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4권 1화
1. 매료의 목소리(2)
"갑자기 무슨......."
'내, 내 의지가 아니야! 매료야!'
챙-!
팩심아이스에게 찔러 넣었던 검을 뽑아서 다시 휘두른 카피길의 검을 팩심아이스가 막아 내었다.
목소리를 내어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카피길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키며 상황을 파악했다.
이번 퀘스트에 참가한 인원을 모아 만든 길드 채팅은 혼란 그 자체였다.
연속해서 매료를 당했다고 말하는 채팅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왕실에서 지원해 준 기사들 중 일부도 매료에 당한 듯, 자신의 동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귓속말이랑 길드 채팅으로 소통이라도 가능하지만 NPC들은 그러한 것이 없어서 플레이어들보다 혼란이 컸다.
[길드 채팅 카피길: 다들 진정하고 일단 매료 안 걸린 사람들이 NPC들한테 지금 상황 설명해!]
카피길의 말에 팩심아이스를 포함한 아레나의 길드원들이 NPC들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아직 당혹감이 남아 있었다.
동료들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방어만을 하다 보니 점점 밀리는 형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매료에 걸리지 않았던 아레나 소속의 사제가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는 데로 매료를 해제시키고는 있지만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백설: 지금 그쪽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그렇게 방어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백설에게서 카피길에게 귓속말이 날아왔다.
카피길은 처음에는 백설에게 지금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 시치미를 떼었다.
자신들에게 매료를 걸었던 마교의 여자, 이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니 마교에서도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잡으면 기여가 높게 책정될 터였다.
매료의 대책만 미리 해 둘 수 있다면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반강제로 자신들의 그룹에서 호야가 빠진 김에 기여의 독점을 위해 시치미를 뗀 것이지만 백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미 지금의 일들이 인터넷에 영상과 스크린 샷으로 실시간 공유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교를 둘러싸기 전에 왕실 기사들에게 안전을 위한 이유로 부탁해 플레이어들과 다른 NPC들을 통제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통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플레이어들의 눈에 지금 상황이 잡혀 버렸다.
도시 안에서 같은 길드, 그것도 매우 유명한 길드의 길드원들끼리 서로를 공격하고 있는데 이런 장면을 보고서도 인터넷에 올리지 않을 이는 몇 없을 것이다.
그 대가로 인해서 아수라장에 그들 또한 말려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카피길은 아깝다는 생각에 속으로 살짝 혀를 차며 그녀에게 지금 상황에 대하여 말했다.
마교의 발견과 마교의 능력으로 인해 지금 벌어진 상황까지 모든 것을 말했고 백설을 통해서 로열 나이츠 쪽에도 이야기가 전해졌다.
백설도 카피길과 같이 이즈바론트에 나타난 마교의 신도는 마교에서도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고 사냥하는 것보다는 포박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강한 자를 포박할 수 있는 확률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것이 안전했다.
물론 마교의 능력에 대해서도 들었기에 로열 나이츠 쪽에 소식을 전할 때에 매료의 대책을 강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렸다.
[카피길: ......미안하지만 마교는 놓쳤어.]
[백설: 뭐라고요?]
묘한 목소리를 내며 매료를 걸었던 그녀는 아수라장 속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그것을 백설에게 알려서 올 필요가 없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그녀는 일단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니 사태를 진정시킨 뒤에 놓친 마교의 수색을 돕겠다는 말을 건넸다.
솔직히 카피길은 그녀가 오지 않았으면 했다.
마교를 놓치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놓친 것은 아니었으니까.
기여를 독점하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 살아 있었다.
[카피길: 팩심, 낙인은 붙여 놨겠지?]
"당연하죠! 것보다 좀 살살 해 주세요!"
[카피길: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팩심아이스가 카피길의 공격을 막으며 답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방어에만 치중하지 않고 제대로 공격을 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기도 했고 이 아수라장이 진정된 후에는 곧바로 마교를 다시 쫓아야 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깎인 체력이야 물약으로 채우면 되지만 때려 눕혀서 진정시키겠다고 공격의 강도를 올리면 매료를 당한 사람이나 그를 상대하는 사람이나 모두 스킬을 빼게 된다.
지금은 매료를 당하지 않은 이의 스킬이라도 지켜야 했다.
낙인에는 지속 시간이란 것이 있었기에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모두 흐를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사제님! 마스터부터 해제 좀 해 주세요!"
"1분! 1분만 더 기다려 주세요!"
매료에서 풀려난 카피길은 그 즉시 다른 이를 도와서 매료에 걸린 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매료에 걸린 이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았기에 동료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강제 로그아웃을 당한 자가 소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리의 아수라장을 듣고 달려온 병사들이 자신들을 돕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정에 대해 자세히 몰랐지만 왕실의 기사단장의 말에 따라서 죽이지 않고 제압만을 돕고 있었다.
매료에서 풀려난 사제들도 몇 늘어났으니 모두가 해방되기까지 조금만 더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모두가 생각하던 때였다.
"자, 모두 정신 차려!"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넓게 퍼지더니 아직 매료에 걸려 있는 자들 모두에게 동일한 시스템 메시지가 발생했다.
[정신의 정령왕 히에로스의 목소리가 당신의 정신을 일깨웁니다.]
[상태 이상 '매료'가 해제되었습니다.]
매료의 대책을 세울 필요가 없는 호야가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워프 스크롤을 찢어 제일 먼저 이즈바론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아수라장으로 달려와 히에로스를 불러서 매료의 해제를 부탁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히에로스의 덕분에 아수라장에 있던 매료에 걸린 모든 이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매료에서 풀려난 이들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향하자 그곳에는 호야와 바두의 등에 올라탄 히에로스가 있었다.
호야를 발견한 카피길이 호야에게 다가가 감사의 인사를 건네었고 호야는 고개만을 끄덕여 그것에 답하고서 히에로스를 가리켰다.
솔직히 호야는 마교가 실제로 나타났다는 소식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의 입장에서는 황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었다.
호야가 히에로스를 가리킨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챈 카피길은 히에로스를 향해서도 감사 인사를 보내왔다.
"이 정도쯤이야!"
얼마 안 있어서 로열 나이츠와 설백호의 일부가 이즈바론트에 도착했다.
워프 스크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플레이어들뿐이다.
그렇기에 NPC들은 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할 인원이 남아 있어야 했기에 플레이어의 일부만 먼저 온 것이었다.
이즈바론트에 도착한 그들은 호야가 사태를 진정시킨 것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커뮤니티에 올라온 영상들로 본 매료에 걸렸던 이들의 모습은 정말 미친개 그 자체였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었다.
"괜히 온 것처럼 돼 버려서 미안해."
카피길은 이즈바론트로 바로 달려와 준 설백호와 로열 나이츠에게 사과를 건넸다.
"됐어요. 마교의 생김새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만 알려 주세요. 오늘 안에 찾아야죠."
"로브랑 모자로 모습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서 여자라는 것밖에 몰라. 워낙 아수라장이었기에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도 못 봤어. ......미안하다."
카피길은 설백호와 로열 나이츠가 자신들을 위해 달려와 준 것은 고마웠으나 얼른 그들이 포기를 하고 가 주었으면 했다.
그래야지 자신들만으로 마교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퀘스트로 볼 때는 협력하는 사이지만 애초에 경쟁 관계다.
그는 자신들이 찾은 것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 저거 거짓말이야."
카피길이 그리 생각하며 말을 하자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히에로스가 말을 툭 내뱉었다.
히에로스의 말에 카피길이 살짝 움찔거렸지만 이내 동요를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의 그런 반응에 로열 나이츠 쪽은 아무 의심 없이 넘어갔지만 설백호는 아니었다.
그들은 정령들의 '진실의 눈'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니까.
"카피길씨, 사실대로 말해 주시죠."
"무엇을? 설마 저 정령의 말을 믿는 거야?"
"......하아."
백설은 그의 회피에 사뭇 차가운 얼굴을 하며 진실로 맞섰다.
그녀가 정령이 가진 진실의 눈에 대해 말하면서 특유의 언변으로 몰아붙이자 그는 결국 진실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로열 나이츠 측에서도 조금씩 험악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으니까.
* * *
"지지리 운도 없지, 진짜."
아수라장을 만들고서 그 틈을 타 골목길로 들어와 모습을 숨긴 나탈리가 아수라장과 멀어지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필 그 녀석이 수색대일 게 뭐람. 그 낮은 확률을 뚫어 버린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져서 어이가 없었다.
일이 꼬였으니 오늘은 일단 후퇴하고 나중에 다시 오자.
그렇게 생각하며 이동하고 있던 그녀의 앞에 수상한 인물이 나타나 막아섰다.
붉은색 곰 인형 탈을 쓴 여성이었다.
얘는 또 뭐야?
"츠바이,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죠?"
나탈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곰 인형 탈이 입을 열었다.
곰 인형 탈이 내뱉은 츠바이란 단어, 그것은 나탈리가 마교에서 사용하는 가명이었다.
나탈리의 입이 반갑다는 듯이 양옆으로 길게 찢어져 호선을 그렸다.
"당신, 혹시 퓐프인 거야?"
곰 인형의 목소리가 낯이 익었던 것이다.
간부 회의를 하면서 수백 번을 더 들었던 퓐프의 목소리였다.
"이런 데에서 만나다니 기막힌 우연이다, 진짜. 아, 혹시 여기서 살아?"
"저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어요."
반가움에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는 나탈리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퓐프의 목소리는 싸늘함과 무뚝뚝함 그 자체였다.
자신이 원하던 반응이 아닌 것에 나탈리의 목소리 톤도 덩달아 낮아졌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아인스 님이 분명히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경계만 키우는 꼴이라고요. 마교 전체에 민폐예요."
퓐프는 마교 전체를 위해서 나탈리를 멈출 생각이었다.
퓐프의 마력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 나탈리가 성을 내었다.
"잡히지만 않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저벅, 저벅.
그러자 그녀의 뒤쪽에서 검을 든 남자가 걸어 나와 그녀의 앞에 서서 퓐프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는 나탈리가 매료시킨 왕실 기사단의 기사였다.
다음의 준비를 위해 도시에서 나갈 때까지만 만일에 대비하여 끌고 다니기 위해 일부러 데려온 것이었다.
나탈리는 그를 이용해 자신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있는 퓐프를 제압한 뒤에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 행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힘이 퓐프의 힘보다 뛰어났기에 자신도 있었다.
나중에 간부 회의라도 열리면 자신이 쓴맛을 보게 될 일이었지만 마족의 흔적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무마할 수 있다.
아니, 거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입지를 더 굳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이지는 말고 적당히 못 움직이게만 해 놔."
나탈리가 그렇게 말하자 기사가 앞으로 도약해 퓐프에게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