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7권 2화
2. 판도라의 상자
루제로스의 수도 이즈바론트의 광장에서 킹이 분수대에 엉덩이를 기댄 채 호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약속 시간이 다 되었지만 근처에 호영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 오시지......."
이니티움의 캐릭터는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온다.
그렇기에 킹은 호영의 얼굴을 가진 남자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바람맞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자신과 호영의 현실에서의 거리는 벽 하나,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바람맞힌 것은 아닐 것이라고 금방 자신을 타일렀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신 건가? 호출 버튼을 눌러 봐야 하나?'
호영이 오지 않아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생겨 갈 때쯤 킹에게 한 인물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안녕."
"형님......? 지금 동대륙에 계신 거 아니었어요?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그 정체는 호야였다.
동대륙에 있을 사람이 왜 서대륙에 와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에 킹이 호야에게 질문을 던지자 호야가 볼을 긁적였다.
"너를 만나러 왔어."
"저를요?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아시고......, 아아."
고등학생 랭커인 킹은 꽤나 유명한 신분이었기에 커뮤니티에 그의 닉네임을 검색하면 그를 어디서 봤다는 등의 글들을 볼 수 있었다.
킹은 호야가 그것을 보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호야가 자신을 찾아와 준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선약이 있었다.
"기껏 찾아와 주셨는데 죄송해요. 이미 선약이 있어요."
"......하아."
킹의 말에 호야는 한숨을 내쉬었고 곧바로 킹의 손을 붙잡고 광장을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향했다.
"혀, 형님! 저 광장 벗어나면 안 돼요! 상대방이랑 친구 추가도 안 되어 있어서 엇갈리면 큰일이에요!"
"나야."
"네?"
"그거 나라고."
호야가 인적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온 뒤 뒤를 돌아 킹을 확인하자 그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백설의 말대로 킹은 이상한 데서 눈치가 없었다.
음성 변조가 되는 것도 아닌데 왜 호야와 호영의 목소리가 같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둘을 다른 존재로 떼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
킹이 의아함에 입을 열자 호야가 가면을 벗었고 호야의 얼굴을 본 킹이 손으로 눈을 비벼 댔다.
"어......, 그......, 호영 형님......?"
"그래."
"와......, 와, 와, 와 진짜......."
킹은 크게 놀란 것인지 눈과 입을 크게 벌린 채 한참이나 말을 더듬다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밝은 표정으로 제대로 입을 열었다.
"와......! 세상 한번 진짜 좁네요! 형님이 진짜 형님이 된 거네요! 와 진짜, 이런 일이 말이 되는 일인가......."
기쁨과 놀라움, 감동을 섞은 말을 내뱉던 킹이 불현듯 말을 멈추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아까 자신이 호영에게 했던 말들이 떠오른 것이다.
-미리 말해 주셨다면 제가 캐릭터 육성을 도와 드렸을 텐데.......
-제가 이래 보여도 랭커라고요!
-사양하실 것 없어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으아아아아......! 내가 감히 누구한테 그런 망발을 내뱉었던 거야!'
마치 흑역사를 만들어 낸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애초에 누나는 왜 미리 말을 안 해 줬던 거야!'
호영이 이니티움을 한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 백설이니 그녀는 처음부터 호영이 호야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 킹은 확신했다.
미리 알려 주지 않은 백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러한 생각들을 하며 킹이 붉어진 얼굴을 가렸던 손을 슬쩍 내리고 호야를 바라보니 그가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호민아, 내가 캐릭터 육성이라도 도와줄까?"
"아, 아뇨. 괜찮......."
"내가 이래 보여도 랭커야."
"으아아아악! 제발!"
호야는 장난삼아서 아까 전 킹이 했던 말을 킹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의 말로 인해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워진 킹은 비명을 내지르고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양할 필요 없어. 내가 도와줄게!"
"으아아악! 제가 잘못했으니까 그만해 주세요!"
킹의 반응에 호야는 참던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 *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고 신혼여행을 떠났던 이예숙과 백재건이 귀국했다.
둘은 신혼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하여 하루의 휴식을 취했고, 그다음 날 호영을 포함한 셋은 신혼집의 이삿짐을 풀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였다.
짐 자체는 백재건과 이예숙이 신혼여행을 간 사이에 호영이 이사업체를 불러 미리 옮겨 놓았기에 셋이 할 일은 포장을 뜯는 것밖에 없었다.
가구의 대부분을 새로 장만한 상태이기에 이전 집에서 옮겨 온 것들은 얼마 없었지만 말이다.
"엄마, 이거 어디에 갖다 놔요?"
"응? 아, 그거! 그거 들어가 있는 상자가 어디에 있나 했더니 거기에 있었구나. 2층에 작은 방 하나 따로 빼놓은 데 알지? 거기에 가져다 두면 엄마가 나중에 정리할게."
"알았어요."
이예숙의 말에 호영은 상자를 통째로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와 이예숙이 말한 방에 도착하자 그 안에서 상자 하나를 옆에 열어 놓은 채 바닥에 앉아 있는 백재건의 뒷모습이 보였다.
"뭐 하세요?"
"응? 아아, 호영이구나. 그냥 정리하면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다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이미 짐을 쌀 때 한번 보고서 되새김질했던 것들인데 내가 참 주책이지?"
호영이 백재건에게 다가가 그의 다리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백재건을 생각에 잠기게 한 원인은 앨범이었다.
옆에 놓인 상자 안을 확인해 보니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섞여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그중 몇 개에서 호영은 매우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양 중학교라고 새겨진 가죽 커버의 두꺼운 졸업 앨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호영의 모교이기도 한 학교 이름이었기에 호영은 자신의 졸업 앨범이 잘못 섞여 들어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졸업 앨범을 꺼내 보았다.
그리고 호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졸업 앨범 표지 상단에는 그 학교의 졸업생이자 졸업 앨범의 주인인 학생의 사진이 붙는다.
호영이 꺼내 든 졸업 앨범에는 그의 사진이 아닌 다른 인물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호영도 잘 아는 인물의 사진.
"왜 지한이 사진이 여기에......."
어째서 그의 졸업 앨범이 이러한 곳에서 나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한이를 아니?"
그때 백재건이 입을 열어 왔다.
"아아, 그러고 보니 호영이 너랑 같은 중학교 출신이구나. 오다가다 마주친 적은 있겠네."
"......왜 얘 졸업 앨범이 여기에 있어요?"
"왜냐니, 그야 아저씨...... 아니, 아빠 아들이니까?"
호영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방금 뭐라고......?"
"아빠 아들이라고. ......지금은 먼 곳으로 떠났지만."
백재건의 말에 호영의 눈에서 물줄기 하나가 흘러내렸다.
문득 옛날에 문지한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냥 친구가 아닌 가족 같은 친구가 되는 거야! 베스트 프렌드!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지만 그가 말했던 가족 같은 친구가 정말로 가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왜 우는 거니? 설마 지한이랑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뇨, 오히려 그 반대예요."
호영은 백재건에게 문지한과의 인연을 털어놓았다.
자신 때문에 문지한이 지하철을 타서 사건에 휘말렸다는 것까지 말이다.
백재건은 호영의 말에 크게 놀라면서도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예상치 못한 인연이 기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기쁨보다도 호영이 느끼고 있을 죄책감을 덜어 주는 것이 먼저였다.
'혼자서 짊어지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백재건이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호영아, 울지 말라고는 안 할게. 하지만 자신 때문에 지한이가 죽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 줬으면 해. 만약 지한이가 호영이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 안다면 뭐라고 할 것 같아?"
"......그딴 식으로 생각할 거면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바보같이 그게 뭐 하는 거냐고......."
"어, 어어....... 잘 아네."
문지한과 아슬아슬하게 1년도 채 살아 보지 못한 자신이 아는 것을 소꿉친구인 호영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문지한은 자신 때문에 다른 이의 속이 상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고 성격도 강했다.
그러한 것들을 토대로 호영이 한 말을 그대로 하는 문지한의 모습을 생각한 백재건이 겉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때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백재건은 진지한 얼굴로 상자 속을 뒤적거리며 물건 하나를 찾기 시작했다.
"호영아, 그때 분명 지한이가 '만나서 영상을 보여 주겠다'고 한 거지?"
"네? 네에."
'만나서 영상을 보여 주겠다'고 한 것은 다르게 생각해 보면 '영상을 무언가에 담아 왔다'라는 것이 된다.
지하철 화재 사건이 있었던 당시에 백재건은 보호자 자격으로 문지한의 유류품을 넘겨받았었고 그 안에는 영상을 담을 수 있는 물건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상실감에 굳이 열어 보지 않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쭉 이어진 상태이기에 아직 확인하지는 않은 물건이었다.
영상이 그 안에 담겨 있을 가능성은 꽤나 높았다.
"찾았다."
백재건이 상자 속에서 꺼댄 것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USB였다.
"그건......?"
"응?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것보다 예숙 씨가 찾겠다. 슬슬 정리 마무리해야지?"
USB를 찾아낸 백재건은 핑계를 대어 호영을 이예숙이 있는 곳으로 내려보냈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이 안에 있는 것을 호영에게 보여 주는 것은 겨우 아물어 버린 상처를 다시 벌리는 꼴이 될 것이다.
'......내려갔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이예숙과 호영의 대화 소리를 확인한 백재건은 USB를 들고서 작업실로 만들어 둔 방으로 이동해 노트북의 전원을 켜고 USB를 꽂았다.
USB 안에는 하나의 폴더가 들어 있었고 그 폴더의 이름은 '영지 고등학교 CCTV'였다.
폴더를 더블 클릭 하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자 수십 개의 영상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미리 보기를 통해 보이는 영상의 한 장면이 모두 같은 것을 보아하니 영상 전체가 하나의 CCTV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중 하나를 클릭하자 학교 건물의 뒤편과 그 앞의 매점 부분이 띄워졌다.
영상의 길이는 1시간 남짓, 아래에 표시된 시간을 보아하니 점심시간의 영상을 통째로 자른 듯이 보였다.
영상을 빠르게 감으며 확인하던 백재건이 눈을 찌푸렸다.
영상에 호영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교의 유리창에 흐릿하게 학생 여러 명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모습이 흐릿해 얼굴이 판단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명의 학생이 한 명의 학생에게 폭행을 가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영상들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영상들 중에서 날씨가 유난히 맑은 날에 찍힌 영상에는 유리창에 학생들의 얼굴이 제대로 비치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사용해 영상을 확대하자 명찰의 이름들이 아슬아슬하게 읽혔다.
그리고 그만큼 폭력의 현장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건 일단 내가 가지고 있자."
당장이라도 없애고 싶은 호영의 상처가 담긴 영상들이었지만 나중 일은 모르는 법이다.
백재건은 호영에게 비밀로 한 채 이 USB를 미래에 일어날 만약에 대비해 소중하게 보관하기로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