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4권 11화
11. 전설과 명장
이니티움 스타에서 자신들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서 이번 주 방송 예고편을 배포했다.
예고편은 세트장에 입장하고 있는 출연자들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토크 쇼로 포장되어 있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소리에 걸맞게 MC들이 그날 출연한 출연자에게 민감한 질문을 막힘없이 던져 댔다.
그때 출연자의 머리에서 땀이 삐질삐질 나오는 듯한 CG가 입혀졌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온 출연자의 대답은 삐 처리가 되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유발시켰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예고편이었다.
하지만 예고편의 마지막 10초, 갑자기 화면이 암전되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니티움 스타 시청자 여러분. 직업 마을 사람인 호야라고 합니다.
목소리가 멈추자 암전되었던 화면이 색을 되찾으며 한 인물의 상체가 화면 한가운데에 잡혔다.
지금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플레이어인 호야, 그가 화면에 있었다.
그가 살짝 싱긋 하고 웃자 화면이 고정되며 방송 날짜가 화면 아래편에 대문짝하게 박혔다.
방송 날짜의 자막이 나오면 예고편이 끝나야 했지만 아직 3초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방송 날짜의 자막이 보인 후 멈추었던 화면이 다시 움직였고 싱긋 웃고 있던 호야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러면 되는 건가요?
-네! 아아주! 좋았어요!
그러자 화면 아래에 '다음 방송을 기대해 주세요!'라는 자막이 박혔고 그것으로 예고편이 진짜 끝이 났다.
이니티움 스타의 홈페이지에만 조용히 올라왔던 1분도 되지 않는 길이의 예고편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확산되었다.
-저 형이 왜 저기서 나와?
-진짜로 왜 저기서 나와?
-호야 님이 정식으로 방송 출연하는 거는 처음 아니냐?
-호야가 방송에 나온 게 얼만데 이게 처음이라고? TV도 안 보고 사냐?
-방송에서 자료 영상 같은 걸로 나온 적은 있어도 본인이 직접 나온 거는 이번이 처음 맞음.
-세상에.......
-이니티움 스타에서 토크가 아니라 갑자기 인터뷰가 웬 말?
그리고 빠르게 확산된 만큼 그 파장도 컸다.
네티즌들은 호야의 첫 방송 출연이라는 것에 놀라며 관심을 보이는 한편 어째서 굳이 '이니티움 스타'인 것인지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이니티움 스타는 인지도가 높은 것도 그렇다고 낮은 것도 아는 딱 중간을 유지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지금 한창 인기가 많은 이니티움 수첩이나 다른 방송들에서도 러브 콜이 갔을 터였다.
한데 왜 굳이 이니티움 스타를 고른 것인지가 의문이었다.
의문이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지 기자들에게는 좋은 기삿거리가 되었다.
[마을 사람 호야, 거침없는 그의 랭킹 역주행! 그 비밀이 밝혀지나?!]
[MBS의 이니티움 스타, 마을 사람 호야 출연]
[MBS의 이니티움 스타가 그를 섭외할 수 있던 이유, 그 뒤에는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
[이니티움 스타, 시청자들 기대감 급증]
관련 기사들이 쉼 없이 올라왔다.
그중에는 어그로성 제목을 가진 기사들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의 1위부터 8위까지가 모두 이니티움 스타에 관련된 키워드였다.
아직 예고편만 올라왔을 뿐인데 공식 홈페이지의 시청자 게시판은 마비가 되기 직전이었다.
"대박! 진짜 대박!"
"우리 보너스 기대해도 되겠죠?"
"보너스뿐이겠냐? 이번 방송이 나간 뒤로 시청률만 계속 쭉 유지하면 황금 시간대로 방송 시간이 옮겨질 수도 있어!"
이니티움 스타의 팀원들은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본방송에 섭외만 가능하면 진짜 대박일 텐데."
* * *
따앙- 따앙- 따앙-.
왕성 안에 자리 잡은 커다란 공방,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사일런스 마법이 걸려 있어 바깥은 매우 조용했지만 그 안에서는 쉼 없이 망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망치 소리의 주인은 반달이었다.
따앙- 따앙- 멈칫.
일정하게 들려오던 그의 망치 소리가 끝이 났다.
오늘따라 과거의 기억들로 머릿속이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에 집중이 되지 않고 있었다.
"후우......."
반달은 머릿속을 비우기 위하여 잠시 망치를 멈추고 고개를 올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반달이 모리스에게 구해지고 나서 그와 같이 생활하기 시작한 지 수십 년이 흘렀을 때, 모리스가 나이로 인한 노화로 인해서 세상을 떠나갔다.
모리스가 죽은 뒤에도 반달은 모리스의 대장간에서 망치를 두드리며 그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또 많은 시간이 흘렀고 반달은 자신에 대하여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자신이 모리스와 지내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외모로 따져서 파악한 자신의 나이는 10대 중반 정도. 그 뒤로 수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있었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은 너무 젊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미 얼굴에 주름이 지고 새하얀 머리카락이 나오고 있어야 정상인데 자신은 그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노화가 너무 느렸다.
하지만 겉모습만큼은 인간이었다.
그러한 의문을 품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불현듯 머릿속에 잊어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침을 먹고 양치를 하고 있던 때였다.
갑작스럽게 돌아온 자신의 기억에 반달의 눈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하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분노와 한탄의 눈물이었다.
모리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반달은 모리스에게서 물려받았던 대장간을 천천히 정리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를 꿈꾸면서.
수십 년 만에 돌아온 집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아버지와 자신이 틈틈이 정리해 오던 집 주변의 잡초들이 허리 높이가 넘게 자라 있었다.
집의 외관 또한 수십 년은 관리가 안 된 듯이 보였다.
끼익-.
아버지가 틈틈이 기름칠을 해 놓았던 문의 경첩에서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의 내부는 이미 두꺼운 먼지와 어지러운 거미줄들로 장악되어 있었다.
반달은 집에 돌아온 뒤로 계속 동요하고 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거미줄을 대충 걷어 내면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아버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거의 매일같이 틀어박혀 있던 공방에는 도구 하나 남아 있지 않았으며 벽 한편에 자랑스레 걸려 있던 무기들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방에도 흔적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의 집은,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맞이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집은 방치된 지 수십 년은 흐른 듯이 보였다.
"치, 침착해라....... 생각을 해......."
반달은 당황스러워 몸부림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아버지를 찾을 방법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우선은 마을로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정했다.
숲속의 드워프는 그 당시 마을 사람들 사이에 꽤나 알려져 있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찾은 숲 바깥의 작은 마을의 그리운 공기를 느낄 틈도 없이 반달은 근처를 지나가던 노인을 붙잡아서 물었다.
"저기, 옛날에 저 숲에서 드워프 한 분이 살고 있지 않았나요?"
"드워프? ......아아! 있었지, 있었어. 꽤 유명했지."
"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글세...... 그건 모르겠는데. 그런데 당신이 그거는 왜 물어보는....... 다, 당신 설마?!"
노인이 눈을 부릅뜨더니 반달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당신 설마 그 반달인가?! 살아 있었구나!"
그 뒤 반달의 얼굴을 뜯어보고서 그가 그 드워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법사의 파티에 대해서였다.
"그때 난리도 아니었어."
마을에 자신을 찾으러 왔다가 마법사와 파티원의 이야기를 들었던 아버지가 그들에게 자신의 복수를 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력을 사용해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 마을을 떠나고서는 그 뒤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반달은 단탈스가 자신을 찾으러 마을을 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그를 찾아서 대륙을 떠돌았다.
자신의 아버지는 종족 자체가 희귀한 드워프이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생각과 달리 아버지에 대한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반달은 도시와 마을에 갈 때마다 그곳의 대장간을 빌려서 돈을 벌고 돈이 모이면 다시 아버지를 찾으러 떠나는 것을 반복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버지를 찾을 수 없자 그는 방법을 바꾸었다.
자신의 이름을 날려서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오게 하자고 말이다.
반달이 어렸을 적에 단탈스는 그에게 젊은 시절에 패기를 앞세워 대륙의 유명한 대장간을 돌며 대장간 깨기를 했던 일을 옛날이야기처럼 말해 주었었다.
그러니 자신이 이름을 떨치면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이름을 듣고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와 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이즈바론트에 정착해 대장장이의 일을 해 나갔다.
그러던 중에 왕실 소속 장인이 되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왕성에서 일을 하면 더 이름을 멀리 날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반달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실 소속 장인들의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아버지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직 실력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하여 더욱 열심히 망치를 두들겼다.
점점 실력이 좋아지고 있음을 자신이 직접 느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반달은 자신이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다보았다.
현재 아버지와 자신을 이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연결점이었다.
그래서 애지중지하던 것이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다.
아버지가 자신보다 젊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을 상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반달은 자리를 정리하고 공방을 나왔다.
오늘따라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공방을 나오니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밖에 나온 반달이 향한 곳은 이제는 아예 단골이 되어 버린 음식점이었다.
"오, 할아버지!"
음식점에 들어가자 가게 주인이 그를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주었고 반달은 그에게 늘 먹던 것을 부탁했다.
며칠 호야와 같이 오다가 혼자 오니 그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스스로가 말을 많이 하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말을 걸어 주면 꼬박꼬박 진심으로 대답해 주는 것이 좋았다.
"안녕하세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호야가 나타나 그의 옆자리에 자연스레 앉았다.
그러고는 그가 입에 대려는 술잔을 빼앗았다.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오늘 같은 날에는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최대한 멀쩡한 모습이 좋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반달의 물음에 호야가 밝게 웃었다.
"만나게 해 드리고 싶은 분이 있어요. 잠시만 저랑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만나게 하고 싶은 사람?"
그게 누군지를 물어봤지만 호야는 실실 웃을 뿐, 답을 내어 주지는 않았다.
호야의 행동에 그가 만나게 해 주려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반달은 아직 먹지도 못한 음식의 값을 치르고 그의 뒤를 따랐다.
호야가 반달을 데려간 곳은 도시 구석에 있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골목의 깊숙한 곳이었다.
"누구길래 이런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는 거야?"
"만나면 아실 거예요."
한 장소에 도착하자 호야가 방해를 하고 싶지 않다며 반달의 등을 떠밀었다.
호야에게 밀려서 반달이 나온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작은 공터였다.
그리고 그곳에 한 짧은 망토의 뒷모습이 보였다.
기억 속에 있는 그동안 자신이 찾고 있던 자의 그리운 뒷모습.
망토로 가려져 있었지만 직감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아, 아버지......?"
반달의 떨리는 목소리에 뒤돌아 있던 그가 반달을 향해 몸을 들렸다.
그날의 밤은 반달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긴 밤이자 짧은 밤이었다.
평소 느끼던 밤보다는 길었지만 지금까지 아버지를 찾아다니고 기다렸던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