 선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은석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 상태로 길드 가입 신청은 어떻게 했어?”
“저 그래서 눈 감고 했어요.”
“미친. 그걸 진짜 눈 감고 했어?”
“이동은 쫄보라서 그래요.”
“너는 애한테 쫄보가 뭐냐, 쫄보가.”
나원이 소주를 홀짝이며 말하자 동명이 나무랐다.
“기여도 날아간 거 아까워서 어떡해.”
“지금 기여도가 중요해? 정찬영이 우리 길드 망하는 줄 알았다잖아.”
여기서 내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 삼겹살 쌈을 만들어 우물우물 씹고 있던 찬영이 놀라 컥컥 기침을 했다. 옆에서 찬영을 지켜보고 있던 은석이 바로 물컵을 내밀었다.
“근데 그땐 진짜 열 받긴 했어.”
선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 형은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네.”
“근데 제가 잘못한 게 맞긴 해요.”
“그만해 이제. 그 얘기는.”
“잠깐만. 나 지금 헷갈리는데 이 얘기 이미 다 아는 거임? 정찬영이랑 김동명도?”
혜지의 말이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동은과 선빈이 싸운 걸 말하는 모양이다.
“괜찮아. 우리 싸운 거 찬영이도 다 들었대.”
“진짜?”
타이밍 좋게 선빈이 나서서 설명했다. 찬영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면서 동명 쪽을 슬쩍 봤는데,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동명도 이미 나원에게 어느 정도 설명을 들은 듯했다.
잘 익은 삼겹살 하나를 집어 든 혜지가 동은에게 물었다.
“그래서 템은. 다 팔았어?”
“하나밖에 못 팔았어요.”
동은이 대답했다. 경매장에 있었던 기간이 꽤 길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개밖에 안 팔렸다고? 선빈이 혀를 내둘렀다.
“미친 시골 서버. 여긴 탈출만이 답이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뭐 팔림?”
“귀걸이요. 산 거 170장에 그대로 팔았어요.”
세에레 트라이가 흐지부지되는 화근이 됐던 그 귀걸이를 말하나 보다.
“부모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다시 게임 해도 된다고 하셨어?”
“일단 귀걸이 판 거부터 말씀드리고…. 다시 이럴 일 없을 거라고 했는데 그럼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게임에 돈도 써도 되는데, 대신 이번처럼 속이지만 말라고 하셨어요.”
“야. 그 정도면 생각보다 엄청 많이 양보하셨는데?”
“그러게. 진작 말씀드리지.”
“잘됐네.”
찬영도 동의했다. 동은의 컴퓨터에 셧다운 프로그램까지 깔려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그럼…. 잠깐 고민하는 듯하던 은석이 운을 뗐다.
“우리 트라이 다시 해도 되지 않나?”
“하죠.”
대체로 말이 없던 나원은 트라이 단어가 나오자마자 낯빛부터 바뀌었다. 바로 튀어나온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선빈이 인상을 썼다.
“또 또 개소리 나오죠?”
“이번엔 시간도 다 맞춰 드릴 수 있어요.”
“그럼 됐네. 정선빈 이걸 안 해?”
“근데 고은석 접는다 하지 않았음?”
동명의 지적에 소주잔을 기울이던 은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접어.”
“안 접어?”
“어. 찬영이랑 약속했어. 섭종 때까지 안 접기로.”
그러면서 피식피식 웃는다. 찬영은 괜스레 뿌듯해졌다.
“그래. 넌 뉴비 챙겨야지.”
선빈이 수긍한 듯 대꾸했다. 뉴비?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뉴비 스펙은 아닌 것 같은데. 초반의 이미지 때문인지 고인물과의 시선 차이인지 선빈의 눈에는 여전히 뉴비로 보이나 보다.
아무튼. 찬영은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접는다는 소리 이제 아무도 하지 마.”
“그래. 정선빈이 전부 다 탈퇴 금지로 보내 버린대.”
“근데 너네 트라이 하면서 안 싸울 자신은 있는 거지?”
“난 안 싸울 자신 있어.”
“누가 싸워?”
“정선빈 설마 쫄?”
“맞네. 혼자 쫄았네.”
“그만해, 미친놈들아. 알았다고.”
선빈이 앞머리를 흩뜨리며 이마를 짚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세에레 트라이는 조만간 재개될 것 같았다. 레전드 길드 쪽 파티가 먼저 깨버렸으니 더 이상 최초 격파가 목표는 아니겠지만. 그런 건 이제 길드원들에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1차 치고는 적지 않게 마신 느낌이다. 조금 답답해져 바람만 잠시 쐬러 나갔다 오겠다고 하자 은석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찬영은 가게 입구까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은석을 슬쩍슬쩍 곁눈질했다.
술집이 즐비한 골목은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옆으로 담배 연기가 넘어오는지 불쾌한 냄새가 났다. 몇 년 전부터 건물 근처는 금연 구역이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하기야 법이 있든 말든. 담배꽁초 하나 제대로 못 버리고 발로 밀어내거나 취한 채 낄낄거리다 바닥에 침을 뱉고 있는 꼴을 보면 저 인간들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것 같진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쳐다보자 은석이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 그리로 가나 했는데. 연기가 가로막힌 덕에 넘어오던 냄새가 훨씬 줄어들었다. 뒤늦게 알아차린 찬영이 입을 벌렸다. 와.
이러면서 생색 한 번을 안 낸단 말이지…. 똑같은 비흡연자면서.
연애를 처음 해 보는 것도 아닌데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그간 헷갈리게 군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찬영은 이제 은석이 저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전에 단순히 맞춰 주던 것과는 달랐다.
“왜?”
새삼스러운 마음에 빤히 보고 있었더니 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팔불출인 건 아는데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은 걸 어떡하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찬영이 말했다.
“그냥. 지금 되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들 착하지.”
“길드원들? 어. 좋은 사람들인 거 같아.”
은석을 생각하고 말했지만 길드원들도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 일만 봐도 그랬다.
지금 기분 같아선 가끔은 싸워도 될 것 같기도 했다. 싸워야 얻는 것도 있으니까. 단 이번처럼 누군가 탈퇴한다거나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이가 나빠진다거나 하진 않을 거란 전제하에. 당사자가 아니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는데 세에레 트라이도 어떻게 되든 좋았다. 어차피 저 멤버라면 잘되겠지만.
“근데 또 이런 일 생기잖아? 그땐 진짜 욕할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긴 해.”
“탈퇴를 또 한다고?”
“아니, 싸울 수도 있다고. 탈퇴는 앞으로 없게 해야지.”
“아, 난 또. 그 정도는 괜찮아. 솔직히 동은이 탈퇴했다고 시스템 메시지 떴을 때는 진짜 길드 어떻게 되나 했어.”
“그랬어?”
대답하는 은석의 표정이 영 마음에 걸린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형 탓도 아닌데.”
“내가 길마긴 하잖아.”
“자꾸 그러면 안에 선빈 형 데려온다?”
그 말을 듣고 은석은 웃었다. 안심한 찬영이 괜히 한 번 더 을렀다.
“형도 탈퇴 금지 되고 싶어?”
“길마는 원래 바로 탈퇴 안 될걸. 다른 사람한테 길마 넘기는 것도 좀 걸려서.”
“진짜?”
“넘길 때 길드원들 투표도 받아야 돼.”
“동의 얻어야 하나 보네.”
처음 알았다. 하기야 에이나인에도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엇비슷한 시스템이 있던 것 같기도 했다. 길드마스터도 바로 탈퇴가 가능하면 길드원들과 협의 없이 다른 사람에게 길드를 넘기고 튈 수도 있으니까 그런가.
그러고 보니 에이나인을 생각한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더는 남겨 두고 온 캐릭터도, 아이템도, 사람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레비아가 더 취향에 맞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 차이 아닐까.
그때 가게 안에서 길드원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선빈이 찬영을 툭 쳤다.
“너네 여기서 뭐 하냐? 하도 안 오길래 둘이 집에 간 줄.”
“왜 다 나와?”
“애들이 2차 가자는데?”
“일곱 명 받아 줄 데는 있대?”
그렇게 말하면서도 찬영은 은석의 등을 살짝 밀며 길드원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길이 좁은 탓에 통행 방해가 되지 않도록 곧 둘 셋씩 찢어지긴 했지만 대화는 다 같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분명 낯을 가리던 동은도 지금은 노래방에 가자며 난리였다. 친해져서인가? 아니면 술버릇인가.
“안 돼. 너 마이크 안 놓잖아.”
“그냥 오늘 밤새. 밤새고 다 같이 첫 차 타고 가. 그럼 힘들어서라도 중간에 마이크 놓겠지.”
“뭔 벌써 노래방이야. 가도 2차 끝나고 가든가 해야지.”
“맞아. 아직 열 시도 안 됐다.”
“뭐야. 진짜 가는 거야?”
“농담인 줄 알았음? 돌아가면서 노래 한 번씩 다 불러야 함. 빼는 거 없음.”
그럼 은석의 노래도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옆에 있던 은석은 조금 낭패한 표정이었다. 혹시 노래방을 싫어하나? 아니면 노래에 자신이 없어서? 궁금해진 찬영이 물었다.
“형 노래 못해?”
대답은 은석이 아닌 선빈에게서 돌아왔다.
“아니. 쟤 노래 잘해. 사기 치는 거야.”
“진짜?”
“뭔 소리야. 잘은 못 해.”
“어어? 이 새끼 벌써부터 밑밥 까네?”
“진짜 잘 부르는 건 혜지지.”
“그건 인정. 거의 가수임.”
선빈이 혜지를 저렇게까지 칭찬하는 건 처음 보는데. 혜지가 노래를 잘할 것 같은 느낌이긴 했다. 처음 노래방을 언급했던 동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전 길드원들 중에 노래 못하는 사람은 본 적 없는 것 같긴 해요. 찬영이 형은 못 들어봐서 모르겠는데.”
“와, 저렇게 말하면 정찬영 진짜 개부담스럽겠다.”
“좀 부담스럽긴 해.”
음치 수준은 아닌데 그렇다고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좀 사린 다음에 분위기 보고 적당히 들어가야지. 그래도 무조건 잘했다 해 줄 것 같은 사람이 바로 옆에 한 명은 있어서 다행이다.
“들어보면 알겠지. 다 두 곡씩은 부를 준비 하셈.”
“아, 미친. 발라드 가능한가요?”
“발라드는 한 곡만 가능합니다.”
“2000년대 걸그룹 노래 메들리 가능한가요? 열 곡도 부를 수 있는데.”
“환영이요. 같이 부르죠.”
“여기가 온라인 탑골 공원이야?”
“일단 뭐든 2차 갔다가.”
“3차도 가. 원래 술 먹고 부르는 게 진짜 실력이야.”
“아 무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시겠다? 쉽지 않네.”
“그러다가 리얼로 첫 차 타겠는데?”
“애매하게 끝나는 것보단 낫지. 홍대에서 새벽에 택시 잡기 존나 힘들어.”
2차, 3차로 포차에 갔다가 노래방에 가서 첫 차 시간까지 다 같이 있는 건가. 이십 대 초반 이후로 처음 겪는 일정을 상상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운데 또 재밌을 것 같긴 했다. 이런 건 같이 가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길드원들도 좋고 옆에서 걷고 있는 은석은 더 좋았다.
원래 MMORPG를 오래 플레이할 수 있는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일 번. 그동안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까워서. 이 번. 같이 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은석을 포함해 아군 길드원들이 레비아를 계속하는 이유 대부분은 이 번 아닐까. 일 번도 없진 않겠지만.
길드원들은 드물게 좋은 사람들이었다. 몇 달 보고 사람의 성격을 판단하기는 우습겠지만 찬영은 제 감을 믿었다. 영원이라는 말은 잘 믿지 않는데 그래도 이 사람들과는 가능하면 오래 가고 싶었다.
그리고 은석은….
그럼에도 그 말을 믿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은석을 보고 있으면 지금의 감정만큼은 꼭 영원할 듯했다.
찬영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슬쩍 은석의 팔을 잡았다. 별로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순순히 당겨 오더니 묻는다.
“속 안 좋아?”
“아니. 그냥 천천히 걷고 싶어서. 형이랑 같이.”
“천천히? 이 정도면 괜찮나?”
은석이 걸음 속도를 늦췄다. 원래도 보폭이 커서 그렇지 그렇게 빠른 느낌은 아니었는데. 의식적으로 느려진 걸음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달그락달그락거린다. 평범한 일상은 어느 때보다 소중했다.
불현듯 고백할 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리해서 한 말이 아니라 그 순간 벅찬 마음에 터뜨린 말은 곱씹을수록 확신이 되었다. 그 말대로 찬영은 은석을 계속 더 좋아할 것 같았다.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았다. 지금도 그랬으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둘의 옆을 스쳐 지났다. 길드원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지만 은석도 찬영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말한 대로 같이, 천천히 걷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