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4권 20화
20. 순백의 공주(1)
검은색 소년은 가만히 서서 스테리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스테리아를 지긋이 바라보던 검은색 소년이 입을 열어왔다.
"도와줄까?"
"뭐......?"
"아앙~? 꼬마야,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신경 끄고 그냥 가던 길이나 가라."
스테리아는 소년의 말에 자신이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도와주겠다니, 어떻게?
자신만큼이나 어린 소년이 자신을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테리아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 도와주세요!"
스테리아가 소년이 내민 도움의 손길을 붙잡자 그 뒤는 순식간이었다.
스테리아가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위협하던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자신은 소년의 손을 붙잡은 채 전력으로 달려 골목을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자신의 손을 잡고 앞서 달리고 있는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런 소년의 모습은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달려온 백마 탄 왕자님 같았다.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그런 왕자님.
"이제 괜찮을 거야."
"허억, 허억......! 네에..., 고마워요."
"......너 너무 약한 거 아니야?"
밝은 곳까지 나온 뒤에야 멈춰선 소년은 스테리아가 숨을 헐떡이는 것을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당신 체력이 너무 좋은 거잖아요!'
스테리아는 숨이 차서 도저히 입 밖으로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한참동안 숨을 헐떡이던 스테리아는 겨우 숨을 진정시킨 뒤에야 소년에게 감사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읏......! 따, 딱히 감사를 받을 일을 한 것은 아니야."
스테리아가 웃으며 인사하자 소년이 얼굴을 붉혔지만 스테리아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보답을 하고 싶은데 이름을 알려주시겠어요?"
"이, 이켠......."
스테리아는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특이하면 어떠한가,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상대방의 이름을 들었으니 이제는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줄 차례였다.
"저는 스테리아......, 읏!"
그때 스테리아는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스테리아의 시야에 일렁이고 있는 자신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어째서?
지금 자신을 비추고 있는 것은 올곧은 햇빛이지 몸을 흔들며 타오르는 횃불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이윽고 스테리아의 시선이 자신의 일렁이는 그림자에서 그 그림자를 밟고 있는 이켠의 발로, 그의 발에서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마지막에는 그의 얼굴에서 멈추었다.
그의 얼굴을 본 스테리아는 자신의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켠의 눈은 먹이를 탐하는 짐승 그 자체였다.
스테리아는 그것에서 아까 느꼈던 공포보다도 더 큰 공포를 느꼈다.
지금 스테리아의 눈에는 이켠이 백마를 탄 왕자님이 아닌 마왕으로 보이고 있었다.
"꺄, 꺄아아악!"
스테리아는 이켠의 변화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숨이 다시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영주의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길을 몰라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스테리아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크게 넘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려 까치집이 되어 있었고 드레스는 엉망이 되었으며 넘어지면서 바닥을 짚은 그녀의 손바닥에서는 피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손바닥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스테리아는 공포에 떨고 있는 상태였다.
"공......! 스테리아 님!"
그때 스테리아가 사라진 것을 알고 그녀를 찾기 위해 저택을 나왔던 스테리아의 유모가 그녀를 발견했다.
곧장 사람들을 뚫고 스테리아에게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아 올린 유모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흑, 흐아아아앙!"
익숙한 온기를 느낀 스테리아는 안심이 되어 유모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유모의 시선에 검게 물들어 있는 스테리아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스테리아의 몸이 약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 * *
"스테리아님의 증상은 네가 말한 그림자 병의 증상과 똑같아."
스테리아라는 이름에 호야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온몸을 새하얗게 감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스테리아님은 몸의 대부분이 검게 물들어있어."
왜 그녀가 온몸을 하얗게 감싸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테리아가 하얀색 천만을 두르는 이유는 검게 변해버린 자신의 몸으로 인해서 그와는 대비되는 색에 집착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호야,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
호야는 에반이 무슨 부탁일지는 대강 예상이 갔다.
굳이 이야기를 하자고 그림족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고 스테리아 공주의 과거에 대해서 말해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호야는 그 부탁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스테리아님이 만났었던 그림족의 소년을 찾아줘."
에반의 입에서 나온 부탁은 호야가 예상했던 것이 맞았다.
[퀘스트 '순백의 공주, 어둠의 공주'가 발생되었습니다.]
[순백의 공주, 어둠의 공주]
제프리노의 유일한 딸, 루제로스의 유일한 공주, 순백의 공주라 불리고 있는 스테리아 루제로스.
그녀가 항상 몸에 두르고 있는 새하얀 천의 아래에는 사실 어둠이 존재합니다.
10년 전부터 손끝과 발끝부터 몸을 물들여가기 시작한 검은색 반점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온몸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중앙신전의 장로들이 손을 내밀었었지만 그들은 그녀를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마탑장인 에반또한 그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에반은 우연찮은 기회에 스테리아 공주의 병에 대한 정보와 치료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테리아 공주의 병은 그림자 병.
에반을 도와서 스테리아 공주의 병을 치료해주세요.
완료 조건: 스테리아의 그림자 병을 치료한다.
성공 보상: ???
실패 패널티: 스테리아의 병이 악화됩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 돼."
스테리아가 앞으로 얼마나 버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최대한 빠르게 대상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에반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호야는 스테리아가 만났었다는 그림족의 소년이라 짐작이 가는 인물을 알고 있었다.
거의 확실한 짐작이지만......, 일단은 확인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잠시 옆방을 빌려도 될까요?"
호야는 에반에게 양해를 구하고 옆방으로 들어와 그림족의 은인을 사용해 이켠을 불러내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 혹시 10년 전에 그림족에서 너 말고도 도시에 나갔던 아이가 있어?"
호야는 이켠에게 스테리아에 대해서 전하기 전에 만약을 대비해 먼저 질문을 했다.
만약 이켠에게 소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가 스테리아가 이켠이 만났던 소녀가 아니라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붕 뛰어났다가 다시 추락시키는 일은 없어야 했다.
"아뇨, 제가 알기로는 저 한 명뿐이에요."
"그래."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스테리아가 만났던 그림족의 소년은 이켠, 이켠이 만났던 소녀는 스테리아.
호야는 가면을 벗고서 이켠과 눈을 맞춘 채 그의 두 손을 잡고서 말했다.
"이켠, 만약에......, 만약에 그때의 그 소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지금에 와서라도 치료해줄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네?"
호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켠이 반문을 토해냈다.
왜 그러한 질문을 하는 거지?
호야의 눈빛과 행동을 봐서는 그냥 하는 질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이켠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로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있었다.
"만날 거예요. 만나서 꼭 치료해주고 싶어요."
호야는 이켠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데리고 방을 나왔다.
그림족의 은인으로 그림족을 불러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30분뿐이다.
그리고 지금 남은 시간은 25분.
그 시간이 모두 지난다면 다시 어둠의 숲에 가 이켠을 데려오거나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이 이켠에게나 스테리아에게나 둘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 * *
"스테리아 님, 에반 님과 호야 님께서 스테리아 님을 급히 만나 뵙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스테리아는 노크 뒤에 바로 들려온 유모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반 님이......?"
왜 이 시간에, 그것도 호야와 함께 찾아온 것일까.
원래라면 늦은 시간이었기에 다음 날 찾아와주기를 청했겠지만 스테리아는 둘의 조합에 살짝 흥미가 생겨버렸다.
"응접실로 모셔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스테리아는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새하얀 장갑으로 검게 변한 손을 가리고 베일을 뒤집어써서 검게 얼룩진 얼굴을 가렸다.
순백의 천으로 가려져있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아는 것은 중앙신전의 장로들과 자신의 오라버니와 아바마마, 왕성에서 일하는 일부의 사용인들뿐이다.
가리지 않고서 복도를 걸을 수는 없었다.
스테리아는 흐릿해진 눈으로 주변을 가늠하면서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서 응접실에 도착했다.
응접실에서는 에반과 호야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펑퍼짐한 로브를 입고 있는 사람이 에반, 녹색 머리를 한 사람이 호야였다.
스테리아가 기사들을 물려서 응접실에는 에반과 호야, 스테리아만이 남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에반 님."
에반이 스테리아에게 사과와 인사를 건넸고 호야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서로 간단한 인사가 오간 후에 스테리아는 에반에게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이러한 시각에 두 분이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스테리아 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네?"
에반의 예상치 못한 말에 베일 아래로 가려진 스테리아의 눈이 잘게 떨렸다.
"갑자기 무슨...... , 도대체 어, 어떻게 치료하신다는 거죠......?"
이미 스테리아를 치료하기 위해 불려왔다가 병의 원인도 알아내지 못한 사람들은 많았고 에반도 그중 한명이었다.
그래서 스테리아도 자신의 병이 치료될 것이라는 희망을 크게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에반의 입에서 치료를 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에반이 호야를 향해 살짝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베일을 벗으셔도 됩니다. 호야에게는 제가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스테리아는 에반의 말에 혹시 저 모험가가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머뭇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베일을 벗었다.
그녀의 베일 아래에 감추어져있던 분홍색의 머리카락의 아래로 군데군데 검게 얼룩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흐릿한 그녀의 눈동자는 제대로 초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서 호야의 그림자 안에 있는 이켠의 얼굴이 죄책감과 슬픔으로 인해 일그러졌다.
저 상태가 될 때까지 그녀를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옥죄어왔다.
스테리아의 얼굴을 보고서 슬픈 표정이 된 것은 에반과 호야도 똑같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눈을 감아주실 수 있을까요?"
"네? 하지만......."
"괜찮아요, 스테리아님."
호야의 부탁에 스테리아가 머뭇거리자 에반이 그녀를 설득했다.
에반의 말에 스테리아는 그와 호야를 믿고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은 것을 확인하자 이켠이 호야의 그림자 속에서 조심히 밖으로 나왔다.
그녀와 만나고 싶었고 치료해주고 싶었지만 직접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때와 같은 시선을 받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호야에게 부탁하여 스테리아의 눈을 감긴 것이다.
"......."
이켠은 스테리아의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그림자에 닿자 둘의 그림자가 모두 일렁거렸고 스테리아의 얼굴 위로 보이던 검은색 반점이 서서히 면적을 줄여갔다.
"이것은......."
"눈 뜨시면 안돼요."
"예? 예."
이상하게도 몸에 활기가 돌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은 스테리아가 눈을 뜨려고 하자 호야가 그것을 저지했다.
스테리아의 얼굴에 있던 검은 반점들은 빠르게 모습을 지웠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닌 듯 이켠은 그녀의 그림자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스테리아의 그림자에서 손을 뗀 이켠은 호야의 그림자속으로 다시 돌아갔다.
"스테리아, 들어가겠다."
그때 뒤늦게 에반과 호야가 같이 스테리아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제프리노가 무슨 일인가 하여 셋을 찾아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가 열어젖힌 문의 안에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을 본 제프리노의 눈은 크게 떠져서 닫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검게 얼룩지기 시작했던 스테리아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바마마? 호야님, 언제까지 눈을 감고 있어야......."
"스..., 스테리아!"
제프리노는 바로 스테리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왕의 체통이고 뭐고 없었다.
딸아이의 병이 나았는데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 있는 아버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