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는 마을사람-171화 (171/171)

# 171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7권 24화

외전 4. 작은 친구(2)

문다인이 깨어난 그다음 날, 고맙게도 호영과 이예숙이 바로 문다인의 병문안을 와 주었다.

이예숙의 눈가는 아주 새빨갰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문다인의 목소리는 아직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러한 것은 신경 안 쓰는 듯했다.

"다인이 너도 쉬어야 하니까 우리는 먼저 가 볼게."

"응."

문다인과 한참이나 대화를 주고받던 이예숙은 2시간이나 흐른 뒤에야 호영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병실 문을 열고 백재건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어제처럼 선명한 눈물 자국이 아닌 미소를 얼굴에 그리고 있었다.

문다인은 백재건을 기쁘게 맞이해 주었지만 문지한은 그렇지 못했다.

딱히 백재건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놀라움의 감정 뒤에 엄마와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 가슴속에서 화가 올라왔었다.

하지만 백재건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것이 그의 의지가 아니라 둘의 사이에 끼어 있던 이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자 화는 곧바로 사라졌다.

그의 아버지, 자신에게 친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것이었다.

좋은 집안의 여식과 결혼하는 것이 자신의 아들을 위한 길이라는, 참으로 재벌이 생각할 법한 이유가 원인이었다.

문다인은 그의 말에 동조하여 백재건을 생각한답시고 배 속에 문지한이 있는 것도 모른 채 그의 앞에서 스스로 모습을 감춘 것이다.

모든 것을 뒤늦게 알았던 백재건은 문다인을 찾기 위해 스스로 집과의 연을 끊고 나왔고 뒷배경 없이 사회에서 홀로 서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심부름센터에 의뢰하여 문다인을 찾았던 것이다.

백재건은 문다인에게 백윤택의 잘못을, 자신의 죄를 갚기 위해서 끈임 없이 노력해 왔다.

그렇기에 문지한의 화가 수그러든 것이다.

문지한은 백재건에게서 반가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다인에게 백재건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미래를 약속했던 사이겠지만 문지한에게는 처음 보는 낮선 이에 불과했다.

피가 이어진 부모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혈연관계 사이의 감정 같은 것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문지한은 백재건을 '아빠'로서 받아들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것을 문다인이 원했으니까.

"보호자분들, 이제 면회 시간 끝나셨어요."

"아, 알겠습니다."

"네, 누나. 엄마, 내일 또 올게요."

백재건과 문지한은 문다인의 인사를 받으며 병실을 나왔다.

설마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는 그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 *

깨어난 뒤에 멀쩡한 모습을 보이던 문다인이 깨어나고 셋째 날 새벽에 갑작스레 세상을 뜬 지도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문다인이 떠나고 나서 백재건과 문지한은 한동안 크게 괴로워하였다.

하지만 둘은 문다인을 생각하며, 서로를 위해서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기둥이라 생각했다.

상대를 위해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문다인이 세상을 떠 버린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가고 있던 때였다.

백재건과 같이 살기 시작했던 문지한은 그와 저녁을 먹을 때 그가 무언가 고민이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었지만 백재건은 죄책감에 차마 문지한에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홀로 속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끝내 문지한에게 비밀로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백재건은 결국 그에게 고민을 털어 냈다.

"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요?"

"......그래."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지한은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약간 화도 났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그 상대방의 이름을 듣고서 사라져 버렸다.

"정말 면목이 없다....... 다인 씨가 그렇게 가 버렸는데 나란 사람은......."

백재건은 문지한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문지한이 화를 낼 것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지한은 그의 그러한 각오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저는 신경 쓰지 말아요."

"......어?"

"엄마도 아빠의 행복을 바랄 거예요. 괜히 붙잡을 생각 없어요. 아, 그래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문지한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 상대분의 아들한테 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이름이나 그런 거 말이에요."

나중에 크게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다.

* * *

"뭐? 이렇게 갑자기?"

호영이 크게 놀란 반응을 보이자 문지한이 낮게 웃었다.

"후후후, 갑자기는 아니야. 준비는 꽤 전부터 해 왔었거든. 놀라게 해 주려고 말을 안 했던 것뿐이지!"

"......하아, 너도 참 너다."

호영은 문지한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유학을 간다는 말을 출국 전날에 해 주는 친구가 세상에 또 있기는 할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건 빨리 말해 줬어야지! 나는 당연히 같이 영지고로 갈 줄 알고 있었다고."

"하하하. ......미안! 방학 때는 칼같이 들어올게."

호영에게 유학 사실을 전한 문지한은 바로 다음 날 새벽 백재건의 마중을 받으며 홀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처음 나가는 해외, 혼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두려움은 없었지만 유학을 하면서 짜증이 나는 일들은 여럿 있었다.

그중에 주된 짜증은 인종으로 인한 차별이었다.

"헤이, 옐로 몽키. 오늘은 혼자서 또 어디 가시나?"

"닥쳐, 존. 학교 홈페이지에 네 얼굴이 도배되기 싫으면 말이야."

"와우, 그거 너무 무서운데?"

그냥 슬쩍 보기에도 딱 자신을 놀리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러한 존의 반응에 문지한은 스마트폰을 꺼내었다.

찰칵-.

"내가 못 할 줄 알아? 내일 아침을 기대해라."

문지한은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것도 그냥 사진이 아닌 합성 사진으로.

그 일이 있은 후 존의 일행이 문지한을 건드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맘때쯤 문지한은 가벼운 친구와 거대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들과 친해지니 어째서인지 자신을 은연중에 놀려 오던 이들이 모두 자신에게 친절히 굴기 시작했다.

"다 왜 저래?"

"그건 아마 도반 때문일 거야."

"도반이 왜?"

"도반 부모님이 조금 높은 분이시거든. 도반의 친구를 건드렸다가 밉보이면 좋을 게 없으니까."

"흐음."

유아의 말에 문지한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났다.

"그런데 너희는 왜 나랑 친구가 된 거야?"

문지한은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눈치를 보고 있는 인물들이 왜 자신에게 먼저 다가온 것인지가 궁금했다.

"도반의 사람 보는 눈을 믿으니까."

"응?"

"너는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야, 친구! 덤으로 재밌기도 하고 말이야! 이전에 존의 사진으로 홈페이지를 도배했을 때는 볼만했어. 아마 우리 학교에서 해킹 실력은 네가 최고일 거야."

"후후, 그렇게 칭찬한다면 사양 않고 받아 주지!"

도반과 유아는 문지한이 해외에 나가서 사귄 유일한 친구였다.

그들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그맘때쯤에 방학이 시작되었다.

문지한은 도반과 유아에게 선약이 있음을 알리고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에 돌아오겠다며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도착하여 입국 게이트를 통과한 문지한은 자신을 마중 나와 준 호영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호! 잘 지냈냐!"

"그래, 잘 지냈다."

오랜만에 만난 기쁨에 문지한은 호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역시 키 차이는 이 정도가 적당해서 딱 좋았다.

도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 키 차이 때문에 자신이 매달리는 형태가 되는 것에 문지한은 작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문지한은 그대로 캐리어와 호영을 끌고서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문지한은 비행기에서의 피로 따위 모른다는 듯이 쌩쌩함을 보이며 전혀 쉬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 있느라 하지 못했던 것을 최대한 오늘 안에 다 해 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배꼽시계는 무시할 수 없었기에 저녁 시간이 다 되자 근처에 있던 국밥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 뒤 주문한 음식을 먹던 문지한은 공항에서 호영을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있잖아, 호야.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쿨 토시는 왜 끼고 있는 거야?"

"어......?"

원래 호영은 쿨 토시 같은 거 답답하다고 해서 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하루 종일 자신과 같이 돌아다니면서 쿨 토시를 한 번도 벗지 않았다.

그리고 쿨 토시가 조금이라도 말려 내려오거나 흘러내릴 것 같으면 금세 쿨 토시를 끌어 올렸다.

마치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이 말이다.

그냥 상상에 불과했던 이야기를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지한은 자신의 말에 흔들리는 호영의 눈동자를 보고는 그의 팔을 낚아채 쿨 토시를 걷어 버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호영의 얼룩진 팔을 볼 수 있었다.

호영에게 멍 자국의 정체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안 한다기보다는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해 못 한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문지한은 침착하게 호영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를 표했다.

문지한의 진심을 받아들인 호영은 그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았고 문지한은 호영을 괴롭힌 녀석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것을 결심했다.

"......저기, 지한아.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

"뭘 할 거냐고? 뭘 하기는. 해킹 배우러 유학 떠났던 학생의 힘을 보여 줘야지. 내가 괜히 과제 하면서 밤을 새웠던 게 아니라고. 이 형님만 믿어라, 고등학교 CCTV 정도는 제대로 털어 줄 테니까."

급하게 호영과 헤어진 문지한은 그 길로 집에 들어와 백재건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캐리어에서 노트북을 꺼내어 작은 가방에 챙겨 넣고는 그대로 집을 나왔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디 가니?"

"잠깐만 나갔다가 올게요. 12시 전에는 들어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 *

영지 고등학교의 보안은 문지한이 봤을 때는 너무 형편없었다.

땡땡이를 치고 있는 것인지 경비도 보이지 않았다.

그 덕에 문지한은 간단하게 학교에 들어가서 CCTV를 해킹해 영상을 빼돌린 뒤 자신의 기록을 지우고 학교에 침입한 지 10분 만에 학교를 다시 빠져나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호영이 말했던 위치와 시간대의 영상을 확인한 문지한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영상을 뿌려 이대현이라는 녀석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이 영상을 가지고 어떻게 할지는 호영이 정할 일이었다.

새벽에 호영의 스마트폰에 문자를 남겨 놔 아침에 약속을 잡은 문지한은 노트북과 USB를 가방에 넣고서 그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호야, 지금 어디쯤이야?"

-아아, 나 아직 집 앞인데. 방금 막 나왔어. 너는 어딘데?

"나? 나는......."

호영의 질문에 문지한이 지하철 천장에 달려 있는 모니터를 확인하였다.

"두 역 정도 남았어. 내가 먼저 도착할 것 같네. 역 안의 카페카페 알지?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후후후, 기대하고 와라. 내가 아주 싹 털어 왔으니까!"

문지한이 그리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는 호영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약속 장소로 정한 역에 도착하자 창문 너머로 역이 소란스러운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곧 도어가 열렸고 문지한은 소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눈 바로 앞에 불길이 둘러져 있는 남자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의 발아래로 기름통 같은 것이 굴러다니는 것이 보였다.

"사, 살려 줘! 내가 어리석었어! 제발!"

불길을 두르고 있던 남자는 그대로 문지한을 향해 달려들고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