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6권 20화
20. 떨칠 수 없는 과거(1)
중학교와는 다르게 첫날 수업을 시간표대로 모두 진행한 후 하교 중이던 호영은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진동 모드로 해 놓았던 호영의 스마트폰이 주머니에서 울어 댔고 스마트폰을 꺼내어 액정의 국제 전화 표시를 확인한 호영은 씨익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우리 호! 새 학기 첫날은 어땠냐?
"으음, 그냥저냥? 그것보다 그쪽은 새벽이지 않아? 뭐 하러 벌써부터 일어나 있어?"
호영의 말에 그의 전화 상대인 문지한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후후후후......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아직 안 잔 거야! 하이 스쿨 주제에 과제가 대학 저리 가라야 진짜! 17살에게는 너무 가혹하다고!
"하하하하하."
-뭐, 이건 농담이고. 내가 선택한 길이 길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과제하다가 지금쯤이면 하교 시간일 것 같아서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 한번 해 봤어. 국제 전화라 요금 많이 나와서 통화는 길게 못 할 것 같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그래, 열심히 해라."
-당연한 소리!
뚝-.
전화가 끊기자 호영은 다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문지한이 갑자기 유학을 간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는 크게 놀라고 걱정도 많이 되었었다.
하지만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니 다행이라고 호야는 생각했다.
'나도 잘 지낼 것 같고 말이야.'
오늘 느낀 바로는 반 친구들도 대체로 다 착한 것 같고 말이다.
* * *
"안녕, 우리 이렇게 얘기해 보는 건 처음이지?"
"응? 응."
새 학기가 시작되고 2주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 체육 시간에 이대현이 먼저 호영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아직 짝이 안 정해졌다면 나랑 해 주지 않을래? 애들이 치사하게 나만 빼놓고 짝을 짰단 말이지."
"미안해, 난 이미 짝이 있어."
체육 선생님이 일찌감치 내놓은 수행 평가 종목인 배드민턴 복식, 호영은 그것을 김희반과 같이 하기로 이미 정해 놓은 상태였다.
호영은 먼저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이대현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옆에 있던 김희반이 호영의 말을 부정했다.
"에이, 나는 괜찮으니까 대현이랑 해. 거절하면 괜히 무안해지잖아."
"하지만 먼저 정한 거잖아."
"그런 거 나는 모르겠고! 나는 이 기회에 수진이 짝을 꿰차러 가 보도록 하마. 그럼 잘해 보셔!"
이대현과 친분을 쌓을 기회는 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호영이 그와 친분을 쌓게 된다면 호영의 친구인 자신도 그와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김희반은 그러한 계산으로 이대현에게 호영을 양보해 준 것이었다.
"어, 야! 김희반!"
호영이 잽싸게 달려가는 김희반을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 호야가 뒷목을 긁적이자 이대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나랑 짝을 해 줄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이 일을 계기로 호영은 이대현과 어울리게 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김희반과 하던 것을 이대현과 하게 되었고 점심시간 또한 그와 그의 무리들과 함께해야 했다.
김희반에게 같이 가자고 권해 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괜찮다며 호영의 권유를 거절했다.
호영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대현이 김희반에게 알게 모르게 눈치를 주고 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래도 이대현이 없을 때에는 평소처럼 잘 어울렸기에 호영도 지금 상황에 불만은 없었다.
이대현도 착하고 좋은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뀌게 되었다.
"희반아, 매점 가자. 애들이 매점에 햄버거가 새로 들어왔데."
"진짜? 매점에 신메뉴가 들어왔다면 이 김희반 님이 평가를 내려 줘야겠지. 빨리 가자, 쉬는 시간 5분밖에 안 남았다!"
"내 것도 부탁해도 될까?"
그때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호영은 김희반과 같이 매점에 가려 했고 매점에 가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는 호영에게 이대현이 말을 걸어왔다.
"나도 꼭 한번 먹어 보고 싶은데 매점처럼 좁고 사람 많은 곳은 조금 약해서 말이야....... 돈은 줄 테니까, 부탁해도 될까?"
"그래,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호영은 이대현에게 천 원짜리 두 장을 받아 김희반과 같이 매점으로 향했다.
처음 시작은 그렇게 아주 사소했다.
덤으로 들어줄 수 있는 간단한 부탁이었고 친구들 사이에 일어나는 약간 과격한 장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소한 것이 쌓이고 쌓여 가고 그것이 당연시되어 사소함의 기준이 커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소한 일이 아니다.
부탁은 곧 명령이 되었고 장난은 장난이라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호영과 이대현의 사이가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대현은 아주 철저하게 호영을 괴롭혔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호영에게 폭력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그는 교실이라는 열린 장소가 아닌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강당 뒤편에서만 호영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가했다.
폭력을 가해도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얼굴과 손은 절대로 피했다.
그렇기에 겉으로만 보았을 때 호영은 멀쩡한 반면 교복 아래에는 멍 자국투성이였다.
이대현이 하는 행동만을 본다면 자신이 호영을 괴롭힌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가 강당 뒤편으로 장소를 제한한 이유는 물적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가해자 이대현, 피해자 선호영.
학교에서 그 사실을 입 밖으로 직접 내는 이는 없었지만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호영을 도와주려 하는 이도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인연들은 모두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을 두려워해 호영을 멀리했다.
그리고 김희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 자리가 바뀌지 않아 호영과 짝을 유지하고 있던 그는 1교시가 시작되고 나서 7교시가 끝날 때까지 호영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게 되었다.
이제 호영은 김희반에게 있어서 친구가 아니었다.
호영은 이대현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너에게 뭔가 잘못을 한 일이 있다면 사과할 수 있게 알려 달라고.
그런 호영의 질문에 이대현은 '그냥 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답했다.
이대현의 괴롭힘에 이유 따위는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호영의 존재가 그에게 있어서 거슬리는 존재였다는 것뿐이다.
그런 이대현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했던 호영은 상담을 통해서 담임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호영의 상담을 들은 담임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호영이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호영아, 선생님이 보기에는 네가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는 것 같아."
"네......?"
"사내자식들끼리 지내다 보면 싸움 좀 날 수 있는 거고 네가 사 줬다는 것들도 대현이 입장에서는 그리 큰돈은 아니야. 그래서 급하게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닐까?"
"아니, 선생님. 그게 아니라......."
"이런 일로 선생님 힘들게 하지 말고 대현이랑 그냥 화해하렴. 호영이가 먼저 용기를 내서 노력하면 괜찮을 거야."
"......."
담임 선생님은 호영과 이대현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 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둘의 사이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피해자와 재벌 집 손자인 가해자 중에서 재벌 집 손자와 자신의 평온을 고른 것일 뿐이다.
호영은 이때 학교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해자 이대현, 피해자 선호영.
학생과 교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모두가 모르는 것이기도 했다.
* * *
"다녀왔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호영은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가방만 책상 위에 내려놓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아직 이예숙이 퇴근하지 않았기에 호영 혼자뿐인 집 안은 너무 고요했다.
호영은 집에 돌아와서 이예숙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이 시간이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다음으로 제일 싫었다.
고요하기만 한 이 시간은 호영에게 온갖 생각을 다 들게 했다.
안 좋은 생각, 희망에 찬 생각, 자신과 남을 탓하는 생각, 왜 이렇게 된 것인가 하는 생각.
어쩔 때는 지금 이 시간이 학교보다도 괴로웠다.
"......."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 있던 호영은 교복을 갈아입기 위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교복을 벗다가 문득 방문에 붙어 있는 거울을 바라보니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셔츠가 벗겨진 호영의 몸에는 연두색과 빨갛고 파란 멍이 여기저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거울을 통해 마주친 자신의 눈동자에는 암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짝-.
호영은 자신의 양 뺨을 찰싹 때리며 표정을 고치기 위해 억지로 미소 지으며 거울을 통해 자신의 표정을 확인했다.
몸의 멍은 가릴 수 있지만 얼굴은 가릴 수 없다.
이런 표정을 이예숙에게 보여 줬다가는 괜한 걱정을 하게 할 수도 있었다.
이예숙은 호영이 괴롭힘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이제 막 팀장의 자리에 올라 한창 힘들 이예숙에게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호영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이예숙에게 상담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예숙의 푸근한 미소를 볼 때면 그 미소를 지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말하지 못했다.
"아드을~! 엄마 왔다!"
"다녀오셨어요."
그 뒤로 시간이 흘러 일을 끝마친 이예숙이 한 손에 커다란 종이봉투를 든 채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그 종이봉투는 뭐야?"
"아, 이거? 후후후, 기대하시라! 짜잔!"
이예숙이 입으로 효과음을 내며 연 종이봉투에는 포장지에 영어가 적힌 과자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옆 팀 팀장님이 출장 가셔서 사 오신 거야. 고맙게도 우리 팀에도 나눠 줬지 뭐니. 그걸 엄마가 잔뜩 챙겨 왔지!"
"이렇게 많은 걸 어느 세월에 다 먹으려고?"
"누가 우리끼리 먹는대? 학교 갈 때 조금 들고 가서 친구들도 좀 나눠 줘. 그 희반이라고 했나? 걔 얼굴 못 본 지도 꽤 된 것 같다. 순간 지한이처럼 유학이라도 간 줄 알았어."
"......."
이예숙의 말에 종이봉투에서 과자들을 꺼내고 있던 호영이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아들?"
"응? 응, 그래....... 언제 한번 집에 데리고 올게."
"흐음......."
이예숙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호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들이지만 무언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응?"
이예숙의 물음에 호영은 들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고민 같은 거 없어."
"그래?"
하지만 호영은 결국 이예숙에게 말하지 못하고 웃으며 거짓말을 내뱉었다.
호영의 대답이 미심쩍기는 했지만 호영이 웃으며 답을 해 주자 이예숙도 그것에 답하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있다면 자신에게 말을 해 주었을 테니까.
지금까지 호영은 자신에게 비밀 같은 것을 만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예숙은 호영을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