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7권 20화
20. 영웅 대전(3)(完)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질 줄이야......."
단체전을 끝내고 패배라는 결과와 함께 선수 대기실로 돌아온 경력직 뉴비의 팀원들 중 백설영이 이를 갈았다.
설마 첫 시합에 사용하고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능력을 자신들에게 사용할 줄은 몰랐다.
신수, 불사조 이화의 불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아마 이화를 이길 수 있는 플레이어는 없을 것이라고 백설영은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이 들 정도로 경력직 뉴비 팀은 5 대 0으로 빠른 패배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 그래도 2, 3회 때에는 16강도 넘지 못했으니까......, 설영이 너는 충분히 잘해 준 거야. 다른 분들도 그렇고요."
그리고 아직 결승이 시작되지 않아 그들 사이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 호영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백설영이 한마디 할 때마다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애서가가 그리 갑작스레 강해질 수 있었던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이 사실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
그러지 않는다면 백설영이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쳐다볼 터였다.
하지만 그러한 호영의 결심은 모니터를 통해서 보이고 있는 레드 팀의 결승 진행 전 인터뷰 덕분에 바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켄타로 씨에게 묻겠습니다. 결승 시작 전 지금 가장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은 건 누구죠?
-호야 님입니다.
켄타로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선수 대기실에 있는 경력직 뉴비 팀의 선수들 시선이 순식간에 호영에게로 몰렸고 호영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야 씨는 개인전 32강에서 켄타로 씨를 패퇴시킨 선수인데 어째서 그에게 감사를 표하신다는 거죠?
-제가 경력직 뉴비 팀에게 사용한 소환수는 원래 커다란 제약이 있던 능력입니다. 그 제약을 우연찮게 호야 님이 없애 주셨습니다. 저희 레드 팀이 준결승에서 그러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인 거죠.
"호오? 거기 문에 손대고 있는 선호영 씨, 잠깐 멈추시지?"
"으, 응?"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그을쎄......, 무슨 말일까?"
백설영이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키면서 하는 질문에 호영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지만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호영은 단체전의 결승이 일본 대표인 레드 팀의 승리로 끝나고 진행 스태프가 자신을 데리러 때까지 선수 대기실을 나오지 못했다.
* * *
제3회 영웅 대전의 남은 경기도 이제는 단 하나, 개인전 결승 경기뿐이다.
관객들은 그 결승에서 만나게 되는 두 사람의 조합에 호야와 애서가가 만났던 32강보다 큰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야와 도반의 경기였으니까.
그래도 호야가 큰 어려움 없이 애서가를 꺾었기에 그가 승리할 것이라는 여론이 컸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영웅 대전 개인전 결승이 뜨거운 함성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호야와 도반은 카운트다운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고 있었다.
둘은 굳이 길게 말을 나누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호야는 도반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봐주지 말고 전력으로 와라.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너에게 보이겠다.
호야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이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그에게 자신의 전력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둘의 사이에 가식은 필요 없었다.
"아아, 도반 선수가 웃고 있어요! 영웅 대전이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보는 모습입니다!"
"호야 선수도 마주 웃어 주고 있네요. 친구 사이에 뭔가 통한 것이라도 있는 걸까요?"
그 모습을 본 해설가들은 크게 놀랐고 그것은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카운트다운이 모두 끝났고 도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킬들을 최대한 끌어내 보였다.
"신의 가호, 축복, 홀리 심볼......."
도반의 뒤에서 후광 같은 것이 비쳤고 그에게서 신성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후 도반이 마지막으로 꺼내 보인 것은 호야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강림."
파앗-!
도반이 그리 말하자 그의 머리 위로 익숙한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빛의 기둥이 사라진 자리, 그곳에는 신비로운 청은빛의 머리와 푸른색 눈을 하고 있는 도반이 서 있었다.
"너 그거......."
"그래, 이브 님을 만났어."
도반이 이브를 만나게 된 건 1년 전의 일이었다.
빛의 수호 기사인 그는 히든 직업의 숨겨진 조건을 달성하여 이브를 만났고 칭호를 받아서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호야 네가 먼저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호야는 도반이 왜 그러한 말을 꺼낸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너도 강림을 가지고 있을 테니 숨기지 말고 꺼내라는 뜻이다.
호야는 도반의 의사를 받아들여 바로 강림을 사용해 보였다.
그러자 호야에게도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렸고 빛의 기둥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카만 장비와 대비되는 밝은 청은빛 머리카락을 한 호야가 서 있었다.
척 보아도 서로 동일한 스킬, 그 사실을 인지한 해설자들이 여러 추측을 내놓았다.
"아아, 둘이 같은 스킬을 사용한 것 같죠?"
"그런 것 같습니다. 선수들의 대화 소리만 들렸다면 확신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스킬 사용으로 인한 외형 변화만 봐도 둘이 같은 스킬을 사용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죠. 두 선수가 평소에 친분이 두터워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죠. 그때 무언가의 경로를 통해서 동시에 획득한 걸까요?"
"하지만 그것도 2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호야 선수가 제대 후 복귀하고 나서 둘이 같이 사냥터에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동시에 획득했다고 해도 2년 전의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걸 지금까지 숨겼다는 것이 되죠."
"2년 전이라면......, 스킬을 얻은 곳은 동대륙일까요?"
"그건 저도 모르죠. 오로지 두 선수들만 알고 있을 겁니다."
해설가들의 추측을 시작으로 해 이후에 수많은 랭커들이 동대륙을 뒤지지만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말씀드린 순간! 호야 선수와 도반 선수의 검과 망치가 부딪쳤습니다!"
"아-! 도반 선수가 호야 선수의 힘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어요."
해설가들이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던 그때 서로 간을 보고 있던 호야와 도반이 격돌했고 힘에서 진 도반이 뒤로 밀려났다.
"버프, 신성력. 검기."
카강-, 스걱!
신의 가호를 제외한 모든 버프를 사용한 호야는 가감 없이 도반을 몰아붙였고 도반의 HP가 엄청난 기세로 줄어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반은 1인 레이드를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호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호야가 공격 스킬을 차례대로 사용하자 도반은 패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시합도 마찬가지, 개인전의 결승은 매우 빠르게 끝나 버렸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것에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경기들보다 러닝 타임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다른 경기들보다 많은 것이 들어 있었으니까.
아쉽기는 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기였기에 사람들은 함성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 * *
스타디움의 관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몇 시간 전까지와는 다르게 안경을 벗은 채 스타디움의 중앙을 바라보며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몇 시간 만에 스타디움의 중앙에 자리 잡은 무대 위에서 수상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위에는 개인전의 우승자와 준우승자, 3위의 선수들이 올라와 있었고 단체전의 팀의 리더들이 올라와 있었다.
무대에 올라 있는 그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고 한 손에는 트로피를 들고 있었다.
아직 꽃다발과 트로피를 받지 못한 이는 단 한 명뿐, 선수들에게 직접 꽃다발과 트로피를 건네주었던 네오워즈의 회장 이태성은 그 남은 한 명의 앞에 다가가 섰다.
"우승 축하하네. 이렇게 가까이서 만나게 되어 매우 기뻐."
"감사합니다."
이태성을 통해서 스태프가 들고 있던 꽃다발과 트로피를 건네받은 호영은 그것들을 한 팔에 모두 들고 남은 손으로 이태성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다른 선수들이 트로피와 꽃다발을 건네받았을 때 터졌던 카메라의 플래시들이 다시 터져 나왔고 스타디움에 함성과 박수 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호영은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이태성과 손을 잡은 채 미소를 짓고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맞잡은 이태성의 손이 매우 포근하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향한 호의가 느껴졌다.
처음 보는 사이에는 너무나도 과한 호의였다.
'그냥 우승자라서 그런 건가......?'
그 호의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호영은 그의 호의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수상식이 끝난 뒤 폐막식은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관객들은 다시 눈 위에 안경을 올렸고 선수들은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사전에 개인이 혹은 팀끼리 준비해 왔던 퍼포먼스를 펼쳐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호응이 좋았던 것은 호야가 검우와 양화를 사용하는 한편 미호의 힘을 빌려서 만들어 내었던 얼음 가루들이 반짝이며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 놓인 얼음의 성이었다.
소인이 걸어 다닐 정도로 천장이 낮은 그 얼음 성의 안에서 칼같이 열을 맞추어 움직이는 작은 동물 모양의 얼음 조각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그 얼음 조각들의 모델은 새미와 바두였다.
그리고 영웅 대전이 끝난 바로 다음 날 단체전의 우승국인 일본과 개인전의 우승국인 한국 국적의 플레이어들은 우승 보상인 버프를 받을 수 있었다.
무려 앞으로 30일간 몬스터를 사냥하게 될 시 20%의 경험치를 추가로 주는 경험치 상승 버프를 말이다.
* * *
영웅 대전이 끝난 뒤 어두운 밤중에 회장실에 돌아온 이태성은 뒷짐을 진 채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서 아직도 불빛이 꺼지지 않은 거리들을 바라보았다.
-아쉬우세요?
그때 꺼져 있던 모니터에 불빛이 들어오며 이브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 모니터에 떠 있는 이브의 얼굴을 확인한 이태성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금 그러네. ......실제로 만나니까 지혁이를 많이 닮았더라. 영웅 대전 첫날에 멀리서 처음 봤을 때에는 선수들 사이에 지혁이가 서 있는 건 줄 알았어."
-아버님.......
"그때는 내가 그리움에 어떻게 된 건 줄 알았지."
이태성은 그리 말하며 책상 앞으로 걸어와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영웅 대전 내내 품속에 넣고 다니던 작은 액자와 새로이 만든 액자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서 턱을 괸 이태성은 액자들을 바라보았다.
네오워즈의 본사가 세워질 무렵부터 홀로 서 있던 액자가 지금은 두 개가 되어 있었다.
하나의 액자에는 약 20여 년 전에 찍은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액자에는 오늘 막 찍은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찍힌 날짜는 달랐지만 두 사진에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하나는 이태성 혼자서 찍힌 사진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터무니없는 착각이네요, 아버님. 지석 아버님은 이미 안 계시는 분이에요.
그때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불이 꺼져 있는 회장실의 안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달빛으로 인해 밝혀진 책상 위에 올려진 두 개의 액자, 그곳에 끼워져 있는 사진들에 이태성과 함께 찍혀 있는 남자들은 분위기만 다를 뿐, 이상하리만치 서로 매우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이태성만이 홀로 늙어 버린 것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태성은 두 개의 액자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큭큭, 그도 그럴 게 아버지랑 아들이 너무 닮았잖아? 핏줄이란 건 참 신기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