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6권 13화
13. 그 아래에 있던 것(1)
자세히 보지 않으면 존재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얇은 금이었다.
그 미세한 금에 손을 대려던 순간 호야는 밖에서 가까워져 오고 있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황제가 침소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 기척에 호야는 금의 정체를 확인하려던 손을 멈추고 곧장 귀환석을 사용하여 흑룡대의 주둔지로 복귀하였다.
* * *
그다음 날 밤이 되자 호야는 어제 밤과 같이 궁궐에 있는 권일우의 침소로 향했다.
오늘 밤에 퀘스트를 끝낼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 권일우라는 보스 몬스터를 잡을 시간도 확보해 두었다.
궁궐로 향하는 길, 에반이 수정구를 통해 연락을 취해 왔다.
-우리 쪽 준비는 모두 끝났어. 권현우 님이 황위에 오르고 호야 너를 통해서 연락을 준다면 바로 이동을 시작할 거야. 나는 그 즉시 워프로 날아갈 거고.
"네, 알겠어요."
에반에게 답한 호야는 궁궐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 뒤 어젯밤에 왔던 것처럼 권일우의 침소에 침입한 호야는 이전에 보았던 침대 아래 단에 있는 금을 살펴보았다.
퀘스트 완수라는 목표가 있어서 다른 길로 새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바두가 말한 피 냄새 때문에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호야는 어젯밤보다 빠르게 궁궐에 침입해 있었다.
궁금증으로 인해 미세하게 나 있는 금을 따라서 손가락을 움직인 호야는 그 금이 건장한 남자 한 명이 아슬아슬하게 지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의 정사각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것도 설마 비밀 통로 같은 건가."
최도와 같이 행동했을 때의 일이 원인인 것인지 호야는 이것이 비밀 통로의 입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에 대비하여 황제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비밀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런 호야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호야가 여기저기를 더듬거리자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며 정사각형의 안에 손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해서 손을 넣고 몸 쪽으로 당기자 부드럽게 문이 열렸고 그 아래로 돌을 쌓아 만든 듯한 벽에 줄사다리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허......."
호야는 자신의 생각이 맞은 것에 놀라면서 줄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와 횃불로 주변을 밝혔다.
흙으로 되어 있는 바닥, 옆으로 길게 늘어진 돌벽, 통로가 아닌 커다란 공동처럼 보였다.
내려온 깊이를 헤아리면 아마 건물 3층 정도의 높이는 될 것이다.
그리고 횃불의 빛이 닿지 않는 공동의 안쪽에서 여러 명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호야는 만일에 대비하여 움직이기 편하도록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무기를 꺼내어 손에 쥐고는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서 조금씩 움직였다.
그리고 곧 기척 중 하나가 횃불의 빛 안으로 들어왔고 호야는 그것을 보고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기척의 주인은 손과 발이 쇠사슬로 구속되어 있는 쿠로에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였다.
뒤로 가지런히 땋아 내렸던 머리카락은 까치집이 되어 있었고 풀어 헤쳐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은 나이에 맞지 않게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죽은 생선 눈을 하고 있었다.
겉에 걸친 한복에서는 저항의 흔적이 엿보였다.
호야가 들고 있는 횃불의 열기를 느낀 것인지, 아니면 호야의 존재를 눈치챈 것인지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초점이 없는 눈으로 호야를 바라보았다.
"누구......?"
"......너를 구해 주러 온 사람이야."
구해 주려고 온 것이 아니었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호야는 검을 휘둘러 소녀의 손과 발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을 잘라 내었다.
그러자 소녀가 호야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가벼워진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시선을 보냈고 소녀는 그제야 상황을 인지하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아......, 아아......, 흐윽......."
호야는 소녀를 한번 꼭 끌어안아 준 뒤 소녀의 손을 살포시 잡아 주었다.
"......그, 이름이 뭐니?"
"흐윽, 햐, 향단이에요......."
"그래, 향단아. 오빠한테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건지 말해 줄 수 있을까?"
호야의 질문에 몸을 잘게 떨던 향단은 이내 머뭇거리는 작은 목소리로 호야에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게......, 궁에서 방출되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였어요......."
향단은 궁에서 일하던 궁녀였고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일이 자신이 한 일이 되어 있었고 그것을 원인으로 궁에서 억울하게 방출되었다.
계속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부정했지만 결정이 번복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던 때에 의식이 끊겼었고 일어나 보니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 향단의 말이었다.
"어, 얼른 이곳을 나가야 돼요....... 아, 안 그러면 다음은 저일지도 몰라요......!"
향단은 호야의 소매 자락을 잡아당기며 그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향단이 원하는 대로 지금 당장 이곳을 나갈 수는 없었다.
이 공동에는 향단을 제외하고도 사람이 더 존재했으니까.
아마 그들도 향단과 비슷한 처지일 것이라는 게 호야의 추측이었다.
그리고 그때 호야에게 퀘스트가 발생되었다.
[퀘스트 '사로잡힌 궁녀들'이 발생되었습니다.]
[사로잡힌 궁녀들]
황제의 침소 아래에 존재하는 비밀 공간에서 손발이 구속된 채 붙잡혀 있는 궁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들의 안전을 위해서 바깥으로 나가 사람들의 보호를 받게 하세요.
*안전을 확보한 궁녀의 수에 따라서 보상이 증가합니다.
성공 조건: 궁녀들의 구속을 풀고 그녀들을 탈출시켜 안전을 확보하세요.
완료 보상: 경험치 상승, 구출된 궁녀들의 호감도 상승, 구출한 궁녀의 수에 따른 잔여 포인트 획득
실패 패널티: 레벨 1 하락, 칭호 '궁녀들의 원망'을 획득
"......지금 향단이가 힘들다는 거는 알아. 하지만 향단이랑 같은 처지에 있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횃불을 들고 오빠를 따라와 줄 수 있을까? 부탁할게."
"흐윽......, 네......."
퀘스트를 수락한 호야는 향단에게 횃불을 맡겼다.
향단에게 횃불을 맡긴 것은 검을 휘두르기 위해 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어둠 속에 향단을 홀로 둘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만약 이곳이 감옥이었다면 호야는 궁녀들에게 죄가 있다 생각하여 퀘스트를 수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있는 곳은 황제의 침소 아래였다.
그런 장소에 감옥을 만들 리가 없다는 것이 호야의 생각이었다.
퀘스트도 잡혀 있는 궁녀들을 구하라 말하고 있었고 뒤가 구린 냄새도 풀풀 풍겨 왔다.
호야는 횃불의 빛을 받아 가며 검을 사용해 궁녀들의 구속을 모두 풀어 주었고 그녀들을 향단과 함께 횃불의 곁에 있게 하였다.
사람이 꽤 많았기에 호야는 인벤토리에서 횃불을 몇 개 더 꺼내어 그녀들에게 건네었다.
구속을 거의 다 풀어 갈 즈음에 호야의 머릿속에 한 가지 고민이 생겨났다.
'이들을 여기서 어떻게 내보내야 할까.......'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던 것인지 구속되어 있던 이들 대부분은 도저히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근력이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만에 하나 올라간다고 해도 이 위는 도저히 쉽게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들을 모두 이곳에서 내보낼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너무 깊게 고민을 했던 탓일까.
호야는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다가오고 있는 한 인물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았다.
"쥐새끼가 기어들어 왔구나."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작은 등잔불을 들고 여유롭게 걸어오는 권일우의 모습이 보였다.
권일우가 모습을 드러내자 진정을 찾았던 여자들이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런 궁녀들을 보며 권일우가 비어 있는 손으로 그녀들을 가리켰다.
"네 녀석이 해 놓은 짓거리인가?"
"......."
"뭐,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그 대신에 이곳에서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후웅-.
권일우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바람이 일더니 그가 들고 있던 등잔불과 궁녀들이 든 횃불의 불이 모두 꺼졌다.
이 공동은 도저히 자연 바람이 들어올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방금 그 바람은 인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 바두야! 블레이즈 스텝!"
"크아앙!"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호야는 불빛을 확보하기 위하여 바두에게 블레이즈 스텝을 사용토록 했다.
호야의 의도를 알아들은 바두는 몸을 키우더니 발에 불길을 둘러 최대한 넓게 불길이 생겨나도록 공동을 달렸다.
바두의 불길로 인하여 공동이 밝아졌을 때에 권일우는 이미 호야와 얼굴이 맞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카앙-!
권일우가 무언가를 휘둘러 왔기에 호야는 바로 칼을 빼 들어 그것을 막았고 권일우가 휘둘렀던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휘둘렀던 것은 팔만큼 긴 그의 손톱이었다.
호야는 바로 코앞에 위치한 권일우의 눈동자에 붉은 핏줄들이 서는 것을 보았다.
"꺄아아아악-!"
권일우의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모습에 여자들이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최대한 먼 벽으로 달려가 몸을 웅크렸다.
그녀들이 근처에 있으면 호야에게 피해만 주는 것이었기에 좋은 판단이었다.
다행히 그 과정에서 홀로 떨어진 이는 없어 보였다.
"다른 곳에 시선을 줄 여유가 있나?"
귄일우가 그리 말하며 힘을 더해 왔기에 호야는 그의 손톱을 쳐 내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크크큭, 뭐 하는 쥐새끼인지는 모르겠다만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살아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말거라. 아, 그렇다고 해서 죽이겠다는 것은 아니다. 네 녀석은 좀 강해 보이니 저들처럼 식량으로 써 주마."
'식량......?'
호야가 권일우의 말에 의문을 품고 있자 그의 눈에 섰던 핏줄들이 범위를 넓혀 가더니 그의 눈을 모두 빨갛게 물들였다.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 없이 온통 붉은 눈과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꼭 흡혈귀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제야 호야의 시야에 권일우의 정보가 들어왔다.
[흡혈귀 권일우]
레벨: 560
연상케 하는 것이 아닌 진짜 흡혈귀였다.
호야는 퀘스트가 어째서 그를 보스 몬스터라 표현했던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닌 흡혈귀였으니까.
언제부터 흡혈귀가 된 것인지는 지금 호야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권일우가 완전히 붉어진 눈을 빛내자 호야에게 이전에 지하 땅굴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시스템 메시지들이 발생되었다.
"호오, 이것이 통하지 않는구나. 크크, 네 녀석의 피를 먹었을 때 나 자신이 얼마나 강해지게 될지 정말 기대된다!"
쐐액-, 쐐액-!
권일우가 마치 검을 들고 춤추는 무희처럼 손톱을 놀리자 바람의 칼날들이 만들어져 호야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활대 베기."
호야가 스킬을 사용해 바람의 칼날을 상쇄시켰다.
그러는 사이에 충분히 불을 밝힌 바두가 권일우의 뒤쪽에서 그를 향해 달려들며 입을 크게 벌렸다.
드레인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크라아아악!"
콰득!
하지만 이빨끼리 맞부딪치는 소리만 날 뿐 무언가를 씹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바두가 곧바로 뒤로 물러나자 위로 뛰어올라 바두의 공격을 피했던 권일우가 손톱을 날카롭게 하여 그 자리를 손톱으로 내리찍었다.
"크하하하하하! 네 녀석도 그렇고 저 짐승도 그렇고 좋은 움직임이구나. 이 모습으로 이렇게 움직여 보는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권일우는 지금 상황을 그저 조그마한 유희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검은 인간과 짐승에게 전혀 질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말이다.
움직임은 흑룡대의 병사들과 비슷해 보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