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6권 2화
2. 독 길(1)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쌍둥이 빌딩이라고도 불리는 백성 그룹 본사의 앞에 남녀 한 쌍이 서 있었다.
"재건 씨, 긴장돼요?"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백재건이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던 것도, 얼굴을 마주 봤던 것도 이제는 10년 전의 일이다.
10년 만에 마주하려는 것인데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백재건에게는 긴장감만이 있을 뿐 불안은 없다.
"저도 시아버님을 처음으로 본다 생각하니까 갑자기 긴장되네요. 저 지금 뭐 이상한 거 없죠?"
이예숙이 자신이 입은 옷의 매무새를 점검하며 말했다.
그녀는 현재 검은색 블라우스와 타이트한 정장 스커트 위에 얇은 노란색 재킷을 걸치고 발에는 검은색 유광의 굽이 낮은 스틸레토 힐을 신고 있었다.
"역시 노란색은 너무 튈까요? 지금이라도 갈아입고 올까요?"
"여기서 예숙 씨 집까지 걸리는 시간이 얼만데 그런 말을 하고 있어요. 안 이상하고 안 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백재건은 싱긋 웃어 보인 뒤에 헛기침을 하였다.
"흐흠, 그럼 이제 가죠."
"네."
둘은 나란히 서서 두 개의 건물 로비로 발을 옮겼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건물 로비로 들어서자 백재건이 미리 연락을 해 놓았던 최창민 총괄 비서가 푸근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백성 그룹의 창업 시절부터 백윤택의 비서로 일해 온 그는 백재한, 백재건 형제에게 있어서 삼촌 같은 사람이다.
최창민의 말에 백재건이 볼을 긁적였다.
"최 비서님이 도련님이라 부르니까 뭔가 낯간지러운데요."
"도련님께서 최 비.서.님이라며 선을 그으니 어쩔 수 없죠."
"하하. 알았어요, 삼촌."
"그래, 그거면 됐다."
최창민이 이를 보이며 씨익 웃더니 백재건의 등을 강하게 때렸다.
"이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냐? 한 10년 됐나?"
"네......, 그렇게 됐네요."
"돌아와 줘서 고맙다. 회장님도 기뻐하실 거야."
백재건을 한번 끌어안은 최창민은 이예숙에게도 인사를 한 뒤에 둘을 회장실까지 안내해 주기 위해 둘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두 사람 모두 너무 긴장하지 말고. 아, 회장님한테는 일부러 말 안 해 뒀으니까 말이야. 갑작스러워야지 진실된 마음이 나오지 않겠어?"
엘리베이터가 회장실이 있는 최상층에 도착한 뒤 회장실 바로 앞까지 안내를 마친 최창민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 보이고는 자신의 일을 하러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 둘의 앞에 있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나무 문의 안쪽에 둘이 만나러 온 사람이 있었다.
"스읍, 후우."
똑똑.
마지막으로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들이마신 백재건은 이예숙과 가볍게 눈을 맞추고서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그러고는 회장실의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창민아."
안경을 쓰고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를 보고 있던 백윤택은 서류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자신의 방에 노크만 하고 들어올 사람은 최창민밖에 없으니 그는 당연하게도 지금 들어온 사람을 최창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삼촌이 아니라 저예요, 아버지."
오랜만에 들어 보는 목소리에 서류를 넘겨보고 있던 백윤택의 손이 행동을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의 문을 바라본 그의 눈동자는 당황스러움과 반가움이 합쳐져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재, 재건아......."
"오랜만이에요, 아버지. 그리고......."
"안녕하세요, 아버님. 이예숙이라고 합니다. 재건 씨의 아내 될 사람이에요."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백재건이 살짝 슬픈 눈빛으로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를 바라보던 백윤택의 눈에서 한 줄기 작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아니다, 내가, 내가 더 미안해....... 그리고 고맙다, 이 몹쓸 아비에게 다시 돌아와 줘서......."
그날 두 부자는 지금까지 서로 쌓아 두었던 이야기를 서로에게 모두 털어 내었다.
그리고 이예숙 또한 백윤택에게 정식으로 며느리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 *
쿠로에를 따라 마을 입구에 다가가자 마을 입구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호야의 일행을 발견하더니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쿠로에! 말도 안 하고 도대체 어디를 갔던 거니!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 그게...... 약초를 구하러 산에......."
"지금 산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니! 엄마가 네 걱정으로 쓰러져야 정신 차릴래?!"
숨도 쉬지 않고 쿠로에를 다그치는 그녀의 어머니의 말에는 그녀를 향한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진짜로 다시는 그러지 말렴!"
이야기를 끝낸 쿠로에의 어머니는 쿠로에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제야 쿠로에의 뒤에 있던 호야와 도반이 시선에 들어온 것인지 둘에게 말을 건넸다.
"거기 두 분은......?"
"어머니, 이 오빠들이 화고라니에게 둘러싸인 저를 구해 줬어요."
"아! 딸아이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 큰일을 한 거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고개를 들어 주세요."
쿠로에의 어머니가 연신 허리를 숙여 대는 통에 호야가 당황하고 있자 쿠로에가 자신의 어머니를 진정시키고는 호야와 도반과 함께 자신들의 집으로 이동했다.
"다시 한 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집에 도착하자 쿠로에의 어머니가 다시 인사를 전해 왔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가를 바라고 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쿠로에의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쿠로에의 집까지 오는 길에 지나쳤던 집들 모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폐가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쿠로에의 집 안도 필요 최저한의 물건들만 겨우 갖추어져 있다.
쿠로에의 어머니는 살이 붙지 않아 뼈가 드러나기 일보 직전으로 삐쩍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고, 쿠로에의 집까지 오는 길에 집 뒤와 나무 창살 사이로 슬쩍 보였던 다른 주민들도 그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쿠로에도 커다란 옷 아래로 마른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호야는 이야기의 주제를 돌리기 위해 아까 쿠로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보다 쿠로에에게 어머니가 아프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아아, 대단한 병 같은 것은 아니에요. 그저 조금 잘 먹지 못해서 체력이 약할 뿐인걸요."
쿠로에의 어머니가 말을 꺼내고는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아까 이야기를 들어 보면 화고라니에게서 쿠로에를 구해 주신 것 같은데......, 두 분이서 직접 쓰러트리신 건가요?"
"네."
"그러시군요."
호야의 대답에 잠시 고민을 하던 쿠로에의 어머니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손으로 호야와 도반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염치없는 이야기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호야와 도반에게 퀘스트가 발생되었다.
[퀘스트 '화야산의 불청객'이 발생되었습니다.]
[화야산의 불청객]
나라에서 잊히고 버려진 낙정 마을의 주민들은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해 산을 타면서 안전한 구역에서 나무를 패거나 과일과 산나물 등을 채집하여 자급자족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대 지네로 인해서 낙정 마을의 주민들은 산에서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거대 지네의 등장으로 인해서 자급자족이 불가능해진 낙정 마을의 주민들은 점점 굶주려 갔습니다.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서 낙정 마을의 남자들이 쉬지 않고 걸어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거리에 있는 마을로 나가 일을 해 돈을 벌어 식량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가는 비용과 시간, 버려진 마을의 주민이라는 이유로 불합리하게 깎인 임금을 생각하면 마을 주민들이 생활을 이어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낙정 마을의 주민들을 위해서 거대 지네에게서 화야산을 되찾아 주세요.
완료 조건: 보스 몬스터 '거대 맹독 지네'를 사냥 (0/1)
성공 보상: 경험치, 낙정 마을 주민들의 호감도 상승, 스킬 '독기'를 획득
실패 패널티: 낙정 마을 주민들의 호감도 하락
"사실 저희 마을은 여러분이 쿠로에를 구해 주셨던 산, 그러니까 화야산에서 식량을 구하며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어요."
쿠로에의 어머니는 퀘스트 설명문에 적혀 있는 이야기들을 좀 더 길게 풀어 호야와 도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 지네의 위협으로 인해서 마을 주민들의 산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저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을 거예요.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겠어요. 제발 저희들을 도와주세요!"
호야와 도반은 망설임 없이 퀘스트를 수락했다.
퀘스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보상에 스킬이 있는 퀘스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저기, 나라에서 버려졌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그게......."
호야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좋은 마을에서 사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나라에서는 세금도 내지 못하는 이런 마을까지는 신경 써 주지 않아요....... 없는 마을 혹은 고름 덩어리 취급이죠. 그나마 마을 전체가 농노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인 일이에요. ......이런 이야기,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죠?"
호야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현 황제인 권일우는 선정을 베풀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호야는 자신이 읽었던 책에 진실만이 적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선정을 한다고 해도 모든 마을을 신경 쓰지 못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경우라면 나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표현 따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죄송해요, 괜한 거를 물어봐서."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호야와 도반은 그녀의 쓰라린 미소로 배웅을 받으며 거대 맹독 지네를 찾기 위해 화야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둘이 산으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을 벌기 위해 마을을 나가 있던 남자들이 오랜만에 마을에 돌아왔다.
그들 사이에는 쿠로에의 아버지도 있었다.
"쿠로에! 얘기 다 들었다! 겁도 없이 산에 들어갔었다며!"
쿠로에는 집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길고 큰 꾸지람을 들어야만 했다.
만약 어머니가 중간에 말리지 않았더라면 꾸지람은 밤새 계속되었을 것이다.
"여보, 이미 제가 한번 혼냈으니까 그쯤 하세요."
"후우, 그래.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진짜. 그나저나 쿠로에를 구해 줬다는 분들은 어디 가셨어?"
"그게 실은......."
쿠로에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거대 지네의 퇴치를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쿠로에의 어머니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말을 해 본 것이었는데 흔쾌히 부탁을 수락해 준 호야와 도반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괜찮을까? 산에는 마물들도 많을 텐데, 괜히 은인을 사지로 내몬 거 아니야?"
"화고라니도 어려움 없이 잡은 분들이라고 쿠로에가 그랬으니까 괜찮으실 거예요."
"맞아요, 아버지! 괜한 소리는 하지 말고 믿고 기다리자고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믿고 기다려서 그분들이 돌아오면 크게 보답을 해 드려야지."
들고 온 짐을 정리하던 아버지가 쿠로에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어?"
"엄청 친절한 사람들이셨어요. 한분은 조금 말이 많이 없으셨지만요. 그리고 다른 한 분은 머리가 녹색인 게 처음에는 산의 요정님이 저를 구해 주러 온 건 줄 알았지 뭐예요."
쿠로에의 대답에 그녀의 아버지가 짐을 풀던 손을 멈추었다.
이내 약간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쿠로에, 혹시 그 녹색 머리를 가진 사람이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던? 나무껍질 같은 가면 말이다."
"네? 그걸 아버지가 어떻게 알고 있어요?"
쿠로에의 대답에 그녀의 아버지는 속으로 고민했다.
'그들은 우리를 구해 준 은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가족이 먼저야. 화야산의 지네가 사라진다고 해도 바로 우리의 생활이 바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야.'
고민을 끝낸 그녀의 아버지는 풀던 짐을 그냥 내려놓고 쿠로에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다가가 둘의 어깨에 손을 하나씩 얹었다.
"쿠로에, 당신, ......우리 잘하면 마을 전체가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더 이상 버려진 마을이 아니게 될 수도 있어."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차피 그는 외부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