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7권 17화
17. 쌓는 건 오래, 무너질 때에는 순식간(2)
'방금 뭐야?'
결승전 첫 경기의 승자가 호야로 결정되고 나서 주어진 30초의 재정비 시간, 에리먼은 카운트다운 위에 떠 있는 문자를 믿을 수 없었다.
호야 1:0 에리먼
호야가 데리고 다니는 펫이 갑자기 엄청난 기세를 풍기며 몸집을 키우더니 입을 크게 벌려 순식간에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펫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고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싶더니 상황을 인지했을 때에는 이미 첫 경기의 결판이 난 뒤였다.
'도대체 왜?'
자신이 왜 패배를 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내가 겨우 펫한테 한 대 맞고 죽은 것 같잖아!'
에리먼은 그러한 생각을 하며 호야를 바라보았다.
보통 경기 중간의 재정비 시간이 주어지면 상대방은 자신에게 대화를 걸어왔었다.
이렇게 실력을 겨루게 되어 영광이다.
이전부터 팬이었다.
앞으로 좋은 인연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등의 말을 꺼내며 자신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었다.
에리먼은 그것이 귀찮으면서도 싫지만은 않았다.
한데 호야는 자신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면으로 인해 얼굴이 가려져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쯧. 하여간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음에 안 들어.'
어제 자신의 손을 무시한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에리먼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재정비를 위한 시간이 모두 지나가고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에리먼은 이번에는 광폭화를 사용하며 호야에게 달려들지 않고 뒤로 물러나 호야가 어떻게 나올지를 살폈다.
'이번에도 그 개 새끼가 나오려나.'
그는 바두가 호야의 비장의 무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바두는 소환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새미가 호야가 허리에 찬 작은 가방을 열고 튀어나와 그의 어깨 위에 앉아 모습을 드러냈다.
호야의 어깨에 앉은 새미는 앞발로 귀의 털을 정리한 뒤 자세를 잡고서 입을 크게 벌렸다.
"뀨우우우우우우-!"
[신수의 외침이 당신의 귀를 파고듭니다.]
[신수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새미'를 향한 공격이 최우선 사항이 되며 거스를 수 없습니다.]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자신에게 생성된 시스템 메시지를 본 에리먼은 눈을 껌뻑였다.
'공격을 최우선으로 한다니......, 원래 그렇지 않나?'
시스템 메시지가 생겨난 것으로 봐서는 자신이 무언가에 당한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을 당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에리먼이 땅을 박차며 호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 뭐, 뭐야!"
다리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인다.
게다가 대검을 쥐고 있는 손에도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공격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건가!'
콰앙-!
에리먼은 대검을 휘둘러 호야가 있던 자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하지만 호야는 발을 뒤로 빼 몸을 가볍게 돌리는 것으로 그 공격을 피해 냈다.
그다음 공격도, 그다음 공격도 호야는 아주 가볍게 피해 내고 있었다.
에리먼의 대검보다 몇 배는 더 빠른 공격을 쫓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호야의 눈은 에리먼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해 내고 있었다.
"이익......!"
처음에는 몸이 멋대로 움직여 공격을 시작한 것이었지만 호야가 계속해서 아무런 피해 없이 공격을 피하자 에리먼에게 점점 오기가 생겨났고 그는 진심으로 호야를 공격하고자 생각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이것 봐라?'
공격을 하고자 생각하니까 디버프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공격을 보조해 주고 있었다.
공격을 최우선으로 해 주는 것이 최고의 공격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에리먼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지만 그 이채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공격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야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 것이다.
"흐억, 헉-."
새미가 걸었던 디버프가 끝나자 그제야 움직임을 멈춘 에리먼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에 비해 호야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X발....... 헙!"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에 에리먼이 순간적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 소리가 바깥에 전달되지 않는 것이 그에게 있어선 다행인 일이었다.
호야는 에리먼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끝내야겠지.'
이미 선수 대기실에서 인터넷을 확인했던 호야는 이 예선전이 끝나고 에리먼이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 상상이 갔다.
아마 자신에게 향하던 호의와는 180도 다른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거의 확실시되자 에리먼을 향하던 분노는 거의 해소되었고 결승전을 통해서 충분히 복수도 한 느낌이었다.
이제 완벽하게 결승을 마무리한다면 에리먼과의 악연도 여기서 끝이다.
그 뒤부터는 사람들이 에리먼을 심판해 줄 터였다.
호야는 속으로 그렇게 정해 놨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도 이제 여기까지야."
"뭐?"
그리 혼잣말을 내뱉은 호야는 에리먼의 반응을 무시한 채 오랜만에 예전에 자주 사용하였던, 하지만 자신을 위해 더 이상 쓰지 않았던 스킬 조합을 꺼내 들었다.
"버프, 신성력."
호야의 전체 스탯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마을사람의 일격."
콰아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전광판이 모두 가려질 정도의 먼지구름이 발생되었고 큰 충격에 영상의 초점까지 흔들렸다.
사람들은 결과를 보기 위해서 먼지구름이 빨리 걷히기를 바라며 숨을 죽인 채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먼지구름이 모두 걷히기 전에 캡슐 하나가 먼저 뚜껑을 열었다.
이대현이 들어가 있던 캡슐이었다.
그가 2 대 0으로 결승전에서 패배했기에 자동으로 호야보다 먼저 로그아웃이 된 것이었다.
캡슐이 완전히 열려 이대현의 벙 찐 얼굴이 드러났다.
'X발......, 방금 뭐야?'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할 줄은 예상조차 하지 않았었기에 패배의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와아아아아아-!"
사람들의 환호 소리에 이대현은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위로해 주기 위한 환호라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관객들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전광판을 향하고 있었다.
관객들의 시선을 따라서 이대현도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전광판에는 먼지구름 사이로 검을 쥔 손을 위로 뻗어 올리고 입으로는 호선을 그리고 있는 호야가 비치고 있었다.
"제3회 영웅 대전 한국 개인전 오프라인 예선에서 우승하여 본선 진출권을 차지한 선수는 호야! 선호영 선수입니다!"
미나의 선언과 동시에 호영의 캡슐이 열리고 그가 바깥으로 나오자 그에게 여러 의미가 담긴 환호가 쏟아졌다.
그 환호 속에서 호영은 짐짓 후련한 듯한 표정을 얼굴에 그리고 있었다.
* * *
예선전의 폐회식까지 모두 끝난 뒤 이대현은 살짝 멍한 정신으로 벽에 등을 기댄 채 복도에 쭈그려 앉았다.
'오늘 도대체 뭐지?'
준결승전을 끝낸 뒤부터 무언가가 이상했다.
결승전이 끝난 뒤에도 자신의 패배를 위로해 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폐회식까지 모두 끝난 후에 무대를 내려와서도 자신에게 말 붙이는 선수가 없었다.
지금도 회장의 정리를 위해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복도를 뛰어다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쭈그려 앉아 있는 자신을 보고서 걱정을 하며 말을 거는 이가 없었다.
'하 씨......, 그래, 깊게 생각하지 말자.'
바로 내일부터 단체전 오프라인 예선이 시작된다.
자신이 속한 팀인 팀명 '아레나'도 오프라인 예선에 진출해 있었기에 이대현은 내일 있을 경기를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대현은 집에 돌아가기 전 두고 온 스마트폰을 챙기기 위하여 다른 선수들과 같이 사용했던 선수 대기실로 이동했다.
선수 대기실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의 스마트폰은 그가 앉아 있던 의자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다행히 누가 훔쳐 가지는 않았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려던 이대현은 액정 위쪽의 표시등이 깜빡거리고 있는 걸 보고는 스마트폰을 켰다.
그러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든 부재중 전화의 발신자가 카피길, 정우찬이었다.
"이 새끼는 또 왜 이래?"
이대현은 지금 몹시 기분이 나빠 그와 통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수십 통씩이나 찍혀 있는 부재중 전화를 보니 보통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선수 대기실을 나와 복도를 걸으며 정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우찬은 신호음이 세 번도 울리기 전에 이대현의 전화를 받았다.
"마스터, 무슨 일이세요?"
-......야 이 X새끼야.
"네?"
그리고 이대현에게 돌아온 것은 정우찬의 욕설이었다.
"가, 갑자기 왜 그래요?"
-하아, 뭐?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네가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치냐? 지금까지 정말 완벽하게 속았어, 내가.
"아니! 진짜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요!"
-이 지경에 와서도 나 몰라라냐, XX 놈아? 야, 너 아예 게임 접고 연기나 해 봐라. 연기파 배우로 가면 아주 대성을 하겠어.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정우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을 향한 적대감이 묻어나 있다는 것을 이대현은 느낄 수 있었다.
-중간 미사여구는 다 생략하고 본론만 말할 테니 잘 들어. 너는 오늘부로 아레나에서 강제 퇴출이고 나와의 인연도 끝이야.
"네? 갑자기 왜요!"
-이유는 네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직접 물어봐!
정우찬의 일방적인 전화가 끊겼지만 이대현은 그가 한 말들이 너무 어이가 없어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허허,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래? 너 같은 사람은 나도 사양이야! 내가 뭐 아레나 말고 갈 곳이 없는 줄 아나."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이대현은 속으로 울분과 짜증을 삼키며 미리 대기시켜 놓은 차를 타기 위해서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대현의 앞을 그의 경호원들이 가로막았다.
"......뭐야?"
"도련님, 후문으로 나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게......."
"대답 못 할 이유면 길 막지 말고 비켜."
짜증으로 인해 시야가 좁아져 있던 이대현은 경호원들 뒤의 모퉁이 너머로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듣지 못하고 경호원들을 밀치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모퉁이 너머로 몸을 내밀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터져 나왔다.
이대현이 좋아하고 원하던 상황이었기에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상황이 이상한 것을 깨닫고는 바로 입꼬리를 내려야 했다.
"이대현 씨! 동창 K의 증언이 사실입니까?"
"영상에 나와 있는 본인의 모습에 대한 해명 좀 해 주십시오!"
"같이 찍혀 있던 이들은 누구입니까?"
"재벌가의 권력으로 학교 폭력을 무마해 돈이면 다 되는 것이냐라는 의견이 강한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자들의 질문이 뭔가 이상했다.
아직 인터넷의 상황을 모르는 이대현은 어째서 저러한 질문들이 나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자, 잠깐...... 그게 무슨 소리......."
"이미 인터넷에 증거 영상과 증인이 수두룩하게 나왔습니다. 모르는 척하신다면 이대현 씨 본인에게 더 안 좋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속였다며 팬들의 분노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 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기자의 말에 이대현은 스마트폰을 꺼내어 인터넷에 접속해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그때, 이대현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왔다.
퍽-.
이대현의 머리에 명중한 계란이 터져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노른자와 흰자가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