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 연애 법칙 3권
목차
7. 최선을 다한다는 것
8. 점화
9. Late Night
외전
7. 최선을 다한다는 것
아웃벤에 올라온 잘굿의 글은 그 내용으로 따지자면 별것 없었지만, 색안경을 끼고 봐서인지 단어 하나 띄어쓰기 하나마다 기분이 나빴다.
찬영은 잘굿과 잘굿에게 선망의 댓글을 보낸 사람 전부를 차단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길드원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차단했다. 동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탈주를 했건 어쨌건 이 일에 대해 뭐라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은 길드원들뿐이다. 어쩌면 이대로 동은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세에레 트라이도 물 건너갔고, 노말 나이트메어는 너무나 익숙해졌고. 자연히 보스에 시들해진 길드원들 사이로 한계의 탑 열풍이 불었다. 그중에서도 동명이나 보은이 가장 열심이었다.
기록을 몇 번이나 경신한 두 사람은 한계의 탑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는 찬영에게 아직까지 레비아 헛했다며 장난을 쳤다. 장난쯤이야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그 말대로 한계의 탑은 레비아 온라인에서 가장 주요한 콘텐츠 중 하나였다. 한 번쯤은 도전해 볼 만 했다.
아무런 도핑도 준비도 없이 자체 버프로만 해 봤을 때의 첫 기록은 49층이었다. 나이트메어를 트라이하기 전 은석이 찬영에게 46~47층쯤 될 거라고 했었나. 그사이 아이템도 몇 개는 갈았고 아수라 자체의 숙련도도 올랐으니 그보다는 높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좋은 기록이었다.
이후 찬영은 만반의 준비를 거쳤다. 탑의 층별로 나오는 몬스터의 패턴부터 분석했다. 예를 들면 45층의 비틀 같은 것.
하드 비틀은 어느 정도 딜로 찍어 누르는 게 가능할 때부터 잡았기 때문에 매주 잡고 있어도 짤 패턴 같은 건 잘 몰랐다. 사람들의 말로는 비틀이 한계의 탑에서도 반격이나 슬로우 같은 귀찮은 패턴을 사용하기 때문에 45층에서 시간을 아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전체 기록도 달라진다고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딜컷[1]도 필요해 보였다.
다음으로 한 일은 데미지가 비슷한 같은 직업군 영상 보기였다.
매번 한꺼번에 맞춰서 쓰던 극딜 스킬들을 층마다 어떻게 분배할지 빌드를 짜는 일은 머리 아프면서도 즐거웠다.
길드원 중 한계의 탑 기록이 가장 높은 사람은 은석이었다. 직업이야 다르지만 원래 이런 콘텐츠는 보스처럼 콘텐츠 자체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니 물어본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은석이라면 제 일처럼 도와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번에는 먼저 제힘으로 해 보고 싶었다. 게다가 무슨 좋은 일이 있었다고, 요즘은 레비아라면 지긋지긋할 은석에게 저까지 짐을 얹어 주고 싶지도 않았다.
찬영은 한계의 탑 대기실에 캐릭터를 세워 두고 도핑을 줄줄이 했다. 어차피 한 번 할 때 제대로 하는 게 나으니까 길드원들이 세에레 트라이 때나 썼던 빛나는 영웅의 비약, 빛나는 집중의 비약 같은 것들도 아낌없이 먹었다. 비싸다고는 하지만 그건 매일 사용해야 할 때의 기준인 거지 한계의 탑을 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공격력 상수 10, 20 차이만으로 층수 기록이 갈린다는데 고작 몇천만 골드 아끼겠다고 고민할 만한 효과 수준이 아니었다.
약쟁이마냥 도핑이란 도핑은 다 마치고 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길드 스킬이 비활성화되어 있었다. 찬영이 멈칫했다.
길드 스킬 레벨은 레비아의 정기 점검 일정에 맞춰 매주 수요일마다 초기화된다. 각 길드원들이 주간 길드 콘텐츠를 수행한 점수 총합을 기준으로 서버별 길드 등수를 매기고, 이 등수에 따라 분배된 길드 포인트를 활용하여 길드 스킬을 올리는 방식이었다.
미리 설정한 권한에 따라 길드마스터나 부길드마스터는 물론이고 길드원들까지 길드 스킬을 올릴 수 있었지만, 보통은 길드마스터가 올렸다. 우스갯소리로 길드마스터의 권력은 길드 스킬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었다. 여느 MMORPG가 그렇듯 길드 스킬 하나 때문에 길드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중요도를 따지자면 마법석 파편 상자를 수급할 수 있는 길드 상점도 뒤지지 않았지만, 마법석 강화 자체가 워낙 장기 콘텐츠다 보니 곧바로 체감이 되는 쪽은 길드 스킬이었다.
아군에서도 이 역할을 길드마스터인 은석이 했다. 오늘은 금요일이다. 수요일 0시만 되면 칼같이 길드 스킬부터 올리던 은석이 이틀이 넘도록 잊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잊고 있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은석이?
찬영은 눈을 끔벅였다. 그러고 보니 이 형… 요즘 접속은 하고 있나? 적어도 찬영은 게임에서 은석을 본 적이 없었다. 지난주, 레전드에서 세에레를 최초로 클리어했다는 시스템 알림이 올라온 이후부터였다. 요 며칠은 평일이었고 당연히 찬영이 접속 안 했을 때 접속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도핑 지속 시간은 이 순간에도 줄어들고 있었다. 간부 중 접속해 있는 사람은 혜지뿐이었다.
[길드] 앞으로맑음: 혜지 누나 있음?
[길드] 빨강색: ㅇ?
[길드] 앞으로맑음: 혹시 길드 스킬 찍어줄 수 있어?
[길드] 앞으로맑음: 나 한탑 할 건데
[길드] 앞으로맑음: 길드 스킬이 안찍혀있어서
일단 찬영은 혜지에게 스킬을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길드] 빨강색: ㅁㅊ
[길드] 빨강색: 미안;; 바로 찍어줌
[길드] 빨강색: 까먹었음
까먹었다고? 원래부터 본인이 찍었어야 했다는 얘기다. 그럼 은석은. 찬영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사정이 생겨 이번에만 부탁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찬영이 들은 것도 없었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스킬 쿨 타임과 층별 몬스터 체력을 고려해 짜 둔 빌드는 하나도 안 맞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찬영의 캐릭터가 훨씬 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원래 목표했던 50층은 가볍게 성공했다. 50층 18:17. 빌드를 좀 더 깎는다면 51층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한계의 탑만큼 유저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보는 스펙 지표도 없었으니 당연히 기뻐해야 할 마당에, 찬영은 왜 은석이 길드 스킬을 올려 두지 않은 건지에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다.
모르는 사람은 며칠 접속 안 한 게 뭐가 대수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틀 이상 미접속은 적어도 은석 같은 랭커에게는 굉장히 큰 일이다. 레비아처럼 일일 퀘스트나 주간 콘텐츠가 있는 MMORPG는 하루 이틀 안 하게 되는 순간부터 모든 걸 놓아 버리기 쉬웠다. 괜히 게임사들이 데일리 접속 보상 같은 걸 줘 가며 어떻게든 매일 접속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찬영은 미간을 좁혔다. 하필 이 시점에. 아무리 이 게임이 쉽게 접지 못한다는 이유로 연어 게임이라고 불린다 해도.
한계의 탑에서 퇴장하자마자 혜지에게 은석에 대한 것부터 물었다.
[길드] 앞으로맑음: 길드 스킬 원래 은석이 형이 올리지 않았나?
[길드] 빨강색: ㅇㅇ 맞음
[길드] 갓말이: 요즘 형 접속 잘 안 하시는 것 같던데요
[길드] 빨강색: 고은석 아마 당분간은 접속 못할 거임
[길드] 빨강색: 지금 부산인 듯?
[길드] 빨강색: 누가 물어보면 집안 사정이라고 전해달라 했음
부산? 본가에 있는 건가. 집안 사정이라 하는 걸 보니 그럴 것 같긴 했다. 혜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 사정이란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양평에서의 첫 정모 때, 은석이 늦을 것 같다고 알려 왔을 때도 혜지는 비슷한 반응이었다. 둘은 얼마나 오래 알고 지낸 걸까. 야릇한 마음이 들었다.
[길드] 빨강색: 걔 이제 진짜 접을지도 모르겠던데
[길드] 갓말이: ㄷㄷ
[길드] 갓말이: 근데 은석이 형이 접는다고 하신 게 한두 번은 아니지 않나여
[길드] 갓말이: 맨날 강화 때문에 현타 와서 접어야겠다고 그러셨잖음
[길드] 도텐: ㄹㅇ
[길드] 도텐: 그거 때문에 다른 사람 접는다는 건 믿어도 걔가 접는다는 건 안 믿는 거임
[길드] 빨강색: ㄴㄴ
[길드] 빨강색: 이번엔 좀 다른 것 같음
[길드] 빨강색: 나한테 길마 넘겨 받을 건지도 물어봤음
[길드] 앞으로맑음: 헐
길드마스터를 넘겨줄 생각까지 하고 있다고?
[길드] 빨강색: 그리고 이번엔 강화 때문이 아니라
[길드] 빨강색: 너프 문제랑 다른 일도 많았고
[길드] 빨강색: 개인적인 것도 있는 것 같아서
[길드] 빨강색: 찐일지도
다른 일이란 동은의 탈퇴나 세에레 퍼스트 클리어 실패를 말하는 거겠지.
나한테는 그런 말 한마디도 없었잖아. 정말 한마디도….
접는다는 얘기도, 접속을 못 할 것 같다는 얘기도, 사정이 있다는 얘기도 찬영에게는 해 주지 않았다.
울컥한 찬영은 마우스를 꽉 쥐었다. 이제 쌍방으로 번호도 있는데. 말하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거다. 자기는 동명과 연락처를 서로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섭섭하다 그래 놓고.
접지 말라고도 했으면서. 섭섭함을 넘어 배신감까지 밀려왔다.
순식간에 게임에 흥미를 잃은 찬영은 컴퓨터 화면을 켜 둔 채 매트리스 위에서 한참 뒹굴거렸다. 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은석의 라잇톡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본다.
은석이 형: 진짜 접을까?
순간 찬영은 그 메시지가 은석이 보낸 게 아니라 제가 보낸 건 줄 알았다. 타이밍도 타이밍이고, 안 그래도 당사자의 프로필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하얀색 메시지 박스를 보면 접을까 물어본 쪽은 명백히 은석이었다.
아는 척하고 싶은 것도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일단 찬영은 모른 척했다.
정찬영: 왜
정찬영: 사람들 때문에?
은석이 형: ㅋㅋㅋ 아니
은석이 형: 그냥
그냥? 그으냥? 심통이 난 마음은 말 한마디 곱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삐뚤어진다. 말이 그냥이지 그 속엔 분명 ‘저격 패치를 진행한 운영진은 빡치고 그걸 또 운영진이 아닌 일개 유저에게 화풀이하는 사람들도 질리고, 그나마 힘내서 진행하려던 세에레 트라이는 엎어진 데다 파티원들끼리의 싸움 끝에 오래 알고 지낸 길드원까지 탈퇴해서….’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겠지만.
찬영이 레비아에 재미를 붙인 팔 할은 은석의 덕이었다. 애초에 은석이 아니라면 데스 아이나 노말 나이트메어 트라이도 안 했을 거고 아군 길드에 들어올 일도 없었을 거다. 아마 뉴비 길드에서 추방당했을 때쯤 접어 버렸겠지. 개당 백만 원이 넘어가는 장비들을 고민 없이 턱턱 살 만큼 게임에 애정을 갖지도 못했을 테고.
뉴비를 이만큼이나 키웠으면 고인물로서 어느 정도 책임은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정찬영: 형 지금 부산이라며
정찬영: 혜지 누나가 그러던데
은석이 형: 벌써 말했어?
은석이 형: 일이 좀 있어서
은석이 형: 집에서 내려오라고 해서 와있어
일이 좀 있다는 말은 별일 없다는 것과 비슷하게 으레 쓰는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세한 사정을 알려 주기는 곤란할 때 대충 둘러대는 말.
벌써 말했냐는 메시지에서는 미묘한 벽이 느껴졌다. 물론 은석 스스로는 그럴 의도가 없었을 것도 알고, 혜지와는 오래된 사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찬영은 고개를 몇 번이고 까딱거리며 손가락으로 볼을 밀었다.
정찬영: 알았어
정찬영: 뭔가 사정이 있나보네
은석이 형: 큰일은 아닌데 좀 오래 있을 것 같아
은석이 형: 잘하면 다음 주까지 있어야 할지도 ㅠ
은석이 형: 지난주에 내려왔는데
은석이 형: (이모티콘)
정찬영: 헐
당황한 듯 땀을 흘리는 곰돌이가 보였다. 지난주부터 다음 주까지면 꽤 오래였다. 그 기간 동안 접속하지 않을 수 있다면 정말 접는다는 판단이 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찬영: 많이 바빠?
은석이 형: 그런 건 아니고
은석이 형: 정리되면 말해줄게
확신을 더해 주듯 곧 길드 단톡에 크롭된 장비 아이템 사진이 올라왔다.
은석이 형: (사진)
은석이 형: (사진)
은석이 형: 이거 정리하면 얼마나 나올까
무기를 제외하고는 약속 장비가 아닌 영원 장비들인 걸 보니 은석이 현재 끼고 있는 장비들인 듯했다. 추가 옵션은 최소 36%에, 강화 수치도 견갑 빼고는 올 25강. 사진에 나온 장비들은 하나같이 헛웃음이 날 정도로 완벽했다. 이런 게 레전드 서버에 있었다니. 도시 서버였다면 굳이 약속 장비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달려들 것 같았다.
서보은: ??
박태경: ㅎㄷㄷ
권나원: 통으로요?
김도텐: 통이면 ㅋㅋㅋ 우리 서버에서 살 사람이 있긴 함?
김도텐: 아니면 너가 사게?
권나원: 그건 아닌데
서보은: 글킨 해요 나눠서 보셔야 할 듯
서보은: 근데 왜요
서보은: 형 접으심?
서보은: 안 그래도 요즘 접속도 잘 안하시고
서보은: 쪼끔 서운하네요
은석이 형: 아직 확정은 아닌데
은석이 형: 잘 모르겠네
임혜지: ?
임혜지: 진짜 접음?
서보은: 엥
서보은: 헐
서보은: 그럼 보코는여?ㅠㅠㅜㅠ
서보은: 접으셔도 보코는 맨날 놀러오셔야 함
김도텐: 접으면 사격도 끝이지
김도텐: 각자의 길로 ㄱㄱ
서보은: 그런게 어딨음
서보은: 연락은 계속 해야됨
은석이 형: 확정은 아니라니까 ㅋㅋㅋ
은석이 형: @김도텐 이 형은 바로 보내버리네;;
은석이 형: 그냥 하는 말이야
은석은 그냥 하는 말이라지만, 단톡에 장비 가격까지 물어보면서 접을지도 모른다고 대놓고 말한다는 건 정말로 접을 의사가 있다는 거겠지.
지금 부산에 있다고 했나. 휙 몸을 일으킨 찬영이 그 자리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가만히 생각한다. 만약 혜지가 은석이 부산에 있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면 은석에게서 먼저 그 사실을 들을 수 있었을까?
곱씹을수록 당연한 사실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찬영이 은석을 생각하는 것만큼 은석이 찬영을 생각하진 않는 거라고.
그 뒤로 은석은 좀처럼 연락이 없었다. 바쁘겠지. 집에서 부르기도 했다는데. 자기 합리화는 아무 소용이 없었고 찬영은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스물일곱씩이나 먹어 놓고 서로 사회인인 마당에 연락 텀에 연연하면 안 되는 것쯤은 알고 있다. 더군다나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 아무것도 아닌 사이…. 어감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먼저 연락하면 될 일인데 이번에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는 점이, 또 스스로도 은석과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답답함이 발목을 잡았다.
은석은 정말 접게 될까? 이대로 접속이 시들해지고, 더 이상은 말할 거리도 만날 거리도 없어지고, 그러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까.
게임으로 알게 된 사이는 게임이라는 매개체가 사라지면 쉽게도 끊겼다. 서로 연락처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 한계였다. 에이나인 때도 그랬다.
다른 길드원들은 모르겠지만 찬영이 은석을 알게 된 지는 이제 겨우 몇 달이었다. 몇 달은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지는 데는 아무 무리 없을 만큼 긴 시간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든 넘겨 버릴 수 있을 만큼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은석도 술버릇이 이상했던 애가 하나 있었지, 정도로 찬영을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딱 그 정도로만.
회사에서는 좀 나았으나 혼자가 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오늘은 아예 밤을 새운 참이었다. 아침에 두유 하나를 사 들고 온 찬영은 하품을 하며 잠을 깨려고 애썼다.
평소보다 삼십 분은 일찍 나오고 보니 구매팀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찬영은 컴퓨터를 켜며 옆 서랍에 넣어 둔 과자 몇 개를 꺼내 씹었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머리가 둔해 뭐라도 씹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은 간밤의 소식들과 배너 광고, 스포츠 경기 하이라이트 동영상들로 가득했다. 뉴스 아래 위치한 광고 포스트들을 맹하게 넘기던 찬영의 시선이 그중 한 챕터에 멈췄다.
“그냥 제가 착각했었나 봐요” 한소정, 짠내 나는 짝사랑
‘친사’ 이시온 “사랑한다는 말 한 번도 못했어”… 눈물 고백
평소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드라마 클립 제목들이 유독 텁텁하게 남는다. 찬영이 입을 씰룩거렸다. 뭔 주제인가 확인했더니 연예고, 그다음 순서는 연애다. 눈에 들어오는 하나를 클릭했다.
[연애 꿀팁] 그 사람이 날 좋아하는지 아는 열 가지 방법
안녕하세요. 연애 상담 전문가 너구리입니다. 연애를 시작할 때 가장 고민하는 게 뭘까요? 바로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게 맞나,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가 하는 부분이죠.
우리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많은 신호를 주고받습니다. 상대방이 유독 내 말을 잘 들어준다든가, 질문을 많이 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좋은 신호고요.
하지만 사람에 따라 표현 방식이 약간씩은 다르기 마련이고, 연애도 똑같습니다. 더군다나 남자의 마음을 여자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말도 있듯이 서로 너무 다른 존재이니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 있는 이성에게 보이는 행동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 마련이죠. 진심인 사람은 상대를 헷갈리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해서 오늘은 대표적인 호감 신호에 대해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1. 다른 이성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것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에 확신이 없는 분들이 질투 유발 작전을 벌이는 경우도 많죠 ㅎㅎ 잘못하다간 활활 불타오르고 있던 마음도 식게 만들 수 있으니 신중하시길 당부합니다.
(중략)
10. 연락을 끊임없이 이어간다.
남자가 진짜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한다면 어떻게든 연락을 하게 되어 있다는 말, 많이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연락은 가장 확실한 관심의 표현입니다. 연락이 끊어진다면 사랑도 끊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애하고 싶으시다고요? 절 믿고 끝까지 따라오시면 여러분들도 연애 가능합니다.
현재 일대일 연애 상담도 진행하고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은 라톡 아이디 zxc***_로 메시지 주시면 되겠습니다.^^ (가격: 라잇톡 문의)
가격은 라잇톡 문의라는 마지막 문구를 보니 기가 찼다. 이런 건 짝사랑 중이든 권태기가 왔든 이미 헤어졌든 간에 연애 고민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글일 텐데. 남의 절실함으로 돈을 벌어먹으려는 사기꾼들은 정말 세상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었다.
이따위 글을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모든 일은 사람 바이 사람이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다. 인생의 많은 부분에 통용되는 진리는 연애에도 적용된다. 그러니 이런 유의 게시글은, 특히 ‘연애 꿀팁’ 따위를 붙인 게시글은 하등 의미도 쓸모도 없다.
그걸 아는데 왜 그러는 걸까. 뻔한 내용들을 왜 다 읽었을까. 힘없이 빨아올린 두유가 빨대로 한 방울씩 목구멍을 타고 흘러갔다. 찬영은 아무것도 자신이 없었다.
* * *
밤을 새웠더니 속이 영 좋지 않았다. 점심을 패스한 찬영은 중앙 엘리베이터를 타고 두 층 올라갔다. 빌딩에는 세 개의 층마다 휴게 공간을 만들어 둔 곳이 있었는데, 사실 쉬러 오는 사람보다는 중간중간 담배를 피우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래도 남들 다 밥 먹으러 갔을 시간이라 평소보다는 한적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수연이 보였다. 저쪽도 오늘 식사는 패스했나. 이 시간에 여기 왔다면 피차 혼자만의 시간이 소중할 테니 멀리 가려는데 수연도 찬영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멈칫하길래 뭔가 했더니, 수연의 오른손에서 작은 막대기 하나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담배였다.
수연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 자체는 오늘 처음 알았지만 따지고 보면 성인이 담배를 피운다는데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입사 동기다 보니 회사에서는 자주 마주친 편이었는데, 그동안 흡연자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평소에 냄새도 안 났다는 게 신기할 뿐이지.
“떨어지셔도 돼요.”
수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안 그래도 멀어질 작정이었지만, 담배 때문에 저러나.
“냄새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상관없는데…. 저희 팀 팀장님도 담배 피우셔서요.”
“냄새도 냄샌데 연기 때문에요. 저 흡연자인 줄은 모르셨죠?”
“몰랐긴 해요. 숨기시려던 거면 제가 괜히 들어왔네요.”
찬영은 수연의 눈치를 살폈다. 누구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건 찬영의 입장이고, 수연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랐다. 흡연자임을 들키는 순간 회사에서 좀 귀찮아지긴 할 것이다. 찬영은 흡연자도 아닌데 팀장이나 임원들에게 여기저기 끌려다닌 적이 있으니까. 사회생활인데 싫은 티를 낼 수도 없고 말이다. 미안함이 담긴 시선에 수연이 웃었다.
“진짜로 숨길 생각이었으면 여기서 피웠으면 안 됐죠.”
그렇긴 했다.
“저도 원래 회사에선 잘 안 피우는데… 제가 어제 헤어지고 제정신이 아니라서요.”
…갑자기?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타인의 사정에 혼란스러워진 찬영은 침묵을 고수했다. 원래 연애사를 제일 오픈하면 안 되는 1순위가 직장 동료 아니었나? 어쨌든 듣고 보니 찬영도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수연의 얼굴은 거의 초췌함에 가까웠다.
“남자고 여자고 진짜 좋아하면, 헷갈리게 안 하는 것 같아요.”
“…….”
수연은 시든 풀때기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적당히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했는데, 말하는 걸 보니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은 모양이다. 찬영은 슬금슬금 돌아서려던 몸을 다시 바로 했다. 우습게도 아침엔 개소리라고 여겼던 게시글 내용이 다시금 떠올랐다. 수연이 그 게시글을 봐서 이럴 리는 없고.
“혹시 날 안 좋아하나 생각했는데, 그게 맞더라고요.”
한탄 비슷한 말에 찬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다. 제 사랑도 마음대로 안 되는 판에 남의 연애를 놓고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찬영의 반응과 관계없이 수연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 년을 만났고, 서로의 부모님도 알고 있었으며, 어쩌면 결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는 제법 무거운 이야기들.
지금까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런 말들을 늘어놓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싶어 찬영은 오래 망설였다. 그러다 수연이 말을 멈췄을 때쯤, 간신히 한마디를 골라냈다.
“더 좋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까요.”
요즘은 웹 드라마 대사로도 쓰지 않을 진부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듣고 수연은 웃었다. 그렇겠죠? 찬영은 약간 안심했다. 연애 상담은 전혀 분야가 아닌데. 다행스럽게도 최악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좋아한다 했고, 최선을 다했으니까 후회는 없어요.”
그 말을 하는 동안만큼은 수연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또렷하고 시원시원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후회는 없다…. 교과서적인 문장이다. 찬영은 멍하니 그 말을 되풀이했다.
남들은 식곤증을 막 극복하고 바쁠 오후 두 시. ‘재고리스트.xlsx’ 파일만 켜 둔 채 가만히 앉아 있던 찬영이 마침내 PC 라잇톡을 실행했다. 은석과의 채팅방은 여전히 [정리되면 말해줄게]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한참 메시지를 노려보다 사내 메신저 창을 띄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동안 사람 착각하게 만들었던 은석의 이상한 다정함이 찬영에게 어떤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게 어느 날 갑자기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것도.
다만 그게 정말 전부 착각이었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고? 찬영은 그것만큼은 은석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해 보고 끝내고 싶지도 않았다. 수연의 말처럼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찬영의 기준에서라면, 앉은 자리에서 라톡이나 전화로 고백하는 건 최선이 아니었다.
[정찬영: 대리님,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내일 개인 연차 사용해도 될까요?]
연차 요청을 한 건 그 때문이었다. 팀장 보고보다도 찬영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업무를 넘겨받아야 할 오 대리에게 언질을 주는 게 먼저다.
[오재원: 내일?]
[정찬영: 급한 집안일이 생겨서요.]
직장인 연차 사용 핑계 1순위가 집안 사정이라고 했었나. 찬영이 다니는 회사도 집안일이라고 하면 더 물어보지 않고 유하게 넘어가 주는 면이 있었다. 물론 해당 부서에 큰 이슈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깔아야 하지만. 찬영은 명절에도 팀원 중 유일하게 휴가를 붙이지 않아 잔소리를 들은 적도 있으니 사정이야 알아서 잘 생각해 줄 것이다.
[오재원: 점심도 안 먹는 것 같더니]
[오재원: 알았어]
[오재원: 급하게 처리해줘야 할 일 있으면 말해주고]
[정찬영: 정리 다 해놓고 가겠습니다.]
당일 연차에 가타부타 말 붙이지 않아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대신 처리해 줘야 할 일까지 남겨 놓고 갈 수는 없었다. 딱히 지금 급한 일이 없기도 했다.
팀장에게도 구두 보고를 올린 찬영은 결재: 이상욱 팀장, 참조: 오재원 대리로 휴가 요청서를 올렸다. 통상 일주일 전에는 연차 일정을 협의하는 게 부서 내 철칙이었던 만큼, 사정이야 있겠지만 다음부터는 이러면 안 된다고 툴툴대는 팀장의 눈초리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한껏 긴장한 등을 의자에 치댄다. 찬영은 지금 일생일대의 충동적인 선택을 하는 중이었다. 쌍팔년도 로맨스 영화 주인공처럼, 일단 얼굴을 보고 말해야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책 없이 달려가는 선택을.
이게 정말 충동적인 결정은 맞을까? 수차례 생각했다. 서울-부산 기차 시간을 보고, 기차표가 매진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동서울터미널의 버스 시간을 찾아보고, 퇴근 후 선릉역이 아닌 종합운동장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기까지.
고민할 시간은 넘쳤다. 그럼에도 부산으로 가야겠다고 판단한 것은 찬영이었다. 그 결과가 어떨지, 은석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열차가 막 잠실나루역으로 들어섰다. 지상으로 올라온 열차 차창 밖으로 한강 다리가 보였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이 풍경을 봤을 때는 한참 넋을 잃었다. 모든 게 막막한 동시에 두근거려서. 꼭 그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강변역 건너편에 자리한 동서울터미널은 여전히 낡아 있었다. 왠지 초록색보다는 녹색이라고 표현하는 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바닥, 여기저기 붙어 있는 대학과 지역 광고, 에스컬레이터 근처로 모여 있는 배너 거치대들.
대합실을 지나 34번 승차장에 선 찬영은 해운대, 양산 방면이라고 적힌 위쪽 간판을 흘깃 보았다. 은석의 본가가 해운대 쪽이라 했었나.
타고 갈 버스가 눈앞이었다. 부산에 도착하면 최소 열한 시는 가볍게 넘길 것이다. 서울과 부산은 그 정도의 거리였다. 그냥 아는 형 동생 사이라면 결코 갑작스럽게 달려오지 않을. 대부분은 부담스러워해야 마땅할.
여기까지 와서야 찬영은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다짜고짜 가면 싫어하지 않을까? 핑계라도 만들어 두지 않고. 발이 가만있지를 못하고 자꾸 움직여댔다.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쯤은 있었다.
일단 말은 하고 가는 게 맞을 것 같다. 찬영은 라잇톡 앱을 켰다. 키보드를 한 자, 한 자 꾹꾹 누른다.
정찬영: 나 지금 해운대 갈 건데
정찬영: 한 번 볼 수 있어?
어쩌면 보지는 못할 수도 있겠다. 시간이 안 맞을 수도 있고, 은석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까. 심지어 오늘은 평일 저녁이다. 거절하는 게 디폴트라고 속으로 스스로를 여러 번 다독였다.
출장이라서 가는 거라고 뻥이라도 쳐 볼까. 은석이 매번 하던 것처럼. 근데 아침 일찍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되나? 차라리 내일 아침에 말할 걸 그랬나.
혼자 고민을 반복하고 있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은석이었다.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고도 한참 미적거리던 찬영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찬영아. 언제쯤 도착하는데?>
“나 한… 네다섯 시간 뒤?”
아까 메시지가 꼭 오늘 보자는 건 아니었는데.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 찬영이 급하게 덧붙였다.
“내일 봐도 돼. 도착하면 거의 자정일걸.”
<여기까지 온다는데 바로 가야지. 잘 데는 있어?>
그렇게 말하는 은석은 예상했던 것처럼 곤란해하는 것 같지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얼떨떨해진 찬영이 대꾸했다.
“부산만큼 숙소 잘되어 있는 데가 어딨다고.”
<그래도. 오는 건. 버스로 와? 내가 차 끌고 갈까?>
야밤에?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민폐였다.
“그냥 걸어 다니면 돼. 시간도 늦었고.”
<그러고 보니까… 오늘 평일 아닌가? 너 내일 출근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질문이 닥쳤다. 찬영이 어물쩡거렸다.
“몰라.”
사실 형 때문에 지금 이렇게 대책 없이 굴고 있는 거라고 유치하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말해 봐야 상대의 부담만 키울 뿐이다. 은석이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당연히 연차 썼지.”
솔직하게 대답했다. 잘했네. 은석이 안심한 듯 말했다.
“일단 도착하면 내가 다시 연락할게. 나 버스 타야 돼서.”
<알았어. 조심해서 와.>
전화를 끊은 찬영은 버스에 올라타 좌석 등받이를 쭉 밀었다. 차창 바깥을 본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집도 들르지 않고 아무 짐도 없이 해운대시외버스터미널행 버스에 오른 시점부터 생각했지만. 이제부터는 될 대로 돼라. 찬영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심호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