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7권 11화
11. 가면 아래에는(2)
사전 인터뷰를 끝낸 호영은 장혜영에게서 검은색의 후드 재킷을 받은 뒤 인터뷰실을 나왔다.
펼쳐 보니 왼쪽 가슴에 이니티움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오프라인 예선 참가자들 전원에게 지급하는 단체복이었고 호영이 인터뷰실에 가기 전에 찾아갔던 선수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이기도 했다.
사전에 옷 사이즈를 왜 물어봤던 것인지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입고 들어가야겠지?'
후드 재킷을 몸에 걸친 호영은 대기실의 문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해서 속을 가다듬었다.
아까 전에는 대기실의 문을 열고 발을 하나 들여놓자마자 인터뷰실로 안내되어 안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도착해 있던 듯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호영은 이대현의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순간적으로 알아본 것인지 눈을 주먹만 하게 키웠었다.
'그게 2년 전을 생각한 것인지 고등학교 때를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2년 전일 확률이 크겠지.'
속으로 그리 생각한 호영은 대기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고양 체육관 안의 모든 불이 꺼지자 안에 입장해 있던 사람들이 예선이 시작됨을 알아채고 목소리를 줄이고 한쪽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그때 전광판 앞 무대에 불이 들어오며 이번 영웅 대전 한국 오프라인 예선의 진행을 맡은 미나를 비췄다.
그녀는 캐릭터의 레벨 자체는 높지 않으나 특유의 통찰력과 말솜씨로 이니티움 영상에 분석 코멘트를 다는 방송을 하는 국내에서는 매우 유명한 스트리머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3회 영웅 대전 한국 오프라인 예선전의 진행을 맡게 된 저 미나, 인사드립니다! 개인전과 단체전 합쳐서 앞으로 4일간 잘 부탁드려요!"
"와아아아아-!"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제3회! 영웅 대전 한국 오프라인 예선전의 시작을 지금! 정식으로 선언합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음악 소리와 함께 체육관 안을 울리는 함성 소리에 미나가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오프라인 예선전에서 저와 함께 해설을 해 주실 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미나의 진행에 맞추어 그녀와 함께 예선전의 해설을 맡게 된 박수혁 해설 의원과 김현우 해설 의원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둘은 미나와 함께 가벼운 농담이 섞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체육관의 분위기를 띄워 놓고 있었다.
하지만 체육관을 찾아온 관객들의 관심사는 그들이 아니었다.
"여러분 너무 저희한테 무관심하신 거 아니에요? 거 입구 쪽 바라보다 목 빠지겠어요."
박수혁이 뾰로통한 말투로 불만을 토로하자 체육관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본 박수혁이 자신의 말이 통했다는 것에 씨익 웃어 보였다.
"관객분들이 얼른 선수들을 보고 싶다는데 저희의 말을 얼른 끊으셔야겠어요, 미나 님."
"그런 것 같네요."
"하하하, 슬프게도 부정을 안 해 주시네요."
"으흠! 그럼 지금 바로 오늘의 주인공들을 모셔 보겠습니다. 총 32명의 강력한 영웅들! 본선에 진출하는 영웅은 단 한 명! 과연 그 한 명은 누가 될 것인가! 지금 그 단 한 자리를 향해 달려온 영웅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무대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전광판에 32명의 선수들의 온라인 예선에서의 모습을 섞어서 편집한 영상이 띄워졌다.
그와 동시에 선수 대기실 앞 복도와 연결되어 있는 출입문이 열리며 선수들이 하나둘씩 가림막을 지나쳐 무대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행자인 미나는 큐 카드를 보며 선수들이 무대로 올라올 때마다 그들의 닉네임과 이름을 호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대 위로 올라오는 선수들 안에는 매우 낯이 익은 사람들도 있었고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신예도 있었다.
하지만 신예라고 해도 알 만한 사람들은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선수들 사이에서 찾고 있는 것은 얼굴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입장순은 영어 다음으로 가나다순이었기에 그들이 찾는 인물은 아마 제일 마지막에 입장할 터였다.
이번 오프라인 예선전에 참가하는 선수들 중에 히읗으로 시작하는 닉네임을 가진 이는 그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32번째 참가 선수가 가림막을 지나 무대 위로 올라오자 체육관에 함성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32번째 마지막 영웅입니다. 닉네임 호야, 선.호.영!"
"와아아아아아-!"
처음으로 공개된 호야의 얼굴에 관객들은 저마다의 감상을 작게 흘렸다.
"대박......, 완전 잘생겼어......."
"호야 님이 못생겨서 얼굴 가리고 다니는 거라고 했던 애들 이제 다 들어가겠네."
"꺄아아아아악-! 오빠아아악-!"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다른 선수들도 관객들의 감상과 똑같은 감상을 품고 있었다.
'진짜 다 가졌네, 다 가졌어. 함성 소리 장난 아니네.'
'아깝게 가면은 왜 쓰시고 다니나요, 호야 님. 흐흑.'
처음 선수 대기실에 그가 왔을 때만 해도 누군가 했다.
하지만 호야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도착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궁금증은 감탄으로 바뀌었다.
누구나 호야의 얼굴을 상상해 보고는 했지만 실제로 본 그의 얼굴은 좋은 의미로 상상을 뛰어넘어 있던 것이다.
"와! 환호성이 정말 뜨겁네요~. 그럼 이 분위기를 이어서 예선 대진표의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미나는 커다란 환호에 당황하지 않고 리허설을 했던 대로 진행을 이어 나갔다.
미나가 팔을 뻗어 무대 뒤의 전광판을 가리키자 선수들의 영상이 끝나고 이니티움의 로고를 띄우고 있던 화면에 총 32개의 빈칸이 그려져 있는 대진표가 띄워졌다.
그리고 랜덤으로 공을 배출하는 형태의 추첨기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대진표는 선수들이 본인 손으로 직접 정하겠습니다. 이 추첨기 안에는 1번부터 32번까지의 숫자가 써진 공이 들어 있으며 전광판에 띄워진 대진표의 제일 왼쪽이 1번, 제일 오른쪽이 32번입니다."
대진표의 추첨은 입장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호영은 마지막으로 입장해서 추첨기를 돌릴 일이 없었기에 신기한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이러한 장소에 올 일이 없다 보니 모든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호영의 시선이 문득 관객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호영은 관객석 안에서 유아와 도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객석의 조명이 어두워 얼굴을 판별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도반과 같은 체격을 가진 이가 흔하지는 않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호영은 도반과 유아를 발견하고는 밝게 웃으며 둘을 향해서 왼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유아가 씨익 웃으며 호영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도반은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었지만 호영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도 유아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 * *
"대, 대박....... 저 사람이 왜 저기에 있어?"
집에서 대학 과제를 하며 노트북을 통해 영웅 대전 오프라인 예선전의 생중계를 보고 있던 한윤서는 손에 들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는 노트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노트북 안에는 고등학생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만났던 남자의 얼굴이 띄워져 있었다.
"그, 그 사람이 호야 님이었던 거야? 말도 안 돼......."
한윤서는 지금까지 세상이 좁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부터는 믿게 되었다.
"그럼 그때 어디선가 봤다고 느꼈던 게 호야 님이라서 그랬던 건가?"
제주도의 미로 나라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느꼈던 기분은 절대 착각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디서 본 것인지가 생각이 안 나 자신의 감이 틀린 것인가 하고 생각하던 일이었는데......, 그게 그가 호야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봤던 것이라면 설명이 되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하지만 한윤서는 그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로 나라에서 만났을 때 호야 님을 어렴풋이 떠올렸던 것이라면 그다음에 게임 안에서 만났을 때에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이렇다 할 느낌은 받지 않았었다.
"그렇다는 건 옛날에 실제로 본 적이 있다는 소린데......, 어디서 봤던 거지?"
한윤서는 과제도 내버려 둔 채 머리를 굴렸다.
뭔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한 것이 지금 이 상태로는 과제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면 간접적으로 본 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호야와 실제로 만났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자 한윤서는 생각의 방향을 바꿔 봤다.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아!"
자신의 기억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한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인 한지철의 서재로 향했다.
한지철의 서재에는 그가 언론인으로 생활하면서 그가 사회의 이슈라 생각하고 스크랩해 왔던 기사들이 연도별로 스크랩북으로 정리되어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윤서는 그중에서 이전에 서울에서 일어났던 대참사인 지하철 화재 사고에 관한 기사들을 찾기 시작했다.
워낙 큰 사고였기에 한지철은 지하철 화재 사고에 대한 스크랩북을 아예 따로 만들어 놓았었다.
그 스크랩북을 찾은 한윤서는 그것을 책장에서 꺼내 한 페이지씩 넘기며 원하는 기사를 찾기 시작했다.
"윤서야, 여기서 뭐 하는 거니?"
그때 오랜만에 휴일을 맞이하여 집에서 쉬고 있던 한지철이 서재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서재의 안으로 들어와 한윤서를 발견했다.
"아빠, 그게 뭐 좀 찾는 게 있어서요."
"찾는 거?"
한윤서의 말에 한지철은 그녀가 넘겨보고 있는 스크랩북의 정체를 확인했다.
"지하철 화재 사고에서 뭘 찾고 있다는 거야? 뭔지 말해 주면 아빠가 찾아 줄게."
"그게 뭐냐 하면......, 아! 찾았다."
스크랩북을 넘기던 한윤서는 자신이 찾던 것에 대한 기사가 스크랩된 페이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윤서의 반응에 그녀의 옆에 다가간 한지철은 스크랩된 기사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서울 지하철 화재 사고, 눈물이 마르지 않는 장례식 현장....... 이걸 찾던 거야?"
"아니, 내가 찾던 거는 이거예요."
한윤서가 가리킨 곳은 기사와 같이 실려 있는 사진의 한구석이었다.
사진은 유가족이 엎드려 통곡하는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찍혀 있는 것이었는데 한윤서가 가리킨 그들의 뒤 구석에 교복을 입은 젊은 학생이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같이 찍혀 있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아빠! 한림 일보 회장이면서 눈물남도 기억 못 해요?"
"그건 기억하지. 내 말은 그걸 왜 찾는 거냐는 소리야."
"눈물남이 호야 님이었어요!"
"뭐?"
한지철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윤서는 서재에 놓인 노트북의 전원을 켜 현재 생방송 중인 오프라인 예선 현장의 영상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마침 화면에는 호야가 잡히고 있는 참이었다.
"봐요! 동일 인물 맞죠?"
"......."
한지철은 한윤서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화면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재건이 부탁으로 만든 원고는 다 폐기해야겠어. 그가 부탁했던 대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야기가 퍼질 것 같아.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핸들만 잘 꺾어 주면 될 거야. 그편이 저 아이와 우리 한림 일보에 리스크가 적을 테고.......'
"아빠?"
속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지철은 자신을 부르는 한윤서의 목소리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다, 윤서야."
"아, 아빠! 내가 머리 만지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었죠!"
"어어, 그래.......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