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4권 17화
17. 새로운 그림자(2)
3분 동안 모든 상태이상의 면역을 부여하는 '진실의 이슬'.
그것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들이 이따금씩 보이고 있었다.
[약점간파!]
[상대방에게 상태이상 '기절'을 발생시킵니다.]
[상대방이 진실의 힘으로 상태이상 '기절'에 저항하였습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꽤나 발생하고 있었다.
그래도 모든 플레이어가 진실의 이슬을 사용한 것은 아닌 것인지 스킬의 효과가 발생하면 바로 기절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 이유는 플레이어들이 진실의 이슬을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실의 이슬은 그 뛰어난 효과와 어려운 제작법으로 인해서 애초에 가격이 높게 책정되어있는 아이템이다.
한데 그게 검은색 NPC들이 발생하기 며칠 전부터 경매장에 올라오는 족족 터무니없는 가격만 아니라면 대부분이 바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확실하게 누군가가 사재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 일과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시세상승과 품귀현상으로 이어져버렸다.
호야의 입장에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후우
"......, 이제 부탁할게."
"네."
호야가 말하자 그의 그림자에서 이켠이 나오더니 주변에 쓰러진 플레이어들을 그림자로 감싸 올렸다.
"죄송해요, 저도 도와드려야 하는데......."
"아니야,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걸."
호야의 보조를 위해 그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그림족의 소년 이켠은 그림자를 부리는 것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전투에는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절한 플레이어의 운반만을 돕고 있었다.
만약 이켠이 없었다면 호야 혼자서 두세 번은 왕복해야 했을 것이다.
플레이어들을 안전한 장소에 내려놓은 이켠은 다시 호야의 그림자로 들어갔고 호야는 이켠의 말에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저 앞쪽에 2명 있어요.
-알았어.
그림족은 그림자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그림자의 주인과 목소리를 내지 않고 쌍방소통이 가능했다.
'그런데 두 명이라고?'
어둠의 숲에서 행동하는 플레이어들의 파티치고는 인원수가 너무 적었다.
'낙오된 건가?'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두 명이라면 빠르게 제압이 가능할 것 같다.
이켠의 말에 따라 빠르게 이동한 호야는 곧 사람의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인영을 향해 곧장 주먹을 날렸다.
상대가 진실의 이슬을 보유하고 있을 수도 있었기에 그것을 사용하기 전에 제압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하지만 호야는 이내 주먹의 방향을 돌려야만 했다.
쿠당탕.
무리하게 주먹의 방향을 튼 호야가 그 반동으로 인해 땅을 심하게 구르고는 곧장 자세를 다잡아 주먹을 날리려 했던 플레이어들을 보았다.
'왜 하필 저 둘이야!'
도반과 유아였다.
호야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할지 고민했다.
아무리 퀘스트라지만 저 둘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은 내키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둘 수도 없었다.
'......옛날에 지한이랑도 치고받고 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저 둘은 지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유아의 행동과 반응을 보면 확실했다.
그렇게 호야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도반: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호야에게 도반의 귓속말이 날아왔다.
호야가 그 귓속말에 무의식적으로 도반을 바라보자 그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알아보고 있는 건가?
호야의 그 생각은 정확이 맞아들었다.
[도반: 대상이 같은 공간에 있다면서 스킬 사용이 안돼.]
친구 목록에 있는 플레이어의 곁으로 한순간에 이동이 가능한 스킬, 그것이 도반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호야는 그 귓속말에 자신이 걸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호야: ......미안, 말 못해.]
호야의 귓속말을 확인한 도반은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아는 아직 호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자 칼날!"
유아가 양손에 든 단검 두 자루를 휘두르자 그의 그림자에서 10개의 칼날들이 곧장 호야를 향해 날아왔다.
지면에 비친 새의 그림자처럼 자신에게 날아오는 그림자를 보고 호야는 왼쪽으로 몸을 피했다.
유아의 그림자 칼날은 대상의 그림자에 공격이 닿으면 대미지가 들어간다.
그림자도 스치지 않게 항시 자신의 그림자의 방향을 확인해야 한다.
호야는 유아가 정말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기분이 살짝 묘해졌다.
평소에도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못 알아보는 것이 정상이기는 했다.
따지자면 도반의 눈썰미가 좋은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먼저 공격했으니까 나중에 들켜도 불만 없겠지?'
당한 만큼 되돌려준다.
유아 본인이 했던 말이다.
* * *
파피스와 약속했던 3일의 시간이 흐른 뒤 호야는 곧장 파피스의 잡화점으로 향했다.
머리는 염색약을 구입해 다시 녹색으로 되돌렸다.
"아, 호야 씨!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파피스의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호야를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에 자신감이 잔뜩 묻어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이템은 잘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아이템은 잘 완성됐나요?"
"물론이죠! 제 인생 최고의 걸작이라 자부할 수 있어요!"
호야는 파피스의 안내에 따라서 가게 안쪽에 작게 마련되어있는 그녀의 공방으로 들어갔다.
잡화점에 다니게 된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지만 그녀의 공방은 처음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녀의 공방에 들어오자마자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공방의 중앙에 있는 작업대 위에 올려져있는 검푸른 몸체에 하얀색 선이 섬세하게 그려진 야구공 정도 크기의 구슬이었다.
파피스는 그 구슬을 호야에게 건네주었다.
"제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이에요. 만약 버티지 못하면 죄송하지만 다른 제작자를 찾아야할 거예요."
아이템의 설명을 본 호야는 파피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거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에요.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파피스에게 맡기길 잘 했어요."
"그렇게 칭찬해봤자 아무것도 안 나와요, 헤헤."
파피스가 아이템을 완성해줬으니 이번에는 호야가 대금을 건넬 차례였다.
호야는 인벤토리에서 골드를 꺼내 파피스에게 대금을 지불했다.
그 후에 에반에게 가기 위해 공방을 나서려는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그녀의 공방 구석에 놓여 있는 붉은색의 곰 인형 탈이었다.
곰'인형'이라기보다는 그냥 곰에 가까운 완성도였다.
"후후, 잘 만들었죠? 기간트 레드 베어가 모델이에요."
"진짜로 잘 만들었네요. 그런데 웬 인형탈이에요?"
"이웃의 메리 아주머니가 아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고 제작을 의뢰했었는데 너무 사실적이라고 바로 되돌아온 거예요. 결국 새로 만들었죠."
바로 되돌아왔다고 하기에는 사용 흔적이 매우 많아보였다.
"그래도 이거 해진 흔적이 너무 많지 않아요? 아무리 봐도 바로 돌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아아, 그거는 제가 써서 생긴 흔적이에요. 한번 써봤다가 좀 심하게 넘어졌었거든요......, 하하."
파피스는 자신의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도대체 어떻게 넘어지면 이렇게까지 해지는 거지?
인형탈이 이렇게 될 정도로 심하게 넘어진 일은 파피스에게 있어서 잊고 싶은 일이었을 것 같기에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호야는 파피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고서 그녀의 잡화점을 나와 마탑으로 향했다.
-이켠, 컨서누에게 아이템을 받았다고 전해줘.
-.......
-이켠?
-네? 아. 네! 뭐라고 하셨었어요?
그림족은 그림족끼리 그림자를 통해서 거리에 상관없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그림자를 사용하는 기술의 숙련도가 높아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켠은 그 숙련도를 옛날 옛적에 뛰어넘어 사용이 가능했다.
처음 모안에게 결계를 부탁하려 했을 때와 같이 갑작스레 일에 변경이 있으면 곧바로 알리기 위해서 이켠은 호야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호야가 이켠에게 말을 전하면 이켠이 토윤에게 말을 전하고 토윤이 컨서누에게 말을 전하는 것이다.
아이템이 무사히 완성되어 이제 에반의 손만을 거치면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켠을 불렀지만 그는 어딘가 넋이 나간 듯이 반응이 살짝 늦었다.
호야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하자 이켠은 그제야 토윤에게 말을 전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네? 아하하하.......
이켠의 반응에 그가 살짝 걱정이 된 호야가 의문을 표하자 이켠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죄송해요, 그...... 도시에 오니까 옛날에 있던 일이 떠올라서 잠시 다른 생각을 했었나 봐요.
그림족은 어둠의 숲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아니었나?
호야는 도시에 오니까 옛날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는 이켠의 말이 의아했다.
이켠의 말을 해석하면 옛날에 도시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같은데, 어둠의 숲에 들어가기 전 고향에서 경험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이켠은 너무 젊었다.
아마 이켠은 그림족이 어둠의 숲에 정착한 뒤에 태어났었을 것이다.
-사실은...... 한 10년 전인가? 한번 가출을 했던 적이 있어요.
호야는 이켠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살짝 놀랬다.
컨서누만큼 예의가 바른 이켠이 가출이라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하하, 지금도 어리지만 이보다 더 어릴 때에는 어른들의 속을 많이 썩였었죠. 저는 자라면서 용 된 케이스예요.
보통 그런 것을 본인 입으로 말하나.......
-보통은 안 하죠. 과거의 창피함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거니까요.
-어......, 설마 방금 내가 말로 했었어?
-네.
-......미안해.
-괜찮아요.
이켠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가출을 했었을 때 저는 숲 바깥에 있는 도시에 갔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시절, 이켠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도시와 사람들에 대해 생긴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락을 나와 사람들을 발견해 그들을 몰래 따라가서 근처 도시까지 발걸음을 옮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소녀를 만났었고......, 어린 마음에 욕구를 참지 못하고 소녀의 그림자를 먹어버렸었다.
그때 소녀가 마지막으로 지어보인 표정을 이켠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혼자서 멋대로 떠들어버렸네요. 이런 이야기...... 별로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죠?
그때에는 결국 저질러버렸다는 사실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었다.
가출까지 하고서 사람의 그림자를 먹었다는 것을 어른들이 알았을 때에 자신에게 향해질 질책이 무서웠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성장을 하면서 그때의 결정을 후회했다.
그때 어른들에게 그 일에 대해서 고백하고 도움을 구해 소녀를 찾았어야 했다.
자신과 같이 검게 변해버리기 시작했던 소녀의 손가락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있었다.
이 일을 이켠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이켠은 방금 자신에게 과거의 일을 말함으로써 가슴 속의 짐을 조금은 내려놓았을 것이다.
자신이 이예숙에게 처음으로 고백했을 때에도 가슴을 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들 중 하나가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짐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 원인을 해결해야 가슴 속의 짐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호야 자신도 이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전보다 많이 가벼워지기는 했으나 가슴속에 남아있는 짐은 아직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