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3권 17화
17. 몬스터 웨이브가 남긴 것(1)
"아가씨, 정신이 들어요?"
"으으, 으음......."
눈을 떠 보니 모르는 천장.
기다란 형광등 두 개가 나란히 붙어서 내뿜는 빛에 손으로 눈을 가리며 일어났다.
아직 살짝 멍한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멀리 둘러볼 것도 없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의 복장과 그 뒤로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장소를 특정하기에는 충분했다.
"경찰서......?"
"네, 경찰서예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시나요?"
경찰의 질문에 이수아의 머릿속에 새벽에 자신이 부렸던 만행들이 속속들이 생각났다.
"아, 아아......."
그놈의 술이 아주 원수였다.
술에 취해서도 그때의 기억이 온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이수아의 좋은 점이자 나쁜 점이었다.
이수아는 술에 취해서 소리를 지르는 자신의 모습과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속풀이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내가 미쳤지, 아주 미쳤어!'
떠오른 기억 중에서 지금 그녀를 가장 부끄럽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나가는 행인에게 건네주었던 자신의 명함이었다.
진짜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잘생긴 사람이었기에 술기운에 번호를 교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명함을 건넨 것이다.
아니, 그런데 왜 하필 건네줘도 명함이야!
게다가 정작 자신은 번호도 받지 못했다.
"정신은 좀 괜찮아요?"
"네? 네....... 그,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폐는 무슨, 원래 우리가 하는 일인데요, 뭐."
감사 인사를 하고서 경찰서를 빠져나온 이수아의 얼굴은 아직도 새빨갰다.
일단 어딘가에 자신을 숨기고 싶었기에 그녀는 곧장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이수아는 가방만 던져 둔 채 바로 침대에 몸을 던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만행이 오버랩 되면 허공에 발 차기를 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녀가 지금 제일 후회하고 있는 자신의 만행은 명함을 건넨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남아 있었다.
그가 연락을 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나 정도면 괜찮은 여자 아니야? 하는 생각.
하루가 다 지나가도록 오지 않는 연락에 그 기대감과 생각이 실망감과 부끄러움이 되는 것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긴, 그 꼴을 보였는데 연락이 오는 게 이상한 거지.'
눈물, 콧물 가릴 것도 없이 질질 짜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이수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많이 아깝기는 했다.
그리고 이제는 창피해서 그 편의점 앞으로 지나다니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 오빠 진짜 잘생겼었는데....... 그 짓만 안 했어도 가끔씩 눈호강은 할 수 있었을 텐데.......'
척 보아도 자신보다 어려 보였지만 잘생기면 다 오빠였다.
* * *
단탈스가 말한 이틀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호야는 단탈스의 공방으로 찾아갔다.
아직 검은 완성되지 않았는지 단탈스는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그립과 가드, 칼날 등의 조립을 끝낸 단탈스가 호야를 향해 씨익 웃으며 완성된 검을 건네었다.
[휘몰아치는 냉기의 칼날]
등급: 유니크
공격력: 2,000
내구도: 340/340
*상대방을 타격할 시 15%의 확률로 상태 이상 [동상]을 발생시킵니다.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과 시전 시간이 20% 감소합니다.
*모든 스킬에 얼음 속성을 적용시킬 수 있으며 얼음 속성으로 인한 추가 대미지가 대폭 상승합니다.
전설의 대장장이 단탈스가 강력한 냉기를 품고 있는 에르텔을 주재료로 하여 만든 검입니다.
검날이 모두 냉기를 품은 에르텔로 이루어져 있기에 얼음 속성의 효과를 크게 끌어올려 줍니다.
부수적인 재료를 섞지 않고 아다만타이트만을 이용해 검의 기본 뼈대를 잡아서 에르텔의 효과가 크게 부각된 상태입니다.
착용 제한: 힘 460, 마력 500 이상 속성 '얼음' 보유 전사
단탈스가 건네준 무기는 호야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공격력이 기간트 레드 베어 본 소드보다 500이나 높았고 내구도는 두 배가 넘게 올라 있었다.
이 정도의 내구도라면 아도라 때와 같이 전투 중간에 검이 부러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거기에 더해서 특수 효과들 또한 정말 잘 나와 주었다.
특히 모든 스킬에 얼음 속성을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은 꽤나 엄청난 효과였다.
크라우스식 검술에도 얼음 속성이 적용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정확히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일단 사용해 봐야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단탈스가 새로 만들어 준 검은 능력치도 능력치지만 외관 또한 매우 아름다웠다.
얼음처럼 빛을 반사시키는 새하얀 칼날, 검등은 아름답게 빛나는 칼날과는 대조적으로 빛을 반사시키지 않는 묵은색을 띠고 있지만 섬세하게 조각된 무늬를 따라서 소량의 에르텔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호야가 가볍게 검을 휘둘러 보자 전에 사용하던 기간트 레드 베어 본 소드보다도 묵직한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이 쓰일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살짝 묵직해진 지금이 호야는 더 마음에 들었다.
철컥, 검을 칼집에 넣자 칼집의 앞 테두리와 검의 가드가 맞닿으면서 소금 알갱이보다도 작은 얼음 조각들이 생겨나 빛을 받고 빛나더니 이내 바로 사라졌다.
"어때? 마음에 들어?"
"네, 엄청 마음에 들어요!"
좋아하는 호야의 모습을 본 단탈스는 흡족하게 웃었다.
호야도 단탈스를 따라서 웃어 보였다.
단탈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재료를 직접 구해 오는 것이라지만 그 재료를 이용해 형태를 잡고 성능을 끌어올려 주는 것은 단탈스였다.
그러니 언젠가는 꼭 보답을 해 주고 싶다.
단탈스뿐만이 아닌 오르도의 주민들 모두에게.
"그럼! 누가 만든 건데, 당연히 마음에 들어야지!"
이미 호야에게 보답받은 오르도의 주민들이 있었지만 호야에게는 자신이 그들에게 보답했다는 자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호야에게 보답받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단탈스가 호야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얼른 사용해 보고 싶지?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가 봐."
"하하하...... 티 많이 나요?"
"조금?"
호야는 자신의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같이 눈을 빛내고 있었기에 단탈스는 호야를 붙잡지 않고 얼른 보내 주었다.
단탈스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공방을 나온 호야가 향한 곳은 마을의 훈련장이었다.
잠시 후, 훈련장에는 강한 냉기가 발생했다.
* * *
어디인지 모를 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완벽히 차단해 내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던 그곳에서 촛불 하나가 빛을 발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곧게 타오르는 촛불로 인해서 내부의 모습이 아주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창문 하나 달려 있지 않은 공간,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중앙에 놓여 있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 하나와 테이블을 둘러싸듯이 놓인 여섯 개의 의자뿐이었다.
그 여섯 개의 의자들 중에 단 한 개의 의자만을 제외하고서 모든 의자에 수상한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동일한 형태를 한 검은색 로브와 기다란 고깔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다섯 명의 인물들.
고깔모자에 달려 있는 붉은색 육망성이 그려진 검은색 기다란 천이 얼굴을 가려 주고 있어서 인물의 판별은 불가능하다.
무거운 침묵 아래에 한 인물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대리자가 결국 모습을 완전히 지우셨다."
다시 이어진 무거운 침묵, 길게 이어지던 침묵 속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그 침묵을 비집고 들어왔다.
"전에 내가 말했었지? 우리가 직접 성장을 도와 드려야 한다고. 괜히 뒤에서 지켜보기만 해서 그분은 우리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사라지셨어!"
테이블을 강하게 치며 일어난 그녀는 씩씩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분노로 인한 떨림이 그녀의 손을 타고 테이블에 내려와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다.
"하! 자주적인 성장은 무슨! 결국 방치하다가 잃은 꼴이 됐잖아!"
그녀의 분노 섞인 말은 길게 이어졌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기에, 마치 자신들의 생각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기에 굳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을 끊는 자가 있었다.
"그만해라."
"......."
유일하게 비어 있던 의자, 어느 틈엔가 나타나 그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한마디에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다시 침묵이 감돌기 시작하자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던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의 대리자가 사라져 버린 것은 유감이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가 대리자로 선택했던 인물은 언제 존재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자였다. 처음부터 선택을 잘못했어."
"당신......! 말 함부로 하지 마!"
"내 말이 틀렸나?"
천으로 인해 분명히 얼굴이, 눈이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자의 눈빛에 꿰뚫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를 대리자로 선택했던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으나 악수(惡手)이기도 했다. 성장이 빠르고 예상치 못한 힘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동시에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종류의 인물이었지. 처음부터 안전장치를 준비해야 했어."
"컨트롤이라니, 무슨......."
"착각하지 마라."
인물들 중 한 명이 그의 단어 선택에 반박을 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 묵살되었다.
"대리자는 우리가 모셔야 할 사람이 아니다. 대리자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용해야 할 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이 아니라 '그자'가 맞는 표현이다."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대리자는 어차피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다.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굳이 필요한 존재는 아니지."
남자는 자신의 로브 안에 손을 집어넣더니 무안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올려놓은 것은 무언가의 깃털이었다.
"......이건 뭐죠?"
"한번 확인해 봐라."
검은색 일색인 그들 중에서 제일 체격이 작은 이가 손을 뻗어 깃털의 정보를 확인했다.
모자에 달린 천으로 인해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깃털을 확인한 이의 눈은 주먹만 하게 커져 있었다.
"이, 이, 이건......."
"뭔데 그렇게 놀라고 있어?"
너무 놀라 목소리까지 더듬고 있는 이의 손에서 깃털을 채 가듯이 가져가 확인한 자의 눈 또한 주먹만 하게 커졌다.
주먹만 하게 커진 눈에 가득 차오른 것은 희열이었다.
"이것은......!"
"그래."
처음 깃털을 꺼냈던 이는 천 너머로 씨익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염된 히포그리프의 깃털]
마기에 오염된 히포그리프의 깃털입니다.
히포그리프의 깃털은 연금술사들이 선호하는 재료 중 하나지만 마기에 오염되어 가치를 잃은 상태입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졌던 깃털의 정체, 그것은 이즈바론트의 몬스터 웨이브의 부산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마탑장인 에반의 지시 하에 모두 회수되었을 물건, 보상을 원하는 모험가들이 마탑에서 보상과 교환했어야 할 물건이었다.
그것들 중 하나가 그들의 손에 흘러들어 왔다.
그리고 그 깃털 하나는 그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자신들이 하고 있던 일이 헛된 꿈을 쫓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우리가 하던 일은, 우리가 추구하던 것은 헛된 꿈이 아니었다. 그들의 흔적이 이렇게 실존하고 있다! 그들이 아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가능성이 있어!"
깃털을 가져온 이의 말 하나하나에 그들은 집중했다.
"우리는 이제 한 발자국, 아니, 목표의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그들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들은 수면 위로 당당히 올라간다!"
바람이 들어올 틈이 없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공기들이 요동치며 옷자락이 나풀거렸다.
바람에 흩날려 살짝 들추어진 검은색 천 아래로 그의 새하얀 이가 짙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그가 말을 끝낸 후 왼손을 펴 자신의 가슴 위에 올리자 다른 이들도 그 행동을 따라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들의 손등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붉은색의 육망성이 그려져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진 수많은 대화 끝에 여섯 명의 인물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모습을 감추었고 그들이 사라진 공간에는 촛불 하나만이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촛불까지 완전히 꺼지자 그곳에는 어두운 정적만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