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갑자기 분위기 세에레
레비아 온라인을 시작하고부터 찬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사격의 온튜브 구독이었다. 자취 요리와 에이나인, 철 지난 예능을 보기 위한 방송사 공식 온튜브들로 차 있던 구독 목록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레비아로 뒤덮였다.
다른 때와 같이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은 영상과 기존 구독 온튜브 영상들이 혼재된 화면을 심드렁하게 보던 찬영의 눈에, 한 레비아 온튜버의 커뮤니티 글이 들어왔다.
황대걸
3시간 전(수정됨)
긴급 라이브 공지)
안녕하세요 대걸입니다
이번 주도 주말 시작이네요
잘 보내고 계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오늘 밤 열 시!!! 테섭[6]에서 세에레 클리어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제가 방송에서 몇 번 얘기했던 것처럼 멤버는 정말 정말 초특급 구성이고 절대 실망 안 하실 겁니다.
<참여 멤버>
저(엘레나)
도부님(파이터)
비트주세요님(아수라) - 메인 오더
사격님(윈드 러너)
직자님(프리스트)
이번에도 전원 마이크 켭니다. 도부님도 동시 라방 진행하신다고 하네요
다들 기대 많이 해주시고
생방에서 뵙겠습니다!!!!!!
댓글 2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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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거 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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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문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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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걸 열 시까지 어떻게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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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나 라인업 보고 심장 터질 것 같아... 빨리 와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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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수라 프리스트 빼면 다 깡딜 조합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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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런이 깡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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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깡딜(X) 깡통딜(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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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나쁘다 진짜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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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런도 파티 유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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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뎀 10% 아님? 그건 없는 직업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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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어쨌든 있긴 하다고~
- 대걸(스펙 환산 기준 전섭 1위)
도부(파이터 전섭 1위, 한계의 탑 전섭 1위)
비트주세요(아수라 전섭 1위)
사격(윈드러너 전섭 1위)
직자(자벞[7] 지력 7만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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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세에레 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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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면 세에레가 불쌍하다 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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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사격 빼고 다 세에레 깬 사람들 아님? 대걸 인맥 쩔긴 한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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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런이 저기 낀 거 실화냐? 출시 때부터 한 윈런 유저로서 가슴이 웅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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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런이 아니라 사격이 낀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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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ㄷㄷ 사격이 자기 지인 외에 파티하는 거 처음 봄 세에레 진짜 하고 싶긴 했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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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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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누가 레전드에서 시작하라고 칼 들고 협박함? 악깡버해야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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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 하나 조패고 싶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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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눈을 씻고 봐도 참여 멤버에는 사격이 분명히 붙어 있었다. 찬영은 사격이라는 단어에 몇 번이고 드래그질을 했다. 은석이 여길 참여한단 말인가? 심지어 보이스 코드 마이크도 켜겠다고?
황대걸은 레비아 온라인을 주력 콘텐츠로 삼는 스트리머 중 구독자 수가 가장 많은 스트리머였다. 온튜브 생방송에만 적게는 3천 명, 많게는 2~3만 명의 시청자가 참여하곤 했다. 드위치 같은 타 플랫폼도 합친다면 시청자 수는 더욱 불어난다.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듣는 일은 은석의 성격상 당연히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란 마음은 비슷한지 단톡도 불이 나 있었다.
정선빈: @ㄱㅇㅅ 형 야 미친
정선빈: 황대걸이랑 진짜 세에레 함?;;
ㄱㅇㅅ 형: ㅋㅋㅋ 뭐야
ㄱㅇㅅ 형: ㅇㅇ 함
임혜지: ㄷㄷ 저번에 제안 와도 그냥 안 한다더니
ㄱㅇㅅ 형: 4페에서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임혜지: ㅇㅎ
서보은: 근데 마이크도 쓰심? 대걸이 올 마이크라고 써놨던데
ㄱㅇㅅ 형: 안 하려고 했는데 이번 한 번만 꼭 해달라고 해서
ㄱㅇㅅ 형: 그 조건으로만 참여 가능하다더라
정선빈: ㅠ
마이크를 켜는 게 조건이라면 방송 문제인가 보다. 중간에 오디오가 비는 것보다는 가득 차는 게 좋을 테니까. 게다가 방송 초반엔 귓속말 같은 어그로가 엄청날 텐데, 채팅으로는 아무리 말해도 보기 어렵기도 할 테고.
최ㅇㄹ: 서버이동 열리면 바로 나가죠
최ㅇㄹ: 여기서 썩으실 인재가 아닌데 서버가 문제임
정선빈: 글로리엔 트라이 격수 구하는 사람 많던데
정선빈: 걔네들은 굳이 이런 것까지 안 해도 되겠지?
ㄱㅇㅅ 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ㄱㅊㄱㅊ
ㄱㅇㅅ 형: 너네도 곧 세에레 할 준비해야지
임혜지: 뭐래
임혜지: 딜도 안 되는데 뭔 세에레 타령이야
ㄱㅇㅅ 형: 안 되는지는 해봐야 알지
ㄱㅇㅅ 형: 왜 안 된다고 생각해
ㄱㅇㅅ 형: 나이트메어도 처음엔 스펙 높게 봤는데 지금은 다 완화됐잖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최종 보스라 그런지 세에레 트라이 스펙 기준은 엄청나게 높았다. 직업별로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보통 한계의 탑 57층 이상을 최소 컷으로 잡는다고 하니까. 물론 스탯을 중요시하는 프리스트는 여기서 예외였다. 어쨌든 그런 격수가 넷은 모여야 트라이 파티 하나가 만들어진다. 레전드에서는 아직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길드원들이 일일 평판 퀘스트는 열심히 해도 트라이는 도전하지 않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김도텐: 그래 언젠가는 하긴 하겠지
김도텐: 해보고 후기나 알려줘
ㄱㅇㅅ 형: ㅇㅋㅇㅋ
서보은: 패턴 개어려워 보이던데
서보은: 보기만 해도 어지러움 잔상이랑 찐세에레 같이 잡아야 하는 것도 그렇고
정찬영: 일단 나랑은 평생 인연 없을 거 같음 ㅋㅋ
서보은: ㅇㅈ
김도텐: ㄴㄴ 알피지라 언젠가는 가게 되있음
정찬영: 언젠가: 5년 뒤
김도텐: 좀 후하게 잡았네 난 10년 뒤쯤으로 봤는데
ㄱㅇㅅ 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녁을 먹은 찬영은 집 앞 편의점에 가서 네 캔에 만천 원 하는 할인 맥주를 샀다. 세 개는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 하나를 딴 뒤 온튜브 방송을 켠다. 화면을 꽉 채운 레비아 실행 창 오른쪽 아래 한편으로 황대걸의 캠이 보였다.
커뮤니티에서 미리 밝힌 것처럼 올 마이크로 보이스 코드 중인지, 스피커에서는 오디오가 겹쳐 들리고 있었다. 스트리머가 둘이나 되는 탓에 텐션도 너무 높았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은석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채팅창이 올라가는 속도도 평소보다 빨랐다. 찬영이 소리를 조금 낮추고 헤드셋을 연결했다.
- 매니저 / 온튜브와 드위치 방송 동시 송출 중입니다.
- 엘레나 상향 좀 해라... 동일템 버서커랑 딜 차이 너무 난다...
- 나 이제 들어왔는데 세에레 언제 잡는 거임?
- 이제 겨우 서로 인사 중임
- 형 사랑해
- 사격님 윈런 4년 키웠는데 엘레나 가야할까요ㅠㅠ 버티고는 있는데 윈런의 미래가 너무 암울합니다
- 대하 대하
- 저 뉴비인데 사냥터는 어디가 좋나요?
- 대걸 스펙 ㄹㅇ 지리긴 한다;; 사냥터에서 100억 넘게 뜨네 ㄷ
<사격 님은 말이 거의 없으시네. 계신 거 맞죠?>
<네.>
헤드셋을 연결하자 좀 전보다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방금 은석에게 물어본 사람이 도부인가? 도부의 말투는 이상하게 비꼬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가 문제냐고 하면 또 딱 꼬집기는 어려운데.
<그럼 슬슬 도핑 준비하죠.>
메인 오더인 비트주세요가 말했다. 다섯 개의 캐릭터가 세에레 입장 대기 맵에 선다. 평소 아기자기하고 밝은 느낌과는 달리 이 맵은 최종 보스다운 티라도 내는 건지 어둡고 어딘가 음침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긴 버프는 지금 미리 써 주세요. 들어가서 개인 버프 쓰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 비약들도 다 써 주시고요.>
<뿌리기는 제가 할게요.>
<좋습니다.>
<근데 다들 너무 잘하시는 분들이라. 이건 진짜 나만 잘하면 될 듯?>
- 대걸 테섭에선 원트원클 하냐 ㅋㅋㅋㅋ
- 어림도 없지 바로 눕클~
테스트 서버에서 사용할 수 없는 길드 스킬을 제외하고 모든 물약과 뿌리기, 버프 스킬을 끌어모아서인지 방송 화면 기준으로 버프만 네 줄이었다. 스펙에서 길드 스킬이 차지하는 비중이 암만 크다지만 이 정도 도핑이면 평소 스펙의 90%까지는 끌어 올린 것 같았다.
<여기서 세에레 깨 본 적 없으신 건 사격 님뿐인가?>
대걸을 포함한 파티원들이 도핑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중, 도부가 뜬금없이 물었다.
<사격 님은 세에레 경험해 보시려고 왔대요.>
<그래요? 처음 하시면 좀 어려우실 텐데. 트라이라도 해 보고 오시지. 하기야 레전드면 트라이할 격수도 없겠네.>
이게… 지금 뭐라는 거지?
좋은 의도로 한 말이어도 기분이 나빴을 판에 도부는 중간중간 비웃는 것처럼 실실 웃기까지 했다. 화가 난 찬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시골 서버 특성상 세에레 트라이가 어려운 걸 뻔히 알면서 저딴 식으로 말을 해?
<아뇨. 그렇진 않아요.>
저였다면 이미 이를 깍 물고 싸웠거나 마이크라도 끄고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을 텐데. 은석은 간결하게 대답하고 그만이었다. 에이, 레전드도 곧 퍼클 나오겠죠.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수습해 주려는 말도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은석이 저런 데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인 건 아주 잘 알겠지만. 그렇지만! 또 저 정도로 무던하게 넘어가 줄 필요는 없잖아.
오히려 난리가 난 쪽은 채팅창이었다.
- ??
- 서버가 문제
- 레전드가 뭐임? 레전드가 뭐임? 레전드가 뭐임? 레전드가 뭐임? 레전드가 뭐임? 레전드가 뭐임? 레전드가 뭐임? 레전드가 뭐임?
- ㄹㅇㅋㅋ 그거 패치 이름 아니냐고
- ㅋㅋ 시골섭 유전데 기분 더럽네
- 방금 은근히 멕이는 거 아닌가
- 도부 혹시 인성도 도부 남?
방금 채팅은 백 점 만점에 이백 점이다. 찬영은 저도 모르게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지 실력은 도부 안 났나|
이건 너무 자존심을 긁는 느낌이다. 지우고.
말을 좀 빡치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ㅇ|
존댓말만 하면 다 괜찮은 건가? 역시 지웠다.
넌 시발 그냥 말하지 마라 그냥|
…됐다. 말하지 말아야 할 건 찬영도 마찬가지였다.
- 레전드 그래도 시골이라 정겹고 좋은뎅 ㅠ
- ㄴ 시골이라 텃세도 있던데
- 현실이든 게임이든 사람 적은 덴 가는 거 아님
- 매니저 / 타인에 대한 비판, 비난 및 직업 간 비교, 서버 갈라치기 등 분쟁을 유발하는 댓글은 원활한 방송 진행을 위해 모두 삭제 처리하겠습니다.
채팅 관리 매니저의 공지가 올라오고, 시골 서버를 후려치던 채팅이나 도부를 공격하던 채팅들이 모조리 삭제 처리되었다. 어그로가 덜 끌리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내심 도부가 더 욕을 먹었으면 하던 찬영에게는 아쉬운 조치였다.
도부도 거의 안 보긴 했지만 초창기 구독했던 온튜브 채널 중 하나였는데. 오늘부로 인연 끝이다. 현재 방송 창을 줄이고 도부 채널에 들어가 구독 중이라고 되어 있는 버튼을 클릭했다. 이딴 채널 다시 보나 봐라.
은석을 대하는 말 저변에 깔려 있는 무시를 느꼈는지 함께 방송을 보고 있는 길드원들의 채팅에도 분노가 가득했다.
[길드] 보틀: 말하는 거 ㅈㄴ 싸가지 없네
[길드] 갓말이: 글게여 ㅋㅋ;;
[길드] 비테마죽: 뭐 편견이긴 한데 파이터 중에 인성 괜찮은 사람 한 번도 못 봤음 전 ㅎ
[길드] 딜하는프리: 파혐 on
[길드] 앞으로맑음: 나 안 그래도 도부 예전에 구독해놨길래 바로 취소했음
[길드] 보틀: 굿
<출발할까요?>
<전 준비됐어요.>
<들어가시죠.>
파티원들의 준비가 얼추 끝난 것처럼 보였는지 비트주세요가 말했다. 입장 후 바뀐 화면을 본 찬영이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기분 나빴다면 은석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지금 해 줄 수 있는 건 어차피 마음으로 보내는 응원뿐이다.
[수다] 윈런이 140조 넣었으면 [7]
이건 ㅅㄱ 손이 지리는 거임? 아니면 다른 애들이 개못한 거임
템 수준은 비슷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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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하는 거 보니까 둘 다인 듯
[수다] 아 니네 템만 좋으면 뭐하냐고 [21]
손이 그렇게 구린데
주어 없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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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봐도 그 스트리머들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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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부 영상 보니까 본섭 때도 혼자 계속 아웃돼서 리트시키더만 지가 뭔데 훈수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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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ㅇㅋㅋ 대걸은 인성 문제라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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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걸 컨 옛날에 비하면 진짜 많이 나아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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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부 63층 아님? 대걸은 몰라도 도부는 손 좀 되는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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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의 탑이랑 실전 보스랑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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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부 한탑 기록 나단 대리임 올라가는 거 나단이 방송도 했었음
[수다] 시골섭 유저인데 솔직히 ㅅㄱ한테 고맙더라 [4]
걔가 말한 거 좀 기분 나빴는데 사실이긴 하니까... ㅅㄱ도 그냥 넘어가길래 맞는 말이라 반박 안 하나보다 했음
근데 안 죽고 깬 것도 모자라서 딜도 제일 많이 넣어줘서 ㄹㅇ 고마웠음 내가 깼어도 지금보단 덜 기뻤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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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ㅠㅠ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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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말에 기분 나빠하실 정도면 마음이 너무 약하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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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걍 무시하셈 도부 포함 서버 갖고 ㅈㄹ하는 것들 개찐따라고 보면 됨
[수다] ??: 처음 하시면 좀 어려우실 텐데. 트라이라도 해보고 오시지. [31]
황대걸: 사격님 개잘하시던데 혹시 딜 얼마 넣으셨어요?
사격: 140조요.
캬 사격 컨 연전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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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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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은 맞긴 한데 이게 이런 데 쓰는 말이었냐고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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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어어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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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놓고 지는 뒤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억까라고 불평 ㅈㄴ 하더니 사격이랑 비주가 출혈 공격 맞으신 것 같다고 하니까 입 다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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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니까 입은 왜 턴 거임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갔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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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ㅇ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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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격한테 다른 것도 아니고 컨으로 시비를 거는 미친 새끼가 있네 ㅋㅋㅋㅋㅋㅋㅋㅋ
[수다] ㅇㅂ) 근데 도부 원래 말 더럽게 함 [48]
저 정도면 엄청 자제한 거임 ㅇㅇ 쉴드 치는 건 아닌데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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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그렇다고 ㅇㅈㄹ ㅋㅋ 차라리 팬이라 쉴드 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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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라고 원래 말을 더럽게 하든 좆같이 하든 평소에 걔 방송 보지도 않는데 알 바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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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러니까 하꼬지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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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독자 6만이 하꼬는 좀 오바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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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한데 십만 이하 취급 안 함
[수다] 븅신 새끼 대걸이랑 합방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람들도 많을 텐데 [12]
지 이미지 지가 다 조지네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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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과 별개로 원래 도부 아는 사람 많았음 그냥 혼자 방송만 하던 애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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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래서 도부가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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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방 글 좀 그만 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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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제목에 대걸이라고 써놨구만 지가 혼자 들어와놓고 왜 난리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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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먹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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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망했네
[수다] 인방 안 봐서 지금 난리난 얘기 ㅈ도 관심 없는 사람 개추 [9]
지들끼리 신나서 떠드는데 뭔소린지 모르겠고 재미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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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갈인지 대걸인지 이름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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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방 게시판이나 갔으면 좋겠음 개노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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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좆같은 생일추나 호에에짤 이딴 거 올라오는 것보단 그래도 훨씬 나음
[수다] 근데 윈런 안 좋다고 하지 않음? [38]
대걸 영상 다시 보니까 ㅅㄱ 거의 아수라급으로 날라다니는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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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보다 성능 괜찮다는 건 동의, 아수라급이라는 건 절대 동의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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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상필 사하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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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개인 생존 유틸은 좋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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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지금 플 보면 딜도 좋다는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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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에레 체력이 대충 420조 정도 되는데 140조면 혼자 30% 넘게 넣은 거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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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부터 윈런 인식보다 좋은 캐릭터라고 꾸준히 말해왔는데 맨날 처맞기만 함 아무도 안 믿더라
[수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아무리 컨이 좋아도 [87]
똥직업이 어떻게 140조를 넣음 다른 변수 다 고려해도 윈런이 저 시간 동안 그만큼 넣은 게 문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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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럿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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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따지면 대걸이나 도부는 몰라도 비주도 있는데 ㅋㅋㅋㅋ 비주도 140조 듣고 놀라던데? 33%는 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수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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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주가 얼마나 넣었는지는 아무도 모름 도부는 3페 전에 나가 떨어진 거 봤을 거고 대걸은 영상 보니까 스펙 대비 거의 못 넣은 수준이었음 비주도 30% 넘게 딜 넣었을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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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실례지만 윈런이 저렇게 넣으면 왜 문제인지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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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윈런은 전 직업 중 원탑급으로 딜링이 편한 직업이니까요 저도 윈런 애정 갖고 부캐로 키우지만 난이도가 낮은 만큼 과한 딜은 너프하는 게 맞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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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 과한 딜;; 님 윈런 스펙 인증 좀 아님 본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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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말 ㅈㄴ 싸가지없게 하네 인증 ㅇㅈㄹㅋㅋㅋㅋ 님은 꺼지세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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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쓰는 꼬라지 보니까 분탕러네 이딴 글 싸지를 거면 본캐인증부터 하고 싸질러라 병신새끼야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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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야 윈런 성능 제대로 드러나겠네 궁수 직게에서 맨날 약코하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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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보니까 윈런 바로 불타겠누 ㅎㄷㄷ
은석의 손에는 항상 감탄해 왔지만, 오늘만큼 그게 제가 더 기분 좋았던 적은 없었다. 첫 데스 카운트를 날렸을 때부터 보이스 코드로 다 들리게 짜증을 내던 도부는 마지막 페이즈인 4페이즈는커녕 3페이즈도 가지 못했다.
<방금 건 진심 개억까지. 오늘 서버 상태 존나 구리네.>
개억까는 무슨. 세에레 패턴을 전혀 모르는 찬영이 봐도 거의 모든 패턴을 한 번 이상 맞은 것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관리 잘되고 있던 서버가 억까당해서 기분이 나쁘겠다.
도부의 컨트롤은 은석이나 비트주세요, 직자에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황대걸과도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말이라도 안 하면 모를까.
<아 씨발. 버근가? 왜 처죽냐고. 좆같음 진짜로.>
자고로 레이드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유형 일 번이 남탓충이요 이 번은 억까무새였다. 억까가 아닌 정당한 패턴에 맞아 죽어 놓고 일단 제가 민망하니까 무조건 버그니 오류니 억까였다느니 우기는 스타일. 게다가 방송에서 정색하며 씨발이라느니 뭣 같다느니 한숨만 푹푹 내쉬기까지 하고 있으니 남들 분위기를 망치는 데는 아주 빡숙이다.
<방금은 출혈 회오리에 맞으셨어요.>
<아니 맞질 않았는데….>
은석이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짚어 줬는데도 도부는 궁시렁대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건지 비트주세요가 ‘아니요, 이 위치에 나온 거 맞으셨어요.’ 하고 방금 패턴이 나온 위치까지 직접 찍어 주었다.
<그래요? 못 봤나 보네.>
<집중해 주세요. 한 분 더 죽으시면 리트 갈게요.>
- 도부 오늘 왜 저럼 술 마심?
- 쟨 원래부터 예의 없던데
- 트라이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회오리 시전 모션 빤히 보이는데 왜 죽은지도 모르는 건 오바 아니냐... 스펙이 아깝다
- ㄹㅇ 방금은 다른 패턴도 별거 없었는데
- 애초에 회오리를 떠나서 그 전 패턴도 다 맞고 있었음 ㅋㅋㅋㅋㅋ
채팅 분위기도 영 안 좋아진 데다 어쨌든 본인의 실수로 혼자 아웃까지 했으니 입은 다물었는데 자존심이 상하긴 했나 보다. 나머지 네 명이 첫 트라이만에 세에레를 깔끔하게 클리어하고 수고 인사를 주고받을 때도 도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 레비아 안 하는데 대걸님 방송은 챙겨보게 되네요 오늘도 재밌습니다
- 엘레나 아수라 개좃사기 직업 이번 달 너프 확정
- 대걸 데미지 보면 대리 만족됨 내가 지를 생각은 없어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근데 사격 클라스 지리긴 하네 ㄷㄷ 영상 본 게 다일 텐데 개잘함
<그니까. 아니 첫 트라이시라던데 미쳤다니까.>
채팅을 빠르게 훑어본 황대걸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은석에게 묻는다.
<사격님, 오늘 개잘하시던데 혹시 딜 얼마 넣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 백사십조요.>
<미친. 백사십이요?>
<네.>
<대단하시다 진짜.>
- 140조 지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말이 되나 이게 와...
- 엄마 난 커서 사격이 될래요! 엄마 난 커서 사격이 될래요! 엄마 난 커서 사격이 될래요! 엄마 난 커서 사격이 될래요! 엄마 난 커서 사격이 될래요! 엄마 난 커서 사격이 될래요!
- 킹갓제너럴엠페러충무공마제스티 윈런
- 이쯤 됐으면 윈런 직업명 사격으로 바꾸자 ㄱ 아님 전직 NPC 사격으로 바꿔주셈
- 도부 없었어도 충분히 깼겠누
- 도부 팬이냐? 3페도 못 갔으면 이미 도부 없는 수준임
- 솔직히 대걸도 없어도 ㅋ
- 어허 대갈 형은 방송 주인이니까 쫓겨나기 싫으면 사려야 한다 이 말이야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비주는 딜 얼마나 넣었으려나 못해도 사격이랑 비슷하거나 더 넣었을 것 같은데 궁금
- 객관적으로 윈런 성능 어떰? 좋음?
비트주세요나 황대걸의 반응도 그렇고, 채팅창 반응도 사격의 컨트롤에 대한 감탄이 가득했다. 슬쩍 들어가 본 아웃벤 인기 글도 마찬가지고.
그럼 그렇지. 이 정도로 잘해 낸 게 찬영의 눈에만 보일 리 없다. 사람 눈은 다 똑같았다. 처음 치고 잘한 수준이 아니라 클리어 경험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잘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 은석다웠다.
찬영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 라잇톡을 켠다.
정찬영: 방송 잘 봤어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마침내 남긴 말은 처음에 비하면 많이 다듬어져 있었다.
ㄱㅇㅅ 형: 봤어?
생각보다 빠르게 답장이 왔다.
정찬영: 당연히 방송 전부터 시계 보면서 대기타고 있었지 ㅋㅋ
ㄱㅇㅅ 형: 잘했네
ㄱㅇㅅ 형: 보니까 어땠어
어땠냐고? 처음 덜 다듬어졌던 말 그대로 메시지를 보냈다면 은석이 찬영의 감정을 좀 더 알 수 있었을까. 나 순간 너무 좋아서 형한테 고백할 뻔했잖아, 장난처럼 가볍게 붙이기에는 찔리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정찬영: 잘하더라 진짜
정찬영: 세에레 하나도 모르는데도 형이 잘하는 건 알겠어서
ㄱㅇㅅ 형: 그리고?
정찬영: ㅎㅎ 도부인가
정찬영: 솔직히 그 사람 말하는 거 재수 없었는데
정찬영: 형이 잘해줘서 그게 제일 좋았어
ㄱㅇㅅ 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찬영: 웃지 말구...
좋기만 했던 정도도 아니다. 속이 다 시원했다. 도부가 욕을 먹고 있는 자리마다 찾아가서 박수를 쳐 줄 수도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물론 이번 140조 딜링의 여파로 윈드 러너 하향 여론이 들끓는 건 좀 신경 쓰였지만, 그걸 굳이 지금 은석에게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별 상관 안 할 것 같기도 하고.
ㄱㅇㅅ 형: 찬영아 우리 만나기로 했었잖아
ㄱㅇㅅ 형: 저번 정모 때
정찬영: 그러긴 했지
ㄱㅇㅅ 형: 너 시간 괜찮으면 이번 주 주말에 한 번 볼래?
정찬영: 주말?
이렇게 갑자기? 하지만 생각해 보니 정모를 다녀온 지도 꽤 되긴 했다. 여기서 더 미루다간 어영부영 없는 얘기가 돼 버릴지도 모른다. 딱히 밥을 얻어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은석과는 더 보고 싶었다.
찬영이 이번 주 일정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평일은 회사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주말이라면 약속도 따로 없고 널널할 것 같다.
정찬영: 주말은 언제든 상관없을 것 같은데
ㄱㅇㅅ 형: 그때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정찬영: 고기?
정찬영: 난 돼지갈비 좋아해
정찬영: 근데 어디서 봐?
냅다 말하고 보니 고기는 너무 범위가 넓었다. 은석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 놨다간 갑자기 고급 소고기집에 데려다 놓을지도 모른다. 돼지갈비는 그래도 얼마 안 하겠지. 실제로 찬영이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은석도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돼지갈비야 싫어하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나? 길드원들은 틈만 나면 한우 스테이크 얘기를 꺼내곤 했지만 이미 다 함께 칙칙폭폭을 받아 놓은 상황에서 뭘 더 얻어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ㄱㅇㅅ 형: 너 편한 곳으로
정찬영: 편한 곳? 집 근처? ㅎㅎ
방금 건 농담이다.
정찬영: 농담이고
정찬영: 내가 형 쪽으로 갈게
ㄱㅇㅅ 형: 넌 집 쪽이 편해? 안 그래도 2호선 라인 말하려고 했는데
ㄱㅇㅅ 형: 서울대입구에서 볼까?
얻어먹는 입장이면 그쪽으로 가 주는 게 예의지. 그런 점에서 서울대입구는 너무 선을 넘었다. 물론 찬영이야 집 바로 앞일 테니 편하겠지만 은석의 집이 이 근처일 것 같진 않다.
정찬영: ㄴㄴㄴ
정찬영: 형 원래 어디 말하려고 했는데?
ㄱㅇㅅ 형: 강남?
정찬영: 그럼 강남 가자
정찬영: 신림이면 몰라도 설입은 오라고 하기엔 좀 애매해서
ㄱㅇㅅ 형: 상관은 없는데
ㄱㅇㅅ 형: 그럼 토요일 강남역 한 시로?
정찬영: ㅇㅋㅇㅋ
휴. 찬영은 이제야 마음을 놓았다.
다음 날이 주말이라면 찬영은 무조건 새벽 두세 시를 넘겨 자는 사람이었다. 한 시간이라도 늦게 잘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한 시에 잠든 이유는 단 하나, 내일 알람을 못 들을까 봐. 그래서 은석과의 약속에 늦을까 봐. 단언컨대 회사 출근도 첫 일주일을 제외하고 이 정도로 신경 쓴 적은 드물었다.
결국 눈을 뜬 시간은 여덟 시였다. 약속 시간은 한 시고 강남역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했을 때 열두 시 이삼십 분에만 집을 나서면 된다는 걸 고려하면 아주 이른 기상 시간이다.
샤워를 하고, 머리 정돈을 좀 더 했다. 일찍 일어난 김에 옷장 안 옷이란 옷은 다 꺼내 봤는데 마음에 드는 게 좀처럼 없다. 완전히 회사 출근용이거나, 반대로 너무 편한 옷이거나였다. 사실 머리를 잔뜩 세우고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간다 해도 별 부질 없겠지만. 그 은석의 옆인 것도 그렇고, 강화가 잘돼서 고마우니 밥 사 주겠다는데 크게 의미 부여할 필요도 없고…. 고심하던 찬영은 평소에 자주 입던 맨투맨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들었다.
한 삼 분의 일 정도는 심란한 마음으로, 또 삼 분의 일 정도는 뭘 먹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머지 삼 분의 일은 그저 비운 채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으로 향했다.
열몇 개는 되는 복잡한 출구들 사이 만나기로 한 곳을 찾아 두리번대고 있으니 저편에서 은석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은석을 힐끔힐끔 돌아본다. 저거 봐. 저 형은 자기 인기 많은 걸 모를 수가 없다니까. 엉거주춤 마주 손을 흔든 찬영이 은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 근처를 잠시 걷다 은석이 이끈 곳은 룸이 있는 한우 전문점이었다. 돼지갈비 좋아한댔는데. 속으로 삼키고 있으려니 들은 것처럼 ‘여기 돼지고기도 있을걸?’ 대꾸한다.
“근데 맛은 없대. 비싸기만 하고.”
“그거 나한테 그냥 소고기 먹으란 거지?”
은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뭐. 둘이서 먹어 봐야 얼마나 나온다고. 찬영은 제 고집을 포기하기로 했다. 사 주는 사람이 이 정도까지 판을 깔아 줬으면 더 거절하지 않고 맛있게 먹어 주는 것도 예의다.
“대신 메뉴는 형이 골라.”
“좋지.”
은석에게 메뉴판을 건네자 흔쾌히 받아 든다.
말도 안 되는 적은 양에 가격도 비싼 한우는 몇 주 전 팀 회식 때 먹은 가성비 갑 소고기집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물로 입가심까지 야무지게 한 찬영이 잔뜩 늘어졌다. 은석은 아무래도 그 모습이 흐뭇한 듯했다. 암만 찬영이 동생이라지만 명절에 놀러 온 손자 보듯 할 정도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건 아닌데. 고작 해야 한 살 차이다.
“이제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글쎄…. 피시방?”
오늘치 일일 퀘스트를 못한 게 생각이 나 그냥 한 말이었다. 사실 지금껏 게임 정모로 만난 사람들 중에는 PC방에 가자고 하면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제법 무난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었나.
은석이 찬영을 지그시 보았다. 그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왠지 귓가로 넌 정말 게임에 진심이구나, 하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렇지만 같이 게임 하는 입장에서 PC방도 괜찮은 선택 아닌가? 제풀에 찔린 찬영은 줄줄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일퀘는 해야 하니까, 중요하잖아. 형도 가서 레비아 할 거 하면 되고. 보스 다 돌았어?”
“사격 캐는 다 돌아놨지.”
이것까진 예상 못 했는데.
“…그냥 딴 데 갈까? 카페나.”
“아냐. 가자.”
너 가고 싶은 데로. 웃으며 몸을 일으킨 은석이 룸의 문을 열고 나가 계산대로 향했다.
지하도 아닌 강남역 PC방은 말도 안 되게 비쌌다. 입구에 놓인 키오스크 화면을 슬쩍 봤더니 한 시간에 이천 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뭐 열 시간씩 충전하면 시간당 천오백 원까진 내려가겠지만…. 찬영은 은석의 얼굴을 힐긋 본다. 그건 오바였다.
이곳이 자취방 근처였다면 당장 나갔을 거다. 그러나 강남역 부근이면 어딜 가든 가격도 비슷할 테고, 그럼 나가 봐야 의미도 없었다. 은석에게도 나가고 싶은 이유를 대야 하겠지. 너무 비싸다느니 하면 내주겠다 들지도 모른다. 찬영의 지갑 사정이 아주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작 이삼천 원 가지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만큼 가볍지도 않았다.
그렇게 들어선 PC방은 주말 오후이기 때문인지 커플석만 달랑 남아 있었다.
“딴 데 갈까?”
“지금 다른 데 가도 비슷할걸. 그냥 앉자.”
찬영은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애쓰며 은석에게 말했다. 영화관도 아니고 PC방 커플석쯤이야 그냥 친구끼리 앉는 일도 흔하니까. 사심과는 일절 관련 없다. …아마도.
회원 가입을 누르고 정보를 입력했더니 이미 등록된 아이디라는 팝업 창이 떴다. 한때 어딜 갈 때마다 PC방부터 갔던 게 여기서 뽀록 난다.
가격을 신경 쓸 필요도 없게 이미 충전까지 되어 있었다. 무려 다섯 시간.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왔을 때의 찬영은 극한의 가성비를 추구했나 보다. 남은 시간이 그 정도라면 한 번에 일고여덟 시간 정도는 충전해 뒀을 테니.
“두세 시간 정도 충전하면 될 것 같은데.”
“나 이미 다섯 시간 있어. 형 것도 내가 충전해 줄게.”
“다섯 시간? 전에 여기 왔었어?”
“그러게.”
찬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민망했다.
당연히 둘이 접속한 게임은 레비아 온라인이었다. 찬영이 접속하고 이 초도 되지 않아 ‘[길드] 사격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하는 길드원 접속 알림이 떴다. 이미 접속해 있던 길드원들에게는 거의 동시에 접속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길드] 보틀: 오우 타이밍
[길드] 빨강색: 둘이 왜 같이 들어옴
[길드] 사격: 같이 피시방 왔어
[길드] 갓말이: ??
[길드] 도텐: 니네 방금 만난 거 아니었음?
은석과 만나게 되었다고 미리 말해 두었던 동명도 의아해한다. 같은 게임 하는 둘이서 PC방에 온 게 그렇게까지 이상할 일인가? 찬영은 아까 저를 지그시 보던 은석을 떠올렸다.
[길드] 앞으로맑음: ㄴㄴ 밥 먹고
[길드] 앞으로맑음: 일퀘 안 해서 내가 오자고 함 ㅠ
[길드] 갓말이: ㄷㄷ
[길드] 갓말이: 일퀘는 못 참지 ㅇㅈ합니다
[길드] 보틀: 찐레창;
[길드] 앞으로맑음: 님들한테 그런 말 듣기엔 좀
[길드] 도텐: 어허
은석은 PC방에서 뭘 하려나 싶어 화면을 슬쩍 쳐다봤더니 찬영과 비슷했다. 몬스터를 잡고, 보스를 돌고, 이벤트에 참여하고. 다른 점은 찬영보다 들락날락하는 캐릭터가 훨씬 많다는 것뿐이다. 그때 봤던 체리피커 말고도 부캐 여러 개를 키우는 모양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옆을 돌아본 은석이 물었다.
“넌 일퀘 끝났어?”
“어… 잠시만. 보스 하나만 돌게. 형도 천천히 하고 있어.”
찬영이 키우는 캐릭터는 앞으로맑음 하나였다. 어차피 당장 해야 할 것도 없고, 온 김에 주간 보스 중 하나인 타락 안드로이드까지는 잡고 갈 생각이었다.
타락 안드로이드는 이름 그대로 안드로이드를 모티프로 한 보스였다. 주기적으로 에너지 필드라는 쉴드를 생성해 강제 딜 로스 타임을 만들거나 유저를 강제로 제 쪽으로 당겨 오는 게 특징이다.
전자는 좀 귀찮은 정도였지만 후자의 유혹 비슷한 효과는 독가스나 폭탄, 총 패턴과 결합되면 데스 카운트를 날리기 딱 좋았다. 아수라가 연계를 하는 것도 이 자석 효과를 막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는데, 솔직히 찬영도 100%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가끔은 튀어 나가 죽기도 했다.
“아, 진짜.”
바로 지금처럼.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석이 어느새 찬영의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찬영은 괜히 뒷목을 쓸었다.
그래도 평소엔 그럭저럭 되곤 했는데. 은석이 보고 있다 생각하니 더 집중이 안 됐다. 그렇다고 보지 말라고 하기도 쪽팔리고.
결국 두 번째 급발진을 본 찬영이 보스에 냅다 캐릭터를 박아 버렸다. 집에 가서 하지 뭐. 이건 다 은석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남탓무새처럼 그런 핑계를 댄다.
“난 급발진이 제일 싫어.”
“아수라 연계가 어려워서 그래. 서버 렉도 있고.”
“진짜 팁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역시 답은 아웃벤 팁과 노하우 게시판이나 직업 게시판일까. 노말 나이트메어를 트라이하며 아수라에 대해 좀 찾아보긴 했지만 아직 먼 모양이다. 언제쯤 비트주세요처럼 플레이할 수 있으려나.
“팁까진 아닌데 하나만 알려 줘도 돼?”
은석의 말에 찬영이 반색했다.
“당연하지. 그냥 키보드 가져가서 보여 줘도 돼.”
은석의 말이라면 아웃벤 팁과 노하우 게시판보다 신뢰도가 높다. 찬영은 의자까지 옆으로 밀어가며 은석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었다.
“A키에 있는 스킬 썼을 때, 위에 일 초짜리 공증 버프 생기는 거 보이지.”
“응.”
“정확히는 이 초 가까운데, 이거 보면서 스택 유지한다는 느낌으로 가면 돼. 20스택까지. 저 시간 내로 다음 스킬 쓰면 안 튀어 나가.”
“그렇게 자세한 건 처음 알았어. 형 아수라도 부캐야?”
“부캐까진 아니고 캐릭터 카드 때문에 한 정도.”
그럼 사냥밖에 안 해 봤을 텐데 초 단위까지 어떻게 체득한 거지. 누군 본캐로까지 키우는데도 처음 안 사실이다. 기껏해야 연계해야 스킬을 사용할 때 안 튀어 나가고 공격력이 오른다는 것만 알았지. 게다가 이제는 들었는데도 패턴을 피하면서 20스택까지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한 번만 실패하면 쌓인 스택이 모조리 날아가 버리니까. 샌드백 수준의 하위 보스라면 몰라.
찬영이 물었다.
“근데 이게 보스 때도 유지가 돼? 노말 나메만 해도 패턴 동시에 나오잖아.”
“잠깐만. 연습 모드 들어가서 보여 줄게.”
“혼자?”
“어차피 잠깐이라서.”
은석은 1인 파티를 만들어 노말 나이트메어 연습 모드에 들어갔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키보드 위의 손가락을 보고 있으니 손가락보단 화면 상단의 버프 창을 보고 있으라고 한다. 3…5…10…12…15…20. 20. 20. 공격력 증가 버프 위로 조그맣게 떠 있는 숫자는 줄곧 20을 유지하고 있었다.
“와, 이게 되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너도 해 보라기에 키보드를 잡았지만, 찬영은 15스택 유지가 최대였다. 그래도 잘하는 거라고 했다.
“실제로 보스에서 계속 유지하는 사람 얼마 안 돼. 스트레스받지 말고.”
“근데 급발진 때문에 한 번은 무조건 죽어. 형이 알려 줬어도 또 죽을걸.”
“딜 넣다 죽는 건 어쩔 수 없지.”
“형은? 세에레는 예외야.”
“쌓인 경험치가 다르잖아. 직업도 다르고.”
괜히 부린 심술에도 은석은 여유로웠다.
“난 네가 왜 자신감이 없는지 모르겠는데…. 잘하던데. 나메나 샐러맨더나. 빈말 아니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석에게 그 말을 들으니 민망해진 동시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사격 인증이면 자부심 좀 가져도 되지 않을까?
“그럼 다행이고.”
“진짜 잘 못 하는 사람은 비틀도 못 깨.”
“경험담이야?”
구체적인 보스의 이름이 거론됐다. 비틀이라면 레비아 온라인에서 최초로 출시된 보스였다. 지금은 하드를 제외하고는 버려진 콘텐츠 수준이지만 한때는 노말 도전조차 어려웠다고 들었다. 몸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기 전까지 본체에 딜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데다가 소위 지랄 맞다는 반격, 슬로우나 감염을 앞세운 상태 이상 패턴도 존재하니까. 은석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주변에 있었지. 십 년 전이라 지금 난이도랑 차이는 있긴 했지만.”
“헐. 길드원들 중에?”
“걔넨 그렇게까지 오래 안 했어. 그땐 진짜 한 대만 맞아도 죽었거든. 데미지도 지금보다 훨씬 낮았고….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때 얘기야.”
“그럼 비틀도 못 깬다 할 게 아니네. 그렇게 어려웠을 때면. 잠깐만, 형도 뉴비 때가 있었어?”
찬영이 시작했을 때 사격은 스펙으로나 컨트롤로나 지나치게 완성형이었다. 물론 당연히 은석에게도 처음인 시절이 있었겠지만, 상상이 전혀 가지 않는다.
은석이 웃었다.
“처음 시작하면 다 뉴비잖아.”
“그래도. 형은 레비아 왜 시작했어?”
“그땐 진짜 다 하는 게임이었어. 같이 하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 근데 형 레전드에서 시작했던 거 아니었나?”
“형이랑. 레전드는 처음 나왔을 때 서버 이동한 거고.”
형이라면…. 찬영은 정모 날 어렴풋이 들었던 은석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더는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PC방 다음 코스는 영화관이었다. 영화보다 팝콘이 우선인 찬영은 팝콘 대 사이즈와 콜라 두 잔을 샀다. 시간표에 맞춰 고른 영화는 킬링 타임용 액션 코미디 장르였다. 좋지는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은. 영화 속 배우들보다는 스크린을 응시하는 은석을 보는 게 좀 더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영화관 바로 바깥에는 무인 인형 뽑기 가게가 있었다. 인형은 좋아하지 않아 어쩌다 갖게 되더라도 구석에 박아 두거나 남들에게 나눠 주곤 했는데, 오늘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게를 계속 쳐다보는 찬영을 본 은석이 물었다.
“뽑아 줄까?”
“형 인형 뽑기도 잘해?”
찬영도 원하는 인형을 뽑는 데 실패한 적은 없지만, 은석은 뭐든 잘할 거란 편견이 있다. 글쎄…. 난처해 보이는 은석의 얼굴은 그저 겸손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지갑 속엔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 생각은 은석이 인형 뽑기를 세 번째로 시도했을 때 뒤집혔다.
“그냥 나갈까?”
지켜보던 찬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겸손이 아니었다. 은석은 인형 뽑기를 정말 못했다. 뽑기 기회는 천 원에 한 번, 만 원에 열세 번이었는데 은석이 넣은 돈은 이미 육만 원을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천 원짜리를 넣다가 네 번째 시도부터 만 원짜리를 넣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 돈이면 그냥 플래그십 스토어에 가서 원하는 인형을 골라 살 수도 있겠다. 이런 랜덤 가챠 따위가 아니라. 심지어 레비아보다도 가격 대비 보상이 쓰레기였다.
“아냐. 다음번엔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은석의 눈에서 오기가 보였다. 차마 거기다 대고 그만해도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파이팅.”
“아니면 너도 해 볼래?”
“아니. 난 괜찮아.”
제가 하라고? 그럼 은석이 정말 현타가 올지도 모른다. 찬영은 이미 한 번 만에 뽑은 인형을 보이지 않는 곳에 슬쩍 밀어 두었다. 뭐 은석이 못하는 게 있을 수도 있지. 오히려 의외라서 좋은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야?”
“뭐 얼마나 됐다고. 난 형도 못하는 게 있구나 싶어서 좋아.”
아차. 진심으로 한 말인데 아무래도 은석은 불편했던 모양이다. 다시 만 원짜리 한 장을 밀어 넣는 걸 보니.
결국 은석은 처음 목표로 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인형 하나를 뽑는 데 성공했다. 인기 캐릭터를 표절한 것 같긴 한데 어딘가 묘하게 정이 가게 생긴 인형이었다.
찬영은 은석이 건네준 못생긴 인형을 안아 들었다. 버릴래? 아무래도 보기엔 영 별로였는지 묻는다.
“이건 못 버리지.”
무려 칠만 원짜리다. 찬영은 아주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가격보다도, 앞으로 이 인형을 보면 인형을 끌어 올리는 데 실패해 시무룩해진 은석의 얼굴이 먼저 생각날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 값어치는 다하고 있는 셈이다.
가게를 나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넘었다. 저녁까지 먹자 해 볼까. 찬영이 망설였다. 그러기엔 너무 오래 있었다. 역시 집에 가야겠지. 자연스레 둘은 지하철 역사로 향했다.
밥도 먹었고, PC방도 갔고, 영화도 봤고, 인형 뽑기도 했다. 남들이 봤을 때는 전형적인 데이트라고 할 만한 코스였다. 단둘이 점심에 만나 저녁이 되었으니 PC방이나 영화관이 껴 있었다고 해도 얘기하기엔 충분한 시간인데 아직도 모자라다. 찬영은 아쉬움에 오히려 말이 없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말 저녁의 강남역사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고, 은석과 찬영의 발걸음도 떠밀려 가듯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찬영의 손안에는 못생긴 인형이 매달려 있다.
“나 갈게.”
지하철 개표구 앞에 선 찬영이 말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은석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찬영아, 잠깐만.”
뭔가를 들고 있는 채였다.
“아까 너 주려고 산 건데 가져가.”
“이게 뭔데?”
“그냥 립밤이야. 급하게 사느라 좋은 건 아닌데.”
얼이 빠진 채 립밤과 은석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으니 설명이 부족하다 여겼는지, 은석은 몇 마디를 더 붙였다.
“너 보고 있으니까 입술 텄더라. 아플 것 같아서. 생각나면 발라. 안 맞으면 그냥 버려도 되고.”
이걸 언제 산 거지? 아까 잠깐 갔다 올 데가 있다고 한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정말로 아주 잠깐이었는데. 그보다도. 찬영은 입술만 뻐끔거리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또 보자. 들어가.”
또 보자는 말을 하면서 은석은 옅게 웃었고 제 시선보다 약간 낮은 곳에 위치한 찬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심장이 조이듯 뛰는데, 설레는 건지 아픈 건지조차 몰랐다. 찬영은 카드를 찍고 지하철을 타는 내내 못생긴 인형과 주머니 속의 립밤을 꼭 쥐고 있었다.
어떻게 버리라고. 대체.
집 근처에 와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은석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그런 말들을 안겨 주고 혼자 그대로 가 버린 게.
이미 열이 오른 얼굴이 터질 것 같아서 입술을 다물고 찬영은 그저 묵묵히 계단을 올랐다. 수십, 수백 번을 타고 다닌 엘리베이터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행동과 표정을 만들어 내는 근육이란 근육이 다 고장 난 것 같기도 했다.
와… 진짜… 와.
말을 잃었다기보다는 언어를 잃어버린 것에 가까웠다. 머릿속으로 감탄사 같은 생각만 반복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문에 등을 기댄 동시에 한숨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진짜 미쳤다….”
손안의 인형이든, 주머니 속의 립밤이든, 은석이든 다. 그동안 좁아터졌다고 생각했던 자취방조차 다정하게 느껴졌다. 더는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찬영은 은석이 좋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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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용에 참고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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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닉넴이문제야: ㅈ노잼 믿거 이벤트 또 나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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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gkie3762: 199000 실화냐? 우리가 기계도 아니고 그만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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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Alisha: 진짜 이벤트 돌려막기 그만 좀... 방학 이벤 끝나면 사냥의 시간 하라고 위에서 지시라도 내려오나 보상도 맨날 똑같고;; 많이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게임만큼만 해주길 바라는 건데 이럴 거면 운영팀은 왜 있고 기획팀은 왜 있는 거임
* * *
ㄴ 겄쭈: 이십만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아직도 지들이 초딩 게임이라고 생각하나 평범한 직장인이 어떻게 3주 동안 이십만마리를 잡음
* * *
ㄴ psy07: 에휴 레비아도 이제 접든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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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김영우: 와 찡찡이들 ㅈㄴ 역하네 니들은 어차피 게임에 별로 도움도 안 되니까 꼬우면 제발 접어주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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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택으호이어: 어차피 할 사냥 그냥 덤으로 보상도 받는다고 생각하면 되지 또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ㅋㅋㅋㅋ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고 뭐 어쩌라고? 누가 이벤트 꼭 하래? 응 하지 마~~~ 안 하고 보상 안 받으면 됨~~~~아무도 니네한테 이벤트 참여하라고 강요 안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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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AI파이터: 위에 3주면 충분하다는 사람들은 다 백수인가? 직장인은 매일 한 시간씩 게임 꼬박꼬박 하기 힘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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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라자: 의자 예쁘당
어제 아침에 떴던 공식 홈페이지 공지 글을 쭉 내린다. 아래에 달린 댓글은 찬영도 제법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보통 대형 업데이트들 사이에 애매하게 낀 기간은 사냥 이벤트로 때운다고 했으니 재탕은 그렇다 치겠는데, 잡아야 하는 숫자가 직전의 십오만 마리에서 이십만 마리로 오만 마리나 늘었다.
어제 일일 퀘스트만 하고 접속을 종료한 탓에 찬영은 이벤트 퀘스트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길드원들은 어디까지 했으려나? 주말에 같이 사냥이나 달리자고 할까.
임혜지: (사진)
임혜지: 사시 끝
타이밍 맞게 아군 단체 채팅방이 울렸다. 이벤트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혜지의 메시지였다.
정찬영: ?
최ㅇㄹ: ㅋㅋ 어제 이벤트 시작한 거 아니었음?
김도텐: 뭔 매주 미친 사람들이 나와
박태경: 미친놈이지만 실례세요?
서보은: 저도 사시 끝남 ㅎㅎ;
정선빈: 아직도 안 한 사람이 있다고? 선 넘네
김도텐: ㅋㅋㅋ
김도텐: 길드에 미친놈들이 한둘이 아니네
임혜지: 정선빈 저거 빨리 끝내고 쉬고 싶다고 새벽에 안 자고 사냥하다 출근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임혜지: ㄹㅇ 돌았음
박태경: 그렇게까지?
정선빈: 그래서 뒤질 것 같애 지금
정찬영: 그럴 만두
김도텐: 고기 만두
김도텐: 아 갑자기 만두 먹고 싶다
임혜지: 진심 방금 욕 쓰다 지움
정찬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찬영: 난 천천히 할래
정선빈: 근데 찬영아 생각해봐봐
정선빈: 너 한 시간에 몇 마리 가능?
정찬영: 한 만삼사천?
정찬영: 정도 잡나
정선빈: 이십만 나누기 만사천 해보면 대충 할 만 하다 싶지 않음?
그건 또 그렇다. 열네 시간 정도면 끝나니까. 찬영이 수긍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정찬영: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김도텐: ;;넌 또 뭐가 그러네야
김도텐: 애초에 3주 줬으면 3주 안에 끝내면 되지
서보은: 네 다음 에이징 커브 오신 분
김도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얌마
단언컨대 3주씩이나 걸릴 길드원은 없다. 동명도 말은 저렇게 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어차피 참여해야 할 이벤트라면 빨리 끝내 버리는 게 나았다. 보상도 필수고. 이십만이라는 숫자만 들어도 숨부터 턱턱 막히는 게 문제지만.
결국 일일 퀘스트를 끝내고도 찬영은 세펠리오 귀퉁이에 자리한 사냥터로 향했다. 먹는 경험치 대비 편하기로 소문나 시골 서버에서도 제법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다. 다른 길드원들처럼 이십만 마리를 한 번에 잡을 생각은 없다. 하루 두세 시간. 평소 하던 것처럼만 하면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다행히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사냥터는 생각보다 널널했다. 찬영은 경험의 비약과 재물의 비약을 사용하고 사냥을 시작했다. 화면 오른쪽 이벤트 퀘스트 정보에 표시된 숫자가 자잘하게 올라가는 게 보였다.
몇 분 지났나. 갑자기 맵 한 구석에서 캐릭터 하나가 나타났다. 쓰는 스킬을 보면 혜지와 같은 레인저였다. 사냥도 보스도 구데기라고 불리는 직업을 들고 의도적으로 스틸을 하려는 것도 아닐 텐데.
찬영은 일단 반사적으로 스크린 샷부터 찍었다. 문제가 생기면 길드부터 엮는 MMORPG에서는 뭐든 캡처하고 봐야 했다. 먼저 온 건 저였으니 저러다 알아서 가겠지, 스킬을 쓰며 주시하고 있었는데.
[모두] 바로you: ?? 자리
찬영이 했어야 마땅할 채팅이 날아왔다.
[모두] 앞으로맑음: 제가 먼저 있었음
[모두] 바로you: 저 비약 먹고 한 시간 전부터 사냥 중이었는데
[모두] 앞으로맑음: 저 왔을 때 아무도 없는 거 확인했습니다
[모두] 바로you: 아무리 지금 자리가 없어도 남에 거 뺏고 그러면 안 되요
설명을 해 줘도 상대는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아무리 이벤트가 진행 중이라고 해도 레전드 같은 시골 서버는 사냥터가 모자랄 일이 없는데 굳이 소모전을 해 가며 뺏을 리가. 심지어 길드까지 달고? 뭣도 모르는 뉴비인가 싶었다.
곧이어 바로you의 닉네임 아래 박혀 있는 길드 명이 눈에 들어왔다. 하필이면 또 레전드다.
설마 이쪽의 길드를 보고 고의로 시비를 걸어온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낭패는 낭패였다. 차라리 엮이지 말고 조용히 채널을 옮길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모두] 앞으로맑음: 혹시 마을이나 참새 갔다 오셨나요?
간혹 사냥터에서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그 사냥터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암묵적인 룰을 모르는 뉴비들도 있었다. 바로you도 뉴비라기에는 레벨이 조금 많이 높긴 하지만, 길드 가입 전에는 교류 없이 솔플만 해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럼 이후 사냥터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떠나 여러 가지로 뒤탈이 없도록 룰을 알려 주는 게 나았다. 상대가 레전드 길드원이니 더.
[모두] 바로you: 아니
[모두] 바로you: 참새고 뭐고 제가 한 시간 전부터 사냥 중이었다니까요
갔다 왔구나.
참새고 뭐고라는 걸 보니 갔다 온 게 맞나 보다. 찬영은 자리를 피해 버리기로 했다.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더 입씨름해 봐야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시간 낭비였다. 맞춤법이 엉망진창인 것부터 이상한 사람인 것쯤은 알아봤어야 했는데.
[모두] 앞으로맑음: 어디 갔다오셨으면 자리 없어지신 게 맞아요
[모두] 앞으로맑음: 아무튼 이 자리는 쓰세요 제가 딴 데 갈게요
[모두] 바로you: ??
[모두] 바로you: 스틸하더니 도망치시네
말하는 꼴을 보니 더더욱 확신이 들어 바로 채널을 바꿨다. 그 자리에서 다시 사냥을 시작한 지 일이 분쯤 되었을까.
[모두] 바로you: 님
[모두] 바로you: 뭐하세요?
[모두] 앞으로맑음: ??
바로you는 찬영이 있는 채널까지 쫓아왔다. 걸린 시간으로 봐서 계속 채널을 옮겨 가며 찾아온 듯했다.
[모두] 바로you: 뭐하시냐고요
[모두] 바로you: 왜 스틸하셨어요? 아군 스길인가요?
[모두] 앞으로맑음: 아니 자리 비우셨으면 사냥터 포기하신 거고
[모두] 앞으로맑음: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그냥 쓰시라고 비켜드리기까지 했는데;
[모두] 바로you: 그냥 스틸해놓고 제가 뭐라하니까 도망친 거 같은데
[모두] 바로you: 제 지인 불렀으니 기다리세요
지인을 불렀다고? 어쩐지 싸움이 커질 낌새였다. 찬영은 슬쩍 길드 창을 열어 길드원 목록을 살폈다. 다른 길드도 아니고 레전드 길드원과 엮인 문제라 상의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현재 접속 중인 간부는 선빈뿐이었다.
캐시 아이템을 써서 이동한 건지 맵에 한 명이 금세 더 왔다. 마찬가지로 레전드 길드원이었다. 메가폰에서 언뜻 본 닉네임 같기도 했다.
[오토크리닉님의 단체 채팅 초대
수락 / 거절]
[모두] 오토크리닉: 단챗 받으세요
거절할 틈도 없이 계속해서 신청을 보내는 통에 아래쪽 시스템 알림 창이 눈 아프도록 깜박거렸다. 바로you고 오토크리닉이고 쫓아온 걸 보면 접속을 종료하거나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닐 것 같다. 결국 찬영은 수락 버튼을 눌렀다.
[앞으로맑음 님이 채팅에 참여하셨습니다.]
[오토크리닉: 스틸하고 사과도 안 하셨다길래 왔음]
오토크리닉의 채팅은 시작부터 아주 공격적이었다. 찬영이 항변했다.
[앞으로맑음: 스틸은 제가 당했는데요]
[오토크리닉: 제가 들은 거랑 말이 틀린데]
[오토크리닉: 아무튼 저는 저희 길드원 말을 믿을 수밖에 없네요]
[오토크리닉: 뭐 그쪽 길드랑 저희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오토크리닉: 그냥 사과하고 끝내시죠]
[앞으로맑음: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사과를 왜;;]
[앞으로맑음: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스틸은 제가 당했습니다]
[앞으로맑음: 저는 그 자리에 아무도 없어서 사냥 시작한 거고]
[앞으로맑음: 바로님 사냥 중에 어디 갔다오신 것 같던데요]
상대가 뉴비건 레전드 길드원이건 적어도 사실관계는 확실히 해야 했다. 여기서 사과하면 찬영이 잘못한 게 된다. 그럼 아군이 저쪽에 책잡힐 기회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이 커지든 작아지든, 길드원들에게는 그것만으로 민폐일 것이다.
[오토크리닉: 흠]
[오토크리닉: 지금 말씀하신 내용을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요?]
[앞으로맑음: 아뇨 그건 아니지만]
스크린 샷을 찍어 두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바로you가 온 이후였다. 사냥을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아 콤보 수치도 낮고, 어쩌면 그것도 스틸이라고 우길지도 모른다. 로그를 받을 수 있다면 확실한 증거 자료가 되겠지만 당장은 무리였다.
[오토크리닉: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오토크리닉: 아군 길마랑 얘기하겠습니다]
[앞으로맑음: ?]
[앞으로맑음: 길마가 부모도 아니고 그냥 저랑 얘기하시죠;]
[오토크리닉: 둘이 말이 틀린데 님이랑 얘기해봐야 의미없을 것 같은데요]
틀린 건 저쪽의 말이고. 같은 길드원 아니랄까 봐 맞춤법 틀리는 것도 닮았다. 일단 우기고 보는 것까지.
이쯤 되면 방법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를 은석이 대뜸 쪽지를 받게 하는 것보다야 이미 접속해 있는 길드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나아 보였다.
[길드] 앞으로맑음: 님들 죄송한데
[길드] 앞으로맑음: 저 레전드 길드원들한테 시비 걸림
[길드] 앞으로맑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길드] 비테마죽: ?
[길드] 갓말이: 레전드요?
[길드] 보틀: 뭔 일임
[길드] 앞으로맑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길드] 앞으로맑음: 분명히 맵에 아무도 없어서 사냥했는데
[길드] 앞으로맑음: 갑자기 누가 오더니 자기 자리라고 뭐라 해서
[길드] 앞으로맑음: 어디 갔다왔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무조건 자기자리라는 거임
[길드] 앞으로맑음: 뉴비라 잘 모르나 싶어서 그냥 사냥터 옮겼는데 내가 스틸했다고 따라옴;;
[길드] 앞으로맑음: 근데 그 사람이 레전드 길드원임
[길드] 비테마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비테마죽: 미1친 새낀가
[길드] 갓말이: 부캐 아니고 본캐 사냥하신 거죠? 그럼 찐 뉴비도 아닌데
[길드] 앞으로맑음: ㅇㅇ;;
[길드] 비테마죽: 레전드면 볼 것도 없음 무조건 그쪽 잘못임
[길드] 앞으로맑음: 문제는 한 명 더 오더니 둘이 말이 갈리고 있으니까 길마 오라고 함
[길드] 앞으로맑음: 나랑 얘기하자고 해도 막무가내임
[길드] 보틀: 기다려봐 내가 감
[길드] 앞으로맑음: 오 ㄱㅅ ㅠ
[길드] 앞으로맑음: 형 바로 초대해줄게
[길드] 앞으로맑음: 자꾸 초대해서 단챗 중임
[길드] 갓말이: ㄷㄷ 2:1 단챗
[길드] 비테마죽: 일찐 그 자체
부길드마스터인 선빈이 도와준다면 베스트였다. 찬영이 단체 채팅에 선빈을 초대했다.
[보틀 님이 채팅에 참여하셨습니다.]
[오토크리닉: ?]
[오토크리닉: 길마 오라니까 왜 저 분이 오심]
[보틀: 길마 접속 안 함]
[보틀: 그리고 길드원 문제 터져서 간부 찾을 땐 부마든 길마든 별 상관 없을 텐데 ㅎㅎ]
시작부터 기 싸움이다. 매번 혜지와 투닥거리는 모습만 보여 주던 선빈도 문제가 터지고 보니 누구보다 든든했다.
[오토크리닉: 뭐 그거야 됐고]
[오토크리닉: 그쪽 길마 부르시죠]
[오토크리닉: 그 전엔 협의할 생각 없습니다]
[보틀: 얘기는 대충 들었는데 ㄹㅇ 길마 타령하시네]
[보틀: 혹시 어둠의 사격 팬이심?]
[보틀: 이렇게라도 얘기해보고 싶다 뭐 그런...]
[오토크리닉: 뭔 소리세요;;]
[보틀: ㅋㅋ]
[보틀: 그럼 사격 보고 오라 마라 하기 전에 님네 길마부터 불러오세요]
[보틀: 딱 봐도 그쪽이 거짓말하는 것 같은데]
[보틀: 죄 없는 길드원 시비 걸려서 열받는 건 저희임]
[오토크리닉: 말이 좀 심하시네요]
[오토크리닉: 거짓말을 누가 하고 있는지 어떻게 판단하죠?]
[오토크리닉: 증거도 없다던데 길드원 말만 믿으시나]
[보틀: 증거 없이 길드원 말만 믿는 건 님도 마찬가지고요]
[보틀: 암튼 잘굿 데려오셈]
[오토크리닉: 저희 길마님이 이런 일로 왜 와요]
[보틀: ㅋㅋㅋ 그럼 사격은 이런 일로 와야 하는 사람임? 어이없네]
[보틀: 님]
[보틀: 님 솔직히 잘굿 불러올 자신 없죠?]
[보틀: 하나만 말씀 드림]
[보틀: 잘굿 저 있다 하면 절대 안올 걸요]
[보틀: 그때 저랑 다시 엮이면 뒤1진다고 했으니까]
[오토크리닉: ;;]
[보틀: 그리고 거기 바로you님]
[보틀: 제가 뭘 믿고 이렇게 막 나오나 싶으실 텐데]
[보틀: 거기 이름 전에 천사였어요]
[보틀: 고글에 천사 길드 박제 검색만 해도 다 나올 테니까 참고하세요]
[보틀: 님은 레전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신 것 같아서 말씀 드리는 거임]
선빈은 평소와는 달리 강경한 태도였다. 그래도 뉴비는 죄가 없다 여겼는지 바로you에게는 상대적으로 유하게 군다.
[바로you: 네 저 레벨만 높지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거 맞는데요]
[바로you: 근데 고인물들이 이렇게 몰려와서 사람 괴롭히시면 좋나요?]
[바로you: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오토크리닉님이나 잘굿님한테 말을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바로you도 레전드는 레전드인지 별 의미는 없어보였지만.
[보틀: 돌겠네]
찬영도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벽을 보고 대화해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정말로 은석이나 레전드의 길드마스터가 와야 해결될까. 그보다 이게 그렇게까지 갈 일인가? 사냥해야 할 시간은 시간대로 버린 데다 쌓인 감정 탓에 길드 간 싸움으로 번지기까지 할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어쨌든 시발점은 찬영이었다. 진작 길드 명부터 보고 튈걸. 뭐 하러 남아 있어서.
[길드] 사격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친구] 사격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그때 채팅창으로 은석이 게임에 접속했다는 알림이 보였다.
[길드] 보틀: 하 저 레인저 ㅈㄴ 꿀밤 마렵다
[길드] 갓말이: ㄹㅇ 이상한 애 걸리셨나보네
[길드] 갓말이: 오 형 하이여
[길드] 보틀: 또라이야 그냥
[길드] 보틀: 잘굿이 뉴비 방패 세우고 스파이 보낸 듯
[길드] 갓말이: 그 정도임? ㄷㄷ
[길드] 사격: 무슨 일이야
애초에 이 일을 은석까지 알게 되기를 원하진 않았다. 대놓고 거절하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드마스터만 찾는 모양새를 봤을 때 은석이 오게 되면 뭐라고 할지 그림이 대충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이 정도 선에서 정리되길 바랐다. 가뜩이나 저런 또라이를 상대하고 있는 선빈에게도 미안했고.
그렇지만 길드원들에게 알린 시점에서 무리였겠지. 한숨을 쉰 찬영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길드] 앞으로맑음: 잠시만
지난번 지하철에서 헤어진 이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모두 포함해 은석과 대화는 처음이었다. 찬영이 의도적으로 피하기도 했다. 책상 위 올려 둔 인형과 립밤을 볼 때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이 튀어 나갈지 몰라서.
[귓속말] 사격<< 그냥
[귓속말] 사격<< 바로you라는 사람이 내가 스틸했다고 오해했는데
[귓속말] 사격<< 그 지인도 같이 와서 나 보고 사과하라고 했어
[귓속말] 사격<< 보니까 레전드 길드라서 선빈이 형 불렀고
[귓속말] 사격<< 그게 다임
[귓속말] 사격>> 내가 얘기할게
[귓속말] 사격>> 단챗에 있으면 나 초대 좀
최대한 큰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려 애썼지만, 야속하게도 찬영의 노력은 빛을 발하진 못한 듯했다.
[귓속말] 사격<< 알았어 잠시만
[귓속말] 사격<< 형 근데
[귓속말] 사격<< 안 와도 돼 진짜로 ㅎㅎ
[귓속말] 사격>> ㅋㅋㅋ 괜찮아
[귓속말] 사격>> 일단 초대해줘
[귓속말] 사격<< 응 ㅠ
혹시나 싶어 한 번 더 말해 봤으나 마찬가지였다.
[길드] 사격: 나 지금 단챗 들어간다
[길드] 갓말이: ㄷ
[길드] 보틀: 그래 나야 뭐 상관은 없긴 한데
선빈의 채팅까지 본 찬영이 은석을 초대했다.
[사격 님이 채팅에 참여하셨습니다.]
[사격: 안녕하세요]
[오토크리닉: 드디어 오셨네]
[오토크리닉: 보틀님 말 때문에 절대 안 오실 줄 ㅎ]
[보틀: ㅋㅋ 안 온다 했던 건 님들 길마고요]
그토록 부르짖던 은석이 왔음에도 오토크리닉의 태도는 여전했다.
[오토크리닉: 아무튼 처음부터 말씀드렸다시피 바로you님이 앞으로맑음님에게 스틸 당하신 상황입니다]
[오토크리닉: 바로you님이 제 쪽에 보내주신 스크린샷 보니 콤보 천이 넘던데]
[오토크리닉: 저는 바로you님이 스틸을 당하신 게 맞다고 보고]
콤보가 천이 넘는다고?
찬물이 확 끼얹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저 사람 입장에선 길드원의 말을 믿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저를 믿고 와 준 선빈이나 은석이 있는데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앞으로맑음: 아까도 말했지만 스틸은 오히려 제가 당했습니다]
[앞으로맑음: 분명히 그 자리엔 몇 분 동안 아무도 없었고요]
[앞으로맑음: 콤보는 어떻게 된 건지 저도 모르겠지만]
[오토크리닉: 지금도 콤보 관련은 얼버무리시네요]
[오토크리닉: 맑음님이 바로you님께 사과하시든가]
[오토크리닉: 못하시겠다면 사격님이 추방해주시죠]
[오토크리닉: 아군이 평소에 스틸한 길드원 어떻게 다루시는지는 몰라도]
[오토크리닉: 저흰 길드 직위 강등. 경고. 대리사과 같은 어중간한 처리 절대 용납 못합니다]
[오토크리닉: 본인 직접 사과나 추방 처리해주세요]
[보틀: ㅋㅋ 말하는 꼬라지]
[보틀: 먼저 말 끊어놓고 얼버무리시네요 하기^^]
[보틀: 진심 벽하고 대화해도 님보다는 말 잘 통할 듯]
오토크리닉은 찬영의 말도 끊어 버리고 사과나 추방만을 몰아붙였다. 억울한 와중에 선빈이 비꼬는 말을 본 찬영의 기분이 좀 나아졌을 때였다.
[사격: 콤보가 천이든 이천이든 증거 안 되는 건 오토크리닉님도 알고 계실 텐데요]
[사격: 맵 이동하거나 참새 다녀와도 콤보 안 끊기게 할 수 있고]
첫인사 이후 쭉 지켜보고 있던 은석이 오토크리닉의 말을 반박했다. 그럴 방법이 있다고? 그럼 오토크리닉은 확실한 증거도 못 되는 걸 가지고 저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온 건가?
[사격: 애초에 맑음님이 비매너짓 하셨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사격: 양쪽에서 서로 스틸했다고 하는 상황에서 확실하지도 않은 증거로 무조건적인 사과나 길드 추방을 요청하시는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격: 그것도 다른 길드도 아니고 레전드에서요]
[오토크리닉: ?]
[오토크리닉: 설마 지금]
[오토크리닉: 저희가 아군에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사격: 예전에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토크리닉: ;;]
[오토크리닉: 그건 그때 일입니다]
[사격: 그때 일이라고 넘기기엔 저희도 당한 게 하도 많아서요]
[사격: 제 길드원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사격: 저도 이 일 관련해서 잘굿님과 얘기하고 싶은데]
[사격: 아직 저 차단해두셨을 것 같아서]
[사격: 차단 풀어달라고 대신 전달 좀 해주시죠]
여기서 은석이 역으로 잘굿의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정모 때 들은 것만 해도 그렇고, 쌍방 차단까지 했다면 말도 섞기 싫은 사이일 것 같은데.
[길드] 보틀: ?
[길드] 보틀: 잘굿이랑 얘기를 왜 함
[길드] 비테마죽: 님들끼리 대체 뭔 말이 오가고 있는 거임
당황스러운 건 선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바로you: 그]
[오토크리닉: 장담은 못 하는데]
[사격: 일단 전해주세요]
[오토크리닉: 네]
[오토크리닉: 전해는 놓겠습니다]
뭔가 말하려던 바로you가 오토크리닉에게 가로막혔다. 차단을 풀어 줄지 장담은 어렵다는 오토크리닉의 말에도 은석은 단호했다.
[사격 님이 채팅에서 퇴장하셨습니다.]
[보틀 님이 채팅에서 퇴장하셨습니다.]
[길드] 사격: 사과는 받아야지 너나 찬영이나
[길드] 사격: 이 일 말고 해야 할 얘기도 있고
[길드] 보틀: 굳이? 걔랑?
[길드] 사격: 끝나고 말해줄게
은석의 뜻은 잘 모르겠지만 어련히 알아서 할까. 찬영은 이미 은석과 선빈이 퇴장한 단체 채팅을 나왔다. 내팽개쳤던 사냥도 채널을 바꾸고 다시 시작했다.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열중하고 싶었다.
[귓속말] 사격>> 찬영아
얼마 되지 않아 은석의 귓속말이 보였다. 찬영이 얼른 대답했다.
[귓속말] 사격<< 응
[귓속말] 사격>> 레전드 길마랑 얘기 끝났고 해결됐어
[귓속말] 사격>> 둘 다 너한테 사과하러 갈 거야
과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야기가 잘된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찬영에게 중요한 건 사과 같은 게 아니었다.
[귓속말] 사격<< 미안|
머뭇거리다 엔터를 누른다.
[귓속말] 사격>> 뭐가?
[귓속말] 사격<< 트러블 만들어서
[귓속말] 사격>> 네가 왜 미안해
[귓속말] 사격>> 여기서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고
[귓속말] 사격>> 우리랑 사이 안 좋아서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시비 걸어온 건데
[귓속말] 사격<< 아
[귓속말] 사격>> 신경 쓸 필요 전혀 없어
[귓속말] 사격>> 오히려 내가 너한테 미안해하는 게 맞지
[귓속말] 사격<< ㅠ
[귓속말] 사격<< 나 아까 쫄았음
[귓속말] 사격>> 왜 ㅋㅋㅋ
[귓속말] 사격<< 싸움 커질까봐
[귓속말] 사격>> 싸움 나면 어때
[귓속말] 사격>> 그냥 싸우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
[귓속말] 사격<< 그래도...
[귓속말] 사격<< 나 때문에 싸우는 건 좀 그렇잖아 ㅎㅎㅠ
[귓속말] 사격>> 그쪽에서 너한테 그렇게 말하는데 당연히 싸워야지
안다. 찬영이 아니라 다른 길드원이었어도 은석이 똑같이 굴었을 거란 정도는. 그래도 그 말에 들뜨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귓속말] 사격<< 오토크리닉이 내 말 맞다는 증거 있냐 그러길래
[귓속말] 사격<< 괜히 말 섞었나 싶어가지고 당황함
[귓속말] 사격>> 그 사람도 길드에 자부심 커서
[귓속말] 사격>> 부마 달고부터는 말 좀 세게 하더라
[귓속말] 사격<< 원래 알던 사이였어?
[귓속말] 사격>> 예전에
[귓속말] 사격>> 지금은 아니야
천사 길드 시절에 알고 지냈나 보다. 그 사건이 터지면서 멀어졌고.
오토크리닉이 이상한 사람인 것과 별개로, 최강 길드가 어쩌고 하며 우르르 쏟아지던 그 날의 메가폰을 생각하면 앞으로 이런 유치한 시비가 몇 번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한 게 많다던 은석의 말이나 증명할 방법이 있냐던 오토크리닉의 말을 상기했다. 콤보 219가 찍힌 스크린 샷을 살핀 찬영이 물었다.
[귓속말] 사격<< 근데 스틸은 로그 받는 거밖에 답 없어?
[귓속말] 사격<< 스샷도 증명 안 되면
[귓속말] 사격>> 사냥 시작하기 전에 영상 찍어두면 좋긴 하지
[귓속말] 사격>> 아니면 윈도우 5분 전 녹화도 있어
[귓속말] 사격>> 로그 받으려면 좀 걸려서
[귓속말] 사격<< ㅇㅎ
[귓속말] 사격>> 그런 거 안 해도 돼 ㅋㅋ
[귓속말] 사격>> 오늘 같은 일 생기면 그냥 나한테 연락해
진짜 이 형은…. 얼굴을 감싼 찬영이 곧 고개를 내저었다.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귓속말] 사격<< 그건 오바지
[귓속말] 사격<< 일 안 생기게 하는 게 제일 좋으니까
[귓속말] 사격>> ㅎㅎ
[귓속말] 사격<< 아까 사과하러 온다는 사람은 오토크리닉이랑 바로you인가
[귓속말] 사격>> 응
[귓속말] 사격<< 안 올지도 모르겠는데
[귓속말] 사격>> 길마가 책임 지고 사과시키겠다고 하던데
사실 찬영은 오토크리닉과 바로you가 사과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오토크리닉이야 부마스터 직위까지 달았으니 표면적으로라도 잘굿의 말을 듣겠지만, 바로you는 길드를 가입한 지도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 데다 할 말도 많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둘은 정말로 사과하러 온 듯했다. 옆에서 알짱거리는가 싶더니 또다시 단체 채팅 초대를 보낸다. 이번에는 거절했다. 몇 번 반복하다 포기했는지 채팅창으로 전체 채팅이 보였다.
[모두] 오토크리닉: 스틸 건 관련 제가 했던 말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 앞으로맑음: 네
[모두] 오토크리닉: 저희끼리 다시 얘기하면서
[모두] 오토크리닉: 바로you님이 자리를 이탈하신 게 맞다는 점 확인했습니다
[모두] 오토크리닉: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맑음님께 실수한 점 인정하고
[모두] 오토크리닉: 그에 사과드립니다.
[모두] 오토크리닉: 다만 한 길드의 부마스터로서 제가 저희 길드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디 뭐라고 말하려나 싶어 지켜봤는데 기가 찬 소리였다. 그보다 괘씸하다. 이해해 달라고? 그건 잘굿에게 찡찡거릴 때나 쓸 말이고. 찬영이 주먹으로 턱을 괴었다.
[모두] 바로you: 맑음님
이제 바로you가 속을 뒤집어 놓을 차례인가.
[모두] 바로you: 참새 다녀오면 자리 없어지는 거 잘 모르다가
[모두] 바로you: 스틸하셨다고 하셔서 저도 모르게 거짓말했는데
[모두] 바로you: 정말 죄송합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생각보다 낫다. 그래도 오토크리닉의 말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모두] 앞으로맑음: 처음부터 계속 말씀 드린 내용인데 그게 참 늦게도 확인이 되네요
[모두] 앞으로맑음: 사격님께 제 추방까지 요청하셨으면서
[모두] 앞으로맑음: 이제 와서 길드원을 믿었을 뿐이니 이해해달라는 변명 붙이시는 이유도 모르겠고
[모두] 앞으로맑음: 일단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만
[모두] 앞으로맑음: 다시 엮이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모두] 오토크리닉: 네
[모두] 바로you: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끝까지 단답하는 오토크리닉의 캐릭터를 우클릭하자 여러 메뉴가 떴다. 1. 사용자 정보 2. 친구 추가하기 3. 차단하기 4…. 바로 차단하기를 누른다. 또치와양치, kin 이후로 세 번째였다. 바로you의 사과는 깔끔했으니 차단까지는 봐줄 생각이었다.
[길드] 앞으로맑음: 나 사과 받음
[길드] 갓말이: 진짜요?
[길드] 도텐: 어케 함 ㄷ
[길드] 앞으로맑음: 근데 오토크리닉 이 사람은 계속 변명하네
[길드] 앞으로맑음: 그냥 넘어가긴 하는데
[길드] 보틀: 걘 옛날부터 싸가지 없었어
[길드] 보틀: 웬만하면 상대 ㄴ
[길드] 앞으로맑음: 그래서 바로 차단함 ㅋㅋㅋ
[길드] 보틀: 굿
[길드] 보틀: 근데 잘굿이랑 대체 뭔 얘기를 했길래 개노답 형제 둘이서 사과하러 옴?
[길드] 사격: 아 그거
[길드] 사격: 다음 주부터 세에레 트라이 가자
[길드] 갓말이: 엥
[길드] 앞으로맑음: ㄷㄷ 세에레
[길드] 보틀: ? 이게 갑자기 뭔 소리죠
사과와 세에레 트라이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데. 정작 폭탄을 던진 당사자는 멀쩡하게 채팅을 이어 간다.
[길드] 사격: 멤버는 너 나 서리 빨강색 맛업는라면
[길드] 사격: 이렇게 다섯 명 생각 중이고
[길드] 갓말이: 드디어 도전하심?
[길드] 사격: ㅋㅋ 서리랑은 얘기 끝났어
[길드] 보틀: 아니 님 저랑은 얘기 하나도 안 되셨잖아요 ㅡㅡ
[길드] 보틀: 딜 1인분도 못하는데
[길드] 보틀: 격수 57층이 최소컷이라며
[길드] 사격: 안 가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왜 믿어
[길드] 사격: 55 56이면 충분함
56이건 57이건 간에 찬영에게는 아득히 높은 층수였다. 하지만 50층 중반부터는 한 층마다 두 배 가까이 스펙 차이가 난다고 들은 것 같으니, 선빈이 진작 포기할 법도 했다.
[길드] 보틀: 설마
[길드] 보틀: 저번에 대걸 방송 가서 시험해본다 한 게 딜 체크한 거임?
[길드] 사격: ㅇㅇ 4페가 좀 걸려서
[길드] 보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ㄴ
[길드] 보틀: 근데 어차피 임혜지도 안 된다 할 걸
[길드] 보틀: 이동은은 몰라도
[길드] 사격: 혜지는 더 널널해
[길드] 사격: 레인저는 +1, 2층이라서
[길드] 사격: 동은이는 내가 설득해볼게
[길드] 보틀: 오... 하나도 모르겠는데;
[길드] 보틀: 너한테 캐리 당할 각임
[길드] 사격: ㄴㄴ 캐리 아님
[길드] 사격: 그리고 레전드도 곧 트라이한대
[길드] 보틀: ?
[길드] 보틀: 누구누구
잘굿과 ‘이 일 말고 해야 할 얘기’란 세에레 트라이 관련이었던 모양이다. 레전드 언급이 나오자마자 선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잠시 후 물음표 살인마 같은 채팅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길드] 보틀: 잘굿이 멤버 말해줌?
[길드] 보틀: 잘굿 오토크리닉 고단한 셋은 고정일 거고
[길드] 보틀: 걔네 딜이 되나?
[길드] 보틀: 고단한 55 아님?
[길드] 보틀: 딜러 둘은 또 어디서 구했길래
[길드] 사격: 둘 다 다른 길드일 걸
[길드] 사격: 그 형도 방송 보고 트라이 확신 생긴 듯
[길드] 보틀: 야 임혜지한테 전화한다
[길드] 보틀: 오늘부터 ㄱㄱ
[길드] 사격: 그럴 줄 알았음 ㅋㅋ
[길드] 보틀: 레전드는 무조건 이겨야 함
혜지도 선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반응이었다. 선빈이 전화하겠다고 하더니 진짜로 한 건지, 라잇톡 알림 소리의 간격부터 매서웠다.
임혜지: 언제부터 가는데
임혜지: 오늘?
임혜지: 내일?
임혜지: @ㄱㅇㅅ 형 @ㄱㅇㅅ 형 @ㄱㅇㅅ 형 @ㄱㅇㅅ 형 @ㄱㅇㅅ 형 @ㄱㅇㅅ 형 @ㄱㅇㅅ 형 @ㄱㅇㅅ 형 @ㄱㅇㅅ 형
임혜지: 답 안 하고 어디 감
임혜지: ㅃㄹ
임혜지: ㅃㄹ
임혜지: ㅃㄹ
ㄱㅇㅅ 형: ;; 알림 보고 놀랐네
ㄱㅇㅅ 형: 왜 이렇게 급함 너나 정선빈이나
임혜지: ?
임혜지: 걔네도 트라이한다는데 어떻게 참고 기다림
임혜지: 여유부리다 늦는다
정선빈: ㄹㅇ
한 명도 아니고 둘 다 저렇게까지 반응하는 걸 보니 어쩌면 은석이 이걸 노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에레 트라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선빈이고 혜지고 스펙이 안 된다며 거절하는 모습만 봤던 것 같은데. 레전드라는 이름을 꺼내자마자 뒤집어져서 당장 오늘부터 하자고 할 정도니까.
정선빈: 야 너 근데 좀 친다?
정선빈: 거절할 수도 없게 만드네
ㄱㅇㅅ 형: 저쪽도 슬슬 트라이할 때 된 것 같아서 물어봤음 ㅎㅎ
ㄱㅇㅅ 형: 아무도 안한다길래
아무래도 그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서보은: 쟤네랑 퍼클 경쟁은 처음 아니신가?
ㄱㅇㅅ 형: 맞아
ㄱㅇㅅ 형: 하드 나메까지 같이 했으니까
정선빈: 오... 무조건 이겨야겠는데
ㄱㅇㅅ 형: 나도 질 생각 없음
최ㅇㄹ: 당연함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정찬영: 그때 누구누구 있었는데?
보은이 은석더러 서버 내 퍼스트 클리어로 이름이 몇 번 올랐었다고 했던 건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러나 나머지 멤버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천사 길드였을 당시에는 인원도 좀 더 많았을 텐데. 궁금해진 찬영이 물었다.
임혜지: 뭐 하드 나메?
정찬영: 엉
임혜지: 나랑 고은석이랑 서리랑
임혜지: 오토크리닉 잘굿
임혜지: 이렇게 깼을걸?
레비아는 여타 게임처럼 중복 닉네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찬영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방금 전까지 싸웠던 오토크리닉을 말하고 있는 게 맞을 것이다. 의외였다. 그래도 한때 트라이까지 같이 진행했으면 생각보다는 깊게 교류한 사이가 아닌가? 대화만 보면 서로 전혀 모르는 것처럼 대하던데. 물론 뒤늦게 은석이 예전에 알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선빈: 쟤네 그때 오토크리닉 때문에 개고생했잖아 ㅋㅋㅋㅋㅋㅋㅋ
의문이 생기자마자 선빈이 라톡을 보냈다.
정찬영: 왜?
임혜지: 걍 손이 ㅈㄴ 안 좋음
임혜지: 그니까 이동은 데려가자 했는데 잘굿 그 새끼가 그때도 반대해서
서보은: ㄷ
임혜지: 걔만 아니었으면 2주는 빨리 깼을 듯 진짜
박태경: 트라이만 갔다오면 길드 분위기 싸했던 거 아직도 기억 남
최ㅇㄹ: 근데 뭐... 오토크리닉이 워낙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한 것도 있음
박태경: ㄹㅇ 손은 둘째치고 인성이 문제임
정선빈: 몇 번 얘기해본 적이 없어서 말 얹긴 그렇긴 한데
정선빈: 걔는 채팅만 봐도 재수 없었어
정선빈: 대체 누가 추천해가지고
임혜지: 잘굿이잖아 ㅋㅋ
임혜지: ㅈㄴ 끼리끼리임
그 말을 들으니 선빈이 잘굿을 언급할 때마다 바로 커트부터 치던 모습이나 강압적으로 굴던 것도 이해가 됐다. 은석이 귓속말로 했던 말까지 생각하면 대충 예상 가는 그림이었다. 입맛에 맞게 구는 어린애에게 부마스터 직위 하나 쥐여 준 잘굿과 그 별것 아닌 게임 속 직위에 뭐라도 된 줄 알고 거들먹거리는 오토크리닉.
권나원: ㅎㅇ여
정선빈: ?
어딘가 익숙했지만 라잇톡에서는 처음 보는 이름이 등장했다. 아직 바뀌지 않은 공지에서 찾아보니 서리다. 세에레 트라이 얘기인 만큼 얼굴을 비춘 듯했다.
서보은: 쟤 왤케 오랜만인 것 같지
권나원: 일이 있었음
정선빈: 지랄하지 마 ㅡㅡ
정선빈: 귀찮아서 안 온 거면서
정선빈: 동명 형이랑은 맨날 연락하는 거 다 들었음
정선빈: 우리랑은 안 하고
정선빈: 개섭섭하다 진짜
ㄱㅇㅅ 형: 그래서 내가 단톡에서 얘기하자고 했어 ㅋㅋ
ㄱㅇㅅ 형: 찬영이도 처음 볼 거고
정선빈: 이래서 연고주의가 문제라니까
정선빈: 학연
정선빈: 혈연
정선빈: 이런 거 다 혼나야 함
학연, 혈연? 정말 혈연이라면 선빈이 저렇게 말할 리는 없고, 동명과 같은 학교를 나온 건가? 정모 때 언뜻 서리가 막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대충 계산해도 나이 차이가 꽤 난다.
김도텐: 오 왔어?
양반은 못 되는지 마침 나타난 동명도 인사를 건넸다.
권나원: 형 안녕하세요
정선빈: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는 거 봐 아주 그냥
권나원: ㅇ
정선빈: ㅈㄴ 모음도 없고 성의도 없으시네요
권나원: ♡☆♤@&♧ㅖ◇°○□●■○
정선빈: 어 그래
정선빈: 예쁘게 말해줘서 정말 고맙다^^
박태경: 이모티콘 돌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확실히 선빈을 대하는 태도와 동명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보이게 다르긴 했다. 이 정도면 학연을 넘어서 특별 취급이 좀 더 알맞다.
정찬영: 형 서리님이랑 같은 학교 나옴?
김도텐: ㅇ?
김도텐: 같은 대학 나오긴 했지
김도텐: 학과도 같음
정찬영: ㅁㅊ 세상 진짜 좁다
김도텐: 같이 다닌 건 반 년밖에 안 됨
정찬영: 그건 형 나이 때문에 예상했고 ㅎㅎ;;
정찬영: 사실 같이 안 다녔을 줄
김도텐: ㅋㅋ 뒤진다
단순히 같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같은 학과에 다닌 기간까지 일부 겹쳤다면 저러는 것도 이해가 갔다. 레비아 온라인이 요즘 유행하는 장르의 게임이 아닌 건 둘째치고, 심지어 가장 인구수가 적은 레전드 서버에서 실제 지인을 만났다?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오늘 하자느니 내일 하자느니 일정을 정하며 제법 순탄하게 흘러가던 세에레 트라이에 제동을 건 것은 예상 밖으로 동은이었다.
이동은: 저보단 다른 분 구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동은: 시간 맞추기도 어려울 것 같고
정선빈: 엥
정선빈: 요즘 바쁨?
임혜지: ㄴㄴ 쟤네 집 자체 셧다운 때문인 듯
정선빈: ㅇㅎ?
서보은: 그
서보은: 동은이네 부모님이 열두 시 되면 컴퓨터 잠기는 프로그램 같은 거 깔아놓으셨대요
정찬영: 헐
이동은: ㅠㅠ 마즘
이동은: 그리고 오토크리닉이 저보다 스펙 더 높기도 하고
정선빈: 그래봐야 스탯 5천 차이 아님?
정선빈: 뭐 5천 차이면 크긴 하지
임혜지: 일단 조용히 있어보셈
정선빈: ㅇㅋ;;
정선빈: 확실한 건 이동은이 오토크리닉보다 손 백 배는 좋음
임혜지: 그건 당연한거고
잘하는 딜러도 매한가지겠지만 트라이 파티에서 잘하는 서포터는 특히 귀했다. 일단 생존의 문제도 크고, 딜을 몰 때 서포터의 버프가 제대로 들어오느냐에 따라 클리어 타임 단축은 물론이고 클리어 유무까지 갈릴 수 있으니까. 레비아라고 별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길드원들이 동은을 설득하려 힘을 실었다.
이동은: 다른 사람이 더 잘할 수도 있고
이동은: 파티한 것도 옛날이니까
이동은: 오토크리닉도 그때랑은 다를지도 모름
이동은: 괜히 저 때문에 클리어 늦어질까봐...
임혜지: 옛날이라고 해봐야 이 년도 안 됨
임혜지: 그리고 끝물 보스면 몰라도 트라이면 차이 좀 많이 날 걸
임혜지: 타고난 손 문제라
서보은: 시너지는 저쪽이 더 좋은가?
정선빈: ㄱㅊ 깡딜로 찍어누르면 됨
정선빈: 난 고은석 권나원 임혜지 셋 믿고 간다
ㄱㅇㅅ 형: 너네 다 잘해서 누구 믿고 가고 할 필요 없다니까 ㅋㅋ
ㄱㅇㅅ 형: 그냥
ㄱㅇㅅ 형: 자신 없으면 너넬 믿는 나를 믿어
ㄱㅇㅅ 형: 충분함 진짜
김도텐: 오...
박태경: 명대사 on
권나원: 이건 좀
최ㅇㄹ: 믿습니다 사멘
ㄱㅇㅅ 형: ;;
ㄱㅇㅅ 형: 만약에 진짜로 안 하고 싶은 거면 나중에 개인톡으로 말해줘
ㄱㅇㅅ 형: 하고 싶은데 시간 때문에 피해 끼칠까봐 그런 거면 맞춰보자
다정한 메시지를 보자 처음 노말 나이트메어 트라이를 제안받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찬영이 동은처럼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못 하겠다고 했었다. 은석은 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대신 잘 말해 주겠다고 했고, 그게 아니라 단순히 안 해 봐서 걱정되는 거라면 한 번은 해 보자고 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겠냐며 연습을 같이해 주겠다고도 했다.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동은: 하기 싫은 건 절대 아니에요
정선빈: 그럼 됐지
임혜지: 어차피 이 겜 횟수 제한 걸려있는데 시간 최대한 맞춰줌 ㅇㅇ
이동은: 그럼 저도 피시방 가거나 해서 최대한 형누나들 시간에 맞춰 봄ㅠ
ㄱㅇㅅ 형: 굿
ㄱㅇㅅ 형: 내일부터 가자
ㄱㅇㅅ 형: 영상 보고 오고
ㄱㅇㅅ 형: 나도 도와줄 수 있는 분들 있는지 찾아볼게
당장 불금을 앞두고 급하게 잡은 일정이었지만 파티원 모두가 트라이에 진심이어서인지 합의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있던 약속도 전부 취소할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단톡은 다음 날이 되어서도 계속 시끄러웠고, 찬영은 업무 중에도 틈만 나면 메시지를 살폈다. 의논할 부분이 많은지 오 분만 안 봐도 톡이 몇십 개는 쌓여 있었다. 수많은 링크와 이미지들이 왔다 갔다 했다. 대부분은 온튜브와 아웃벤 출처였다.
어차피 금요일 오후여서 집중도 안 되고, 팀장도 진작 퇴근한 참이었다. 출장지에서 일을 보다 퇴근하겠다고 말한 게 다지만 두세 시쯤엔 이미 집으로 운전대를 돌렸을 거란 정도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다. 팀장이 없는 사이 뽕을 뽑으려는지 오 대리는 오십 분째 말없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아마 근처 카페에 앉아 온튜브나 보고 있을 것이다. 아직 짬이 덜 찬 찬영은 제 자리는 지켜 가며 딴짓을 해야 하는 거고.
임혜지: 그러고 보니 보코 따로 파야 하는 거 아님?
정선빈: 상관 있나
정선빈: 어차피 길드팟인데
임혜지: ㄴㄴ 고은석이 도와줄 사람 데려올 수도 있다면서
임혜지: 그럼 어차피 새로 파야함
정선빈: 아 그러네
정선빈: 그럼 ㄱ
정선빈: 저녁에 내가 파고 주소 보내줄게
이동은: 넵
권나원: ㅇㅋ여
내용을 보니 길드 보이스 코드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트라이를 진행하려는 것 같았다. 상황을 지켜볼 수 없게 되었으니 아쉽긴 했지만, 단순한 트라이도 아니고 서버 최초 클리어를 노리는 것이니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녁은 간만에 정시 퇴근을 했다. 퇴근길에 들여다본 길드 보이스 코드에는 매번 있던 멤버들이 없었다. 이미 트라이를 시작했으려나. 마음속으로 행운을 빌며 게임에 접속하려는데, 옆에 둔 핸드폰에서 라잇톡 알림이 울렸다. 은석이었다.
ㄱㅇㅅ 형: 우리 곧 출발할 것 같은데
ㄱㅇㅅ 형: 찬영이 너도 여기 올래?
여기라면 분명 분리해 놓은 보이스 코드를 말하는 것일 텐데. 좋긴 하지만…. 그런 곳이라면 보통 친분과 관계없이 딱 파티원들끼리만 가지 않나? 트라이 때 예민해지는 사람이 많기도 하고. 의아해진 찬영이 답장을 보냈다.
정찬영: 내가 가도 되나
정찬영: 방해되는 거 아냐?
ㄱㅇㅅ 형: 다 상관없다던데
ㄱㅇㅅ 형: 어차피 오늘은 우리밖에 없을 거라 괜찮아
ㄱㅇㅅ 형: 정 신경 쓰이면 중간에 마이크만 꺼도 되고
정찬영: 그럼 그래야 할 듯 ㅋㅋ
정찬영: 곧 갈게
은석이 보이스 코드 초대 링크를 보내 왔다. 찬영은 헤드셋을 끼고, 링크로 들어가 인사부터 했다. 대답하는 목소리들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찬영이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오. 정찬영 왔네. 화공 켜 줘?>
“그래 주면 고맙지.”
<맞는 것만 보여 주게?>
<응 너보단 덜 맞을 듯.>
선빈과 혜지가 투닥거리는 것도 여전했고. 출발 시간이 아직 많이 남은 건가? 은석은 곧이라고 했는데.
“출발 시간 언제야?”
<우리 여덟 시. 일곱 시 오십 분부터 슬슬 준비할 듯?>
오후 여덟 시? 좀 신기한 시간이었다. 퍼스트 클리어 경쟁이 있는 MMORPG라면 보통 레이드 업데이트 첫날부터 어떻게든 빨리 접속하려고 안달이다. 대학생들의 자체 휴강이야 예사고 직장인들은 모자란 연차까지 끌어다 쓰기도 했다. 밥도 잠도 줄이면서 남들보다 몇 분이라도 빠르게 깨려고 애쓰는 것만 봐 왔는데. 레비아는 이것도 다른 분위기인가? 무한 리트가 안 돼서?
찬영은 슬쩍 PC 라잇톡 창을 열고, 은석에게 물었다.
정찬영: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ㄱㅇㅅ 형: 응
바로 답장이 온다.
정찬영: 시간 여덟 시로 정한 이유가 있어?
정찬영: 퍼클 노리는 거면 좀 애매하지 않나 싶은데
정찬영: 레비아는 다른 게임이랑 다른가 궁금해서
ㄱㅇㅅ 형: 보통은 11시 12시 연속으로 잡고 하긴 해
ㄱㅇㅅ 형: 스케줄 맞추는 게 힘들기도 하고 세에레도 1일 1회 입장이라서
ㄱㅇㅅ 형: 근데 우린 동은이가 자정 이후로 시간이 안 돼
정찬영: ㅇㅎ...
그 자체 셧다운 문제 때문인 모양이었다.
ㄱㅇㅅ 형: 얘 연습 모드도 없어 ㅋㅋ 글로리도 그래서 두 달 넘게 걸린 거야
ㄱㅇㅅ 형: 한 명 튕기기만 해도 그날 트라이는 망하는 거라
정찬영: 헐 ㅁㅊ;
세에레에 연습 모드가 없다는 건 처음 알았다. 1일 1회 입장만 해도 숙련도가 낮은 보스라면 귀찮아지는 경우가 많은데, 연습 모드까지 없다면 매 판을 실전같이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모르긴 몰라도 맨 처음 헤딩했던 파티는 엄청나게 고생했을 것 같았다.
ㄱㅇㅅ 형: 그래서 차라리 다 되는 시간 중에 제일 이르게 잡았어
ㄱㅇㅅ 형: 어차피 트팟 레전드랑 우리밖에 없고
ㄱㅇㅅ 형: 저쪽 트라이 시간도 넉넉하진 않을 거야
ㄱㅇㅅ 형: 지금은
요약하면 트라이 파티가 둘뿐인 시골 서버만이 가능한 스케줄이란 얘기다. 사이가 나쁜 걸 떠나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선빈이 말한 일곱 시 오십 분을 기점으로 다들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이스 코드 채팅 채널로 버프와 도핑 종류가 정리된 이미지도 올라왔다. 각종 비약, 물약, 음식, 버프 스킬, 뿌리기 버프…. 보는 것만으로 질릴 정도로 많다. 방송에 나오는 네 줄짜리 도핑들은 역시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화면으로 선빈이 비약과 물약을 구매하는 모습을 본 찬영이 경악했다. 각각 보스 공격 시 데미지와 방어력 관통을 올려 주는 빛나는 영웅의 비약과 빛나는 집중의 비약의 시세가 개당 칠백만 골드나 했기 때문이었다.
“가격 왜 저렇게 비싸?”
<뭐. 내가 방금 산 거?>
“어.”
<이름에 빛나는 붙어 있으면 두 개까지 중첩해서 먹을 수 있어서 그래. 그래서 아무것도 안 붙은 것보다 비싸. 제작도 안 될걸?>
<그래도 원래 이 정도로 비싸진 않았어요. 저번 주만 해도 삼사백만 골 했던 것 같은데.>
<시세 내역 보니까 잘굿 쪽에서 사재기했을지도?>
<하여튼 걔네는 이런 것도 도움이 안 돼요.>
<뭐 언제는 도움 됐나.>
빛나는 영웅의 비약이나 빛나는 집중의 비약에 비하면 덜했지만, 다음으로 구매한 고농축 힘의 물약도 개당 삼백만 골드로 절대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부대 비용까지 따져 보면 한 번 트라이 할 때마다 최소 이천만 골드 이상은 써야 하는 셈이었다. 최종 보스를 갈 만큼의 아이템을 둘렀으면 그러려니 넘길 만한 가격인가. 어쨌든 찬영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길드] 보틀: 마죽님 계신가요
[길드] 비테마죽: 넹
[길드] 보틀: 혹시 고양 몇 분이세요?
[길드] 비테마죽: 12분이요
[길드] 비테마죽: 계신 곳으로 갈게요
[길드] 보틀: 오 저희 버프 좀 주실 수 있
[길드] 보틀: 역시 찰떡같이 알아들어주시네
[길드] 비테마죽: ㅋㅋ 30분 전부터 대기 타고 있었는데 안 불러주시면 섭섭할 뻔
[길드] 보틀: ㅋㅋㅋㅋ
이제 파티 버프를 준비하려는 모양이다. 비스트테이머의 스킬인 고양은 파티 전체의 치명타 데미지를 올려 주었다. 딜 상승률이 가장 큰 버프 중 하나라 육성 과정이든 주요 콘텐츠든 많이 쓰이는 스킬이었다. 고양 하나 때문에 비스트테이머를 프리스트와 엮어 도구즈라고 낮잡아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풀이었던 파티에서 동은이 탈퇴하고, 파티장인 은석이 비테마죽을 파티에 초대했다.
<다 준비됐나?>
<네.>
<혹시 뿌리기 버프 뿌려 줄 수 있는 사람?>
<나 있어. 내가 뿌릴게.>
은석의 대답을 듣고 선빈이 인벤토리 창을 켰다. 방금 전 경매장에서 산 비약이나 물약, 음식 같은 것들이 구석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도핑 시작한다?>
<오키.>
[사격 님의 메시지: ㅇ]
작은 분홍색 꽃이 화면 전체에서 하늘거리는 모습과 함께 파티원들이 도핑을 시작했다. 길드 스킬, 빛나는 영웅의 비약, 빛나는 집중의 비약, 고농축 힘의 물약, 딸기 케이크, 버프 스킬…. 대걸의 방송에서 본 것과 비슷한 버프 길이였다. 비테마죽이 반복해 사용하고 있는지 고양 버프 표시도 맨 아래쪽에서 계속 반짝거렸다.
[길드] 비테마죽: 부담 드리려는 건 아닌데
[길드] 비테마죽: 저 지금 재비 버리고 왔음
[길드] 보틀: ㄷㄷㄷㄷㄷ
[길드] 보틀: 반드시 깨달라는 압박
[길드] 비테마죽: ㅋㅋ ㅎㅇㅌ
[길드] 보틀: ㄱㅅㄱㅅ
[길드] 빨강색: 감사여
[길드] 사격: 감사합니다
<녹화 다 떠야 되는 거 알지? 분석 켜고.>
<이미 ABS 돌아가는 중이요.>
<난 그냥 양캠 켬.>
<첫 트니까 가볍게 가자. 천마 넘어가는지 딜 체크가 목적이니까.>
<당연히 넘어가지지.>
<당연히? 플래그 섰고요.>
<어허.>
<들어간다. 첫 패턴 보고 바로 속박 걸게.>
소란 끝에 파티원들이 입장하자마자 찬영은 보이스 코드 마이크를 껐다. 은석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일반 트라이도 아니고, 패턴 브리핑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파티원이 아닌 사람의 마이크는 어떻게 해도 방해일 것 같았다.
처음으로 보이는 건 그동안 일러스트로 숱하게 보아 온 세에레가 아니라 웬 날개 달린 말이었다. 뒤쪽 배경으로는 왠지 맞으면 안 될 것 같은 푸른 구체와 빨간 구체가 둥둥 떠다녔다. 꽤 촘촘한 간격이었다.
그리고 선빈의 화면은 입장과 동시에 멈췄다.
<아, 입장렉 진짜. 레비아 서버 관리 안 하냐? 시작부터 구체 다 맞은 것 같은데.>
<렉 많이 심함?>
<지금도 내 화면 멈췄어.>
<그럼 속박은 보고 쓰자.>
보이스 코드 서버의 문제인 줄 알았더니 실제로 화면이 멈췄나 보다.
<바로 돌진. 거리 유지해.>
<저 움직일 수가 없어요, 선생님. 화면이 멈췄어요.>
화면이 다시 정상적으로 보였을 때는 오른쪽에 있던 게이지의 삼 분의 일이 이미 차올라 있었다. 간헐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면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차는 종류는 아닌 것 같고, 보스의 패턴에 맞거나 하면 차는 것 같았다.
선빈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보스가 목전으로 다가왔다. 말이라 그런지 모션이 인간형 보스보다도 빠른 느낌이었다. 그대로 입에 물린 캐릭터의 위로 틱 데미지가 뜬다. 4514, 4514, 4514…. 틱 데미지라지만 절대 작은 숫자는 아니었다. 뒤로 휙 넘어간 보틀은 그대로 사망했다.
딜다운 딜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데스 카운트부터 날린 선빈이 기가 찼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 바로 뒤졌는데?>
<힐 드렸는데. 이미 물렸으면 안 들어가나 봐요.>
<컴퓨터 좀 바꿔.>
<이거 반년 전에 이백 주고 맞췄거든?>
선빈이 억울한 듯 말했지만, 파티원들 모두가 대답이 없었다.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게이지 다 찬 것 같은데?>
<어. 곧 포효 오겠다.>
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보스의 눈이 빨갛게 빛났다. 화면 오른쪽 하단에 있던 스킬들이 순식간에 회색이 됐다. 모든 스킬이 봉인 상태라는 뜻이었다.
<가호 미리 썼어요.>
<나이스. 타이밍 좋고.>
가호는 프리스트의 각성 스킬 중 하나인 빛의 가호의 줄임말이었다. 몇 초간 파티원들의 피격 데미지를 감소시켜 주는 데다 약간의 쉴드까지 생성해 줘 즉사기가 아닌 패턴을 대응하는 데는 아주 유용했다.
<대체 누가 이렇게 맞았대?>
<저 범인 알아요.>
<우리 모두가 알걸?>
파티원이 아닌 찬영도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내 탓이 아니지. 서버 탓이지.>
<너 방금 좀 도부 같았다?>
<뭐 도부? 그냥 내 탓인 걸로 해.>
<잘 생각했어.>
항변하던 선빈은 도부가 언급되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당연하다. 트롤은 기본이고 예의라고는 밥 말아 먹은 남탓충이 되느니 그냥 트롤 하나만 되는 게 나으니까.
<진짜 걷는 거 말고 아무것도 안 되네.>
<아니, 점프는 좀 풀어 줘야 하는 거 아님? 그것도 스킬이라고 안 되는 거 봐.>
말이 안 되긴 했다. 미약한 쉴드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지. 움직임이 자유로울 때도 다 피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이동 판정이 붙어 있는 스킬은 물론이고 점프까지 안 되면 어떻게 피하라고. 느릿한 걸음걸이는 가뜩이나 가로로 긴 화면에서 무빙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 미친. 혼란 같이 옴. 뒤졌다.>
<이거 정화 물약도 안 먹히네요. 의지는 안 된다길래 써 봤는데.>
<포효는 상태 이상 판정 안 된다더라. 게이지 연장선으로 쳐서 그런가 봐. 처음부터 게이지 안 차게 하는 것만 방법이래.>
<저기. 저 벌써 2데카 날아갔거든요? 1페이즈에서 1데카도 쓰면 안 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데카만 문제가 아니고 딜이 하나도 안 밀려요, 지금.>
나원이 지적했다.
<극딜 안 쓴 거 감안해도?>
<감안해도 그냥 느려요.>
<그리고 곧 폭주 아닌가?>
<58분 기준이라서 삼십 초 뒤야.>
찬영의 시선이 화면 상단에 박힌 시간으로 향했다. 58분 29초.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트라이가 잘되고 있진 않나 보다. 딜, 데스 카운트 관리 둘 다 안 된다는 것 같으니. 게다가 삼십 초 뒤에는 뭔가 중요한 패턴도 오는 모양이었다.
잠깐 동안 모두가 침묵했다. 찬영은 마이크를 끄길 잘했다 생각했다.
은석이 말했다.
<일단 속박 걸고 극딜 한 번 가자. 다음 트라이 때 어떻게 할지는 이번에 얼마나 까는지 보고 정해야 할 것 같은데.>
<나 풀극딜 아니긴 한데 오키.>
<긴 버프 쓴다.>
<바로 심판자 켤게요.>
<속박 썼어.>
파티원들이 모이고, 가운데로 빛나는 진이 생겼다. 은석의 속박 콜이 떨어지자 멈춰 선 보스 위로 수십 개의 스킬이 보였다. 지지부진하게 움직이던 보스의 HP가 한순간에 스무 줄 가까이 줄어들었다.
<딜 생각보다 안 들어가는데.>
<그러게요.>
이전까지 깠던 HP 전체보다 많은 수치였으나 극딜임을 따졌을 때 높은 화력은 아닌지,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일단 몸쪽으로 붙어. 방금 뿔 빛났어.>
<갑니다.>
파티원들이 보스의 몸쪽으로 붙자마자 그쪽을 제외한 모든 바닥이 폭발했다. 맞았다간 즉사급 데미지가 들어올 것 같은 어마어마한 생김새였다. 곧 숨 돌릴 틈도 없이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계속되는 공격에 분노한 천마가 폭주해 날뜁니다.]
<폭주 시작했어.>
<이거 보면 못 깬다고 하지 않았나?>
<맞을걸요. 폭주 다룬 영상이 몇 개 없어서. 근데 일단 무조건 스킵해야 한다고 했어요.>
폭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보스의 움직임이 직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심지어 들어오는 피격 데미지도 다르다. 당연히 게이지가 차는 속도도 빨라진 탓에 이리저리 움직여 가며 버틴다 해도 그 끝에는 포효가 기다리고 있었다.
척 봐도 컨트롤로 극복할 수 있는 영역 같은 게 아니었다. 아까처럼 점프까지 봉인되고 나면 뻔히 보이는 패턴에도 데스 카운트가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처음부터 데스 카운트를 낭비한 선빈을 시작으로 혜지, 동은이 차례로 아웃되었다.
이제 나원의 남은 데스 카운트는 하나로 아슬아슬했고, 그보단 사정이 나았지만 은석도 두 개가 다였다.
게다가 착각이 아니라면 방금 보스의 HP가 차오른 듯했는데.
<방금 봤음? 체력 찬 거?>
<어, 봄.>
<미친 보스네. 이걸 어떻게 깸? 계속 이만큼 회복된다는 거 아냐.>
<일단 이번 판 완전 조지긴 한 듯요.>
<나갈까요?>
나원이 물었다. 이미 딜 로스는 딜 로스대로 다 난 와중에 HP 회복량이 생각보다 훨씬 많아 지속해 봐야 시간 낭비라는 판단을 내린 듯했다. 게다가 혜지나 동은의 말을 들어보면 폭주 자체를 보지 않아야 클리어가 가능한 것 같은데, 그럼 연습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나가자.>
대답을 듣자마자 나원이 패턴에 캐릭터를 갖다 박았다.
마지막으로 나온 은석을 포함해, 퇴장 맵에 다섯 개의 캐릭터가 나란히 섰다.
<렉 이슈 죄송요.>
선빈이 안 하던 존댓말까지 하며 사과했다. 포효도 그렇고 극딜 타임이 꼬인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에이, 서버 탓인데 죄송 안 하셔도 돼요.>
<근데 폭주 진짜 오반데. 이 정도면 스펙 컷 두고 막아 둔 거 아님?>
<스펙 안 되면 못 깨게 한 거 맞을걸. 전에 디렉터 인터뷰할 때 그런 식으로 말하던데.>
보이스 코드는 전반적으로 축 처져 있었다. 아슬아슬한 것도 아니고 체력이 너무 많이 남은 상태로 끝나 버려서 그렇겠지만, 찬영은 선빈의 입장 렉만 아니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뭣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은석이 딜이 모자라지 않다고 했었는데.
은석이 형은 어땠어요? 마침 동은이 물었다. 이 중에서 유일한 클리어 경험자인 만큼 의견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일단 폭주는 다른 파티처럼 안 보는 게 맞는 것 같고.>
<네.>
<속박은 무조건 들어가자마자 쓰자. 생각보다 딜 넣을 시간이 없어서 디버프 겹치면 방금처럼 될 듯.>
<저도 그게 맞을 것 같아요. 나중에 쓰면 어떻게 굴려도 버프 노는 시간 생기는 것도 있고.>
<구체 잘 피해 주세요. 극딜 때 딜 생각만큼 안 들어간 것도 공격력 감소 때문인 것 같아서.>
<그건 나중에 영상 보면서 따로 얘기해야 할 것 같아. 게이지도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찼어.>
<첫 포효 때요?>
<정선빈 렉 감안해도 빠른 거 보니까 다들 많이 맞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뒤에도 그렇고.>
<그러게요. 보스 패턴 생각보다 엄청 빠르던데…. 상태 이상도 자주 와서 의지도 아껴야 할 듯요. 힐이나 가호 타이밍도 아직 잘 모르겠고.>
<내가 다음에 직자님한테 도와주실 수 있는지 물어볼게. 나도 프리스트는 잘 모르겠어서.>
<그럼 완전 좋죠.>
간단한 피드백이 오가는 도중, 선빈은 첫 사과 이후로 아무런 말도 없었다. 혹시 현타라도 왔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혜지야.>
난데없이 혜지를 부른다.
<왜.>
<너 주력기 한 줄 딜 대충 얼마 나와?>
<한 2, 30억쯤?>
<내가 아까 말은 안 했는데 나 완전 풀극딜이었거든? 구체 디버프도 없었단 말이야.>
<어.>
<근데 딜이 약해.>
<레벨 때문일걸. 나도 그래. 얘 레벨 200이잖아.>
세에레의 입장 레벨은 190이었던 것 같은데, 적정 레벨은 만렙인 200인가 보다. 선빈의 레벨은 아직 196이었다. 레벨 뻥이야 원래 못 받는 보스라 쳐도 데미지 패널티라도 먹지 않으려면 만렙을 찍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근데 레벨 올리려면 오래 걸리잖아. 그 전에 딜 올리는 게 맞는 것 같은데. 템을 바꿔야 하나?>
<뭘 템을 바꿔요.>
<솔직히 나도 고민 중이긴 함.>
<누난 또 왜요.>
<바꾸시려고 해도 매물이 없을걸요.>
<그걸 생각 못 했네. 여기 언제 탈출 가능?>
<응 평생 못 나가죠?>
<걍 너네 중에 누구 접어라. 그 사람 템 사게.>
<너부터 접는 건 어떰?>
<그냥 잘굿 보고 접으라고 해요. 템은 좋잖음.>
<지금 템 바꾸는 건 오바야.>
자꾸 아이템을 바꿔야겠다는 선빈과 혜지가 답답했는지 은석이 등판했다.
<트라이 오래 했는데 안 깨졌을 때 바꿔도 안 늦어. 너네 스펙에서 올리려면 최소 백만 원인데.>
<필요하면 써야지.>
무리할 필요 없다는 설득에도 선빈의 생각은 확고했다. 선빈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MMORPG는 트라이 단계에서 스펙업 욕구가 가장 크다고들 하니까.
<너 말대로 숙련도 문제 맞거든? 근데 스펙업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아니면 우리 안 쓴 버프 없어요?>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은데.>
<그나마 거품 정도?>
거품? 그런 게 있었나?
<그거 엄청 비싸잖아요. 한 개 5억 골 하지 않았나?>
<미친. 5억? 6만 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파는 사람이 없을걸. 어차피 방송 콘텐츠용이야.>
뭔가 싶어 검색해 보니 십 주년 기념으로 잠깐 팔았던 뿌리기라고 했다. 블로그에는 유일하게 다른 뿌리기와 중복 사용이 가능한데, 지금은 도시 서버가 아니라면 매물이 없다고 봐야 한다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역시 템을 바꾸는 게 맞다느니, 아직은 너무 이르다느니 끝이 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동은의 말이었다.
<아니면 뭐, 결혼밖에 없죠. 반지 끼면 데미지 올려 주잖아요.>
<결혼?>
당사자는 별생각 없이 던진 것 같은데, 혜지가 그 말에 반색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결혼도 있네.>
<진짜 하시려고요?>
<못 할 건 없지 않나? 말 나온 김에 정선빈 결혼함?>
<설마 나요?>
<너도 딜 딸린다면서. 안 했으면 하자.>
갑작스러운 청혼에 선빈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넌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너랑 나랑?>
<왜 이렇게 오바함? 싫으면 말고.>
<할 수야 있죠. 실제로 결혼하자는 것도 아닌데.>
<헛소리하지 마라, 진짜.>
혜지나 동은의 말대로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더 망설였다간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선빈이 한숨을 쉬었다.
<해, 그래. 하면 될 거 아냐.>
역시나. 선빈이 준비됐는지 여부를 떠나 혜지가 말을 꺼낸 이상 결국 하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다. 둘 다 딜을 올리겠다는 공통의 목표도 있었으니.
<대충 결혼하는데 오실 분?>
이렇게까지 빠르게 진행될 줄은 몰랐지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결혼을 확정하고 다 같이 건너간 길드 보이스 코드에는 동명과 보은, 비테마죽 셋만이 모여 있었다. 비테마죽은 마이크를 끈 상태였는데, 계속 보이스코드 채팅으로 말하고 있던 듯했다.
<뭐임? 갑자기 웬 결혼.>
아군 #채팅
비테마죽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로...]
난데없는 소식을 접한 셋은 모두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었다. 찬영도 처음부터 상황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똑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러게요.>
선빈이 제 일이 아닌 것처럼 맥없이 대답했다.
<누가 결혼하는데요?>
<나랑 빨강색이요.>
아군 #채팅
비테마죽 [ㄷ;]
아군 #채팅
비테마죽 [준비되지 않은 저희 앞에 성큼 다가온 두 분의 결혼]
아군 #채팅
비테마죽 [예상은 했는데 응원합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진짜.>
표면적으로는 응원이지만 놀리려는 의도가 팍팍 담겨 있는 채팅에 선빈이 질색했다. 선빈이 질색하든 말든 알 바 아닌 길드원들은 그저 재밌어할 뿐이었다. 보은이 물었다.
<세에레 가신 거 아니었어요?>
<세에레는 무슨. 걔 얼굴도 못 보고 쫓겨났어.>
<근데 그게 왜 두 분 결혼의 이유가 됨?>
<너네 설마 반지 때문이냐?>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동명의 눈치가 더 빨랐다. 말하고 나서도 어이가 없었는지 말투에 웃음이 섞여 있다.
<미친놈들 아냐. 이게 이렇게 되네.>
아군 #채팅
비테마죽 [스펙 올리는 데 결혼이 싸고 좋긴 하다던데 ㅋㅋㅋㅋㅋ]
아군 #채팅
비테마죽 [반지 공격력 몇 퍼였죠]
오늘 처음으로 동은에게 ‘결혼하면 데미지를 올릴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게 단데, 정확히는 공격력을 올려 주는 모양이었다. 비테마죽의 채팅을 보면 유저들 사이에서는 이미 스펙업 방법으로 유명한 것 같았다. 사실 이전에는 레비아에서 결혼할 일은 죽어도 없다고 생각해 찾아본 적도 없다.
그제야 찬영은 캐시샵에 들어가 웨딩 카테고리를 살폈다. 결혼식을 열 수 있는 프리미엄 웨딩 티켓이 만 원, 꽃과 한 쌍의 반지가 포함된 프러포즈 패키지가 삼만 오천 원이다. 현질로 유명한 게임답게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는 또 별도였다. 이름도 거창하게 각각 ‘블랙 웨딩 패키지(남)’, ‘퓨어 화이트 웨딩 패키지(여)’라고 붙어 있다. 고작해야 게임에서 결혼하는 것뿐인데, 옷까지 다 사면 한 번에 팔만 오천 원이나 들었다.
인게임에서도 돈이 없으면 결혼을 못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씁쓸해지려 할 때쯤, 프러포즈 패키지 위로 마우스 커서를 올리자 꽃과 반지의 효과가 보였다.
프러포즈용 장미 꽃다발
캐시 소비 아이템
평생 함께하고 싶은 상대에게 바치는 선물. 프러포즈 성공 시 일정 시간 동안 사용 캐릭터 및 그 대상 캐릭터의 물리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을 50 증가시켜 준다.
언약의 증표
캐시 장비 아이템
별과 다이아몬드를 가공해 만든 반지. 변형되거나 파괴되지 않아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 착용자의 물리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 1.5% 증가, 배우자가 같은 파티 내 있을 경우 2% 적용.
삼만오천 원짜리 치고는 말도 안 되는 혜자 효과였다. 심지어 반지는 캐시 장비 아이템으로, 현재 끼고 있는 장신구를 대체해야 하는 리스크조차 없었다.
“방금 캐시샵에서 반지 봤는데 가성비 장난 아니네요.”
찬영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반지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 많아. 공격력 2퍼센트 상시 적용이니까.>
은석이 설명했다. 당연했다. 오히려 선빈이나 혜지가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게 이상한 수준이었다. 겨우 딜 몇 프로 올리겠다고 몇십 몇백도 우습게 쓰는 게임이다. 세에레 트라이 이전에 다른 보스들도 같이 또 따로 다녔을 텐데. 보스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공격력 버프는 한계의 탑 같은 콘텐츠에서도 유의미했다.
이쯤 되자 궁금해졌다. 은석도 게임 내에서 결혼했을까?
<임혜지 어딨음?>
<나 웨딩 홀에 있는데?>
<기다려 봐. 티켓이랑 반지 샀으니까 내가 프러포즈함.>
아군 #채팅
비테마죽 [“내가 프러포즈함”]
아군 #채팅
비테마죽 [오 졌 다...]
<되게 담백하게 말하셨는데 왜 이렇게 징그러운 것 같지.>
<뭐 어쩌라는 거지? 언제는 실제 결혼도 아닌데 오바하지 말라더니.>
<방금은 나도 좀 웃기긴 했어.>
<형도 자꾸 그럴래?>
마음도 없는 사람끼리 엮는 건 실례라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둘은 왠지 붙여 놓는 것만으로도 웃겼다. 혜지는 반응도 없는데 선빈만 혼자 짜증 내는 것도 길드원들이 놀리는 이유에 한몫하지 않을까 싶었다.
[보틀 - 웨딩 홀(채널 17)]
길드 창을 켜 선빈의 위치를 본 찬영이 ‘따라가기’를 클릭했다. 처음 온 웨딩 홀 맵은 많이 들어본 클래식을 편곡한 BGM이 흘렀다.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실제 결혼식에서도 쓰이는 결혼행진곡 멜로디다.
부마스터 두 명이 결혼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려는 길드원은 찬영만이 아니었는지, 웨딩 홀에는 이미 신랑 신부를 제외하고도 보이스 코드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와 있었다. 심지어 이런 일에 관심이라곤 없을 것 같은 나원도 있었다.
<아 언제 함. 빠른 진행 좀요.>
<아니, 잠깐만. 하객 제한 있는데? 선착 다섯 분 모십니다.>
<엥, 다섯 명밖에 안 돼요?>
아군 #채팅
비테마죽 [알아서 나가주시죠]
<가위바위보로 결정?>
<뭔 또 가위바위보야. 난 굳이 안 들어가도 될 듯.>
<저도 그럼 빠질게요.>
<오키. 시작합니다.>
동명이 빠지자 나원이 기다렸다는 듯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냥 동명을 따라온 건가 보다.
[시스템] 보틀 님과 빨강색 님의 결혼식이 시작됩니다.
하객 다섯 명이 결정되자마자 진행했는지 바로 둘의 결혼식이 공표되었다. 무려 서버 전체 공지였다. 이 정도로 어그로를 끌어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메가폰] 치킨왕: 오...
[메가폰] 사격: [아군] 길드에서 두 분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메가폰] 쓰로우: ㄴㅇㄱ 상상도 못한 결혼
시골 서버 내 유명 인사인 둘의 결합에 은석의 메가폰까지 더해져 웨딩 홀에도 조금씩 사람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채널까지 어떻게 알고 들어왔는지는 몰랐다. 채널을 다 돌아봤는지, 아니면 혜지나 선빈의 계정과 친구라서 위치를 알 수 있었던 건지.
<뭔 시골 동네 잔치 같네요.>
아군 #채팅
비테마죽 [소라도 한 마리 잡죠]
<아니. 그니까 넌 뭐 메가폰까지 썼냐고.>
[메가폰] 보틀: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은석에게 불평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선빈의 메가폰이 올라왔다. 관종임? 혜지의 비난에는 입을 꾹 다문다.
[메가폰] 두번다시안함: 누가 하자고 하신 거임? 개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가폰] 두번다시안함: 암튼 ㅊㅋ여
[보틀 님과 빨강색 님의 결혼식에 참가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친구 채팅창인지 메가폰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운 내용들을 보며 찬영이 수락을 눌렀다. 찬영의 캐릭터가 자동으로 하객을 위해 마련된 하얀 의자에 앉았다.
처음 본 레비아 결혼식은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꽃과 보석이 장식된 맵은 에이나인보다 조금 덜 화려했고, 예식의 순서는 조금 더 복잡했다. 화촉 점화나 축가가 없다는 점, 순서가 조금 뒤바뀌었다는 점만 빼면 실제 결혼식과 일부러 비슷하게 맞춘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신랑, 신부의 혼인 서약이 있겠습니다.]
이제 주례 NPC가 말풍선으로 식의 마지막 순서임을 알렸다.
<하고 싶은 말 하라는데?>
“혼인 서약이면 아무리 봐도 고백 각이지.”
아군 #채팅
비테마죽 [숨겨왔던 나의]
아군 #채팅
비테마죽 [수줍은 마음 모두 네게 줄게~]
[보틀: .]
[빨강색: 공 2% ㄱㅇㄷ]
딱 한 번 놀린 것뿐인데. 낭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메시지가 바로 화면에 떠올랐다. 반지 효과만을 언급한 혜지도 혜지였지만, 점 하나만 찍은 선빈의 메시지가 더 과했다. 하나라도 트집 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졌다.
<아, 개노잼. 실망이다 진짜.>
아군 #채팅
비테마죽 [ㄹㅇ 비즈니스 그 자체]
<그럼 님들이 직접 하시든가요. 메가폰 써서 존나 재밌게 만들어드릴 수 있음.>
<그건 좀.>
실망한 길드원들이 불평하자 선빈이 대차게 대꾸했다. 더 자극했다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보은은 바로 발을 뺐다…고 생각했는데.
[메가폰] 갓말이: 보틀♥빨강색 품절 ㅊㅋㅊㅋ여
[메가폰] 갓말이: 두 분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사시길 ㅎㅎ 응원합니다
[메가폰] 보틀: xx 너는 진짜 밤길 조심해라 조만간 찾아간다
아니었나 보다. 장난기 어린 메가폰이 이어지자 길드원들 모두가 빵 터졌다.
<방금 둘 다 우편으로 축의금 넣었어.>
<아, 그래? 확인해 볼게.>
홀로 이 악물고 맞서 싸우던 선빈은 축의금을 넣었다는 은석의 말에 금세 사근사근해졌다.
<뭐야. 왜 이렇게 많이 줌?>
<얼마나 넣었길래?>
<그냥 적당히.>
우편 확인은 선빈보다 혜지가 빨랐던 모양이다. 기겁하는 혜지에 선빈이 어리둥절해했다. 반응을 보면 적어도 일이 억은 아닌 것 같은데. 보낸 당사자인 은석은 대충 둘러댈 뿐이었다.
<너는 미친놈아. 5억이 적당히냐?>
“헐. 5억이요?”
<심지어 따로임.>
선빈도 이제 금액을 확인한 듯했다. 각각 5억이라는 말에 찬영의 입도 벌어졌다. 합치면 10억. 실제 지인의 결혼식 축의금으로도 낼 수 있을 만한 돈이었다. 장난처럼 한 게임 결혼에 덥석 쓸 만한 금액은 아니다.
아군 #채팅
비테마죽 [아 ㅋㅋㅋㅋ 결혼 비용 축의금으로 다 돌려받을 수 있다더니]
아군 #채팅
비테마죽 [창조경제가 여기 있었네]
<그냥 우리도 결혼하죠 이 정도면.>
<뭐 10억이라고? 나랑 결혼할 사람 구함.>
[길드] 도텐: 레결하실 분 구합니다 축의금만 받고 바로 이혼 가능
[길드] 비테마죽: 저 가능한가여
[길드] 비테마죽: 10억 반띵하죠 턱시도 웨딩드레스 이런 거 다 생략하고
[길드] 도텐: 굿
[길드] 서리: ;
은석의 통 큰 후원에 길드에는 갑작스러운 결혼 열풍이 불었다. 10억이면 그럴 만도 했다. 보통 게임에서 축의금을 준다고 해 봐야 강화의 돌 하나 정도가 다일 텐데. 오죽하면 이미 일 년 전에 레결을 했다는 동은도 이혼했다 다시 할까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너네 축의금 돌려줘야 하는 돈인 건 알지?>
<뭔 소리야. 일단 받고 튀어야지.>
<그렇게 따지면 은석이 형이 결혼만 안 하시면 그만이긴 함.>
결혼만 안 하면? 뉘앙스를 보면 은석은 아직 게임 내에서 결혼 상대가 없는 듯했다. 찬영이 슬쩍 물었다.
“형은 레결 안 했어?”
<나 안 했어.>
<오. 그럼 이번 기회에 해라. 쟤네 둘 거 바로 뺏어 오게.>
<뺏긴 뭘 뺏어. 저희 방금 전에 받았거든요?>
<찬영이랑 딱 하면 되겠네.>
누구랑 뭘 해? 생각지도 못한 동명의 말에 순간 심장이 뛰었다. 아무리 게임 내 결혼이래도 오바 아닌가. 물론 길드원들이 의아해할 만큼 은석이 찬영에게 유독 잘해 주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호의의 영역에서 설명 가능한 선이었다. 튀어 오르는 기대감을 몇 번이고 누르고 덜어낸다.
<근데 앞으로맑음 남캐였나?>
<에이. 이럴 때 쓰라고 성별 전환권 업데이트 한 거죠.>
맞다. 레비아는 성별이 다른 캐릭터끼리만 결혼 가능했다. 에이나인 이후로 여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은석과의 결혼이 이유라면 어쩌면. 찬영은 성별 전환권쯤이야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난 게임에서 결혼할 생각 없어.>
은석의 말만 아니었다면.
드물게 단호한 말투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찬영도 농담 삼아 말을 붙일까 말까, 고민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쓸모없어졌다.
<아, 맞다. 형 어그로 끌려서 안 한다고 했었죠.>
<그런 것도 있고….>
<쟤네 둘이 할 때 보니까 진짜 장난 아니긴 하더라.>
<나만 좋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 찬영이가 싫어할 수도 있지.>
<그렇긴 하죠.>
와중에 찬영을 언급한 마지막 말은 평소와 같이 부드러웠다.
거기다 대고 장난처럼 싫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동은의 말대로 실제로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게임에서 결혼하는 것뿐인데. 그렇게 대답하더라도 은석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에 붙인 말들이, 에두른 거절의 표현인 걸 알 만한 눈치는 있었다. 그 정도 사회 경험은 쌓아 왔다.
생각해 보면 하고 싶지 않을 이유는 많았다. 어그로가 끌리는 게 문제라면 아까 공지부터가 과했다. 가뜩이나 시골 서버라 메가폰이나 채팅이 올라가는 속도도 느린데, 네임드 유저인 은석이라면 몰래 하려고 해도 불가능할 게 뻔하다.
그럼에도 찬영은 은석의 거절이 서운하고 속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