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는 마을사람-99화 (99/171)

# 99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5권 1화

1. 등잔 밑이 어둡다(1)

'이 인형이 원래 이런 포즈였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처음 보았을 때와는 달랐다. 이전에는 가방에서 얼굴만을 빼꼼히 내민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아까 이야기 들었다. 정말로 몸이 안 좋은 것이라면 메이글린을 위해서라도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추천하지."

"아, 아니, 그......."

호야가 대답 없이 바라만 보고 있자 인형이 너무 자연스럽게 다시 말을 꺼내 왔다.

아무리 봐도 그냥 인형은 아니었다.

"누구세요......?"

"아, 내 소개를 안 했었군. 헤이든이라고 한다. 마왕이지."

인형의 거침없는 고백에 호야는 가방을 떨어트릴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바닷물에 닿기 직전에 다시 잡아챌 수 있었다.

"하하하! 반응 한번 재미있구나."

그런 호야의 반응을 보고서 헤이든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놀랄 것 없다. 그저 마계의 집무실에서 대화를 걸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자신을 헤이든이라 밝힌 인형, 그것은 모안이 헤이든에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모안이 만들어 준 인형은 그와 시야를 공유하고 간단한 움직임과 대화만이 가능할 뿐 마법을 사용하는 등의 간섭은 불가능했다.

인형 자체도 움직이고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빼면 다른 인형과 다르지 않았기에 물리적인 간섭도 대부분이 불가능하다.

혼자 마계를 나가는 것에 긴장한 메이글린과 그녀를 걱정하는 헤이든을 위해서 제작된 것이었다.

"너에게는 많은 도움을 받았구나. 가곤의 일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가곤이 누구지?

호야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받지는 못했다.

"메이글린은 이 인형을 그저 부적이라 생각하고 들고 다니고 있다. 만약 내가 보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많은 긴장을 하게 될 테니 비밀로 해 주었으면 한다."

"그럼 저한테도 말하지 않는 것이 좋았던 게 아닌가요?"

"너한테는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수로 새겨져 있는 인형의 눈동자가 살짝 웃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마족의 아이를 잘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인형은 다시 조용해졌다.

* * *

메이글린에게 대륙을 안내시켜 준 지도 벌써 며칠.

호야가 지금까지 들렀던 도시는 물론이거니와 안개 설원이 있는 꽁꽁 얼어 있는 얼음 바다까지 메이글린이 가 볼 만한 곳은 이미 다 다녀온 상태였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기는 하지만 호야는 더 이상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위그드라실......은 역시 안 될 거고, 으음.'

호야는 고민을 하면서 자신의 앞에서 히에로스와 손을 잡고서 걸어가고 있는 메이글린을 바라보았다.

메이글린은 지금처럼 도시를 걷고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호야는 메이글린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을 남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마땅히 생각나는 곳이 없었기에 호야는 자신보다 이니티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것 같은 인물에게 지혜를 구했다.

"으음......, 어떤 거든 상관없는 거예요?"

플레이어인 자신보다 NPC인 파피스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호야가 아는 NPC들은 많았지만 빠르게 간단히 만날 수 있는 것은 파피스가 유일했다.

"할 수 없죠. 제 비장의 장소를 알려 드릴게요!"

파피스는 호야의 질문에 한 장소를 떠올려 냈다.

어릴 적부터 우울할 때마다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찾아가곤 했던 장소.

그 마법과도 같은 풍경을 호야와 그가 데리고 온 메이글린이라는 소녀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이전에 받았던 도움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이었다.

"하지만 제 비장의 장소는 밤에 가야 하는 곳인데....... 헤헤."

파피스가 자신의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지금 그곳에 가 봤자 평범한 숲일 뿐이었기에 가는 의미가 없었다.

"이따가 밤에 다시 만나는 걸로 할까요?"

밤에 가야 하는 곳이라면 호야의 접속 제한 시간의 문제도 있었기에 호야와 메이글린은 일단 오르도로 돌아갔다.

자신이 게임을 나가 있는 동안 메이글린을 돌보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 * *

캡슐에서 나온 호영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이제 어떻게 한담......."

갑자기 비는 시간이 생겨 버렸다.

메이글린과 파피스와의 약속도 이예숙과의 저녁 식사를 한 후로 잡았기에 그때까지는 할 일이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현실에서의 활동이 많이 없었다는 것을 호영은 실감하고 있었다.

그때 호영의 눈에 책상 위에 올려 둔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작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알림이 쌓여 있다는 표시였다.

[부재중 음성 통화 '재거니재거니♡']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백재건으로부터 온 부재중 통화가 찍혀 있었다.

'아니, 그런데 이 아저씨는 언제 저장된 이름을 바꾼 거야?'

호영은 분명히 그를 '재건 아저씨'라고 저장해 두었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이전에 집에 놀러 왔을 때 슬쩍 바꾸어 둔 모양이었다.

호영은 그 사실에 놀라며 백재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 않아서 백재건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저씨, 전화는 왜 하셨었어요?"

-아저씨? 아아! 호영이구나! 미안, 지금 손이 바빠서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바로 받아서 액정을 못 봤어. 호영아, 지금 아저씨가 많이 바쁜데 이따가 다시 전화 걸어도 될까?

-백 팀장님! 지금 빨리 가야 돼요! 약속 시간에 1분이라도 늦으면 거래처가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1분만! 아니, 30초만 기다려! 아......, 찍혀 있는 부재중 보고서 전화해 준 걸 텐데 정말 미안하다, 호영아. 이따가 2시간 정도 뒤에 다시 전화할게. 미안해!

뚝, 뚜우- 뚜우-.

백재건은 호영의 대답을 듣지 않고 통화를 끊어 버렸다.

스피커 너머로 들린 소리들을 보면 정말로 바쁘긴 바쁜 것 같았다.

전화가 끊긴 뒤 액정에 뜬 시계를 확인해 보니 2시간 후면 마침 저녁을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호영은 일단 그 전까지 집 안 청소를 해 놓기로 했다.

청소라고 해 봤자 평소에 이예숙이 관리를 철저히 했기에 가볍게 청소기를 돌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시간이 남아서 저녁 준비라도 해 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요리 실력을 자신이 알고 있었기에 금방 포기했다.

그 한참 뒤에 일을 끝내고 돌아온 이예숙과 저녁을 먹고 있자 백재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호영아, 호영아! 스피커폰으로 해 봐!"

"뭐? 갑자기 왜?"

"깜짝 놀라게 해 줄 거야!"

이예숙이 아이처럼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기에 호영도 그것에 동조해 전화를 받기 전에 먼저 스피커폰을 켰다.

지금까지 백재건에게 당한 것이 수도 없이 많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되갚아 주자는 생각도 있었다.

"여보세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 호영아.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왜 전화하셨던 거예요?"

-그게.......

큰 소리를 내어 백재건을 놀라게 하려던 이예숙은 이어져 나온 그의 말에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이제 예숙 씨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하려고 하거든. 너한테서 예숙 씨가 좋아하는 장소라든가 분위기라든가 조언이나 도움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하하. 아! 물론 호영이 네가 내가 그...... 너의 새아빠가 되는 것이 싫다면 무리겠지만.......

이예숙은 혹시 자신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새어 나올 것을 염려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얇은 물줄기 하나가 흘러내렸다.

이예숙의 표정을 본 호영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도와 드릴게요. 그...... 이제 아저씨 말고 아빠라고 불러야 하나요?"

* * *

약속된 시간이 되자 호야는 메이글린과 함께 파피스의 잡화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덤으로 히에로스도 함께하고 있었다.

파피스의 잡화점으로 가 뒷문을 두들기자 파피스가 문을 열고 셋을 밝게 맞이해 주었다.

문을 열고 나온 파피스는 평소의 살짝 낡은 작업복이 아닌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후후, 어떤가요. 호야 씨!"

"네? 뭐가요?"

"오, 옷 말이에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하아."

호야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파피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칭찬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파피스는 호야에게서 이런 쪽의 눈치는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에 새겨 넣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제 비장의 장소로 출발하죠!"

파피스는 힘차게 말하며 주먹을 쥐어서 위로 뻗어 보였지만 호야와 메이글린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쭈뼛거리며 바로 손을 내렸다.

"출발할까요?"

파피스가 방금 점의 일을 없던 것으로 하려는 듯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서는 셋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피스가 손을 올렸을 때, 히에로스는 보았다.

'붉은색 육망성.......'

그녀의 손등에는 붉은색의 육망성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까지 호야를 따라서 가끔 만날 때에는 항상 물품을 진열하고 만드느라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눈치채지 못했었다.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것을 보아하니 환각 마법으로 인해 가려져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꽤나 강한 환각 마법이었다.

아마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손등에 붉은색 육망성은 호야가 이전에 찾아다니던 마교라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말해야겠지......?'

히에로스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틈에 그들은 파피스가 안내한 장소에 도착했다.

"여기가 제 비장의 장소예요."

"그냥 평범한 숲인데요?"

"후후후, 한번 위를 올려다보세요."

파피스가 그들을 안내한 곳은 도시 바깥에 있는 숲이었다.

호야도 여러 번 온 적이 있어서 익숙한 숲이었지만 파피스의 말을 따라서 위를 올려다보자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메이글린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우와......!"

파피스가 안내한 곳은 나무에 유독 나뭇잎이 많이 없는 장소였다.

그래서 위를 올려다보면 나뭇가지들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다.

얇고 긴 나뭇가지들의 사이사이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서 마치 별이 나뭇가지에 걸려서 빛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확실히 파피스가 비장의 장소라고 말할 만한 장소였다.

"호야, 그...... 말해야 할 게 있는데."

"응?"

메이글린과 같이 눈을 빛내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호야에게 히에로스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히에로스가 말해 온 내용에 가면 아래 호야의 두 눈이 주먹만 하게 커졌다.

"그, 그거 사실이야......? 확실해......?"

"사실이야. 뭣하면 지금 해제할 수도 있어."

히에로스가 말해 준 갑작스러운 진실에 호야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파피스가 마교?

농담하지 말라고.......

아니, 히에로스가 농담을 할 리가 없지.

호야의 머릿속에서 그러한 생각들이 빠르게 오가고 있을 때, 메이글린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을 향한 채였다.

'저기만 비어 있네.'

메이글린의 시야에 다른 곳에 비하여 별이 적은 나뭇가지가 들어왔다.

저 나뭇가지에 별이 조금만 더 많다면 지금보다 멋진 풍경이 될 것 같았다.

'헤이든 님이 사용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겠지?'

메이글린은 몰래 마법을 사용하여 나뭇가지에 빛의 알갱이들을 추가해 보였다.

메이글린이 마법을 사용하고 있던 그때, 히에로스는 파피스의 손에 걸려 있는 환각을 해제시켰다.

자신의 손에 걸려 있던 아인스의 환각 마법이 갑자기 해제되자 파피스의 눈이 주먹만 하게 커졌고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아아......."

갑자기 왜?

들켰어, 어떻게 하지, 뭐라고 해야 돼?

파피스가 당황해 어찌할 줄을 몰라 하고 있던 그때, 의외의 인물이 그들의 앞에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마인 님......?"

그들의 앞에 나타난 마인은 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