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랜선 연애 법칙 2권-3. 초심자의 행운 (2) (4/11)

랜선 연애 법칙 2권

목차

3. 초심자의 행운 (2)

4. 갑자기 분위기 세에레

5. 업보

6. 상상도 못 한 ㄴㅇㄱ

3. 초심자의 행운 (2)

한동안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었다.

숙제와도 같은 일일 퀘스트를 다하고 나자 할 게 지지리도 없었다. 지겹지만 계속 사냥을 해서 본캐 레벨을 올리는 게 맞나, 아니면 저도 슬슬 부캐를 키울 때인가. 찬영이 고민하며 마을에서 더블 점프만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정선빈: 님들 님들

임혜지: 왜 또

정선빈: 레전드 간만에 대형 사건 터졌음

서보은: ?

서보은: 뭔일임 ㄷㄷ

정선빈: 잠만

정선빈: https://www.outven.co.kr/

board/labia/free/2214876

[수다] 레전드 서버 뉴비 길드 내부 정치질 및 왕따 사건 박제(장문 주의) [261]

레전드 서버에서 플레이 중인 두치팡입니다.

남을 박제하는 글을 쓰려면 제 닉네임을 밝히는 게 예의라 생각해 써둡니다.

장문이지만 꼭 전문 읽어주시고 판단 부탁드립니다.

박제 대상)

뉴비 길드 길드 마스터 k**(이하 k)

길드원 또*와*치(이하 또치)

피해자는 익명을 위해 A님으로 호칭하겠습니다.

박제 내용)

먼저 저는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뉴비 길드원이었습니다. 친목성 채팅은 잘 안 했고 길드 운영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기여도 백만을 넘겼을 만큼 길드 활동 자체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자부합니다.(원래 제가 길드 내 분탕이었다는 쉴드 방지 차원에서 언급, 인증 아래 첨부)

기여도 캡처.jpg

A님을 길드로 데려온 것은 길마인 k입니다. 처음 A님이 길드에 가입하셨을 때는 k도 신경을 써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별히 과했던 건 아니고 다른 길드가 뉴비들의 게임 적응을 위해 도와주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같이 보스를 돌아주기도 했고 강돌이나 경비 등 뉴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도 소량 선물해주기도 한 것으로 압니다.

어느 날부터 A님과 또치의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정확히는 또치가 A님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또치와 친한 대부분의 길드원들도 길드 채팅에서 A님을 무시하기 시작했는데, A님도 본인에게 적대적인 분위기를 느끼셨는지 그 이후부터는 길드팟에 오지 않으셨고 말수도 점점 줄어드셨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저는 친목성 채팅을 자주 하지 않고 길드원들의 채팅에도 잘 끼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분의 사이가 나빠진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A님이 계시지 않을 때 또치의 채팅이나 태도를 보면 초반 k가 A님을 신경 써준 게 매우 불쾌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중략)

두 분이 얘기하시는 것 같더니 곧 A님이 추방당했더군요. 모든 상황을 지켜본 입장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길마인 k에게 또치가 파벌을 만들어 그동안 알게 모르게 A님을 고립시켜 왔으며, 길드 내에서 A님을 향한 욕(나이도 적지 않은데 애들 사이에 껴있다 같은 시덥잖은 내용이었음)도 빈번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평소 또치가 했던 정치질을 보면 누가 봐도 A님이 아닌 또치를 내보내는 게 맞다고도 했고요.

그런데 k는 이미 그 모든 내용을 알고 있었고, 그렇더라도 길드의 종합적인 운영을 생각했을 때는 안타깝지만 A님을 내보내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열이 받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친목 길드라지만 이런 식의 편파 운영은 장기적으로 절대 좋지 않다고요. 이름부터 뉴비를 달고 있는 뉴비 친화 길드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k는 제 말에 운영 방식은 길드 마스터의 고유 권한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저는 설마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시는 게 k가 A님보다 또치와 더 친해서인지 물었습니다.

k는 거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대답하지 않았고 불만이시면 나가시면 된다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저도 추방시키더군요.

심지어 바로 차단까지 당했습니다 ㅎ

채팅창 캡처_1.jpg

채팅창 캡처_2.jpg

채팅창 캡처_3.jpg

채팅창 캡처_4.jpg

채팅창 캡처_5.jpg

채팅창 캡처_6.jpg

채팅창 캡처_7.jpg

위 내용과 관련된 채팅 스크린 샷 전문 첨부합니다. 읽어보시고 댓글로 의견 말씀해주세요.

이게 정말 맞는 건가요? 길드 마스터라면 주축이 아닌 길드원 의견 같은 건 무시하고 챙기고 싶은 사람들만 데리고 마음대로 운영해도 되는 겁니까? 그럴 거면 둘이서 길드 꾸려나가면 되지 왜 다인 길드를 만들어서 사람 바보 만들죠?

바로 글을 올릴 수 없었던 건, 제가 당사자가 아닌데 A님의 허락도 없이 그 내용을 함께 박제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까지 추방 당한 시점에서 이제는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은 뉴비 길드에 들어가는 피해자가 없길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그동안 뉴비 길드에 들어와 고생만 하셨던 A님에 대한 위로와 사과를 전합니다. A님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가렸으나 만약 이 글을 원치 않으신다면 쪽지 주시면 바로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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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61) 등록순 최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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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줄 요약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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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씹새끼네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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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드 박제는 무조건 3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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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ㅈ목 길드 뻔하지 특정 멤버들한테 아부 안 떨면 갈라치기 당하고 쫓겨나기 ㅋㅋㅋㅋ 한 번 당해보고 나서부터 친목질하는 길드 죽어도 안 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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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저쪽 길마 얘기도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중립 박음 ㅇ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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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팅 스샷 길이 보면 작성자 유리한 대로 편집한 것도 아닌 것 같음 이 정도면 중립 기어 해제해도 된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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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란 생기게 만든 거 자체가 길마 문제임 이런 글 올라오기 전에 서로 오해 없게 얘기했어야 함 그래야 추방을 당해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거지 결론=길마가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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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둘이 실제로 아는 사인 거임? 아니면 왜 저렇게까지 편 드는 거? 나였으면 작성자가 따로 귓말한 시점부터 ㅈ됐다 싶어서 죄송합니다 박고 바로 또치 강퇴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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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ㄴ 애초에 따로 귓말 올 상황도 안 만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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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이상할 게 있나 사귀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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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칭만 봐도 누구님 누구님인데 사귄다고? 뭔 랜선 연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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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는 아니라도 랜선으로 썸은 탔을 수도 ㅋㅋ 일단 저 또치인가는 좋아죽나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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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욱씹 저러면 스스로 자괴감도 안 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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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ㅅㅂ 대체 게임에서 인연을 왜 찾냐 얼굴 한 번도 못 보고 사랑해 좋아해 ㅇㅈㄹ하는 것들 극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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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이크 길이 보면 A 닉 다섯 글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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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러 유추 못 하게 했다는데 남들도 뻔히 다 아는 걸 굳이 밝히네 ㅋㅋㅋㅋ ㅂ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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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거 쓸 거면 닉 좀 정확히 밝히라고 아오 답답해서 뒤ㅣ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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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드명 밝혔고 그 길드에 비슷한 닉네임들 하나뿐이라 바로 나오는데 뭔 ㅋㅋㅋㅋㅋㅋㅋ 핑프 새끼야 스스로 서치하는 습관 좀 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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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걍 내가 이름 깜

길드마스터 - kin

길드원 - 또치와양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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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는 오반데 존나 속시원하긴 함 ㅋㅋ 어차피 저격하려는 거면 닉은 정확히 말해줬으면 좋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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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 글은 명예훼손 때문에 조심하긴 해야죠 결국 고소 들어오면 그땐 아무도 책임 안 져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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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A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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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댓글 지켜보고 있는데 A님 추측하려고 하지 마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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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처먹을 대로 처먹은 놈들이 뉴비 한 명 붙잡고 왕따시키면 안 쪽팔리나... 보는 나도 쪽팔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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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ㅇ 이제 초딩 겜 아니라더니 하는 짓은 무슨 잼민이보다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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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어제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기사 떴는데 나이가 문제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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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명만 추방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길드 전체가 썩은 듯 길마 보니까 자정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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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도 결국 방관자 아님? 저 A 추방당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안해줬단 소린데 내 눈엔 작성자도 똑같아보임 거기다 당사자 허락도 없이 박제글에 이용하고 이딴 식으로 사과한다? A한테 귓이라도 해봤음? 이제 와서 착한 척하는 거 역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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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그 부분은 저도 할 말 없습니다. 박제글 작성을 허락해달라는 것도 염치없어서 따로 연락 안 드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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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치없어서 A한테 허락 구하는 연락도 못 했지만 내가 꼴받으니까 박제글은 쓴다? 내가 보기엔 님도 레전드임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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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A만 존나 불쌍하네 나였으면 트라우마 생겨서 꼬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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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뉴비는 그래서 진짜로 접은 거임? 길드원들이 저 모양이면 현타 와서 폐사 안 하면 다행인 수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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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쓰레기는 당연히 길마랑 또치인데 A도 호구새끼네 ㅋㅋㅋ 말하는 거 보면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참고만 있음? 먼저 나가면 되지 길드가 저기만 있나 ㅈㄴ 이해 안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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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 혹시 친구 있음? 그냥 물어보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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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A가 좀 호구 같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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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버 특성 때문에 못 나간 것도 있을 것 같음 시골 서버 상상 이상으로 좁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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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욕먹을 사람은 길마랑 또치뿐인데 A가 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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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게 레전드섭인가 ㅈ병신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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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ㅇ 뉴비만 불쌍... 글로리였으면 이런 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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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두 명이 잘못한 거지 서버가 무슨 상관인데 ㅋㅋㅋ 글로리도 얼마 전에 패드립 빌런 나왔는데 그럼 글로리는 패드리퍼들 소굴로 보면 되냐 븅신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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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인생 최대 업적이 글로리에서 레비아하는 건가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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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버 과몰입 ㄴ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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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kin 저 사람 이제야 말 나오네 나도 예전에 똑같이 추방당했음 쟤는 또 뭐시기처럼 대놓고 꼽 주거나 하는 것도 아니라서 주변에 말해도 그냥 나만 병신 취급당해서 더 빡침 ㅋㅋㅋㅋㅋㅋㅋ 다 알고 그런 거면 또라이고 모르고 그런 거라도 무능한 거임 최소한 양쪽 얘기는 다 들었어야지 길마 자격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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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전드 서버면 뉴비가 산삼보다 귀할 텐데 맨날 업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정신 차리셈

게시글 전문을 읽은 찬영이 침묵했다. 노자가 그랬던가.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거든 앙갚음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럼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올 것이다.’

두치팡이라면 kin을 빼면 뉴비에서 유일하게 찬영을 잘 대해 준 사람이었다. 다만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박제 글을 올릴 거였으면 미리 쪽지라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두치팡에게는 악감정이 없었고, 글을 내려 달라고 말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글을 통해 사과한 것을 보면 두치팡도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댓글이 200개를 넘기자 두치팡도 방관자이니 똑같다는 비난이나 사실 찬영이 호구는 맞다는 비웃음도 조금씩 보였다. 그 반응을 보면서 찬영은 화가 나거나 억울하기보다는 안도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사격이 대신 박제해 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길 잘했다 싶었다.

다만 아군 단체 채팅방에 좌표까지 찍히자 민망한 건 사실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면 언제가 됐든 다들 알게 됐겠지만.

정선빈: 글 다 읽어봤는데 그냥 쟤들이 등신인 듯

정선빈: 메가폰으로도 욕 개처먹던데 ㅋㅋㅋㅋ 꼬심

정선빈: 어딜 길드에서 정치질이야

정선빈: 심지어 뉴비 대상으로? 영정[1] 먹여야 함

어쩐지 오늘 메가폰이 평소보다 좀 더 시끄럽다 했는데. 또 싸우는구나 싶어 자세한 내용을 안 본 탓에 뉴비 길드 일인지는 몰랐다. 알았다면 바로 아웃벤부터 가서 살폈을 거다.

정선빈: 근데 왜 다 읽고 아무 말도 없음?

임혜지: 정선빈 은근히 눈치 없는 줄 알았는데 걍 드럽게 없네

정선빈: ??

정선빈: 나 왜

정선빈: 아 뭔데 나도 알려줘ㅡㅡ

서보은: ㅎㅎ;

이전부터 친구로 등록되어 있던 길드원 대부분은 A가 찬영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워낙 서버가 좁아 이름 있는 길드나 거기 속한 길드원은 대충 외우기도 하고, 처음 나이트메어를 트라이 했을 때도 찬영의 길드를 봤을 테니까. 기존 길드 탈퇴 후 아군에 가입한 타이밍도 맞아떨어지고.

보틀은 아군 가입 전까지 찬영과 친구가 아니었으니 잘 몰랐을 수도 있지.

혼자서만 영문을 모르는 보틀을 보다 못한 찬영이 말했다.

정찬영: 저기 A가 저예요

정선빈: 엥

정선빈: 아니

정선빈: 헐

정찬영: ㅋㅋㅋㅋㅋㅋㅋ ㄱㅊㄱㅊ

정찬영: 다들 신경 안 쓰셔도 됨

정선빈: 아 요즘 나 왜 이러냐;

임혜지: 어휴 ㅉㅉ

정선빈: ㅈㅅㅈㅅ;;

정선빈: 맑음님한테도 머리 박겠음

이동은: 보틀 형은 맨날 머리 박는 거 같...

이동은: ㄷㄷ

정선빈: 아니 근데 미친 놈들한테 걸리셨네

서보은: 저도 갑자기 길드 없어지셨길래 안 좋게 끝나셨나 짐작만 했지 자세한 얘기는 몰랐는데 쌉에바

임혜지: 개새끼들임 진짜로

김도텐: 넌 저런 일 있었는데 왜 얘기를 안 하냐

김도텐: ㅈㄴ 서운하게

정찬영: 저거 글로 정리해서 더 심각해보이는 거지

정찬영: 별거 없었어 ㅎㅎ

정찬영: 미안ㅠ

동명은… 서운해할 법도 하다. 나중에 개인 톡이라도 해서 한 번은 따로 봐야 할 듯싶었다. 접는 것까지 고민했다는 건 비밀로 해야겠다.

서보은: 뉴비 길드원들 다 나가는 중이던데요

서보은: 또치인가 양치인가 걔는 닉넴도 바꾼 것 같고

서보은: 어차피 바뀐 닉도 박제될 건데 왜 바꾼 거지

박태경: 열 받는데 닉변권에 돈이라도 쓰라 하죠

박태경: 사실 성에 안 참 한 백 번은 바꿔야 함

최ㅇㄹ: ㄹㅇ 이만원 너무 쌈;; 적어도 0 하나는 더 붙어야 될 듯

사격님: 곧 터질 거예요 뉴비

정선빈: 레전드 때처럼?

임혜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ㅅㅂ 제 2의 레전드 탄생 소름 돋네

서보은: 옛날 생각 나긴 함

사격님: 글쎄 뉴비도 어떻게 될지는 봐야 할 것 같은데...

레전드 때처럼? 보틀의 메시지를 본 찬영이 멈칫했다. 아군 가입 전 사격은 찬영에게 레전드와 사이가 안 좋다고 설명하면서 자세한 이유를 대진 않았다. 길드에 불만이 있었는데, 참다가 나중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말 정도가 다였다.

그래서 그냥 내부 트러블 정도인 줄 알았는데. 레전드도 예전엔 아웃벤에서 박제까지 해 가면서 싸운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단순한 트러블 정도였다면 그때 길드원들이 메가폰을 보고 그렇게까지 흥분한 것도 설명이 되질 않는다.

정찬영: 근데 이제 아무 상관 없는 곳이라 그런지

정찬영: 그렇게 화는 안 나네요ㅋㅋ

박태경: 어우

최ㅇㄹ: 맑음님 보살설

정선빈: 사실 솔직한 심정은?

정찬영: 음

정찬영: 한 턱 쏘고 싶은데 다 같이 오실? ㅎㅎ

서보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보은: 저게 마따

정선빈: 오늘 모이자고 하셔도 갑니다 이런 날은 한 잔 까야 함

오늘? 여러 가지로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긴 했지만 모이기엔 시간이 늦었다. 그래도 이 멤버라면 한 번쯤은 모여도 좋겠다.

최ㅇㄹ: 그래도 보살이심...

정선빈: ㅇㅈ 저였으면 메가폰으로 테러함 왜냐하면 레비아는 메가폰 차단이 안 되기 때문임^^

정선빈: 접을 때까지 괴롭힐 자신 있음

정선빈: 그저 갓겜

임혜지: 메가폰 차단 안 되는 게 갓겜임? ㅋㅋㅋㅋㅋㅋㅋㅋ ㅁㅊ

정선빈: 이럴 땐 갓겜이지

임혜지: @사격님 그러고 보니 말 나온 김에 우리 정모는 안함?

임혜지: 맑음님도 오셨는데 슬슬 할 때 안됐나

임혜지: 여름도 다 지났고

이 멤버라면 한 번쯤은 모여도 좋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정모 이야기가 나왔다.

사격님: 안 그래도 한 번은 하려고 했어

박태경: 오오

박태경: 정모 가나요

임혜지: 당일치기? 1박?

임혜지: 이번에도 펜션 잡을 거?

정선빈: 양평? ㅋㅋ

정모라고 해서 식당이나 카페, 술집에서 모이는 것 정도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1박 2일짜리 MT 같은 양상이 될 모양이었다. 절 제외하고도 9 to 6 주 5일 근무 직장인들이 다수일 테니 날짜는 토-일이겠지. 요즘은 사냥에 집중하느라 약속을 잘 잡지도 않아 최근 찬영의 주말 스케줄은 항상 프리했다. 본가에 내려갈 일도 없고.

정찬영: 일단 저는 다 좋아요

정찬영: 1박 2일로 가도 재밌을 듯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또다시 사격이 괜찮으시겠냐며 물어올 것 같아 미리 선수를 쳤다.

정선빈: 굿

임혜지: 다같이 가면 재밌긴 해여

임혜지: 레비아 얘기밖에 안 하는 게 문제지만

정선빈: 그러니까 재밌는 거지

정선빈: 그게 싫었음?

정선빈: 실망이다 임혜지 레비아에 진심 아니었네

임혜지: 닥쳐라 진짜 오늘도 70만원 썼으니까

정선빈: ㅇㅋ;;

정선빈: 너무 진심이라 문제네

박태경: 어쨌든 맑음님이 좋다고 하셨으니까 확정이네요 ㅋㅋㅋ

정찬영: ㄷㄷ

서보은: 저도 좋음

이동은: 저는 못 갈 듯요.... 아버지 때문에 외박이 어려워서ㅠㅠ

최ㅇㄹ: 아이고

사격님: 어쩔 수 없지

사격님: 다음 번엔 일박 말고 저녁팟으로 가자

이동은: 넵 아쉽ㅠㅜ

맛업는라면이 대학생이었던가? 아군 길드원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고 언뜻 들은 기억이 났다. 집이 엄하다면, 특히 아직 학생이라면 외박이 어려울 만도 했다. 학교 행사 같은 공적인 일도 아니니까. 다 같이 모이면 좋긴 하겠지만 언제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사격님: 숙박비랑 경비는 제가 책임질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몸만 오세요 다들

정찬영: 그건 좀

임혜지: 또 뭔 개소리임

임혜지: 뭘 책임져

사격님: 어차피 아는 펜션 있어서

사격님: 그냥 내가 내면 됨

정선빈: 응 알 바 아님

사격님: ;;

최ㅇㄹ: ㅁㅈ 엔분의 일로 갑시다 학생들 제외하고

정찬영: 넵 당연하죠

사격님: 음

사격님: 그러시면 식비만 그렇게 ㄱ하죠

정선빈: ㅡㅡ 말 진짜 드럽게 안 듣네

사격님: ㅎㅎ

임혜지: 넌 그럼 식비 엔빵 제외임 이건 양보 못함

사격님: ㅠ ㅇㅋ

계산은 정확히 하는 게 좋다. 사실 일고여덟 명이 모일 만한 규모의 펜션이라면 지인 할인이 들어간다고 해도 사격의 부담 비용이 남들의 두 배는 넘길 것이다. 빨강색도 그걸 알아서인지 식비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불만이 있어 보였다.

정모가 결정되고 운 좋게 모두의 일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날짜도 1주 뒤 주말로 빠르게 정해졌다. 못 갈 것 같다고 말한 서리와 처음부터 집안 사정으로 외박이 안 된다고 했던 맛업는라면을 제외하고는 길드원의 대부분이 참여하는 자리였다.

며칠간 레비아는 별다른 업데이트나 이렇다 할 이벤트랄 것도 없어 아군 단톡방의 화제는 주로 정모 관련 이야기가 되었다.

이를테면.

임혜지: 양평이면 모여서 가는 게 낫지 않나

정선빈: 다들 차 있음?

정선빈: 차 갖고 가는 사람 손

정선빈: 일단 난 갖고 감

임혜지: 인원 총 몇 명임?

박태경: 비테마죽 빨강색 사격 도텐 갓말이 보틀 앞으로맑음

박태경: 저까지 하면 딱 여덟인 듯

정선빈: 딱 좋네 숫자

사격님: 딜프리님도 이번이 처음이셨던 것 같은데

박태경: 넵 맞습니다 지난번 정모 때 제가 못 갔어 가지고 ㅋㅋ

사격님: 좋습니당

정선빈: 그럼 저번 때처럼 마죽님이랑 임혜지는 내 쪽으로 ㄱㄱ?

임혜지: ㅇㅋ

최ㅇㄹ: 저도 좋음

사격님: 맑음님은 차 끌고 오시나요?

정찬영: 아 저 운전은 할 줄 아는데 회사차로 하는 거라

정찬영: 제 차가 없어서...

정선빈: ㅇㅎ

정선빈: 어디 쪽 사심??

정찬영: 설입이요

정선빈: 오 관악이네

정선빈: @사격님 그럼 너가 맑음님이랑 보은이 데리고 오면 될 듯?

정선빈: 픽업 장소나 출발 시간은 각자 협의 ㄱ

사격님: ㅇㅇ 그러려고

정선빈: 굿 다른 분들은?

김도텐: 주소만 알려줘 난 따로 감

박태경: 저도 펜션 주소만 알려주시면 될 듯

박태경: 지방에서 올라가야 해서

정선빈: 조심해서 오십쇼 ㄷㄷ

짝을 지어 같이 가자는 얘기들이나.

임혜지: 혹시 정모 때 노트북 누구 가져옴?

사격님: 나 가져갈 거야 일퀘해야 함

서보은: 어우

서보은: 거기 컴퓨터 있지 않았나여

사격님: 사람이 몇인데

사격님: 한 대 가지고 안 됨

서보은: 진짜 진심이시네

임혜지: 일퀘는 못 참지

정선빈: 이제 좀 참을 때도 됐다 그날 하루는 걍 놀아

사격님: ㄴ 하루도 안 됨

사격님: 신보스 또 나오면 평판 제한 몇일지 모름

사격님: @임혜지 @정선빈 너네도 일퀘 ㄱ 세에레 같이 가야지

임혜지: 뭔 소리임 나 이미 노트북 캐리어에 넣어놨는데

임혜지: 회사 워크샵도 아니고 길드 정모에 노트북도 없이 간다고?

임혜지: 게임이 장난이야? 정선빈 미쳤어?

임혜지: 안 가져가시는 분들 반성 좀요

정선빈: 님은 회사 워크샵 때도 가져가시자나요

서보은: 저 누나 전에 회사 워크샵때 소주 세 병 먹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일퀘하고 다시 잤다 하시지 않음? ㅋㅋㅋㅋㅋㅋㅋㅋ

정선빈: 그 와중에 안 들키려고 화장실에서 핫스팟 켜고 한 게 레전드

최ㅇㄹ: ;; 여긴 레비아에 미친놈들밖에 없어요?

정선빈: 님도 그 미친놈들 중 하나임

최ㅇㄹ: ㅋㅋ 이런

누가 레비아에 진심 아니랄까 봐 가서도 일일 퀘스트를 해야 하니 노트북을 챙겨 오라는 얘기 같은 것들이었다.

얼떨떨할 정도로 급하게 잡힌 정모지만 그 덕에 사격과 정말로 만나게 되었다. 다른 길드원들도 당연히 궁금하긴 했지만 사격만큼은 아니었다.

주말이 다가올 때까지 찬영은 사격의 이름이 무엇일지, 실제로는 어떤 목소리에 어떤 말투로 말하는 사람일지 생각했다. 보이스 코드는 음질이 아무리 좋아도 약간의 왜곡이 들어가니까.

찬영의 만류에도 사격은 끝까지 서울대입구역까지 픽업을 와 주겠다고 했으니 토요일 오전부터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이름을 꼭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출발 당일, 사격은 급하게 일이 생겼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개인 톡과 단체 톡 모두 미안해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찬영은 우선 개인 톡부터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시라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

사격님: 죄송합니다

사격님: 보은아 미안

서보은: 아니 이 형은 괜찮다고 했는데 계속 그러시네

정찬영: 저도 괜찮습니다

정찬영: 사정이 있으신 건데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임혜지: 갑자기 생긴 거면 집안일임?

사격님: ㅇㅇ...

임혜지: ㅇㅋ 이해했음

임혜지: 오늘 고생하겠네 ㅎㅇㅌ

김도텐: 흠

김도텐: 그럼 둘 다 나랑 같이 가야할 것 같은데

사격님: 그래줄 수 있어?

김도텐: 당연하지

사격님: ㄱㅅㄱㅅ 내가 언제 밥 삼ㅜ

김도텐: 됐으 ㅋㅋㅋ

정찬영: 형이 여기 오려면 시간 애매하니까 내가 형 집 쪽으로 갈게

김도텐: 오 그럼 고맙지

김도텐: @서보은 넌 집이 어디냐

서보은: 저 집이 아니고 ktx 타고 서울 왔음

서보은: 역 알려주시면 저도 글로 갈게여

김도텐: ㅇㅋ 둘 다 범계로 오셈

준비가 끝나자마자 지하철을 타고 급하게 범계로 향했다. 사당이 어느 정도 중간 지점이긴 하겠지만, 거기서 만나기엔 차가 너무 막힐 테니까. 차라리 동명의 집 근처에서 출발하는 게 나았다.

처음 만난 갓말이와 간만에 보는 동명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탄 찬영은 미리 산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내밀었다. 주말이라면 특히 양평까지 몇 시간을 차 안에 박혀 있어야 한다. 지난번 서운하게 한 것도 있고, 운전자인 동명이 조금이라도 편하길 바랐다.

망고 Top 100을 틀고 함께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려 도착한 펜션의 컨디션은 겉부분만 보아도 이미 최상이란 걸 알 수 있을 만큼 좋아 보였다.

보틀과 비테마죽, 빨강색은 이미 와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품이 큰 맨투맨을 입은, 키가 160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찬영과 마주했다. 뒤에서 나오면서도 투닥대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자동으로 저 둘은 보틀과 빨강색이겠거니 싶었고, 그럼 이 사람은 비테마죽인 모양이었다.

인사를 하자마자 보틀이나 빨강색과는 통성명을 하고 말을 놓았다. 비테마죽은 모두와 말을 놓지 않는 성격이라고 했다. 죄송하다고 하는 비테마죽에게 찬영은 고개를 저었다. 낯을 가리거나 선뜻 섞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있다. 그 모임이 게임 정모라면 더더욱.

숙소는 첫인상대로 내부도 깔끔하고 쾌적했다. 지역 특성인지 생각보다 춥긴 했지만. 대충 짐을 풀고 다 같이 근처 둘로마트에서 장을 봤다.

혜지는 술은 인당 네다섯 병씩은 잡고 사야 한다는 선빈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넌 진짜 그렇게 안 먹으면 뒤진다. 혼자서 다섯 병은 충분히 먹을 자신 있지? 그 말에 선빈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다섯 병까지는 어려운 모양이다.

산더미 같은 양의 삼겹살과 상추, 마늘, 양송이버섯, 비비가 김치, 무말랭이, 과자 열댓 봉지. 마지막으로 소주 한 박스에 콜라와 오렌지 주스 한 병씩을 사고 나자 선빈이 끌고 온 차의 트렁크가 가득 찼다.

펜션으로 돌아와 보니 딜하는프리, 태경도 도착해 있었다. 다 같이 냉장고 정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다. 도시보다 빨리 어두워진 펜션 근처는 마치 초를 들고 캠프파이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사격님은 언제쯤 오신대?”

“곧 올걸? 아까 전에 출발했다고 밥 시간 되면 미리 고기 구워서 먹고 있으라던데.”

태경의 물음에 찬영의 귀도 쫑긋 섰다. 혜지는 심드렁하게 고기부터 굽자며 냉장고 문을 가리켰다.

멋대로 기대하거나 혼자 들떠 있는 건 아니지만 사격이 어떤 모습일지는 궁금했다. 라잇톡 프로필에는 이름도 초성이었고 프로필 사진도 뒷모습이 다였으니까.

길드 정모라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에이나인에서 지겹도록 했다. 당연히 게임에서 정모를 하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을지도 모르고, 피부는 조금쯤 탔을 수도 있겠지. 눈썹이 송충이처럼 짙을 수도 있겠다. 동명처럼 파워 공대생 기운을 내뿜으며 체크무늬 셔츠에 물 빠진 색의 청바지를 입고 올지도 모른다.

사실 사격이 무슨 옷을 입고 뭘 어떻게 하고 오든 중요하진 않았다. 어쨌든 찬영은 사격과 더 친해지고 싶은 욕심이 있었으니까.

“진짜 다 왔다는데? 요 앞이래.”

통화를 끝낸 혜지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옆에 서 있던 태경과 동명에게 손짓했다. 슬슬 냉동실에 넣어 놓은 소주나 음료수들을 챙겨 오려는 것 같았다.

“형 보시면 깜짝 놀란다, 진짜로.”

차에서부터 친해졌던 보은은 사격이 온다는 말에 왠지 신난 것처럼 보였다. 깜짝 놀란다고? 놀랄 게 있나? 뭐에다가? 분주하게 세팅하던 접시를 내려놓았을 때쯤 야외 주차장 쪽에서 타이어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바비큐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찬영이 새로운 차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 잰걸음으로 나섰다. 보은도 얼른 뒤따라왔다.

한 인영이 차 문을 열고 내리고 있었다.

연갈색 머리카락은 언뜻 봐도 윤기가 나고 부드러워 보였다. 눈은 머리 색보다 조금 어두운데도 마치 반짝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했다. 소매를 한 번 걷어 올린 화이트 셔츠에 검정색 정장 바지를 입은 남자를 앞에 둔 채, 찬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분명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사격일 텐데, 상상했던 그 어떤 모습과도 달랐다.

“형이 그렇게 챙기던 맑음님이에요.”

옆에서 보은이 찬영을 소개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마주치자 사격은 잠깐 놀란 듯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봄날의 벚꽃 같은 미소였다.

* * *

“근데 넌 길드 정모에 무슨 정장을 입고 오냐?”

“지금은 추리닝이시잖음. 완전 극과 극이네.”

“일 끝나고 바로 오느라. 옷은 미리 챙겨 둔 거고.”

“아, 그런 거야? 난 또 신입들한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차려입고 나온 줄.”

“뭔 헛소리야. 그리고 그걸 정장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야, 그 정도면 정장이지. 여기 처음부터 쓰레빠 끌고 온 사람도 있다.”

“인정.”

“좀 답답하긴 했어.”

다시 나타난 그는 직전의 단정한 옷과는 정반대로 프린팅 반팔 티에 트레이닝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들 은석이, 은석이 형 불러대는 걸 보니 프로필에 ㅇㅅ으로 쓰여 있던 이름은 은석이었던 모양이다.

이미 반쯤 풀어져 있던 머릿결이 옆에서 미세하게 나풀거린다.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는 얼굴은 여전히 헛웃음이 나올 만큼 화사해서, 찬영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흘깃흘깃 보냈다. 미인은 쌀 포대를 입어도 미인이랬나. 쌀 포대도 아니고 세 줄이 그어진 검정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는 은석은 마치 광고 이미지컷에 나올 것 같았다.

입고 왔던 셔츠에 바지가 정말로 답답했던 모양인지 반팔 티의 목 부분을 몇 번 끌었다 놓더니 동명과 선빈이 서 있던 바비큐 그릴 근처로 향한다. 곧 남은 집게까지 들었다.

“이제 내가 구울게. 저기 가서 쉬어.”

“됐음. 내 고기는 내가 구울 거임.”

“맞지. 남 절대 못 믿지.”

“그럼 같이 굽든가.”

선빈은 맞장구를 치면서 알루미늄 포일을 깔고 그 위에 자른 양파와 버섯을 올렸다.

“빨리 술부터 까, 너넨. 우리 기다리지 말고.”

동명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아까 가져왔던 소주와 음료수들이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중 소주 한 병을 집어 든 찬영이 물었다.

“누구 섞어 드실 분?”

“저요.”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중 손을 든 것은 혜지뿐이다. 의외로 술이 약하고 알코올 냄새가 강한 것도 못 마신다더니 바로 옆에 오렌지 주스를 뒀다. 어쩐지 마트에서 술보다 오렌지 주스를 먼저 담더라니. 그럼 이쯤에서 선빈이 태클을 걸어올 때가 됐는데.

“응, 임혜지 넌 안 돼.”

“어쩔. 제가 님한테 얘기했나요?”

“찬영아, 쟤 거는 맥주 컵에 소주 꽉 채워서 따라 줘. 알지?”

“뒤진다, 진짜로.”

한 번은 적당히 넘어갔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일어나서 제 멱살을 잡으려 드는 혜지를 태평하게 보면서, 선빈은 ‘아야. 길마님 얘가 자꾸 저 때려요.’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다. 하나도 급해 보이지 않는 아주 나긋한 말투로.

맞을 짓 했네. 그렇게 말하는 은석은 이 상황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찬영은 소주잔용으로 쓸 작은 종이컵과 섞어 먹는 용도로 쓸 큰 종이컵을 인원수에 맞게 꺼냈다. 뚜껑을 연 소주를 졸졸 따른다. 보고 있던 보은과 태경이 얼른 컵을 받쳐 들었다.

적당히 구워진 고기를 두 개의 접시 위에 얹고, 전자레인지에 돌린 즉석밥과 김치류, 쌈 야채까지 세팅하고 나니 테이블은 나름의 구색이 갖춰졌다. 찬영은 술이 아주 센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복작한 분위기라면 꽤 마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근데 고기 진짜 잘 구우셨네.”

상추에 고기, 쌈장, 무말랭이를 차례로 얹고 입에 넣은 비테마죽이 연신 감탄했다. 그 말대로 삼겹살은 정말로 맛있었다. 야외 바비큐장은 불 조절이 어려워 고기가 너무 익어 질겨지거나 타기 쉬운데, 그런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잘 구워진 편이었다.

고기 한 점 먹고 건배 한 번. 고기 한 점 먹고 건배 한 번. 차려진 음식에나 분위기에나 찬영의 몸이 노곤노곤 녹아내리기 시작했을 때쯤 보은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옛날에 기억나심? 그때 여기서 잘굿이 서리님한테 막내니까 네가 구우라고 했다가 고기 다 탔잖음.”

“아, 기억 난다. 그때 결국 은석이가 다 다시 굽지 않았나?”

“미친. 잘굿 얘기가 여기서 나온다고?”

“존나 싫다 진짜.”

잘굿? 레전드가 메가폰으로 시비를 걸었을 때 봤던 닉네임이다. 레전드의 길드마스터였나. 정말 싫은지 혜지는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다른 길드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종일관 장난스럽던 선빈의 얼굴도 찡그려져 있었다.

“요즘 잘굿 뭐함?”

“몰라. 또 부들거리고 있을 수도. 걔 사격한테 열등감 쩔잖아.”

“레전드 다 죽어서 이제 고인물들 가입 안 하니까 돈 많이 쓰는 뉴비들 데려다 갑질하는 것 같던데. 같은 게임 하는 사람으로서 개쪽팔림.”

한번 화두에 오른 이름은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잘됐다. 안 그래도 레전드와 있었던 일에 대해 동명을 통해 한 번은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오늘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았다. 술이 반쯤 채워진 잔을 꿀꺽 털어 넘긴 찬영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네.”

“레전드랑 어떤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묻자 길드원들은 다들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찬영이 최근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캐치한 듯했다.

“아, 맞다. 찬영인 모르겠네.”

“근데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 줘야 함? 좆같은 걸로 따지자면 시작과 끝이 없는데.”

“뉴비 일이랑도 비슷하지 않나?”

“그냥 잘굿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걔가 진짜 진짜 쓰레기였다는 정도?”

“아니지 아니지. 잘굿만 문제는 아니었잖아. 걔 빨아 주는 애들도 있었고.”

“걔네는 그래도 어렸음. 솔직히 잘굿이 나이 서른 살 처먹고 스무 살짜리 애들한테 부둥부둥 받으려고 했던 게 역겨운 거지.”

“지금도 그렇게 다르진 않아.”

그러니까… 정확히 뭔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굿이 서른이고 진짜 진짜 쓰레기인데, 어린애들을 데리고 정치질을 하려던 게 좆같았다는 건가? 들은 정보를 가지고 조합하려 애쓰는 찬영을 본 은석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맑음님이 모르시잖아.”

“그래. 한 명이 정리해서 말해, 그냥.”

동명의 말에 선빈과 혜지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눈짓이 몇 번 오가더니 결국 혜지가 말하는 것으로 협의했는지, 둘 중 말을 꺼낸 사람은 혜지였다.

“일단 잘굿이 원래 레전 길마는 아니고 부마였어.”

“아, 원래 길마가 따로 있었어?”

“어. 이름도 레전드가 아니라 천사였고. 우리도 그 길마 때문에 거기 가입한 거야, 처음엔.”

“근데 그분 게임 잠깐 접으시고 잘굿이 길마 받으면서 꼬인 거지. 잘굿도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개꼰대 돼가지고.”

옆에서 태경이 거들었다. 보은은 약간 답답했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개꼰대 수준이 아니라 걔 길마 되고 나서부터는 은석이 형 이름 팔고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다녔어요. 은석이 형 친창 중에 스펙 높은 사람 꽤 있었는데 길드 데려오라고 계속 뭐라 하고.”

“아니 잘굿은 처음부터 사격한테 열등감 있었다니까. 관리는 자기가 하는데 길드원들이 다 사격이랑 친하고 좋아해서. 애들은 돈 쓰면 좋아하는 것 같다고 은근히 비꼬던데.”

또치와양치가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사격의 이름을 팔고 다녔다는 걸로 봐서 잘굿은 그보다 어나더 레벨의 인간인 듯했다.

“그것도 기억 남? 레축 몇 번 혼자 썼다고 길드 채팅창에다 대놓고 쟤 저격질 한 거. 나 그거 스크린 샷도 찍어 놨잖아. 뭐라더라. 네가 돈 많이 쓴 거 알겠는데 아직 렙 낮은 길드원들도 많으니까 혼자 쓰지 말고 배려 좀 하라고 했나.”

선빈의 말은 경악 그 자체였다. 레축을 혼자 쓰든 땅바닥에 갖다 버리든 유효기간이 끝날 때까지 인벤토리에 모셔만 두든 애초에 당사자가 받은 보상을 가지고 남이 왈가왈부하는 게 오바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와, 진짜 이 얘기는 들어도 들어도 소름 돋는다.”

“형 거기에다 뭐라고 말은 안 했는데 제가 더 빡쳤음.”

“근데 길드 터진 이유는 왜 얘기 안 함? 그게 레전든데.”

“이건 진짜 누나가 얘기하셔야죠.”

저게 레전드가 터진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다고? 이제 어느 날 은석이 갑자기 열이 받아 레전드를 다 뒤엎고 나갔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혜지가 얘기해야 한다는 걸로 봐선 혜지와 관련된 일인가 보다. 찬영은 고기를 집고 있던 젓가락까지 내려놓으며 집중했다.

“잘굿이 그때 나한테 혜지서폿 이 지랄 했음.”

뭔 서폿? 귀를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었다.

“미친. 뒤에서 했어도 별론데 심지어 그걸 대놓고 얘기를 했다고?”

“어, 들어 봐. 이게 어떻게 나온 얘기냐면 잘굿이 지딴엔 나랑 친하다고 생각을 했나 봐. 자꾸 딜러 말고 프리스트 하는 게 어떻냐는 거야. 길드에 그때 프리스트 둘이나 있었거든. 얘랑 동은이.”

“근데 난 스펙 낮다고 진작부터 팽 당함.”

“그게 웃긴 거지. 걘 애초에 프리스트 존나 무시했다니까? 말끝마다 도구 거리고 날먹 하기 편하다 그러고.”

요즘은 RPG든 MOBA든 서포터 혐오가 만연하다지만 그건 허구한 날 다른 직업을 물어뜯기 바쁜 게임 커뮤니티에서나 통용되는 얘기다. 실제로 게임 안에서, 더군다나 길드원들에게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찬영이 물었다.

“혹시 잘굿 직업이 프리스트야? 그래도 이해 안 될 것 같은데.”

“놀랍게도 나이트임.”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비테마죽이 대답했다. 선빈이 코웃음 쳤다.

“다른 직업도 아니고 나이트가 그랬다는 게 어이없지 않음? 걔도 날먹 얘기할 입장은 아닐 텐데.”

“그러니까. 암튼 내가 진짜 다 까고 길드 나가기 전에 개소리 작작 하라고 정색했는데 걔가 알겠다고 하면서 뭐랬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아쉽네. 너 이름도 혜지라 딱 혜지서폿인데. 저 이 말 보기만 했는데도 토씨 한 글자도 안 빼고 기억함. 안 그래도 그 전부터 각 재고 있었는데 그날 다 같이 길드 탈퇴했어요.”

“와.”

찬영이 입을 떡 벌렸다.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더니, 역시 이상한 사람은 한 곳에서만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는데? 자게에 박제했어?”

그 말에 혜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 탈주하면서 당연히 박제했지.”

“그럼 그렇게 욕먹고도 저러는 거야? 아님 욕을 생각보다 덜 먹었나?”

“덜 먹진 않았을걸. 사격 닉으로 올린 거라 이틀 내내 아웃벤 자게 도배됐었으니까.”

“근데도 길드 명만 변경하고 아직까지 저희랑 저러고 있는 거임. 더 웃긴 건 저 형이랑 보스 퍼클했던 거 지금도 우려먹어요. 자랑하면서.”

“어떻게 보면 진짜 그것도 대단하다.”

쓸데없을 정도로 건강한 멘탈이었다. 찬영은 스스로 떳떳했는데도 그게 잘 안 됐는데.

“나 그래서 심심할 때마다 잘굿한테 쪽지 보내고 있잖아.”

“그게 보내져요?”

“아니. 캐릭 서른 개 돌려가면서 보냈는데 다 차단했더라. 개찌질한 새끼.”

“그럼 차단당하셨는데 계속 보내시는 거임?”

“어. 차단 푸는 순간 폭탄 맞으라고.”

아닌가? 서른 개의 캐릭터를 일일이 다 차단했다면 의외로 유리 멘탈일지도 모르겠다.

사 놨던 소주의 절반을 해치우고 나서 다 같이 뒷정리를 했다. 생각보다 서늘한 기온 탓에 미리 보일러를 돌려놓은 숙소로 들어가 남은 술과 음료수, 과자 대여섯 봉지를 뜯어 테이블 위에 올려 뒀더니 마치 대학교 OT나 MT 비슷한 모양새였다. 스무 살 때 이후로 안 간 지 오래지만.

“엠티 온 거 같네. 술 게임이라도 해야 될 분위긴데?”

태경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나이가 몇 살인데 술 게임 같은 걸 해.”

이 자리에서 가장 연장자인 동명은 술 게임의 술 자만 들어도 싫은지 진절머리를 쳤다. 찬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괜찮지 않아?”

“그런 건 스무 살 때나 하는 거야. 이제 페이스 조절도 안 돼, 난.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 깨진다.”

“형도 에이징 커브[2] 왔네. 피지컬 이슈. 작년 형이었으면 먼저 술 게임 하자고 했을걸.”

대놓고 놀리는 말에 동명이 허, 하고 웃는다.

“넌 뭐 평생 안 올 줄 알지? 너도 금방이야.”

어차피 찬영이 두 살 더 먹으면 동명도 두 살 더 먹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대로 뱉었다간 동명이 정선빈 닮아가는 거냐고 물을 것 같아 말할 마음은 고이 접었다.

“야, 은석아.”

“왜.”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되냐?”

“무슨 부탁?”

“여기서 강화 한 번만 해 보면 안 됨?”

숙소 안으로 들어와서부터는 어쩐지 얌전히 감자칩만 집어먹고 있더라니. 선빈이 그새 강화 이야기를 꺼냈다.

설마… 그 미친 모자를 말하는 건가? 23강짜리 모자가 터지고, 복구해 놓은 것도 세 번이나 원트 원펑한 꼴을 함께 지켜봤으면서도 선빈은 기어이 또 강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정선빈 강화병 나왔네. 정모만 하면 사격한테 강화해 달라 하는 병.”

“아니, 이건 솔직히 이 자리에 노트북 같은 걸 가져온 너네가 잘못이지. 나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오늘은 일퀘 쉬자고 했어, 안 했어?”

이걸 우리 탓을 해? 혜지가 어이없게 쳐다보았지만, 선빈은 오히려 뻔뻔하게 가슴을 폈다.

“근데 그 모자 진짜 마 낀 것 같던데. 14강이면 얼마 하지도 않는데 갖다 버리고 새로 만들면 안 돼요? 그게 낫지 않나?”

보은의 말에 은석은 말이 없었다. 다 같이 그렇게 하자며 맞장구만 치고 있을 때, 한참 은석을 수상하게 보던 혜지는 마침내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솔직히 불어라. 거기다 뭐 했음? 딱 보니까 혼자 강화했거나 크리스탈[3] 돌렸는데.”

“강화가 너무 안 되길래….”

“그래서?”

이어지는 물음에 은석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냥 몇 번만 돌렸어.”

“와. 정선빈만 또라이인 줄 알았는데 얘도 미친놈이네. 그걸 또 돌려?”

그대로 일축한 혜지가 제 캐리어를 가져오더니 노트북을 꺼냈다. 말은 그냥 몇 번만이라는데 은석이라면 정말 그렇게 끝냈을 리는 없다. 갖다 버리는 것도 안 되는 수준이라면 100% 전설에 유효 옵션까지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오늘 끝내자, 그냥. 또 터지면 현금 십만 원 지원해 줌.”

레비아 로그인 창을 켜 둔 채 은석에게 내밀곤 말한다. 은석이 한숨을 쉬고 로그인을 했다.

“정선빈이 강화하랬을 때 잘된 적 한 번도 없지 않나.”

“저기요. 강화 누르기도 전에 초 치는 소리 자제 좀요.”

“이게 내 문제는 아니지. 그냥 네가 운이 존나게 없는 거야.”

“팩트 폭력도 폭력이래요, 형.”

“아니면 찬영이한테 대리 강화 맡겨 봐도 될 듯? 지난번에 무기 20강 원트 했잖아.”

태경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찬영에게로 향했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볼 생각만 하고 있던 찬영은 당황했다.

이걸 갑자기 맡긴다고? 난이도가 너무 높다. 확실히 찬영의 무기는 잘 갔다. 그때는 은석의 기원처럼 초심자의 행운이 따랐을지도 모른다. 바꿔 말하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운빨이었다는 뜻이다.

“또 터뜨릴 것 같은데….”

“터지면 어때.”

“맞아. 터지면 임혜지 돈 쓰고 난 오히려 좋음. 한 열 번만 터뜨리자.”

아니, 이게 님들 돈이 아니잖아요.

어디다 기대했나 싶어 은석 쪽을 바라봤더니 당사자도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어차피 제가 해도 터질 거라. 해 보고 싶으시면 편하게 하세요. 골드도 꽤 남아 있을 거예요.”

원래 사양하려고 했는데 그 말에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당연히 찬영에 대한 배려의 뜻이겠지만, 터지든 말든 이미 포기했다는 듯한 뉘앙스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럼 좀만 해 볼게요.”

이미 찬영이 뭐라고 말할지 예상했는지 옆에서 혜지가 들고 있던 무선 마우스를 내밀었다.

어디서 강화해야 할까. 이쯤 되면 강화 장소도 중요하다.

잠깐 생각한 찬영이 향한 곳은 지난번 은석이 멸망했고 찬영은 대박이 난 별빛 안개숲이었다. 이동한 맵을 본 길드원들이 한마디씩 얹었다.

“또 여기야? 사격 여기서 항상 망하지 않았나?”

“근데 여기만 망하신 것도 아니고…. 맑음님 무기도 별빛 안개숲에서 띄웠지 않음?”

“솔직히 그동안 그렇게 망했으면 이제 한 번쯤은 가 주지 않을까요?”

“그 한 번이 알고 보면 찬영이 거인 거임.”

은석이 처음부터 말했지만, 아군 길드원들은 다 좋은데 말이 좀 많았다. 그냥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가는 게 낫나. 나름 확신의 장소였는데. 괜히 다른 곳에 갔다 터지면 그건 그것대로 아쉬울 것 같아 고민하고 있던 차에.

“어디든 붙을 거면 붙고 안 될 거면 안 돼. 거기까지만 하자. 맑음 님 신경 쓰이시겠다.”

은석이 한 말은 찬영의 마음을 읽은 듯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찬영이 인벤토리 창을 켰다.

“오키요.”

“쟤는 뭐 인간 빅데이터라 반박을 못 하겠네.”

“이제부터 초 치는 소리 하는 사람 만 원씩 걷습니다.”

“아, 만 원 너무 약한데. 오만 원으로 올리죠?”

“님들, 만 원이 두 장이면 치킨이 한 마립니다. 잘 생각하십쇼.”

“이거 근데 진짜로 25강 보내면 어떻게 되는 거임?”

“어떻게 되긴. 당연히 찬영이한테 뭐라도 사 줘야지.”

모자는 인벤토리 아래쪽에 홀로 분리되어 있었다. 클릭해 보니 전에 화면 공유로 봤을 때는 없던 추가 옵션이 생겼다. 민첩 39%. 무려 두 줄 이탈[4]이다. 시골 서버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을 옵션이었다.

와, 추옵 돌았다. 선빈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 돌렸다더니 그 수준이 아닌데.”

“넌 그 말을 믿었어?”

“아니. 쟤도 세상이 억까하는 동지라고 믿었는데 아니라서 그것만 억울함.”

“너 저거 다는 데 얼마 썼냐?”

동명이 묻자 은석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적게 쓰진 않았어.”

어정쩡하게 대답한다.

“사격이 저렇게 말하면 한 장 이상인가 본데.”

“백만 원이요?”

“뭔 소리임? 당연히 천 단위지.”

뒤에서는 사격이 과연 얼마를 썼을지 대토론회가 열렸다. 모르긴 몰라도 백만 원은 아닐 것 같고. 어쨌든 저 애먹이는 모자도 25강을 보내야 할 때였다. 시끄러운 틈을 타 찬영은 강화 창을 켰다. 활성화된 강화하기 버튼을 누른다.

제발 터지지만 않게 해 주세요. 제발.

왜 제 장비를 강화할 때보다 더 긴장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터지지 않게 해 주세요. 붙어 주면 더 바랄 게 없고.

[강화] 장비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강화] 장비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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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20강이었다.

“미친, 야. 20강 왔는데? 실패 몇 번 했는데 파괴도 안 됨.”

“흐름 탔다 이거. 바로 눌러야 함.”

그새 화면을 본 길드원들이 양옆에서 난리법석을 피웠다. 긴장한 찬영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다물린 입술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사실 이제부터가 진짜긴 했다. 20강부터는 강화 수치가 오를 때마다 파괴 확률의 상승 범위도 커지는 데다, 성공 확률도 말도 안 되게 낮아지기 때문이었다. 1강이 더해질 때마다 장비의 거래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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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흐름 타셨다면서요.”

“그래도 안 터졌잖아.”

“대신 골드가 살살 녹고 있는데?”

“일단 안 터졌잖음. 그러면 된 거임.”

탄 줄 알았던 흐름은 집을 나갔는지 어쨌는지 좀처럼 돌아오질 않았다. 한번 깨진 리듬은 쉽게 되돌리기도 힘들다.

남은 골드는 이제 고작해야 50억 남짓. 잊히지 않는 약속 세트는 레벨 제한이 높은 탓에 강화 비용도 비쌌다. 50억이면 강화하기 버튼을 마흔 번도 채 누르지 못할 돈이었다. 클릭 한 번에 만 오천 원이 날아가다니. 마우스를 쥔 손이 무거웠다.

차라리 여기서부터 은석이나 다른 사람에게 넘길까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대신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은석도 화면만 열중해서 보고 있었는지 찬영을 마주하자 의아한 표정이었다.

저 얼굴에 대고 ‘더는 못하겠어요’ 하기에는 양심이 찔린다. 결국 고개를 흔든 찬영이 다시 강화하기 버튼을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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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장비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래도 이 와중에 한 번 더 붙었다. 이대로 천천히 한 번씩만 성공해 주면 좋겠다. 터지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될 테니까.

그런데… 그게 될까? 21강의 파괴 확률이 지금 무려 20%인데? 앞으로는 더 올라갈 일만 남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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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장비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강화] 해당 장비의 강화 수치가 최대이므로 더 이상 강화가 불가능합니다.

“어?”

그런데 그게 됐다.

“이걸 가? 이게 갔다고?”

“나 앞으로 무조건 찬영이한테 대리 맡긴다.”

“저도요.”

“말도 안 됨, 진짜로. 저 형 처음에 골드 한 170억 있었나?”

“170억으로 약속 14강에서 25강? 평생 은인으로 모셔야 됨.”

“나였으면 25 뜨는 순간 바로 결혼하자 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 배 아파 했을 텐데 쟤는 얼마 썼는지 아니까 축하하게 되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동명과 태경, 혜지는 소리까지 지르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동안 놀렸어도 삼연펑은 선을 넘었다 싶긴 했는지 선빈은 누구보다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은석을 돌아봤더니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고인물 중의 고인물인 은석에게도 25강은 큰 의미가 있나 보다. 찬영은 뿌듯해졌다.

“혹시 갖고 싶으시거나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은석이 물었다.

“솔직히 이건 최소한 한우나 참치는 사 줘야 함.”

“그냥 뭐든 말씀만 하시면 될 듯. 지금 저 형 기분 최상이라 다 사 줄걸요?”

“딱히 그런 건 없는데….”

빈말이 아니라 정말 없었다. 기본적으로 먹는 데 크게 욕심이 없는 데다 게임 재화나 아이템도 원하면 직접 사 버리면 그만이니까.

“엥 이걸 뽀찌[5]도 안 받는다고? 내가 배 아프니까 절대로 안 됨.”

25강을 띄운 것도 저고, 고개를 저은 것도 저인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불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애초에 그런 걸 노리고 대리 강화를 해 준 건 아니었다. 그냥 은석이 포기한 것 같은 모습이 싫었을 뿐이다. 보상이라면 방금 그, 상기된 얼굴로도 충분하고.

다만 은석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맑음 님만 괜찮으시면 언제 한번 따로 보시죠.”

“따로요? 저랑요?”

마시던 콜라를 뱉을 뻔했다. 따로 보자는 말은 평소 은석이 하던 것과는 달리 단호하게 들렸다. 올. 둘이서 스테이크 써냐? 데이트임? 동명이 장난스럽게 하는 얘기에도 대꾸하지 못했을 만큼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덕분에 방금 원하는 것도 생각났고. 조금 주저하던 찬영이 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거 말해 달라고 하셨잖아요.”

갖고 싶은 거였나. 어쨌든 그게 중요하진 않다.

“네. 뭐든 말씀하시면 돼요.”

“혹시 저도 말 놓을 수 있을까요?”

와우. 태경이 낮게 감탄사를 뱉었다.

잘못 말한 건가? 말을 놓자고 하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 같은데. 은석도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말이야… 놓을 수 있는데.”

“에휴. 얼마나 어렵게 굴었으면. 정찬영 우리랑은 처음부터 말 다 놨는데.”

“챙겨 주는 척하더니 뒤에서 선 그었나 보네. 여기서 사격 인성 박제요.”

“근데 진짜 너네 왜 이렇게 내외하냐? 처음 본 사람처럼.”

“처음 본 건 맞죠. 실제로는 처음이잖음.”

“생각해 보니까 또 그렇긴 해?”

아. 한마디씩 하는 걸 들으니 그제야 이해가 갔다. 다들 표정이 변했던 건 ‘그런 사소한 요청을 천금 같은 기회에 써? 원하는 걸 다 말하라고까지 해 줬는데?’라는 뜻이었던 모양이다.

“맑음 님이 스물일곱이었나?”

“네, 맞아요. 스물일곱.”

“말 놓자, 찬영아. 그게 뭐가 어렵다고.”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은석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따로 만나긴 해야 돼. 잊지 않고 덧붙인다. 어어…. 순간 넋을 잃었던 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처음 한 번 알려 준 게 다였는데.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식비 나온 것도 내가 다 낼게. 장 본 금액 좀 알려 줘.”

“아싸~!”

“이러면 이제 다 같이 이득이네.”

“우리 아까 마트에서 얼마 나왔지? 한 삼십 썼나?”

“내가 이따 카드 확인해 보고 갠톡 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전체 식비도 쏘겠다는 말에 길드원 모두가 환호했다. 25강의 가격이 가격인만큼 이번에는 혜지도 한발 물러서는 것 같았다.

장비 강화가 잘된 건 잘된 거고, 술이 너무 많이 남았다고 한참 툴툴대던 선빈은 결국 즉석에서 주루마블 판을 만들었다. 힘들거나 취한 사람은 물로 대체하거나 아예 빠져도 된다고 했지만 그러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도적 직업군 마셔, 힘 쓰는 직업 마셔, 공식 일러스트 여캐인 직업 마셔….

얼떨결에 오늘의 주인공이 된 찬영은 분위기를 타 평소보다 훨씬 많이 마셨다. 즐겁긴 했지만 머리가 자꾸 맹해지는 게 잠깐 바람이라도 쐬는 게 좋을 것 같아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펜션 바깥은 등산로나 산책로에 흔히 쓰이는 나무 재질로 제법 큰 발코니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쪽으로 걷다 보니 말소리가 들렸다.

“응. 나도 여기 오셨다고 해서 급하게 간 거야. …그런 얘기는 안 나왔어. 걱정 안 해도 돼. 아버진 형 칭찬만 하시더라.”

오늘의 진짜 주인공이지만 찬영보다도 먼저 나갔던 은석의 목소리였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통화를 하고 있었던 듯했다.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찬영은 다가가지 않고 자리에 멈춰 섰다. 저게 정확히 무슨 얘기인지는 몰라도 왠지 타인에게, 게다가 오늘 처음 본 타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은 아닐 것 같았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일부러 발 구르는 소리를 내 가며 옆으로 다가선다. 하늘을 보고 있던 은석이 찬영을 보았다.

“여기서 혼자 뭐해.”

방금 온 것처럼 물었다.

“그냥 통화했어.”

은석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찬영은 더 묻지 않고 대신 방금 은석이 했던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몇 분 전만 해도 누굴 죽이니 마니 음주 대결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상 시끄러운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또 완전히 고요하다. 채팅이나 톡만 했지 실제로는 처음 만난 사람과 단둘인 데다 오디오까지 비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리 불편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별생각 없이 나왔는데 아까보다 바람이 더 서늘해졌다. 이게 9월이 맞나. 찬영이 몸을 떨자 은석은 아차 하는 기색이었다.

“추워? 히터 갖고 올까? 창고에 있긴 할 텐데.”

“아니. 그 정도는 아냐.”

“겉옷 같은 거라도 갖고 나올 걸 그랬나. 난 추위를 잘 안 타서….”

못 견딜 것 같으면 이미 갖고 나왔을 거다. 이미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은석을 고개를 저어 붙잡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형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난다.”

“처음 만났을 때?”

“그, 샐러맨더랑 데스 아이 잡았던 거 있잖아.”

“아.”

“나 그때도 긴장 많이 했는데.”

“엄청 많이 했었지. 티 났어.”

“…그래서 자리 안 비웠는데 자리 비운 척하고.”

“그것도 예상하고 있었고.”

이건 몰랐겠지, 하고 던졌는데 예상했다고?

“진짜? 어떻게 알았어?”

“처음부터 길드원으로 점 찍어 놨는데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그래야 데려오지.”

자리를 비운 척한 걸 예상했다는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번 건 농담이다. 은석의 화법에 대해 이제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거기다 대고 농담이라고 짚는 대신, 찬영도 모른 척 대꾸했다.

“그치. 그땐 길드도 있었는데.”

은석이 살짝 멈칫했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인데, 뉴비는 원래 길마가 별로인 걸로 유명했어. 박제 글에도 댓글 보면 똑같이 추방당했다는 사람 많았잖아.”

그건 몰랐다. 그래서 처음부터 계속 아군 길드로 오라고 한 걸까? 어떻게 될지 뻔해 보여서?

뭐…. 이제 아무 상관 없는 데니까. 찬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나이트메어는 괜찮은데 새로운 레이드 가면 또 긴장할 것 같아.”

“맨날 긴장해도 괜찮아. 그 정도 뒷감당은 해 줄 수 있으니까.”

“그러다 나 버릇 나빠지겠네.”

“그럴 것 같았으면 친추부터 안 했지.”

은석이 덧붙였다. 잘하려고 애써서 그래. 그 말이 꼭 찬영을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면서 쓸데없이 긴장한다고 질책받은 적은 있어도 저렇게 말해 주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는데.

“형 되게 인기 많지.”

충동적으로 튀어 나간 말에 은석이 눈을 깜박였다.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계속 부정하는 것도 기만이야.”

“난 네가 더 인기 많을 것 같은데.”

고백이야 남녀 가리지 않고 여러 번 받긴 했다. 그래도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란 게 있다. 일단 형만큼은 절대 아닐걸. 끝까지 그렇게 말했더니 은석은 ‘뭐….’ 하고 대충 얼버무리며 웃었다. 저 정도 뉘앙스면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는 거다. 하기야 그 얼굴이면 모를 리가 없겠지. 적어도 만으로 이십육 년을 넘게 살아왔다면.

찬영이 말했다.

“나 원하는 거 또 있어.”

“뭔데?”

“형 성도 알려 주면 안 돼?”

“내 성?”

“프로필에 초성만 있었어서 궁금해. 이름도 남들 부르는 거 듣고 알았고.”

아하. 수긍한 은석이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더니 찬영을 향해 말했다.

“고은석이야. 내 이름.”

그림 같은 펜션의 풍경 탓일까, 이름도 남들 부르는 걸 듣고 알았다는 투정 섞인 말에 굳이 ‘내 이름’에 강세를 주며 말한 은석이 웃고 있어서일까.

찬영은 어쩐지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은석과 나란히 펜션으로 돌아갔더니 주루마블 판은 이미 치워진 지 오래였다. 대신 다들 한 명씩 자리에 앉아 원카드를 하고 있었다. 옆으로 쫄래쫄래 다가서자 선빈이 새나 벌레를 쫓는 허수아비라도 되는 것마냥 휘휘 손을 내젓는다.

“아, 저리로 좀 가 봐. 나 빡집중해야 돼.”

“원카드에 뭔 집중이 필요해? 보스 트라이도 아니고.”

“여기에 돈 걸려 있단 말임.”

“돈? 얼마나 걸려 있는데?”

“꼴등이 일등한테 오백만씩 주기로 했어.”

“오백만?!”

찬영이 기겁했다. 판돈이 오백만이면 이건 뭐 도박장 수준 아닌가? 암만 MMORPG 특성상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한다지만 오백만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잠깐 나갔다 온 사이 거실이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봤던 하우스가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너도 할래? 태연하게 말하는 혜지를 본 찬영의 눈이 흔들렸다. 아니 난…. 그 모양을 옆에서 지켜 보고 있던 은석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말은 제대로 해 줘야지.

“애들이 단위를 똑바로 안 말해 주네. 실제 돈 아니고 골드 얘기야.”

“아.”

순식간에 오바를 떤 게 창피해졌다. 생각해 보니 당연하다. 게임 길드 정모에서 갑자기 오백만 원씩 걸고 카드 게임을 할 리가. 겜창들에게 그럴 돈이 있었다면 이미 장비를 사거나 크리스탈 돌리는 데 썼겠지. 사실 크리스탈도 어떤 의미로는 도박이긴 하다.

“원래 펜션에서 정모 하면 정선빈이 맨날 카드 갖고 와서 내기하자고 했었어.”

“내가 좀 준비성이 철저해서 그래.”

“지랄. 그냥 지 심심하다고 그런 거임.”

“아, 어쨌든.”

“은석이 넌 안 하냐?”

동명이 은석에게 물었다. 이제 보니 동명도 가진 패가 잘 보이지 않도록 카드를 세운 채였다.

“쟨 항상 안 했던 것 같은데.”

“잘 알고 있네.”

그러거나 말거나 보은은 손에 쥔 카드를 노려보았다. 남은 카드는 두 장. 검은색 스페이드 하나, 흑백 조커 하나. 지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카드는 검은색 스페이드 4였고, 원카드만 잘 외치면 승리는 무조건 따 놓은 셈이다, 생각하던 차에.

동명이 코웃음을 치며 카드를 냈다. 빨간색 하트에 4.

“아, 진짜! 이길 수 있었는데 진짜로.”

색과 모양을 보고 좌절한 보은이 분통을 터뜨렸다. 곧 시무룩해지더니 그 옆에 놓인 뒤집힌 카드를 한 장 가져간다.

“근데 너 생각하고 있는 게 너무 잘 보여. 표정 관리를 좀 하든가. 모른 척이라도 할 수 있게.”

“진짜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저 지금까지 한 번도 못 이겨 봄.”

“절대 안 되지. 그런 게 어딨어. 승부는 무조건 정정당당하게 해야 됨.”

“맞아. 어딜 지금 승부 조작하려고.”

“막내가 빠졌네. 비리가 이렇게 시작되는 건데.”

“와 개억울하네, 진짜로.”

사실 오백만 골드면 현금으로 따졌을 때 고작 육백 원 수준이다. 그러니 장난처럼 넘길 만도 한데 다들 실제 오백만 원이 걸린 것처럼 열중했다.

그 와중에 혜지는 컬러 조커를 내고 바로 의기양양하게 끝을 외쳤다. 혜지의 손에는 한 장의 카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 순서였던 태경이 두리번거리더니 말없이 카드를 내던졌다.

“엥? 왜 포기함?”

“그러게요. 꼴등은 일등이랑 따로 계산하는 거 아니에요?”

“맞긴 한데 어차피 졌어. 저거 카드 가져가면 파산이야.”

태경이 내던진 카드는 언뜻 봐도 열 장은 훨씬 넘은 것 같았다. 전에도 혜지로부터 여러 번 공격을 당한 모양이다. 룰을 어떻게 정한 건지는 모르지만 컬러 조커면 보통 일곱 장 이상 가져가는 걸로 잡으니까, 웬만하면 파산이긴 하겠다.

“그럼 일등이랑 꼴등 다 정해진 건가?”

“그런 듯.”

“이번 희생양은 박태경 씨 당첨이요.”

“혜지 지금 몇 번째 일 등이지?”

“나 다섯 번째.”

“와, 게임을 여덟 번 했는데 다섯 번이시면… 거의 독식하시네.”

“아니 근데, 너네가 너무 못함. 잘 좀 해 보든가.”

혜지는 그렇게 말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누나가 너무 잘하시는 거란 생각은 안 해 봄?”

“혜지야, 설마 손목에 뭐 카드 숨기고 있거나 그런 거 아니지? 난 너 믿어.”

“내가 넌 줄 아세요?”

“님들. 이쯤 와서 중간 정산 한번 하죠.”

내내 조용하던 비테마죽이 제안했다. 요란법석을 떠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말이 없어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비테마죽의 얼굴에도 이기겠다는 열망이 가득하다.

“이번엔 오천만 골 어떠심?”

“오. 그렇게 막판 콜?”

“오천만이면 충분히 목숨 걸 만하지.”

게다가 열 배로 판돈을 끌어 올리기까지 했다. 오천만이면 대략 육천 원. 이제 과자 몇 개 값 정도는 충분히 나온다. 지금껏 꼴등만 했어도 막판뒤집기가 가능했다.

눈에 불을 켜고 서로 쥔 카드를 노려보는 길드원들을 본 찬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도 어디 가서 은근히 승부욕 있다는 말을 듣는 편이었지만, 이 사람들 앞에선 승부욕의 승 자도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 판은 보은이 승리를 차지했다. 꼴등은 놀랍게도 혜지였고. 그래도 판돈은 나눠서 줬을 테니 다섯 번이나 이겼으면 손해는 아닌가.

새벽 세, 네 시가 돼서야 한두 명씩 자러 간 탓인지 아침에 마주한 사람들은 어제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거의 좀비 같은 몰골이었다.

물론 등만 댈 수 있으면 어디서든 잘 자는 성정의 찬영은 아주 푹 잤다. 어제 분명히 바닥에서 베개 하나, 덮는 이불 하나만 갖고 몸을 돌돌 말아 잤던 것 같은데 자고 일어나니 침대에 눕혀져 있었던 건 좀 이상했지만. 모르는 사이 잠버릇이 하나 더 늘어났나 보다 하고 넘기면 그만이다.

거실 한 귀퉁이에서 터덜터덜 일어난 선빈은 까치집이 된 머리로 손과 얼굴을 씻고 불부터 올렸다. 냉장고를 열어 콩나물과 양파, 청양고추 같은 것들도 꺼내 썰고 다듬는다.

어쩐지 어제 장을 볼 때 혼자 한참 돌아다니더라니. 꺼낸 재료들만 봐도 아예 본격적으로 해장국을 끓이려는 것 같았다. 길드 정모에서 아침으로 라면이 아니라 해장국을 먹는 건 처음인데.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뭐야. 해장국임?”

“어. 끓이는 중.”

“안 그래도 밖에서부터 맛있는 냄새 나더라.”

은석이 펜션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제 은석도 늦게 잤던 것 같은데.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일찍 일어났다는 혜지가 은석은 어딜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으니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났을 테고. 그런데도 하얗고 매끄러운 얼굴에서는 피곤한 기색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걍 대충 라면 끓여도 된다니까. 너도 어제 술 존나 먹었잖아.”

“내 사전에 대충 먹는 건 절대 없어. 여기 기본 조미료도 그대로 다 있던데. 그럼 못 참지.”

“그건 또 언제 봤대? 어제 장 보기 전에 부엌 뒤적거리긴 하더만.”

“저거 직업병이야. 정선빈 직업이 요리사라서.”

“그건 너무 티엠아이 아냐?”

혜지에게 대꾸한 선빈이 팔팔 끓인 콩나물해장국을 종이 그릇에 퍼담아 날랐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남은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어제 주루마블과 원카드를 했던 탁자에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까지 올렸다.

요리사라더니 청양고추까지 들어간 해장국은 당장 24시간 콩나물해장국 집을 차려도 될 정도로 맛이 좋았다. 한 숟갈을 떠먹은 찬영이 감탄했다.

“이거 진짜 팔아도 되겠는데?”

“그치? 정선빈 지난 정모 땐 시래기 해장국 해 주더라.”

“와우….”

“그렇게 말하면 다음에 또 해 줘야 할 것 같잖아.”

“뭘 굳이 해 줘. 그냥 알아서 먹으라고 해. 그럼 지들이 라면 끓이겠지.”

“사실 그럼 내가 안 돼. 라면으로 해장 절대 안 하거든.”

그 말에 동명이 어이없어했다.

“편들어 줬더니 뭐 어쩌자는 거야?”

“다들 그렇게 깨달아가는 거지. 쟤 편들어 주는 건 인생 낭비라는 걸.”

“그 말은 좀 상처네.”

체크아웃 시간은 열한 시라고 해서 다 같이 청소를 했다. 마당 한 구석 깨끗한 골판지 박스에 술병과 페트병 같은 재활용품을 담고, 한쪽으론 봉투에 일반 쓰레기를 모은다.

돌아갈 때의 멤버는 전날과 달리 원래 사전에 협의한 대로였다. 대신 보은은 서울역이 아닌 양평역에 내린다고 했다.

보은에게 뒷좌석 자리를 양보한 찬영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은석의 차 안에서는 부담스럽지 않게 은은하고 차분한 향이 났는데, 아마도 앞쪽에 보이는 검은색 방향제에서 나는 향 같았다.

“즐거웠어.”

“그래. 또 보자.”

“다들 조심해서 들어가십쇼.”

“정선빈 다음에도 원카드 갖고 오셈. 그땐 판돈 5억씩임.”

“응, 5억이면 내가 무조건 이길 거임.”

“저거 그럼 카드 주작 해 오는 거 아니냐?”

한 반년은 뒤에 볼 것 같은 아련한 인사가 무색하게 차는 금방 멈췄다. 선빈에게 전화가 와 다 같이 해장 커피라도 마시고 가자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하루 사이 절친한 사이가 된 길드원들이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미 반대쪽 손에 커피 한 잔씩을 든 채였다. 그 모양을 본 은석이 말했다.

“커피는 내가 살게.”

“안 돼. 차 태워 주는 사람한테 커피 사 주는 게 내 원칙이란 말이야.”

“둘 중 어느 분이 사 주시든 저는 그냥 잘 먹겠습니다.”

“방금 내가 사기로 협의했어.”

“이미 결정돼 버린 거야?”

찬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차해 둔 자리가 애매해 잠깐 기다려 달라는 은석을 제외하고 보은과 매장 안에 들어왔다. 아메리카노부터 플레인 요거트 스무디에 아인슈페너까지 있는 카페 메뉴를 살핀다. 메뉴가 뭐가 있든 어차피 찬영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고정이었다. 취직하고부터는 달거나 뭔가 많이 들어간 음료는 입에 맞지 않았다.

은석은 라떼로 사가면 되겠지? 저 라떼 진짜 좋아해요, 라고 했었으니까.

“보은이 넌 뭐 마셔?”

“저 아이스 초코요.”

“내가 주문할게. 셋 다 아이스로.”

아이스 초코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아이스 라떼 하나. 총 세 잔을 주문했다. 진동 벨을 받아들고 뒤돌아서니 보은이 묻는다.

“형 라떼 좋아하세요?”

“아니. 난 아아메. 라떼는 은석이 형 거야.”

“저 형이요?”

그런데 보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네. 은석이 형이 라떼를 먹었었나?”

“나한테 라떼 진짜 좋아한다고 하던데?”

“그래요? 전엔 맨날 아메리카노만 드셨거든요. 근데 뭐, 입맛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니까….”

그럼 라떼를 좋아한다는 말은 인사치레였을까? 하지만 ‘진짜’라는 말까지 붙여 가며 그렇게 말해 줄 이유가 뭐가 있어서? 그냥 같은 길드원 사이일 뿐인데. 심지어 그때는 얼굴도 한번 본 적 없었다. 상대적 뉴비여서 그런지 전부터 잘 챙겨 주긴 했지만.

일단 나온 음료를 받아 들었다. 마침 은석이 문 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형 라떼도 드세요? 찬영이 형이 그러던데.”

“라떼?”

은석의 시선이 찬영이 들고 있는 음료 쪽으로 향한다.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이 보였다.

“어어. 나 요즘은 잘 마셔.”

“진짜요? 처음 알았네.”

“생각보다 괜찮더라.”

나 줘. 찬영의 손에서 음료를 가져가 보란 듯이 빨대로 한 모금을 마신다. 그 어색한 행동에서 찬영은 확신했다. 이 형 라떼 안 좋아하네.

돌아오는 길은 (어쩌면 일방적으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찬영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은석을 힐끔힐끔 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마침내 빨간색 신호등 앞에서 옆을 돌아본 은석과 눈이 마주쳤다. 은석이 부드럽게 말했다.

“피곤할 텐데 억지로 안 깨어 있어도 돼. 어제 늦게 잤잖아.”

“조수석 자리가 어떻게 자. 그렇게 따지면 형도 나보다 더 못 잔 것 같던데.”

조수석 자리에서 잠을 자는 건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개매너라고까지 불리는 행동이다. 동시에 지적하는 걸 두고 꼰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애초에 그걸 떠나 은석이 운전하는 옆에서 늘어지게 자고 싶진 않았다.

“나 옆자리 자도 집중 잘해서 괜찮아.”

“내가 안 돼.”

대차게 대꾸하고 나서, 찬영은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오히려 옆에서 떠들면 집중 안 된다는 사람도 있긴 하니까. 은석도 그럴지도 모르지. 다시 물었다.

“혹시 깨어 있는 건 싫어?”

“깨어 있어도 좋지.”

그럼 됐다. 찬영이 마음을 놓았다.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은석은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왔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주고 있긴 했지만, 사실 찬영은 아까 그 라떼 문제에 정신이 온통 팔려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물론 태생적으로, 어쩌면 과하게 다정한 사람이야 어디에나 있긴 하다. 아무에게나 친절한 사람. 행동만 보면 빼박이니 무조건이니 해도 주어가 붙으면 모두 한발 물러나는. 중고등학교 때도, 대학에 다닐 때도, 사회에 나와서도 주위에 있었다.

그리고 찬영은 항상 그런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고 휘둘리는 역할이었다.

이번에도 혼자 착각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조금 부풀어 오르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콩알만 하니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다정도 선이 있지. 이렇게까지 무르게 굴어 준다면 은석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었으니.

은석이 괜찮다면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걸 지하철역으로 협의하고, 차에서 내린 찬영은 홀린 듯 멍해진 정신을 붙잡아 자취방 원룸으로 돌아왔다. 1박 2일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어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임혜지: 집 오자마자 바로 레비아 들어왔음

임혜지: 숙제 중

임혜지: 설마 오늘은 쉬겠다 이런 사람 없지?

김도텐: ㄹㅇ 그러기만 해보셈

김도텐: 바로 박제함

최ㅇㄹ: 어디다 박제하나여? ㅋㅋ

김도텐: 모름 어디든 박제함

정선빈: @임혜지 어차피 집 가서 일퀘할 거면 노트북 왜 가져왔니

정선빈: 혹시 체력 단련용이었니?

임혜지: 니니체 ㅈㄴ 극혐;

임혜지: 사격 25강 성불시켜주려고 가져간 거임

임혜지: 솔직히 내 노트북 아니면 25강 못 갔다

ㄱㅇㅅ 형: ㅋㅋㅋㅋ 인정

서보은: 아니 님들 안 피곤하심? 왜 다 접속해 계신 거? ㄷㄷ

김도텐: 그걸 아는 시점에서 이미 너도

김도텐: 크흠

박태경: 씻자마자 바로 켰음

박태경: 당연한 거 아님?

샤워부터 한 뒤 짐 정리를 마치고 핸드폰 화면을 켰더니 라잇톡 알림이 잔뜩 와 있었다. 알림 중 대부분은 단체 채팅방이었다. 겜창들답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레비아부터 접속한 모양이다. 찬영도 이미 로그인 중이었지만.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쉰다면 게임에 진심이라고 할 수 없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때라면 오늘을 제외하고도 많았다. 쉬는 게 허용되는 사유는 야근과 같은 천재지변, 강화 실패나 N백만원 무과금으로 인한 현타뿐이다.

[확인되지 않은 우편이 있습니다. 우편함을 확인해주세요.]

접속되자마자 오른쪽 아래에 시스템 메시지 창이 하나 떴다. 쪽지가 아니라 우편이라고? 게임사에서 뿌린 전체 보상 같은 건가.

레비아 온라인에서 타인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기능은 두 가지였다. 쪽지와 우편. 쪽지는 메시지만 보낼 수 있었고, 우편은 메시지에 아이템까지 첨부 가능했다. 찬영이 우편함을 열었다.

보낸 이: 사격

보낸 날짜: 0000/00/00

우편 제목: 선물이야

우편 내용: 전에 탈것 보고 있다고 한 게 생각나서

받아 줬으면 좋겠어

첨부 아이템: 다 함께 칙칙폭폭(영구)

도착한 지도 얼마 안 됐을 것 같은데 우편은 또 언제 보냈대.

갖고 싶은 건 몇 번을 물어봐도 계속 없다고 하지, 평소에 말하고 다닌 것도 없지. 결국은 지난번에 딱 한 번, 의자나 탈것을 보고 있다고 말한 걸 떠올려 그중 가장 비싸고 선호도가 높은 아이템으로 선물했나 보다. 다 함께 칙칙폭폭은 안 그래도 곧 사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손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이상하게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옆에서 그 정도는 받아야지 몰아가는 분위기였어도 사양했을 텐데. ‘생각나서’라는 단어가 보기 좋아서인지, ‘받아 줬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신경 쓰여서인지.

가만히 보던 찬영이 우편을 수령했다. 인벤토리에 들어온 다 함께 칙칙폭폭을 탈것 목록에 등록하고 F8 단축키로 설정한다. 키보드를 누르자 옆으로 조그맣게 창이 떴다.

- 다른 사람 태우기 1/4

- 혼자 타기

- 탈것 해제(단축키 재사용)

마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일일 퀘스트를 하고 있을 길드원들을 당장 불러 같이 타자고 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혼자 타기를 클릭했더니 뿅 하고 찬영의 캐릭터가 노란색 기차 모양에 앉는다.

유저들 사이 떠도는 짤이나 공식 홈페이지 이미지로만 봐 왔던 다 함께 칙칙폭폭에 실제로 캐릭터를 태우니 정말 귀여웠다. 네 명을 채워 같이 달리면 더 귀여울 것 같았다. 태운 캐릭터들의 표정도 랜덤으로 변하는 것 같던데. 다음에는 길드원들도 태워 볼까. 그리고… 이걸 선물해 준 은석도.

은석은 전혀 몰랐겠지만, 에이나인을 포함해 찬영이 게임에서 처음 받아 보는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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