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업보
전쟁 같은 아침 출근길을 거쳐 도착한 사무실 자리에는 명절 선물로 보이는 쇼핑백들이 놓여 있었다. 부서 인원수에 맞게 딱 세 개다. 당연히 경영지원팀에서 준비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겉에 붙은 운송장을 보니 거래처에서 보낸 어묵 선물 세트였다.
‘윤리 경영 원칙에 의거하여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협력사로부터 명절 선물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지침이 바로 며칠 전에도 내려진 참이다. 특히 구매팀은 주 업무가 업무다 보니 주시하는 눈이 많았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보내지 말라는 말에도 이런 식으로 보내고 보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반송이 원칙이겠으나 하필 품목이 식품인 탓에 처분에 대한 의견이 갈리는 듯했다. 그대로 반송할지, 경영지원팀에 전달할지 이야기 중인 대리와 팀장 사이에서 발언권이 없는 찬영은 책상 위 달력만 보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이 왔다. 이번 추석은 주말과 붙은 탓에 연휴가 길었다. 토, 일, 월, 화, 수. 이번에도 고향에 내려가진 않을 것 같으니 간만에 하계 휴가급으로 긴 휴가가 주어진 셈이었다.
당연히 찬영의 최근 고민도 연휴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것이었다. 레비아야 꼬박꼬박 접속하겠지만 그렇다고 5일 내내 좁은 방 안에 갇혀서 보낼 수는 없다. 친구들은 대부분 고향에 있을 테고, 가까이 사는 길드원 중에 시간이 비는 사람이 있다면 약속을 잡아봐도 좋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은석이라거나.
그러고 보니 은석의 본가가 어딘지는 모른다. 사투리를 쓰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아마 서울이나 경기도 부근이겠지. 그러면 추석 당일은 가족들과 같이 보낸다 하더라도 주말 하루쯤은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물어봐야겠지만.
결국 어묵 선물 세트는 반송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팀의 막내로서 거래처와의 연락도 반송도 도맡아 처리한 찬영은 옆 부서 직원이 퇴근하는 타이밍을 노려 잽싸게 퇴근했다. 줄을 서듯 내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맞춰 2호선 내선순환행에 올라탄다.
내리는 사람은 없고 타는 사람만 있는 선릉~강남 구간을 거치니 지하철은 금세 자리가 빽빽해졌다. 세포마냥 다닥다닥 붙은 상태에서 앞 사람 핸드폰 화면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쓰던 찬영은 익숙한 벨 소리에 반사적으로 음량 조절 버튼부터 눌렀다. 벨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역시나 제 핸드폰이다. 거래처라면 퇴근했다고 문자라도 보내 두어야지, 하고 액정을 살폈는데.
[엄마]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한 찬영이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 속에 넣었다.
* * *
[공지] 추석 이벤트 안내
안녕하세요, 모험가님.
레비아 온라인입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모험가님들이 즐겁고 풍성한 한가위를 보내실 수 있도록 아래와 같은 이벤트를 준비하였습니다.
● 이벤트 기간
- 0/00(토) ~ 0/00(수) 점검 이전
● 이벤트 참여 방법
- 이벤트 기간 동안 적정 레벨 몬스터 처치 시 확률적으로 ‘깨 송편’이 드롭됩니다.
- ‘깨 송편’ 50개를 모아 NPC 타라가 지정한 NPC에게 배달해주면 ‘따뜻한 마음’과 다양한 코디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 이벤트 보상
- 따뜻한 마음
따뜻한 마음
소비 아이템
더도 덜도 한가위만 같아라. 사용하면 30분 동안 경험치 획득량을 100% 증가시켜준다.
- 단아한 한복 머리 장식 교환권(남)
- 우아한 한복 머리 장식 교환권(여)
- 단아한 한복 한벌옷 교환권(남)
- 우아한 한복 한벌옷 교환권(여)
- 꽃버선 교환권
게임 이용에 참고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명절 연휴는 보통 게임사들에게도 대목이었다. 레비아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에도 막 추석 이벤트 공지가 올라왔다.
공지에서는 즐겁고 풍성한 한가위라고 거창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따뜻한 마음은 이벤트마다 뿌리던 경험치 쿠폰을 이름만 바꿔 출시한 재탕이다. 그나마 의미가 있을 만한 한복은 줘도 안 입을 것처럼 묘하게 촌스러웠다. 양아치 같은 놈들. 한정판 코디 아이템은 이런 식으로 디자인하지 않으면서. 물론 찬영은 5일 내내 꼬박꼬박 출석할 예정이었다.
길드원들에게는 추석 이벤트보다 세에레 트라이 문제가 더 큰 관심사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명절은 제각기 일정이 있으니 모이기 어려울 테니까. 지금도 라잇톡은 그 얘기뿐이었다.
정선빈: 아침 일찍 빼고 다 가능
정선빈: 당일도 저녁 이후면 괜찮을 듯?
정찬영: 세에레 지금 어디까지 감?
임혜지: 3페 진입했음
세에레가 3페이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라고 했었나. 그래도 지금까지는 제법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찬영: 오
정찬영: 역시 결혼의 힘
처음 1페이즈를 깨지 못했던 건 딜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장비를 바꾼다 어쩐다 했을 때 은석이 괜히 말린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찬영은 일부러 그런 말을 던졌다.
정선빈: ㅋ
정선빈: 너도 은근 사람 열받게 한다?
정찬영: ㅎㅎㅎ
이런 반응 때문이었다. 동명도 그랬지만 선빈도 놀리는 맛이 있었다. 반응만 재미없었으면 진작 그만뒀을 텐데.
ㄱㅇㅅ 형: 둘이 결혼하고 1페 바로 넘긴 건 맞지
정선빈: ;;너까지 그러지 마라 진짜
은석도 찬영과 같은 생각인 듯했다.
이동은: 전 그 전날은 안 될 듯ㅠ
이동은: 당일 저녁은 되려나
이동은: 다른 날은 최대한 튀어볼게요
임혜지: 난 다 됨
ㄱㅇㅅ 형: 그럼 추석 전날 하루는 쉬자 그냥
권나원: 확인이요
박태경: 난 명절 연휴엔 접속 거의 못할 듯
김도텐: 할 건 해야지
박태경: 추석은 가족하고 보내야 함 ㅋㅋㅋ
서보은: ㄷㄷ
서보은: 전 간만에 본가 갑니다
서보은: 그래도 접속은 계속 할 듯영
김도텐: 굿
김도텐: @정찬영 넌 어디 안 가냐
길드원들은 당연히 매일 접속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의견이 갈렸다. 오히려 제가 이상했던 건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찬영의 이름이 언급됐다.
정찬영: 나야 뭐
정찬영: 안 내려갈 듯
김도텐: 원래 집 서울 아니라고 하지 않았음?
정찬영: ㅇㅇ
김도텐: 명절에 움직이려면 힘들긴 해
김도텐: 차 막히는 거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픔
서보은: 에이 추석이나 설날은 당연히 기차죠
서보은: 버스도 개힘듬;
정찬영: 그치
힘들다는 게 교통 수단의 문제만은 아니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서보은: 그럼 형은 연휴에 뭐하심?
정찬영: 글쎄
정찬영: 그냥 집에서 보내지 않을까?
서보은: ㄷㄷ 외로우시겠네
박태경: 오히려 좋을지도
정찬영: ㅋㅋㅋㅋㅋㅋㅋ 왜 집 가기 싫음?
박태경: 들킴 ㅎ
정찬영: 연휴 동안 푹 쉰다 생각하게
정찬영: 별로 외롭진 않아
김도텐: 원래 나이 들면 혼자가 편해
서보은: 와 형 방금 완전 아저씨 같았어요
김도텐: ;;
추석 연휴에는 문을 여는 가게가 몇 개 없을 텐데. 물어는 봐야겠지만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면 꼼짝없이 집에만 박혀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ㄱㅇㅅ 형: 너도 이번 추석에 일정 없어?
답장을 보내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은석으로부터 따로 개인 톡이 왔다.
너‘도’? 길드원 중 저 말고 연휴에 본가에 가지 않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건가.
정찬영: 없지
정찬영: 형은?
ㄱㅇㅅ 형: 나도 본가가 부산에 있어서
ㄱㅇㅅ 형: 해운대쪽
정찬영: 헐
정찬영: 부산이면 진짜 멀겠다
은석의 본가가 부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마 윗지방, 기껏해야 충청도일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하기야 찬영도 지방 출신인데 거래처로부터 서울 사람인 줄 알았다는 얘기를 종종 듣곤 했지만, 부산 사투리는 훨씬 세지 않나? 억양도 못 느꼈는데.
ㄱㅇㅅ 형: ㅋㅋㅋㅋ
ㄱㅇㅅ 형: 연휴 말고 따로 내려갈 듯
문득 양평 정모 날 펜션 바깥에서 홀로 통화하던 은석이 떠올랐다.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아버진 형 칭찬만 하셨다고 했었나….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타인의 사정을 멋대로 추측해선 안 되는 법이다.
ㄱㅇㅅ 형: 20일에 볼래?
ㄱㅇㅅ 형: 저녁 먹으러
ㄱㅇㅅ 형: 괜찮으면 서울대입구에서 보자
정찬영: 서울대입구?
일정만 맞으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은석이 먼저 보자고 제안할 줄은 몰랐다. 20일이라면 연휴 중 하루였다. 추석 전날.
ㄱㅇㅅ 형: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그래
서울대입구란 말에 보나마나 사양할 거라 생각했는지 바로 덧붙인다.
어딜까. 꼭 가 봐야 하는 곳은 이 동네 어디도 없을 것 같은데. 토박이는 아니지만 2년 차 거주민으로서의 눈이었다.
정찬영: 그러자 그럼
정찬영: 메뉴가 뭔데?
아무튼 은석이 가 보고 싶은 데가 있다고 하니 물어보고 미리 위치라도 봐 두면 좋을 것 같긴 했다.
ㄱㅇㅅ 형: 글쎄
정찬영: ?? 형이 가보고 싶은 데 있다며
정찬영: 식당 아니야?
ㄱㅇㅅ 형: ㅎㅎ
ㄱㅇㅅ 형: 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딱 보니까 또 뻥이네.
가 보고 싶은 데는 무슨.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것도 라떼 때와 똑같다. 일단 서울대입구에서 만나게 하려는 거였겠지.
설마 집 쪽이 편하단 농담을 기억하고 한 말은 아니겠지?
순간 예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지만, 곧 찬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오바한다 진짜….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쯤 되면 자의식 과잉 수준이다. 이런 식이니까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을 다짐했던 건데.
찬영이 보는 은석은 그냥 원래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혼은 그렇게나 차갑게 안 한다고 하고. 밀어 두었던 서운함이 몰려왔다. 물론 찬영은 은석이 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건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고 사실 차갑게 말한 것도 아니었지만, 찬영의 기억 속에서는 그랬다.
어쨌든 거짓말이었던 게 빤히 보이는 말에도 찬영은….
정찬영: 일단 이번엔 내가 살 거야
하고 말았다. 길드 정모의 숙박비와 경비를 모두 책임지겠다던 은석에게 식비만이라도 내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던 혜지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정찬영: 근데 진짜 우리 뭐 먹지
정찬영: 나도 이 동네 잘 모르는데
만으로만 일 년 반은 넘게 살아 놓고 뭔 소리인가 싶지만 정말이다. 사람을 만날 일이 있으면 보통 홍대, 사당, 강남, 잠실 등지로 갔지 서울대입구에서 만날 일은 좀처럼 없었다. 차라리 맛집이라면 회사 근처를 더 잘 알았다. 거기선 거래처 접대나 저녁 회식이라도 수십 번 했으니까.
정찬영: 그나마 조개?
정찬영: 근데 형 해산물 먹나
조개탕이라면 맛있다고 장담은 못 해도 괜찮은 정도인 곳은 알고 있다. 그 외 이 근방에서 가 본 곳이라고는 백반집과 곱창집, 삼겹살집, ‘넌 먹을 때 제일 예뻐’ 같은 유치한 네온사인이 붙어 있는 피맥집 정도가 다였다. 백반집은 회사가 생각나니 패스, 곱창집은 은석을 데려가기엔 왠지 메뉴가 마음에 안 들고. 소고기를 얻어먹어 놓고 삼겹살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도 별로였다. 피맥집은… 그냥 싫었다.
ㄱㅇㅅ 형: 그럼 돼지갈비 먹으러 가자
ㄱㅇㅅ 형: 너 좋아한다며
은석이 이런 걸 기억하지 못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물론 돼지갈비를 좋아하긴 했지만 사 주는 이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꺼냈던 메뉴가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나 며칠 전에 돼지갈비 먹고 체해서 싫어하게 됐|
-다고 쓰려던 찬영은 마음을 고쳐먹고 메시지를 모조리 지웠다. 역 근처에 있는 괜찮은 돼지갈비집이 생각났는데, 그곳의 메뉴판에서 소갈비를 본 것 같았다. 지난번의 은석과 같은 전법이었다. 우선은 데려가고 보자. 실제로는 다른 걸 사 줘도 되니까.
정찬영: 그래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찬영의 계략은 장렬히 실패했다. 애초에 강남역 한복판에 위치한 한우 전문점과 가격이나 퀄리티 면에서 비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당일에 도착하고 본 가게의 메뉴는 양념 돼지 갈비와 삼겹살, 소불고기가 전부였다. 게다가 소불고기는 호주산인지 가격이 돼지갈비나 삼겹살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냥 돼지갈비나 먹자.”
찬영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미리 검색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은석은 찬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컵에 물만 쫄쫄 따랐다. 이 상황을 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갈비를 먹이려던 계획을 알 리 없으니 분명히 기분 탓이겠지만.
다른 많은 고깃집처럼 이곳도 메뉴판은 따로 없었다. 대신 고기류와 식사류가 정리된 차림표를 벽에 걸어 두었는데, 그 아래에는 ‘고기류 첫 주문 시 기본 2인분 기준입니다.’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램 수를 따져 봤을 때 둘이서 2인분은 애매했고, 그렇다고 단일 메뉴로만 3인분을 주문하는 것도 끌리지 않는다. 이렇게 된 김에 가격 상관없이 여러 개를 시키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찬영은 양념 돼지갈비 2인분에 삼겹살 2인분을 시키고 소주와 맥주 한 병도 추가했다.
별생각 없이 맥주잔 하나에는 소주 위 맥주, 다른 하나에는 맥주만을 채우고 있는데, 물끄러미 지켜보던 은석이 물었다.
“술 마시고 싶었어?”
아차. 저도 모르게 너무 회식 자리처럼 행동했나. 심지어 주종에 관해선 은석의 의사를 묻지도 않았다.
몹시 민망해진 찬영이 맥주병을 내려놓았다. 이건 다 돼지갈비라는 지나치게 친숙한 메뉴 탓이다.
“꼭 그런 건 아니고. 형은 마시기 싫어? 뺄까?”
“아니. 맥주는 네 거야?”
“형 거긴 한데 소주로 마시고 싶으면 새로 줄게.”
“그거 말고 소맥으로 줘. 너랑 똑같이.”
너랑 똑같이, 라는 말은 쓸데없이 기분 좋게 들렸다. 찬영은 모르는 척 새 숟가락으로 잔의 바닥을 한 번 쳤다. 은석이 그 잔을 그대로 건네받았다.
“술 잘 마셔?”
“그렇게 잘 마시는 건 아니야.”
“그런데 섞어 마셔도 돼? 다음 날 괜찮아?”
“소주보다 소맥이 더 잘 넘어가서 처음 몇 번만.”
정확한 주량을 말하기는 애매해 대충 둘러댔더니 은석은 찬영의 속을 걱정하는 듯했다. 한 병에서 한 병 반 정도면 괜찮지 않나. 잘 마신다고는 못 하더라도 못 마시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망설이던 찬영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한 병은 넘게 마셔. 술버릇 가지고 욕먹은 적도 없고.”
정말이다. 어디 가서 술 마시고 감당 안 된다고 욕먹은 적은 없었으니까.
“술버릇? 뭔데?”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 말한 건데. 은석은 찬영의 술버릇 자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냥 좀… 평소보다 솔직해지고 말 많아지는 거? 그러다 자는 거?”
하지만 찬영의 술버릇은 특색도 재미도 없었다. 그냥 어딜 가든 한 명쯤은 있는 흔하디흔한 술버릇일 뿐이다.
“아, 하나 더 있긴 하다. 근데 이건 쪽팔려서 말 안 할래.”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한데.”
은석의 아쉬워하는 얼굴을 보고도 끝까지 알려 주지 않으려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다른 술버릇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 취한 채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차나 신호를 잘 안 본다는 것 정도. 대학생 때 한 번 지적 받고 나서는 의식해서 고쳤으니 지금도 그러진 않겠지만…. 어쨌든 술에 취해 그 정도로 정신을 못 차렸던 게 자랑은 아니니 은석에게 말해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러는 형 주량은 얼만데?”
“나도 너랑 비슷할걸.”
“한 병 반?”
은석은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곧 찬영은 이것도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은석이 제대로 술을 마시는 걸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정모 때도 마시긴 했지만 그때는 다음 날 차를 운전해야 한다며 본인 스스로 자제했기 때문이었다. 찬영은 주량에 비해 마시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는데, 은석은 그보다 더 빨랐다. 얼굴색이나 행동을 보면 그다지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여기서 계속 마실 거야?”
실실이 석쇠 아래 불씨가 식어 가기 시작했을 때쯤 은석이 물어왔다.
“여기?”
찬영이 눈을 깜박거렸다.
“더 마실 거면 찌개나 계란찜 같은 거라도 시키게. 너 속 버리겠다.”
“그래도 되고.”
약간 긴장해 있던 탓에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많이 마신 것 같았다. 머리가 조금씩 어질어질했다. 옆에 세워 둔 병은 초록색만 해도 네 개였다. 체감상 그중에 절반은 기여한 것 같은데 그럼 주량은 한참 전에 넘긴 셈이다. 은석이 마시는 걸 눈앞에서 보고 있었으니 그 속도에 찬영도 모르게 맞춰진 모양이었다.
그제야 적당히 마셨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석의 앞에서 취해선 안 되는데.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술 좀 깨게 잠깐 화장실이라도 다녀올까. 그 전에 먼저 시계를 보려고 핸드폰을 꺼냈는데 부재중 통화와 문자가 쌓여 있었다.
엄마였다.
전화했던 시간은 거의 한 시간 전이었다. 은석과 만난 이후 내내 무음으로 해 두었던 탓에 전화가 왔는지도 몰랐던 듯했다.
[엄마: 부모 취급도 안 해주는 것도 자식이라고.. 내가]
[엄마: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으로 살자]
[엄마: 나는 너같이 이기적인 자식 둔 적 없다]
일어서기만 하면 바로 시야가 흔들릴 만큼 취해 있는데도 문자 메시지는 잘 보였다. 모르는 사람으로 살자고…. 평소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애틋한 티를 내면서도 조금만 수틀리면 바로 극단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이었으니 그 내용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심란해질 뿐이지.
서보은: (사진)
서보은: 전 너무 많이 부친 듯;
김도텐: 오 니가 함?
서보은: 넹
최ㅇㄹ: ㄷㄷ
서보은: 가족들이랑 다 같이 하는 중이여 ㅋㅋ
서보은: 갈비랑 국이랑 전
임혜지: 찐 요리사네
서보은: 에이 그건 선빈 형이죠
함께 온 라톡을 보자 더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쩌면 술이 찬영을 좀 더 감정적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명절에 혼자 있으면. 보통은 외롭나?”
은석에게 그렇게 물은 것도 충동의 발로였다.
“형은 외로웠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술김에도 실수했다는 느낌이 왔다.
“보은이가 전에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 나한테 외롭겠다고 했잖아. 걔가 한 말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고.”
수습하려고 했으나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해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컷 다 말하고 나서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겠냐만.
“그냥 난, 안 그래서.”
몇 번을 뇌까리다 결국 포기한 찬영이 소주를 한 번 더 들이켜고 말했다. 목이 탔다.
은석이 이상하게 여기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보통은 안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진 않을 테니까. 혼자 감상에 빠져 분위기만 쓸데없이 무겁게 하고. 뒤늦은 자책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은석은 그 말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랬어.”
내놓은 답이 모호하긴 했지만 덕분에 불안하게 들뜨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찬영은 갈비 하나를 잡고 한참 깨작거렸다.
“사실 난 집 안 가고 싶어서 안 갔어.”
“…….”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라.”
여느 집이 다 그렇듯 사이가 좋은 게 아니라는 말 한마디에 사정을 담을 수는 없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흔한 이야기였다. 외도하는 남편과 그를 미워했지만 동시에 사랑했기 때문에 이혼은 할 수 없었던 아내. 원망을 표출할 대상은 주로 하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모자랄 것 없는 가정은, 찬영에게는 괜찮은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 선택도 독립도 고향과는 최대한 멀리했다.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본가에는 잘 가지 않았다. 한두 번은 억지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그 집에선 하룻밤을 버티는 것도 어려웠다.
“나도.”
은석의 대답에 놀란 찬영이 고개를 휙 쳐들었다. ‘나도’라는 내용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은석이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을 것이란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으니까. 놀란 부분은 은석이 그걸 짧게라도 말해 준 데 있었다.
그러나 찬영은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은석이 말을 이었다.
“저번 설에도 안 내려갔어. 그게 맞을 것 같아서.”
“형도? 나도. 명절에 안 내려간다니까 남들이 잔소리 엄청 하던데. 나이 들어서 후회한다고.”
“아직도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래서 이번엔 그냥 고향 간다고 했어.”
은석의 잔에 소주를 새로 따르고 또 짠, 잔을 부딪쳤다. 생각보다 세게 부딪친 탓에 옷 위로 소주가 몇 방울 튀었지만 상관없었다. 일단 말하고 보니 제법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술을 마시고 뱉은 말들이니 다음 날이 되면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아니 반드시 후회하겠지만.
어쩐지 이상했다. 묘하게 은석이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했고.
술기운에 어느새 느려진 숨을 찬찬히 뱉으며, 찬영이 말했다.
“누구는 그래도 가족인데 그러지 말라는데.”
“응.”
“가끔은 가까이 있는 것보다 멀리 있는 게 더 나은 가족도 있다고 생각해, 나는.”
마주 보고 있는 눈은 일순 일렁이는 듯했다. 은석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잠자코 기다렸지만 은석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그렇지.”
다시 열고는 그 한마디만을 했을 뿐이었다.
은석이 마신 잔을 마지막으로 시켜 놓은 술이 모두 떨어졌다. 거의 손대지 않은 계란찜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가게의 영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주변 자리도 몇몇을 제외하면 슬슬 쫑을 내는 분위기였다. 저녁 식사 겸 1차만 하고 헤어지기에 딱 적당한 시간대이기도 했다.
은석과도 저녁을 먹자고 했지, 저녁을 먹은 뒤 뭘 하자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 찬영은 시계와 은석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이제 겨우 아홉 시였다. 게다가 내일은 모두가 쉬는 연휴다. 찬영은 은석과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었고 술김이라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게임 이야기도 좋고 은석에 관한 이야기도 좋았다. 이대로 돼지갈비집에서 어영부영 헤어지기엔 아쉬웠다.
“자리 옮길래?”
아는 형 동생 사이에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다른 데?”
“2차로.”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아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실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은석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때는 심장이 철렁했다. 찬영은 저도 모르게 옆에 뒀던 핸드폰을 꼭 쥐었다.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바로 가도 괜찮겠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고 말하려 했는데. 그 말에 맥이 다 풀렸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지갑을 챙긴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기롭게 대답한 것 치고 걸음은 엉성했다.
추석 전날 밤이라 그런지 영업 중인 곳은 많지 않았다. 마침 바로 옆 수제 맥주 펍이 열려 있는 것 같다며 은석이 찬영을 이끌었다. 다행히 펍은 1층이었고 계단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길 잠시, 찬영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분홍색 네온 사인을 마주했다.
‘술과 밤이 있는 한, 친구는 없다.’
대학에 다닐 때 유행했던 촌스러운 문구였다. 찬영이 눈을 가늘게 떴지만 오늘 같은 밤은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네온 사인만 제외하면 분위기가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자리에 앉은 둘은 무난하게 모둠 감자와 맥주 두 잔을 시켰다. 맥주는 은석이 뭘 마실 거냐고 물어보길래 메뉴판을 한 번 훑어보고 대충 골랐다. 이미 취한 상태에서 뭘 마시든 다르겠나 싶었고, 솔직하게 말하면 글자도 이제 잘 안 읽혔다.
IPA, 오렌지, 상큼한, 캐러멜…. 띄엄띄엄한 정보만을 보고 안일하게 고른 메뉴는 더럽게 찬영의 취향이 아니었다. 상큼하고 달콤하다더니. 이슬통통이나 썸머스비 같은 걸 상상했는데 그냥 이상한 향이 섞인 쓴 맥주였다. 입술에 대자 이도 저도 아닌 향과 맛이 훅 올라왔다.
아 씨…. 찬영의 눈과 콧등이 저절로 찌그러졌다. 취한 상태라 표정도 잘 제어되지 않았다. 이게 한 잔에 8천 원이나 한다고? 차라리 코스나 화이트로 마시는 게 훨씬 낫겠다. 모른 척 맥주잔을 내려놓았는데, 바로 들킨 건지 은석이 맞은편에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예 소리를 내어 웃는다.
“웃지 마. 나도 웃긴 거 아니까.”
“귀여워서 그러지.”
“뭐래 진짜.”
귀엽기는. 이런 말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찬영이 샐쭉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멈춘 은석이 찬영과 잔을 바꿔 주었다.
“그걸로 마셔.”
“이거 형이 마시려던 거 아냐?”
“난 아무거나 마셔도 상관없어서.”
“내 거 이미 입 댔는데.”
“뭐 어때. 댔든 말았든.”
어떻긴. 은석에게는 상관없는 문제겠지만 찬영은 달랐다. 결국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능한 배려였다. 그게 싫었다.
그대로 몇 번을 사양하자 은석은 아예 가져간 잔을 마셔 버렸다.
“나도 이제 입 댔으니까 됐지?”
아무거나 마셔도 상관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잔 안 맥주의 양은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찬영은 별수 없이 바뀐 잔을 집어 들었다.
“…맛있네.”
“그건 맛 괜찮아?”
“응.”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취향을 다 알고 시켜 준 것처럼 꼭 맞았다. 찬영은 침울한 얼굴로 원샷을 했다. 마음이 어수선했다. 형은 어떻게 이렇게 능숙할 수 있지. 찬영이 은석에게 해 준 것이라고는 마시지도 않는 라떼 기프티콘 선물에, 찬영의 지갑 사정과 입맛에 맞춰 준 듯한 돼지갈비 사 주기 정도가 다인데. 알려 준 게 없으니 그렇다고 합리화하기엔 은석도 사정은 같았다.
“한 잔 더 시켜 줄까?”
“그냥 그거 나 줘.”
“왜.”
“맛없는 거 형 마시라고 준 것 같잖아. 그냥 줘.”
“괜찮대도.”
“또 뻥 치네.”
한번 마신 뒤로 은석은 맥주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취향이 아닌 게 분명했다. 타고난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남한테 맞춰 주는 것도 이 정도면 병이다. 생색이라도 좀 내든가…. 찬영은 턱을 괴고 은석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럴 성격 같진 않아서 열 받지만.
불쑥 심술 섞인 말이 튀어 나갔다.
“난 이제 형이 뭐 좋아한다는 거 다 안 믿어.”
“갑자기?”
“라떼도 그렇고.”
라떼? 어리둥절하던 은석의 얼굴에 금세 아,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어떤 걸 말하는 건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요즘은 잘 마신다니까.”
“형 그날도 차 타고 나선 한 번도 안 마셨거든.”
“너 딴 데 보고 있을 때 마신 거야.”
“난 뭐 눈도 없는 줄 알아? 내 커피 바로 밑에 뒀잖아.”
계속 보고 있었는데. 계속.
변명은 평소 은석답지 않게 어설펐고, 밀어붙이자 더 대꾸하지도 못했다. 어차피 거짓말도 잘 못 하면서. 시치미를 뚝 떼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찬영은 직원에게 맥주 한 잔을 추가 주문하고, 은석의 만류에도 또다시 원샷을 했다. 옆으로 슬그머니 물컵이 밀려왔다.
“물도 마셔.”
“이거 봐. 이런 말, 이런 행동들….”
집어내듯 지적하던 찬영은 말을 뚝 멈췄다. 취해서 늘어놓는 말들이 점점 과해지고 있었다. 선은 넘지 말아야 했다.
물컵을 든 찬영이 중얼거렸다.
“처음엔 형이랑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지금처럼 같이 술 마시는 거?”
“이것저것 다. 애초에 같은 길드 된 것도 그렇고.”
그도 그럴 게 샐러맨더 버스를 타러 간 것뿐인데 그 파티원 중 하나가 사격일 줄 알았겠냐는 말이다.
…아닌가? 시골 서버라 게임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되었으려나. 지금처럼.
찬영은 이어 말했다.
“나 레전드에서 시작한 것도 형 때문이었어. 물론 동명이 형 때문이기도 한데…. 어쨌든.”
은석이 찬영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처음 정모 갔을 때도. 보은이가 형 보면 깜짝 놀란다는 거야. 자꾸.”
“놀랄 게 뭐 있다고.”
“이유를 물어보진 않았는데. 형 보니까 왜 놀란다는 건지는 알겠더라.”
“왜?”
이쯤 됐으면 어떤 말이 나올지 대충 짐작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저렇게 웃고 있지. 그냥, 뭐…. 찬영은 대답 대신 뒷목만 쓸었다.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오히려 제가 더 쑥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첫인상 얘기 나와서 말인데, 찬영아.”
“어어.”
“우리 둘이 몇 번 봤잖아.”
그랬다. 사실 정모까지 세면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런데 왜 연락처 달라고 안 해? 동명 형이랑은 번호 안다며.”
찬영이 가만히 눈을 껌벅거렸다. 갑자기? 여기서 그 형은 또 왜 나와. 은석은 꼭 섭섭하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섭섭하고, 서운하고, 속상하고…. 그런 건 찬영의 몫 아닌가? 게임에서 결혼할 생각이 없다던 은석의 말을 들었을 때처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찬영은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그 형은 예전 게임 때부터 알았고….”
“나랑도 안 지 꽤 되지 않았나?”
좀 섭섭하네. 결정타였다. 찬영이 어버버거렸다. 애초에 은석도 찬영에게 번호를 달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이걸로 몰아붙이는 건 너무하지 않나? 라잇톡 아이디도 아니고 번호 교환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괜히 물어봤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달라고 하면 되잖아. 형이 달라고 했으면 줬어.”
“먼저 말하길 기다린 거지.”
끙. 찬영이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길 수가 없다.
“핸드폰 줘 봐 그럼.”
손을 내밀었더니 넙죽 핸드폰을 올린다. 열한 자리 숫자를 꾹꾹 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찬영의 핸드폰 화면 위로 모르는 번호가 떴다. 01051…. 마찬가지로 열한 자리 숫자였다.
찬영은 은석 모르게 몇 번이고 그 번호를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취한 상태에서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회사에서 늘 더디게 흐르던 시간은 은석의 앞에서는 조금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취한 채로 흘려보내는 게 아쉬워 어느 순간부터 술을 치웠지만 이미 너무 늦었나 보다. 팔뚝에 밀린 젓가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찬영이 그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바로 젓가락부터 주워 올리려고 했는데 은석의 행동이 더 빨랐다. 찬영이 머쓱하게 말했다.
“나 그렇게까지 취한 건 아니야.”
“알아. 근데 슬슬 그만 마시긴 해야겠다.”
“벌써?”
“나도 취해서. 시간도 늦었고.”
잔을 옆으로 치우는 은석은 하나도 취한 것 같지 않았지만, 그냥 수긍했다. 취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은석도 그런 유가 아닐까 싶었다. 찬영도 이제 정말 한계였고.
“일어나야지.”
어린애 대하듯 말하더니 스스럼없이 손을 내민다. 찬영은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적어도 정신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어서자마자 눈앞이 경사지다가, 아예 팽팽 돌아가다가 했다.
“데려다줄게.”
“뭘 데려다줘, 주길. 내가 애도 아니고.”
찬영이 간신히 대답했다. 입 밖으로 뭔가 나가고 있는 건 알겠는데 머리고 귀고 붕붕 떠서 마치 TV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머리를 몇 번 흔들어도 똑같다.
은석은 찬영의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모양이었다. 그야 단둘이서 마셨는데 한 명이 이 정도로 취했다면, 그리고 집도 근처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다른 한 명이 은석이라면 더더욱.
다만 늦었으니 은석도 택시를 타고 가야 할 텐데…. 앱으로 출발 위치를 지정해 놓고 기다려도 의외로 골목 안쪽까지 들어와 주는 택시는 많지 않다. 다시 역 근처까지 가려면 귀찮을 게 뻔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찬영이 곁에 다가선 은석을 살짝 밀어냈다.
“나 취해도 집은 잘 찾아갈 수 있어.”
“밤에 위험해. 너 들어가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 걱정돼서 그래.”
걱정돼서…. 그 말만큼은 귀가 아니라 머리에 박히는 듯했다. 진짜 반칙 아닌가. 말도 안 되게 듣기 좋았다. 찬영은 눈을 감았다. 대항할 힘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 * *
편의점에서 나온 은석이 찬영에게 갈색 병 하나를 건넸다. 이 타이밍이라면 숙취해소제인가 보다. 받아 들기만 하고 잠자코 서 있었더니 ‘뚜껑 따 줘?’ 눈을 맞추며 묻는다.
“집 가서 먹을래.”
나온 말은 스스로 듣기에도 아까보다는 선명했다. 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밤 바람은 선선했고 찬영의 기분도 좋았다. 찬영은 사람들 사이를 헤쳐 가며 성큼성큼 걸었다. 가끔씩은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은석의 생각만큼 취하지는 않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는데, 잘 되고 있는지는 몰랐다. 은석이 뒤에서 감싸 안듯 찬영의 어깨를 잡았다.
“나 안 취했어.”
“너 안 취한 거 알겠으니까 같이 가. 왜 혼자 가.”
연기가 그럭저럭 잘 되고 있나 보군. 만족한 찬영은 마음을 놓고 은석에게 기대 걸었다. 사실 편의점에서도 정신이 몽롱하긴 했다.
큰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자 작은 횡단보도 하나가 나왔다. 그리고 다시 큰 횡단보도 하나. 그 건너편부터는 골목이었고, 여기서 집까지는 고작 오 분 거리였다.
현대부동산, 아름세탁소, 다사랑마트, 일광인테리어.
찬영은 길을 걷는 내내 가게 간판 하나하나 눈으로 읽어내렸다. 귀소본능 덕에 귀갓길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으니 골목길 하나만 돌면 끝이 맞을 것이다. 곧 익숙한 다가구 빌라 건물과 가로등이 보였다. 집 앞이었다.
끙…. 안심하듯 긴 숨을 뱉은 찬영이 건물 외벽에 등을 기댔다. 대리석으로 된 벽은 그리 깨끗하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옷이 더러워지건 말건 머리가 어지러운 게 먼저였다.
“여기야?”
은석이 빌라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 뒤로도 뭔가 더 말하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내용이 잘 들리지 않는다. 대충 이곳이 집이 맞냐는 거겠지. 찬영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집…. 초저녁부터 밤까지 많은 말들을 했는데도 헤어지기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나.
그래도 이제는 정말 은석을 보내야 할 때였다.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은석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찬영은 새삼스럽게 은석을 바라보았다. 취해서 본 얼굴은 여전히, 오히려 평소보다 더 화사하다. 단정한 이마와 또렷한 눈동자 위 부드럽게 팔랑거리는 속눈썹과… 하얀 뺨, 곧게 뻗은 코와 입술.
찬영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불현듯 지난번 은석이 줬던 립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날의 감정도 함께 떠올라 찬영의 마음을 부유했다.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게 만든, 간지러웠던 감정. 이러니 착각하지 말자, 좋아하지 말자 수십 번 다짐해도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것조차 이미 착각했고 좋아하게 되었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인데.
“형 있지.”
“어.”
“나 좀 많이 취한 것 같아.”
비겁한 말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는 정말 뭔가 저지를지도 몰랐다. 그러기 전 변명이 필요했다.
그게 고작 술 핑계라고 하더라도.
몸이 엉거주춤 기울었다. 체향인지 로션 향인지 모르겠지만 은석의 얼굴과 목 가까이에서는 아주 좋은 향이 났다. 그대로 은석의 볼을 잡아당긴 찬영이 고꾸라지듯 입을 맞췄다. 키스라기엔 민망할 정도의, 정말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뽀뽀였다. 그런데도 만족스러웠다.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굳어 있는 은석도 마음에 들었다.
오늘 밤은 책상 위 립밤과 인형을 보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