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7권 16화
16. 쌓는 건 오래, 무너질 때에는 순식간(1)
오프라인 예선전의 준결승 첫 번째 경기의 승자가 호야로 확정되고 나서 시작된 두 번째 준결승, 시합을 벌이는 선수는 에리먼과 스카치였다.
스카치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는 플레이어는 아니었으나 에리먼에게는 천적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의견이 강했다.
스카치는 스탯을 거의 민첩에 몰아넣고 아이템의 특수 효과도 속도에 관련된 것 위주로 맞추어서 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플레이어다.
그렇기에 대검을 크게 휘두르는 에리먼의 빈틈을 노릴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된 인물이었다.
사람들의 그러한 예상에 보답하듯이 스카치는 에리먼을 예상 이상으로 몰아넣는 것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민첩을 끌어올린 탓에 체력이 낮아 에리먼의 공격 하나하나가 모두 크게 들어와 금세 구석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1승 2패로 패배를 맞이했다.
"잘했다, 스카치! 멋있었어!"
"준석아!! 스트리밍 켜면 형이 골드 시원하게 쏴 줄게!"
"오빠! 진짜 멋있었어요!"
먼저 로그아웃이 되어 캡슐의 뚜껑을 열고 나온 스카치, 병준석에게 사람들의 격려와 환호가 쏟아졌다.
오로지 자신만을 향하는 환호 소리에 그의 가슴속에서 감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씨잉......."
"형! 울지 말아요!"
"울지 마! 울지 마!"
그가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에 눈물을 흘리자 그를 달래기 위하여 '울지 마'가 계속 연호되었다.
하지만 울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면 더 눈물이 나오는 법, 그의 눈물은 계속되는 연호에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연호가 뚝 하고 멈추었다.
여러 가지 말들이 뒤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웅성거림에 병준석이 눈물을 닦던 손을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방금 막 캡슐에서 나온 이대현의 모습이 보였다.
'왜 저러지......?'
관객석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니 여러 사람들이 이대현을 곁눈질하며 속닥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 앞쪽에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관객들 전체가 그러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서 호의는 보이지 않았다.
병준석은 왜 관객들이 저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이대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야? 다 왜 이래?'
이대현은 상황이 왜 이런 것인지 파악할 수 없어서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이......!"
"네! 시합 잘 봤습니다!"
삐이익-.
그때 관객석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내지르려 했고 그것을 미나가 더욱 큰 목소리로 막았다.
어찌나 소리를 크게 낸 것인지 미나의 목소리와 섞여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섞여 나올 정도였다.
"결승에 진출하는 선수는 에리먼, 이대현 선수입니다! 두 분 모두 수고하셨고요, 무대 아래로 내려가 주세요. 이대현 선수도요. 나중에 스태프가 데리러 갈 거예요."
"어, 잠깐......."
"네, 네. 빠른 진행을 위해 빠른 퇴장 부탁드릴게요!"
미나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 해서 무대 아래로 내려온 이대현이 약간 짜증이 섞인 눈으로 뒤를 돌아 무대 위를 바라보자 미나의 영업용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승자 인터뷰도 없이 내려보내? 저 여자 대본 지키고 있는 거 맞아?'
뭐라고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이미지가 있었기에 그러지 못한 이대현은 선수 대기실로 돌아갔다.
"......."
"......."
"......?"
이대현이 문을 열고 선수 대기실에 얼굴을 비치자 문 바깥으로 새어 나오던 선수들의 대화 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그리고 선수 대기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대현을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또 왜 이래?'
이대현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자 진행 스태프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를 선수 대기실 밖으로 끌어내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건가요?"
"이대현 씨의 선수 대기실이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격리...... 아, 아니 결승을 위한 진행 측의 배려입니다."
이대현은 영문도 모른 채 비어 있는 다른 선수 대기실로 안내되었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결승전 전까지 자신에게 치근덕대려 다가와 귀찮게 할 인물이 없어진 것이었으니까.
다른 이들과 같이 사용하던 선수 대기실에 있었어도 그에게 다가오는 이는 없었을 것이라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다.
'아, 스마트폰 아직 거기에 있는데.'
이대현이 다른 선수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에 놓고 온 스마트폰에는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 * *
"관객 여러분, 폭력적인 발언은 자제해 주세요. 아직 완벽하게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네?"
"완벽하게 밝혀진 게 없기는 뭐가 없어!"
"당장 참가 권한을 박탈해야 맞는 거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미나는 무대 위에서 성난 관객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관객들의 이러한 반응은 호영이 준결승을 진행 중이던 때에 인터넷에 올라온 하나의 기사가 원인이었다.
[동창 K의 제보로 뒤늦게 알려진 영지고의 학교 폭력, 피해자는 선호영]
현재 제3회 영웅 대전 오프라인 예선전에 참가 중인 닉네임 호야, 본명 선호영인 그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음이 동창 K의 제보로 인해 밝혀졌다.
동창 K는 당시에 몰래 찍어 놓았던 영상을 본 기자에게 건네며 가해자의 보복이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욕하고 후회하며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아마 모두가 자신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가해자 L 군이 재벌가였기에 선생들은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가 자퇴하자 재벌가의 후원으로 학교 운동장에 인조 잔디가 깔리고 강당이 보수됐다"며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
뉴스 선데이라는 언론사에서 올라온 그 기사를 본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글만 올라왔다면 조회 수를 벌기 위한 기자의 몸부림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뉴스에는 사진 여러 장이 같이 실려 있었다.
그 사진들은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이어 붙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상상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그중에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호영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은 많은 것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 기사는 분노한 사람들에 의하여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고 여기저기서 비슷한 내용의 기사들이 파생되었다.
신기한 것은 그 기사들 중 일부가 뉴스 선데이에서 공개한 사진을 인용하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찍은 전혀 다른 사진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숨어들어 그 모습을 카메라로 담았던 일부 기자들이 뉴스 선데이에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복사해 두었던 사진을 사용한 것이다.
기사를 접한 네티즌 수사대들은 분노하며 가해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움직였다.
그 대상을 특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당시에 영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재벌가 L 군'은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이대현, 그가 가해자로 지목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가 가해자로 지목되자 그의 팬들은 격하게 반박하며 그를 옹호했다.
동창 K의 말을 어떻게 믿냐.
에리먼 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정확한 증거도 없으면서 떠들고 다니지 마라.
이대현이 지금까지 해 온 이미지 관리의 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지만 그 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사에 올려졌던 사진들 중 하나가 결정적인 증거가 된 것이다.
한국의 이상한 사회 보호법은 피해자인 호영의 얼굴은 드러내면서 가해자의 얼굴은 모자이크가 되어 있는 사진들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그중 단 하나, 실수로 모자이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가해자의 얼굴과 그가 차고 있는 명찰까지 모두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친 강당의 창문에 있던 명찰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지 않았다.
그 사진의 출처는 뉴스 선데이. 정문석이 일부러 놓친 모자이크였고 직접 그 실수를 익명성의 힘을 빌려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이대현을 옹호하던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었고 자신이 당시 같은 반 학생이었다며 이대현이 가해자였다고 증언하는 이들이 인터넷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가짜도 있었고 진짜 같은 반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호영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그런 증언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하고 회피를 부조리로 인한 억압으로 포장하여 자신의 죄를 줄이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기 위한, 오로지 자신을 위한 증언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이대현과 병준석이 준결승을 치른 30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현재 예선전이 진행 중인 체육관 안에 모두 퍼진 이야기였다.
무대 위에 있어 직접 그 사실을 접할 수 없었던 미나는 처음에는 관객들의 갑작스러운 웅성거림에 의아해했지만 인이어를 통해서 사실을 전해 듣고는 관객들의 통제에 나선 것이다.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럼 제3회 영웅 대전 한국 오프라인 예선전의 결승을 시작하겠습니다!"
* * *
'뭔가 이상해.'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는 숫자를 사이에 두고서 호야와 마주 보고 선 에리먼은 조금 전에 있던 상황의 기시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게 말이 돼?'
호야와 에리먼은 무대 위로 동시에 올라왔고 당연하게도 환호 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 환호들은 호야에게만 향했고 자신에게 향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결승 시작 전 인터뷰도 제1회와 제2회 때에 비하여 간략하게 넘어간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결승전치고는 뭔가 빠르게 넘어가려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뭐, 일단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해야지.'
2, 1, Fight!
"광폭화!"
카운트다운이 모두 끝나자 에리먼은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광폭화는 스킬의 사용 시간이 모두 지난 뒤에 강력한 디버프를 가져다주는 반동을 가진 스킬이었지만 스킬이 상급으로 성장하여 지속 시간이 늘어나 10분은 버틸 수 있었고 효과 또한 상승했다.
하지만 그 상승한 효과도 호야의 가면이 가진 디버프로 인해 깎여 현재 에리먼의 스탯 상승률은 35% 정도에 불과했다.
광폭화를 사용한 에리먼은 바로 땅을 박차며 호야에게 접근했다.
그런 에리먼에게 대응하기 위하여 호야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바두였다.
"바두야."
"와옹!"
호야가 바두를 부르자 허공에서 바두가 나타났다.
예선전이 시작되고서 호야가 바두를 내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에리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호야가 결승에 와서 펫을 꺼낸 이유가 혼자서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펫의 도움을 빌리려는 의도라 생각했다.
'그래, 2년 공백이 그리 쉽게 메꿔지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런 에리먼의 생각은 호야의 의도에서 완벽하게 빗나간 생각이었다.
그가 바두를 불러낸 것은 바두의 힘을 빌려야 그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아도 바두의 힘만으로도 이길 수 있음을 에리먼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2년 동안 바두는 호야보다 더 강해져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에리먼은 큰 좌절감을 맛보게 될 터였다.
호야는 에리먼을 평범하게 이길 생각이 없었다.
"해방."
"크르아아아아아악!"
호야의 말에 스킬을 사용한 바두는 거대하고 날카로워진 몸집으로 보스 몬스터와 같은 위용을 뽐내면서 에리먼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려 그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바두의 강함을 모르는 에리먼은 펫의 뒤에 가만히 서 있는 호야를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는 바두를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그의 대검은 바두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