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6권 23화
23. 축복받을 날(3)
집에 어떻게 돌아온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교무실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들을 들었을 때 속이 뒤틀려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 뒤에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호영은 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어 천장에 달린 불이 꺼져 있는 LED 등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소한 것으로라도 생각의 문을 빼꼼히 열게 된다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봐주지 않고 자신의 머릿속을 휘저어 놓을 것만 같았다.
아군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했던 이는 아군이 아니었다.
호영의 머릿속에 방금 전에 들었던 선생님들의 대화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하나씩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호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호영의 눈동자는 초점 없이 공허하기만 했다.
자신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괴로워.......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며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기 위하여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호영은 그제야 자신이 커터 칼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바둑이의 피로 붉게 얼룩져 있는 커터 칼.
그것을 본 호영은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 * *
쏴아아아-.
엘리시아 웨딩 홀 7층의 신부 대기실 뒤편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작은 화장실은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기에 건물 구조도를 보지 않은 사람은 존재조차 모르는 곳이다.
엘리베이터 바로 근처에 위치한 화장실은 매우 커다랬고 오늘 7층의 하객 수도 많지 않았기에 굳이 다른 화장실을 찾는 이가 없어 오늘 이 화장실을 찾은 것은 호영이 유일했다.
세면대를 양손으로 집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호영의 턱선과 앞머리에서는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스으읍, 하아."
숨을 내쉬어 속을 진정시킨 호영은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잠근 뒤 핸드 타월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 내었다.
'설마 그 말을 실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때 정말로 성공했으면 영원히 몰랐을 현실이었겠지.'
그리 생각하며 호영은 소매를 살짝 걷어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가늘고 굵고 긴 흉터들이 새겨져 있었다.
"......."
가해자의 기억 속에서는 찰나에 불과하지만 피해자의 기억 속에서는 아주 길고 긴 영겁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기억해야 할 사람은 잊어버리지만 잊어버려야 할 사람의 머릿속에는 영원히 남는다.
그 사실이 비참하고 화가 나 속이 들끓고 있었다.
"......지금 이러면 안 되겠지."
오늘은 기쁘고 즐겁고 축복받아야 할 날이었다.
그런 날에 자신이 이러한 마음으로 있으면 주변에 폐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호영은 자신의 양 볼을 찰싹 때려 보이고는 밝게 미소 지으며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초대받지 않은 거북한 손님이 와 있지만 겉으로 티를 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애써 스스로를 세뇌시킨 호영은 밝은 미소와 함께 화장실을 나와 이예숙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직전이었기에 하객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여서 신부 대기실에는 이예숙과 그의 입장을 도와줄 직원들만이 남아 있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이예숙의 얼굴이 살짝 굳어 있는 상태였다.
"......아들, 괜찮아?"
호영을 발견한 이예숙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을 듣고서 호영은 이대현이 신부 대기실에도 찾아왔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 상태로 식장에 들어갈 게 아니라면 얼굴 좀 펴세요. 오늘의 주인공이 축 처져 있으면 어떡해요."
"아들......."
"에헤이, 울지 마시고. 우는 건 이따 할아버지 앞에서잖아요, 네?"
"......응, 알았어."
이예숙이 애써 미소를 보여 주자 호영도 그것에 답하듯이 더욱 밝게 웃어 주고는 먼저 식장으로 들어와 신부 측 부모석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타이밍 좋게 식장안의 조명이 모두 꺼지더니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식장 한편에 서 있는 단상에 핀 조명이 떨어졌고 사회자를 맡은 최창민이 멘트를 내뱉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결혼식의 사회를 맡은 최창민이라고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신랑 백재건 군의 기저귀도 갈아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때 그 아기가 결혼을 하게 된다니 참 감개무량하네요."
형식적인 멘트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인 듯 최창민으 살짝 훌쩍이며 손가락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오늘 결혼식은 주례 없이 진행되기에 하객 여러분들의 큰 협조가 필요합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해 주세요. 그럼 지금부터 신랑 백재건 군과 신부 이예숙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최창민의 말이 끝나자 우례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한 박수 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삼아 최창민이 화촉점화를 알리자 식장 중앙 길에 조명이 들어와 길을 밝혀 주었다.
엘리시아 웨딩 홀은 특이하게도 중앙 길의 양옆으로 새하얀 조형 나무가 늘어서 있는데 그것이 조명을 받아 빛나면서 마치 나무들이 빛 가루를 뿌리는 듯한 환상을 심어 주고 있었다.
그 빛 가루들을 받으며 강은영과 이예숙의 선배인 양수진이 손을 꼭 잡은 채 식장 안으로 입장했다.
이예숙의 선배인 양수진과 그의 남편인 방정훈 부부는 이예숙에게는 정말 부모나 다름없는 분들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이었기에 이예숙은 둘에게 부모석에 앉아 줄 것을 부탁했고 둘은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식장에 입장한 강은영와 양수진은 주례석 양옆에 준비되어 있는 초에 동시에 불을 붙인 뒤 하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각자의 자리에 착석했고 강은영이 옆에 앉아 있는 백윤택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 보았다.
"시아버님, 벌써부터 눈이 촉촉해지시면 도련님 입장하고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크흠, 내가 눈이 촉촉해지기는 무슨. 내 눈물은 그렇게 싸지 않다."
백윤택의 말에 강은영은 소리 없이 웃어 보였고 그때 최창민이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다음은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랑이 입장할 때 하객 여러분들의 큰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신랑 입장!"
그러자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이 당찬 느낌의 피아노 연주로 바뀌어 박수 소리와 함께 식장 전체로 펴져 갔다.
백재건도 음악에 영향을 받은 모양인 것인지 얼굴을 굳히고는 꽤나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걸어 길 끝에 도착했고 그 모습을 본 최창민이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크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하! 아무래도 신랑이 많이 긴장한 모양입니다. 이게 이렇게 빠르게 들어올 길이 아닌데....... 뭐, 그만큼 신부를 빨리 보고 싶다는 뜻이겠죠? 그럼 이제 오늘의 진짜! 주인공인 신부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아름다운 신부를 위해 신랑 때보다 더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신부 입장!"
식장 안에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이예숙이 방정훈의 손을 잡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천천히 걸음과 같이 새하얀 바닥에 끌리는 기다란 면사포와 드레스는 마치 새하얀 강처럼 물결쳤고 이예숙은 그 새하얀 강 위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한 마리의 백조 같았다.
그녀의 위로 떨어져 내리는 나무의 빛 가루들은 그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일 아름답고 축복을 받아야 할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길 끝에서 바라보고 있는 백재건의 눈은 놀라움으로 인해 크게 뜨였다.
이미 한번 본 모습이었지만 신장 안에서 보는 것은 역시 달랐다.
"우리 예숙이 잘 부탁해요."
"예, 형님!"
백재건의 앞에 도착한 방정훈이 이예숙의 손을 그에게 건네고 자리로 돌아가자 둘이 손을 꼬옥 잡은 채 주례석의 바로 앞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주례석의 앞에 도착한 둘은 최창민의 말에 따라 서로에게 부부로서 첫 인사를 나눈 뒤 하객들을 향해서 돌아섰다.
그때 마치 짠 것처럼 백재건과 이예숙의 시선이 백윤택과 강은영에게, 그리고 양수진과 방정훈에게로 움직였고 마지막으로 둘의 뒤에 앉아 있던 호영에게서 멈추었다.
둘의 따듯한 미소에 호영의 마음도 따스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 호영의 머릿속은 지금의 행복으로 가득할 뿐이어서 이대현을 만났던 일은 떠오르지 않아 진심으로 둘을 축복해 줄 수 있었다.
그 후 백재건과 이예숙의 혼인 선언문의 낭독이 이어졌고 성혼 선언문의 낭독은 백윤택이 맡아 주었다.
그는 성혼 선언문을 낭독하는 내내 딱딱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그의 붉어져 있는 눈가가 그가 누구보다도 둘을 축하해 주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성혼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축사가 진행되었고 축사가 끝나자 하객들이 준비해 온 축가가 진행되었다.
신랑 측 하객, 신부 측 하객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들이 둘을 위해서 축가를 불러 주었고 이전에 성악을 배운 적이 있던 이예숙의 후배가 축가를 시작하자 누군가가 호영에게 슬며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호영의 어깨를 두드린 사람은 마이 웨딩의 대표인 조한철이었다.
"어이, 아드님. 슬슬 준비해야지?"
"네."
호영은 조한철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식장 입구 근처의 어두운 구석에 한 손에는 마이크를, 한 손에는 장미 한 송이를 든 채 눈을 감고 축가들이 모두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전 프러포즈 때에는 이예숙이 백재건의 프러포즈를 가로채 버렸다.
그 당시에만 해도 백재건은 매우 기쁘고 행복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 프러포즈를 결국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예숙에게 프러포즈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하여 마이 웨딩의 도움을 받아 축가를 계획해 놓았다.
거기에 이예숙만 도와주고 자신은 안 도와주는 것은 치사하다는 백재건의 말 때문에 호영이 다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두 분 성격이 참 똑같아.'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감고 있던 눈꺼풀 너머로 불이 꺼진 것이 느껴졌다.
그때 호영은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대로 미리 감고 있어서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의지해 신랑 신부가 걸어갔던 식장 중앙을 구둣발 소리를 내며 천천히 걸었다.
그러자 그 소리에 맞추어 결혼식 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노래인 가수 이중기의 '결혼할래'가 흘러나왔고 어둠 속에서 호영의 노랫말이 스피커를 통해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호영이 백재건과 이예숙의 바로 앞까지 도착하자 식장에 다시 불이 들어와 신랑 신부와 호영을 비추었다.
"우리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닮은 아이 하나씩 낳고♪"
조명이 자신을 비추자 호영은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며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장미 한 송이를 이예숙에게 건네고는 뒤로 물러났다.
장미를 받은 이예숙은 매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축가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호영이 노래 한 소절을 마저 부르자 주례석 쪽에 핀 조명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전 이예숙의 프러포즈에도 도움을 주었던 마이 웨딩의 직원이 그 조명을 받으며 주례석 뒤쪽에서 천천히 고개를 내밀어 그 다음 소절을 이어 부르기 시작했다.
"천년만년 너와 함께 아프지 않고 살고 싶어♪"
그 뒤로도 사회자 단상 아래에서, 하객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보 아래에서, 기둥 뒤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오며 노래를 한 소절씩 불렀고 이예숙에게 장미 한 송이씩을 건네었다.
이예숙에게 장미를 건넨 그들은 백재건과 이예숙을 둘러싸듯이 반원 모양으로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예숙의 바로 앞자리는 비워진 채였다.
그 자리의 주인은 이예숙의 옆에 서 있는 백재건이었다.
미리 연습했던 대로 마이 웨딩의 직원이 모두 자리를 잡자 백재건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품 안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꺼내어 이예숙에게 건네고는 비어 있는 자리로 가 다시 품속에서 마이크를 꺼내어 노래를 이어 불렀다.
"내가 조금 더 사랑해 줄게♪"
"내가 조금 더 사랑해 줄게......."
그런 백재건의 노래에 호영과 마이 웨딩의 직원들이 화음을 넣어 주었다.
이때를 위하여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던 듯 그들의 화음은 한 치의 엇나감도 없었다.
이예숙은 그러한 축가를 들으며 기쁜 마음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윽고 노래도 막바지에 다다라 백재건이 홀로 무심하게 툭 말하듯이 마지막 가사를 내뱉었다.
"나랑 결혼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