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점화
가을밤인 걸 감안하고도 유독 밤공기가 좋았다. 특별할 것 없던 말들은 이상하게 깊게 박혔고 은석은 그대로 일어서 찬영의 집 앞까지 함께 걸었다. 헤어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다는 묘한 아쉬움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밀어낸다거나 피한다거나, 그래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은석은 그저 가만히 굳어 있었다. 눈앞으로는 찬영이 사르르 웃는 얼굴만이 보였다. 은석을 보느라 위로 향하다가 접히며 작아지는 동그란 눈. 그 눈이 틈 없이 가까워졌다 점차 멀어진다.
남겨진 은석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입술을 몇 번이고 만져 보다가 헛웃음이 터졌다. 방금 전만 해도 찬영이 기대서 있던 벽 위로 이마를 갖다 댄다. 벽은 차갑고 이마는 뜨거웠다.
쪽팔리니까 말 안 하겠다던 술버릇은 이걸 말했던 걸까. 그렇다기엔 좀 많이 취한 것 같다는 말이 너무 변명처럼 들렸다. 상대는 취해 있었던 데다 아직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고 원하는 쪽으로 해석하려 드는 마음을 여러 번 다잡는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뉴비 길드 박제를 핑계 삼아 만든 양평 정모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귀엽게 잘생겼다는 생각 정도야 했다. 보은이 옆에서 ‘형이 그렇게 챙기던 맑음 님이에요’, 일러주었지만 사실 은석은 그 말을 듣기 전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저를 보고 멍하니 멈춰 있는 사람은 어딘가 은석이 챙기던 뉴비를 떠올리게 했다. 그 자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찬영만은 아니었다는 건 둘째치고 얼굴도 제대로 보기 전이었는데도. 희한하게 확신이 들었다.
속도 모르고 매번 터져 나가던 장비가 찬영의 손에서 한계치까지 강화되었을 때는 당연히 기뻤다. 그러나 그럼 단지 고마워서 밥을 사 주고 싶었던 것뿐이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찬영과는 좀 더… 친해져도 좋을 것 같았다. 뭘 받겠냐고 묻자 말을 놓아 달라고 하던 찬영에게 굳이 따로 만나자고까지 했던 건 그 때문이다.
인간적인 호감 그리고 동질감인 줄 알았던 감정은 입맞춤 한 번에 불씨가 피어났다. 그리고 제 진짜 정체를 드러냈다. 범인은 이미 다람쥐마냥 제집으로 쏠랑 도망가 버린 채였다. 내일이 되면 어젯밤 일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시치미를 뚝 뗄지도 모르겠다. 좀 많이 취하긴 했던 것 같으니.
이불이나 제대로 깔고 자려나. 저번에도 이불은 어디다 날렸는지 몸만 웅크리고 자고 있는 걸 침대 위로 올려놨었는데. 공처럼 돌돌 말려 있던 모습을 떠올리자 입꼬리가 자꾸 올라간다.
돌아가는 길은 내내 찬영의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찬영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모른 척하는 대신 은석에게 몇 번이고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찬영다웠다. 사과보다도 그 뽀뽀가 술버릇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더 궁금해 묻자 기다렸다는 듯 덥석 물고는 어찌 됐든 제 잘못은 맞다고 쩔쩔맨다.
술버릇인 것 같지만은 않아 보였는데. 실수였을지는 몰라도. 은석은 무심코 나오려는 마음의 소리를 무시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음 날 이런 식으로 넘기려 한다면 전날 일은 없던 일로 만들고 싶다는 소리였다. 거기서부터는 술버릇이 맞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다만 ‘버릇’이라고 이름을 붙일 정도면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도 그런 적이 있다는 걸까? 친구든 누구든? 회사에 다니고 있으면 회식도 몇 번은 했을 텐데. 아니면 평소엔 술을 자제하나? 술버릇인 건 또 어떻게 알게 됐지?
찬영에게는 화가 나지 않았다고 설명하면서도 슬그머니 언짢아졌다.
ㄱㅇㅅ: 근데 조심하긴 해야겠더라
ㄱㅇㅅ: 다른 사람들이랑 있을 땐
정찬영: ㅠㅠ 넵
유치한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말해야겠다…는 건 은석도 처음 느껴 본 감정이었다.
* * *
[귓속말] fjgjaboutr>> 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
[귓속말] fjgjaboutr>> 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윈런롤백해~
[귓속말] 5785675345>> 안녕하세요 사격님 갑자기 죄송하지만
[귓속말] 5785675345>> 혹시 제가 뉴비인데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포션 사고 강화하려는데 돈이 너무 모자라서ㅠㅠ
[귓속말] 5785675345>> 5천만골만 부탁드립니다ㅠㅜ
[귓속말] 5785675345>>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귓속말] fjgjaboutr님께 차단되어 귓속말을 보내실 수 없습니다.
[귓속말] 5785675345>> 에휴;;
[귓속말] 5785675345>> 그거 얼마나 한다고 끝까지 답 안 해주네
[귓속말] 5785675345<< ?
[귓속말] 5785675345>> 인성 ㅉㅉ
[귓속말] 5785675345>> 뉴비한테 5천만골 아껴서 얼마나 잘살겠다고;; 평생 그렇게 살아라ㅋ
[귓속말] 5785675345님께 차단되어 귓속말을 보내실 수 없습니다.
또다. 외우기도 힘든 영어나 숫자 닉네임들이 접속하자마자 저런 귓속말을 보내고 차단하는 일. 전에도 이런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최근에는 더 심해졌다.
신고하기엔 대놓고 보이는 욕설이 없다. 레비아 온라인에서 욕설이란 ‘씨발’, ‘병신’, ‘미친’, ‘새끼’와 같이 정말 교과서적인 단어만을 지칭했다. 어떤 게임이든 이견 없이 금지어로 지정하는 극소수의 단어들. 욕설 신고는 해당 유저가 이 단어들을 우회하여 사용하고 있을 때만 가능했다.
신고가 불가능하다면 보통 유저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1. 같이 키보드 배틀 뜨기. 2. 차단하기 3. 무시하기.
일 번은 은석이 선호하는 수단도 아니었지만 방금 전처럼 상대가 먼저 차단해 버리면 키보드 배틀을 이어 갈 방법 자체가 없었다. 들끓어 오른 화는 풀지도 못하고 혼자 조용히 벽을 보며 삭여야 하는 것이다.
이 번의 경우 일반 유저라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은석은 몇 년 전부터 어그로가 하도 많이 꼬여 차단 목록을 다 채운 지 오래였다. 하나를 차단하면 다른 걸로 오고, 그것도 차단하면 또 다른 걸로 오고….
길드원들이 심심하면 차단하곤 하는 레전드 길드원은 은석의 차단 목록에는 한 명도 없었다. 일일이 차단을 누르는 일에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럴 자리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레비아는 차단 목록 개수 제한을 오십 개로 십여 년간 유지해 왔다. 심지어 차단은 계정 단위가 아닌 캐릭터 단위로 적용된다.
다른 게임사도 아니고 온더넷에서 이제 와 제한을 풀어 준다거나 상황을 개선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귓속말 비허용 같은 기능이라도 추가해 주면 좋을 텐데. 아니면 도배도 신고 사유로 넣어주든가.
결국 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삼 번 무시하기. 은석은 아예 채팅창을 옆으로 치워 두었다. 귓속말을 보고 있으면 게임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정도 다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십몇 년 전 레비아를 시작했던 건 형 때문이었다. 네 살 차이가 나던 형과 같이 어울리고 싶어서.
최종 보스가 비틀이던 시절이었는데, 그때도 은석은 남들보다 레벨 업 속도나 콘텐츠 이해가 빨랐다. 형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협동 콘텐츠를 같이 갔는데 움직임이 느려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며 대놓고 욕을 먹은 적도 있었다. 그래 봐야 몇 초 차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을 잘못 만난 것 같긴 했다. 짜증을 내던 형은 얼마 못 가 게임을 접었다.
잠깐 깔짝이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게임 초반 구간을 넘기지 못하고 질려 하거나 어려워했다. 아이템이나 골드를 지원해 주려고 해도 접속 자체가 귀찮고 하기 싫다는데 그럼 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친구 목록에는 게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만이 남았다. 사실 게임 콘텐츠를 하며 만난 사이다 보니 콘텐츠 소모 속도나 게임 스타일이 비슷해 같이 하기는 더 편했다.
그중 몇 사람들과 만든 게 아군 길드였다.
굳이 아까 같은 귓속말을 보지 않아도 윈드 러너 너프 과정을 둘러싸고 말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황대걸의 방송에 출연한 이후 윈드 러너 성능에 대한 여론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은석도 봤다. 너프도 예상했고, 어쩌면 그 원인으로 지목될 것도 짐작했다.
게시글이나 댓글 내용을 보다 보면 억울한 부분도 있었고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똑같은 일을 가지고도 사람들의 어제 반응과 오늘 반응이 다르다는 건 아웃벤을 이틀만 지켜봐도 알게 되는 사실이다. 당연히 내일 반응도 다를 거고, 여기에 은석이 말을 더 얹지만 않으면 논란도 얼마 못 가 사그라들 게 뻔했다. 다른 랭커들도 이전에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은석보다는 길드원들이 더 화가 나 날뛰었지만 온더넷에서 운영을 못했던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 니선겜 악깡버[2], 누칼협[3] 같은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운영을 따지고 들 거였으면 전전임 디렉터 시절부터 다른 게임으로 날랐어야 했다.
윈드 러너를 접는 것도 전혀 고려해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성능을 보고 잡은 직업이 아닌데. 시간이 지나며 윈드 러너보다 화려한 이펙트에 더 좋은 성능을 가진 직업들도 여럿 출시되었지만 은석은 여전히 윈드 러너가 가장 좋았다. 만약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레비아 온라인은 손도 대지 않겠지만 꼭 해야 한다면 그때도 윈드 러너를 고를 것이다.
세에레 트라이도 아직 남아 있었다. 아무리 은석이 여러 개의 부캐를 키웠다고 해도 윈드 러너만큼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직업은 없었다.
하지만 동은의 일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블루북에 구인 글을 올리긴 했지만 제대로 된 프리스트가 연락해 올 거란 기대는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도 연락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퍼스트 클리어 욕심이야 직업 랭커로서, 그리고 레전드 서버 퍼스트 클리어 기록을 꾸준히 세워 온 유저로서 당연히 그득하다. 그래도 은석은 길드원들이 더 중요했다. 동은이 부모님과 잘 풀고 다시 돌아오는 게 가장 베스트지만 안 되더라도 신규 보스는 또 나올 테니까. 이후에도 퍼스트 클리어에 도전한다면 그 멤버에 동은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또 그걸 떠나서도 오래 가고 싶은 동생이었고.
동은의 생각은 달랐을까. 아무 말 없이 길드 단체 채팅방을 나간 동은은 역시 말없이 길드도 탈퇴했다. 어쩌면 트라이도 억지로 따라온 게 아닐까. 그냥 친한 형이 하자니까 하기 싫은데 말을 못 했던 건 아닌지. 마지막 보이스 코드에서도 파티장이자 길드마스터로서 제대로 중재를 못 했던 것 같아 회의감이 들었다.
찬영이 그건 절대 아닐 거라며 동은도 억울하겠다고 해서 그 생각은 접었다. 사 줬던 것과 똑같은 초코우유 기프티콘도 선물로 받았다. 그걸 보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 뒤 레전드 길드가 퍼스트 클리어에 성공하면서 세에레 트라이 자체가 흐지부지되었다. 누구도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시점부터 트라이는 사실상 중지였다. 혜지도 더는 구인 글을 올리지 않았고 선빈은 충격을 받았는지 접속이 뜸해졌다. 파티원들 중 트라이에 가장 의지가 강했던 나원은 예전처럼 조용히 하던 콘텐츠만 돌릴 뿐이었다.
…진짜 접을까?
강화를 여러 번 실패했을 때 농담 삼아 했던 말이 이제는 진지하게 머릿속을 쏘다녔다.
며칠 뒤 본가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말에 은석은 그날부로 부산으로 내려왔다. 집에 돌아와 직접 마주한 아버지는 편찮으시긴 했다. 다만 단순한 기침감기였을 뿐이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좀처럼 오지 않는 은석을 부르려던 의도였을 것이다. 이런 거짓말까지 하셔야 했나 싶으면서도 직접 말하진 않았다. 반년에 한 번도 안 왔으니 섭섭하실 만도 하지.
간만에 저녁이나 먹자는 소리에 은석은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멀지 않은 식당으로 향했다. 벽지나 문만 봐도 옛날 인테리어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었다. 물과 컵, 수저가 먼저 왔고 곧 소주 한 병과 함께 정갈한 반찬들이 테이블 위로 세팅되었다. 은석은 소주병을 따고 컵에 따랐다.
“밥은. 먹고 다니나.”
“잘 먹고 다녀요. 걱정 마세요.”
“그 커핀지 뭔지 얄라구진 거는 요즘 어떤데.”
“장사 잘돼요. 직원들도 일 잘하고요.”
“정리할 생각은 아예 없고?”
“네.”
단호한 대답이 탐탁지 않은지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언제까지 그것만 할래. 니도 니 이름으로 사업체 하나는 갖고 있어야 되지 않겠나.”
집에서 저녁을 먹어도 될 걸 굳이 은석만 부른 데서 어느 정도 짐작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다만 앉자마자 이 얘기부터 할 줄은 몰랐는데. 지난번의 거절이 별 소용 없었나 보다.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 운영 중인 카페도 은석의 이름으로 등록된 사업체였다. 규모도 절대 작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눈에 카페는 사업으로 비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은석은 모른 척 젓가락질을 했다. 그리고 물었다.
“사업이야 이미 하고 있는데요. 형은 잘 지내죠?”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을 사람은 따로 있지 않느냐 돌려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니 얘기만 하자.”
은석과 달리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섞인 말투는 여전히 고집스러울 만큼 완고했다. 은석은 더 말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거렸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후 은석은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에서 자랐다. 유치원 일 년 반에 초등학교 몇 년을 보내고 났더니 사투리 억양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고서도 말투는 쭉 유지됐다.
외할머니가 싫지는 않았지만 은석은 아버지와 사는 게 더 좋았다. 낯선 여자 어른은 은석에게 항상 살갑게 굴었고 곧 이모에서 어머니로 호칭이 바뀌었다. 없다가 생긴 형도 좋았다. 이미 중학생이었던 형이 은석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자랄수록 둘의 사이는 삐걱거렸다.
소개로 만났으나 결국 연애 재혼이었음에도 은석의 아버지는 아내도, 아내가 데려온 자식도 믿지 못했다. 사업을 영위하면서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몇 번 당했던 탓이었다.
피가 섞인 친자여서 그랬겠지만 은석은 어쨌든 유일하게 아버지가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는 대상이었다. 가족 중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연중에 은석은 형과는 다름을 짚어 주는 말은 불편했고 따로 챙겨 주려는 용돈도 반갑지 않았다.
쓰지는 못하고 모아만 두던 돈은 곧 형에게 걸렸다. 처음부터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중학생이 갖고 있기엔 적지 않은 액수였다.
‘아버지는 원래 너만 챙기시잖아.’
형은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차분히 은석을 비꼬았을 뿐이다. 피가 이어졌으니 이해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은석은 형이 그동안 자신을 귀찮아했던 게 아니라 미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학은 서울로 갔고, 졸업할 때쯤 아버지에게 세 가지를 말했다. 하나. 집안 사업 물려받을 생각 없다. 둘. 졸업 이후로는 어떤 도움도 받지 않겠다. 셋. 카페를 하겠다. 은석은 처음으로 아버지와 싸웠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모은 돈을 투자해 영등포구 어드메 작은 카페 하나를 차렸다. 돈이 모자라 함께하기로 한 동업자와는 일 년도 되지 않아 사이가 나빠졌다. 인테리어 취향이나 일을 하는 방식의 차이 정도는 넘길 수 있었지만 커피 맛이 널뛰기를 한다거나 불친절하다는 평은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카페는 그때 동업에서 탈퇴하고 다른 위치를 알아보던 중 아버지로부터 증여받은 건물을 쓰고 있었다. 사업을 물려받지 않는 대신 받은 것이다. 원래는 이것도 거절하려다 새어머니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꿨다.
형이 은석을 불편해하는 건 그래서였다. 어쩌면 새어머니도. 은석이 아무리 거절해도 아버지는 매번 더 쥐여 주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으니까. 형을 대하는 것과는 눈에 보이게 달랐다. 그래서 이 집안은 온전히 섞이지 못하고 은석은 다른 가족들 앞에서 죄책감을 느낀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영 할 생각이 없나? 모르는 거야 배우면 되고.”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할 생각 없어요. 형도 거기서 일하고 있고.”
“니 형은 강단이 없단 말이라, 강단이. 옆에서 보면 참. 내가 답답시러워 가지고…. 일도 잘 못하고. 니가 있었으면 좋았을 낀데.”
“지난번엔 또 열심히 잘한다고 하시더니.”
“열심히야 하지. 열심히만 하니까 문제지.”
“그래도 이런 얘기를 저한테 하시면 안 되죠. 자꾸 이러시면 저 앞으론 아예 안 내려와요.”
형이 아버지의 말대로 정말 일을 못하고 있든 과장이 섞였든 간에 은석이 들을 필요는 없는 얘기였다. 게다가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오직 형 때문에 사업을 물려받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은석은 제가 모르는 분야에 있는 기업의 운영에 대해서는 정말 요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형이 없었다고 해도 전문 경영인을 쓰시라 권유드렸을 것이다. 하물며 저 집안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유산 싸움 길겠다고 대놓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는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뭐 얼마나 대단한 얘기 했다고.”
한숨만 길게 내쉬던 아버지가 빈 잔을 내밀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수긍한 분위기다. 은석은 그 잔에 술을 따르고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게 말했다.
“간만에 내려왔으니까 며칠은 있다 갈게요.”
“일주일은 있다가 가라.”
“일주일이요?”
한 가게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입장에서 혼자 일주일의 휴일은 너무 길었다. 가뜩이나 직원들에게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급하게 내려온 참이었다. 아버지는 난감해하는 은석을 보더니 신경질을 냈다.
“사장이 일주일 안 간다고 안 돌아갈 가게 같으면 망해야지. 고생하지 말라고 건물도 줘 놨더니만.”
“알았어요. 일주일은 있을게요.”
더 말이 길어지기 전에 은석이 잘라 내듯 대답했다.
“다 같이 모여가지고 식사도 좀 하고 가족끼리. 니가 먼저 멀어도 가끔 내려와가지고 들여다도 보고 해야 될 낀데. 연락도 자주 좀 하고. 명절 때도 안 와서 내가 얼마나 섭섭했는가 아나.”
멀어서…라기보다는 불편한 분위기 때문에 자주 내려가지 않은 거지만. 때로는 나서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그 뒤로 은석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대로 이틀이 지났다.
은석이 기억하는 한 최근 몇 년 동안 레비아를 아예 접속하지 않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작이 아닌 게 이상할 정도로 연이은 장비 파괴나 온더넷의 삽질 운영에도 꼬박꼬박 접속해 왔다는 게 자랑스럽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랬다.
접을까 고민하는 것과 별개로 접속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단순히 게임을 돌릴 컴퓨터가 없어서였다. 본가 컴퓨터는 은석이 고등학생이 된 이후 한 번도 바꾸지 않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억지로 접속했다가 튕긴 적도 몇 번 있다. 그 탓에 아주 가끔 은석이 본가로 내려가게 되면 노트북이라도 가지고 가곤 했는데, 이번엔 워낙 급하게 오기도 했고 받은 연락 내용도 내용이었으니 노트북까지 챙겨 올 정신이 없었다.
남은 건 집 근처에 있는 PC방뿐이었다. 그렇지만 거길 굳이 가야 할까? 일일 퀘스트? 이미 이틀 빠진 거 며칠 더 빠진다고 달라지긴 하나. 은석은 앉아 있던 바퀴 의자를 뒤로 쭉 뺐다. 옛날 같은 의지는 이제 생기지 않는다.
미접속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혜지에게는 따로 연락했다. 지인 길드라 출석을 빡빡하게 관리하고 있진 않았으니 일반 길드원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은석은 길드마스터였다. 할 일은 해야 했다.
집안 사정으로 부산에 있어 접속이 어려우니 길드 스킬만 부탁한다는 짤막한 메시지에 혜지는 더 묻지 않고 ‘ㅇㅇ’ 두 글자만 보냈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오래 봐 온 지인이었고 그만큼 상대에 대한 신뢰도도 높았다. 길드 스킬뿐만 아니라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터지더라도 혜지라면 잘 대처해 줄 것이다.
은석은 반은 농담, 반은 진담으로 혜지에게 물었다.
ㄱㅇㅅ: 그냥 길마 가져갈래?
임혜지: ?
ㄱㅇㅅ: 잘할 것 같은데
임혜지: 님 진짜 접음?
접는다는 소리가 왜 나오냐고 하기엔 양심이 있다. 은석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혜지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임혜지: 잠깐 쉬는 건 ㄱㅊ
임혜지: 접는 건 웬만하면 반대임
임혜지: 부담 주는 건 아닌데 여기 너 하나 보고 들어온 애들도 있을걸
맞다. 아군에는 천사 시절부터 은석이 데려온 길드원들도 있었다. 보은을 시작으로 해서, 가장 최근엔 찬영까지. 나머지 길드원들이야 은석이 있고 없고에 크게 좌우되진 않을 테고 걱정할 만한 사람이라면 찬영뿐이다. 찬영조차도 길드에 들어온 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 거의 모든 길드원들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몇 명은 나이트메어 트라이를 같이 한 것도 있고 하니까. 적응을 잘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임혜지: 그리고 내가 길마하는 거랑 니가 하는 거랑 다름
ㄱㅇㅅ: 나 길스 올리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ㅋㅋ
임혜지: ㄴㄴ 그런 것 같아도 아님
임혜지: 애들이 따르는 것도 그렇고 밖에서 보는 것도 그렇고
임혜지: 권나원만 해도 보셈
ㄱㅇㅅ: 걔 생각하면 동명 형이 길마여야지
임혜지: 그렇긴 한데 김동명은 길드 공지에 아재개그 쓸 것 같아서 싫음;
ㄱㅇㅅ: ㅋㅋㅋㅋ
은석은 혜지와의 채팅방을 나와 길드 단체 채팅방으로 들어갔다. 동은의 일이 있고 난 이후 단톡방은 조용했다. 간간이 동명이나 보은이 한계의 탑을 치고 나눈 대화들이 보이긴 했지만 이전의 화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대화창을 조금만 위로 올리면 세에레 트라이 얘기, 게임 이벤트나 업데이트 얘기, 레전드 길드 얘기, 은석의 강화 얘기 같은 주제들이 줄줄 이어져 있다. 그 가운데 선빈의 이름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잠시 생각하던 은석이 선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ㄱㅇㅅ: 오늘 레비아 접속함?
정선빈: ㄴ
ㄱㅇㅅ: 왜
정선빈: 개노잼임
ㄱㅇㅅ: ㅋㅋㅋ
정선빈: 연락한 김에 혹시
정선빈: 요즘 이동은한테 연락 받은거 있음?
ㄱㅇㅅ: 없는데 왜
ㄱㅇㅅ: 동은이 연락왔어?
정선빈: 그건 아님
정선빈: 일단 ㅇㅋ 고맙다~
메시지는 그대로 끊어졌다. 눈치를 보면 뭔가 얘기해 보려는 것 같긴 한데…. 경험상 이럴 때는 가만히 두는 편이 결과가 좋았다. 일이 생긴다면 선빈이 어련히 알아서 말해 주겠지.
안 되는 집 컴퓨터로 레비아에 접속해서 아이템 캡처만 하고 나왔다. 장신구와 약속 장비를 제외하자 모자, 견갑, 상의, 하의, 각반, 장갑, 신발 일곱 부위가 남았다. 한 삼 년 전쯤이었나. 레전드 서버 추가와 함께 갈망하는 영원 장비가 출시되자마자 열심히 만들었던 것들이다.
그림판에 붙여 넣기 된 장비들을 보자 시원섭섭했다. 은석은 십 년 넘게 해 온 게임을 이제는 정말 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접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ㄱㅇㅅ: 진짜 접을까?
그래서 찬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약간 충동적이긴 했지만 혜지나 선빈보다도 찬영에게 먼저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찬영은 은석이 부산에 있는 걸 혜지에게 이미 들었다고 했다. 따로 말해 줄 생각이었는데. 정확히 어떤 경위로 오게 되었는지 말하는 게 민망해져서 은석은 두루뭉술하게 둘러댔다. 괜히 걱정할지도 모르니 큰일이 아니라는 것만 알려 줄 생각이었다.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 낸 장비 사진들을 단톡방에 올리자 다들 접느냐고 난리였다. 처음부터 접을지도 모른다는 신호를 주는 게 목적이었으니 상관없었다. 다만 찬영이 한마디도 없어 신경이 쓰였다. 개인 톡도 은석의 메시지 이후로 답이 없고. 답을 안 하는 상황에서 또 메시지를 보내기도 그랬다.
…혹시 섭섭했던 건가?
머릿속에 가설 하나가 떠오른다. 그리고 바로 부정했다. 설마. 별생각 없이 답장 안 한 거겠지. 그러다 모자 강화를 하다 터뜨리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은석을 찾던 찬영이 생각났다. 본인한테는 접지 말라 해 놓고 어딜 가시냐고 했었나. 그때는 유일하게 공략을 선행학습 해 왔던 뉴비가 접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정도였는데.
찬영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주저하던 은석은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겼다. 그날 일이 거대한 스노우볼이 되어 굴러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 * *
찬영이: 나 지금 해운대 갈 건데
찬영이: 한 번 볼 수 있어?
서울에서 지금 출발한다는 뜻일까. 버스로? 아니면 기차나 비행기로? 단순한 여행일지도 모르지만 은석은 아닐 거라고 직감했다. 찬영의 말은 어딘가 서투르게 급했고 회사 출장으로 오는 뉘앙스도 전혀 아니었다.
찬영의 집 앞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금 머리를 맴돈다. 은석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바로 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면으로 잠깐 보인 시간은 오후 여섯 시 삼십 분 정도였다. 달리 반차를 쓴 게 아니라면 집에도 들르지 않고 퇴근하자마자 해운대행 버스에 올랐다는 뜻이다. 지금 해운대로 갈 건데 볼 수 있냐는 메시지까지 보내면서.
그리고 네 시간 반을 달려서 오겠지.
기분은 벅차서 이미 한참 앞서 달려 나간 채였고 은석은 찬영과의 통화가 끝나고서도 그걸 숨기지 못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잠시만 마음을 놓고 있어도 눈과 볼과 입이 제멋대로 풀렸다.
차는 굳이 가지고 오지 말라기에 인도를 타고 쭉쭉 걸었다. 해운대시외버스터미널이야 도보로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사이면 가고도 남겠지만 은석이 집에서 나선 시간은 열 시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한 시간 좀 넘게 기다리고 있으면 찬영이 도착할 것이다. 터미널 하차장까지 미리 마중 나가 있으려는 생각이었다.
좁은 대합실에 가만 서 있는데 주머니에 밀어 두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이름을 보자 놀랍게도 동은이었다.
‘안녕하세요 형….’으로 시작한 메시지는 은석이 살면서 받은 메시지 중 가장 길었다. 요약하자면 ‘세에레 트라이를 엎어뜨려 미안하고, 말없이 단톡을 나가거나 길드를 탈퇴해 길드 분위기를 다운시킨 것도 미안하며, 갑자기 연락한 것도 미안하다. 길드에 다시 받아 주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다 미안하다는 내용이다.
메시지 자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꼼꼼하게 읽었지만 사실 은석은 동은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잘했다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탈퇴의 여파로 길드 분위기는 처지고 있던 게 사실이었고 길드원들이 답답해했던 것들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당장 은석이 접을까 말까 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은이 돌아왔을 때, 길드에 다시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은은 아직 어렸다. 스무 살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상황을 고려하면 선빈이 과하게 몰아붙인 게 아니라고 해도 당사자는 억울했을 수도 있고 섭섭했을 수도 있다. 모르는 사이가 아닌 오래 봐 온 지인일수록 그런 감정은 더 쉽게 생긴다. 예전에는 은석도 감정적으로 굴 때가 있었다.
부모님 몰래 아이템을 샀다는 것도 무슨 마음인지 이해했다. 원래 트라이가 길어지면 딜러 힐러 할 것 없이 모두 본인의 손에 현타가 오거나 스펙을 올리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혜지와 선빈도 반지 효과를 얻겠답시고 결혼까지 했지. 물론 그것만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메시지 하나가 더 날아왔다.
이동은: 형한테 진짜 제일 죄송해요
이동은: 지금 선빈 형이랑도 계속 얘기중이에요
선빈과? 메시지 뒤로 울상이 된 얼굴 하나가 불투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ㄱㅇㅅ: ㄱㅊㄱㅊ
ㄱㅇㅅ: 안 그래도 저번에 너한테 연락온 적 있냐고 물어봤었는데 연락했나보네
이동은: 네ㅠ
이동은: 저희 이것 때문에 다음 주 주말에 다같이 한번 보려는데
이동은: 형은 어떠세요
ㄱㅇㅅ: 우리 파티원들끼리?
ㄱㅇㅅ: 다른 애들은 다 나온대?
사는 지역이 그리 멀지는 않다고 해도 시간 때문에 한 번에 모이긴 쉽지 않을 텐데. 선빈이야 이제 괜찮겠지만 혜지는 아직도 불만을 갖고 있을지 모르고, 나원은… 부르면 나올 것 같긴 하다. 안 나오면 어쩔 수 없고.
이동은: 셋 다 온다던데요
ㄱㅇㅅ: 잘됐네ㅋㅋ
화해했다니 그럴지도 모른다. 동은의 탈퇴는 파티 전체에 큰 충격이었으니 말이다.
이동은: 꼭 세에레 파티원들끼리만 모이려는 건 아니고 길드원 중에 몇 명 더 물어보게요
이동은: 갑자기 탈퇴했어서 죄송한 것도 있고
ㄱㅇㅅ: 다같이 보면 좋지
ㄱㅇㅅ: 나도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되면 바로 말해줄게
이동은: 넵
이제는 선빈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 차례였다. 아마 은석이 연락했던 그 날부터 동은과 연락을 한 게 아닌가 싶긴 했다.
ㄱㅇㅅ: 동은이랑 연락함?
정선빈: ㅇㅇ?
정선빈: 며칠전에 내가 먼저 함ㅋㅋ
ㄱㅇㅅ: 오 잘했네
정선빈: 원래 이런 건 나이 많은 사람이 먼저 해야돼
정선빈: 그리고 다같이 있는데서 뭐라 한 것도 있고 하니까
정선빈: 그날 일은 내가 미안하다했지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는 말에 은석은 놀랐다. 동은이 단톡방을 나갔을 때도 제일 어이없어했으니 계속 화가 나 있을 줄 알았는데. 길드 탈퇴는 아니다 싶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은석이 접니 마니 하고 있던 사이 둘은 화해 중이었을 걸 생각하니 좀 허탈하기도 했다.
ㄱㅇㅅ: 그래서
정선빈: 이동은 바로 자기가 더 죄송하다함ㅋ
ㄱㅇㅅ: ㅋㅋㅋ 귀엽네
정선빈: 안 그래도 너한테 사과한다고 연락할거라던데
정선빈: 연락 안 왔냐?
ㄱㅇㅅ: 이미 받음
ㄱㅇㅅ: 뭐라 하지도 못하겠던데 사과를 너무 많이 해서
정선빈: 아그니까 ㅁㅊ넘이 ㅡㅡ
정선빈: 처음에 라톡 너무 길게 와가지고
정선빈: 세줄이상 안 읽는다고 함
ㄱㅇ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왜 좀 받아주지
정선빈: 아니 길게 보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정선빈: 아무튼 이번 거는 나도 너한테 미안하게 생각함
ㄱㅇㅅ: ㄴㄴ
ㄱㅇㅅ: 내가 먼저 동은이한테 연락했어야 하는데 나도 생각보다 멘탈 나가있었던 듯
ㄱㅇㅅ: 잘했어
정선빈: 근데 넌 좀 그럴만했음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을 안 길드원들끼리의 사이가 이만큼 벌어진 건 레전드에서 탈퇴했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잘굿과는 원래 친하지 않았던 것도 있고. 결국 잘 해결되어 다행이지.
은석은 다시 시계를 보았다. 터미널 한쪽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이제 겨우 열 시 사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늘을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해서 시간이 빨리 가 주지는 않는다. 찬영이 오려면 아직도 삼십 분은 기다려야 했다.
오면… 작은 대합실을 초조하게 서성이다 바깥의 승하차장을 내다보며 생각한다. 끼니를 걸렀을 테니까 우선 좋아하는 메뉴로 밥부터 먹이고, 커피나 아이스크림 같은 것도 쥐여 준 다음 천천히 이 밤에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물어보는 게 좋겠다. 그럼 찬영은 뭐라고 할까. 일단 은석은 찬영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 모든 게 착각이었고 사실 찬영은 별생각 없이 왔다고 한다면. 그때도 하려던 말을 할 수 있을까? 해도 될까?
털실처럼 뒤엉키던 생각이 정리되고, 마침내 머릿속엔 단 하나의 대답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