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는 마을사람-62화 (62/171)

# 62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3권 12화

12. 남쪽의 작은 섬(3)

제주도 여행 둘째 날 아침,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의 조식 시간을 피해 아침을 일찍 먹은 셋은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다시 방으로 흩어졌다.

방으로 돌아왔던 호영이 다시 로비에 나갈 때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은 뒤 힙색 안에 지갑과 스마트폰 같은 귀중품만을 챙기고서 재건이 선물해 준 모자를 머리에 쓴 것이 다였다.

아주 빠르고 간단하게 준비를 끝낸 호영은 로비의 기둥에 등을 기대고서 재건과 이예숙을 기다렸다.

아침을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먹었던 것인지 잠시 시간이 흐르니 로비 한편으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의 조식을 먹기 위한 줄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늦으시네.'

20분이나 기다렸는데도 재건과 이예숙이 나오지 않아서 호영은 그들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재건과 이예숙의 방으로 향하고 있자 재건만이 홀로 로비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엄마는요?"

"그게, 화장을 해야 한다고 해서 말이야. 조금 오래 걸리는 것 같길래 네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내려왔어."

그럼 앞으로 20분은 더 있어야겠다고 호영은 생각했다.

* * *

호영은 결국 이예숙과 재건이 둘이서만 있을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에 성공했다.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 대가가 너무나 컸다.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는 대가로 호영은 미로에 갇혀 버렸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미로에 갇혀 버렸다.

제주도 동부권에 위치한 제주도 대표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인 미로 나라.

세계 최대 규모의 미로를 자랑하는 곳이면서 워킹 맨과 화성인 백신에서 다녀가 더욱 커진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그 미로 나라의 돌 미로 안에서 길을 잃었다.

바람 미로와 여자 미로는 꽤 간단한 편이었기에 제일 어렵고 길다는 돌 미로에서 둘 사이에서 빠져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돌 미로에 들어온 후에 살짝 뒤로 빠져 주었는데 그 뒤로 길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길을 잃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호영은 공간 지각 능력에 꽤 자신이 있었기에 지도만 있다면 바로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관람 안내도를 챙기기는 했었다.

하지만 셋이서 딱 하나만 챙긴 관람 안내도가 호영의 손에 없었다.

재건이 들고 있다는 것을 깜빡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라아 라아 라아 라 라♪.

호영이 지금 상황에 살짝 당황하고 있을 때 그의 스마트폰에서 그가 전화 벨소리로 설정해 놓았던 가수의 노래가 들려왔다.

벨소리가 들려서 확인한 스마트폰 액정에는 '♡제일 좋아하는 엄마♡'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이예숙이 호영의 스마트폰에 직접 저장한 이름이다.

전화를 건 것이 이예숙이라는 것을 확인한 호영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들, 어디 있어? 갑자기 사라져서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 그게......."

미로에서 길을 잃었어.

라고는 차마 말을 못 하겠기에 살짝 머뭇거렸다.

그렇게 말하면 호영을 찾으러 되돌아올 것이 뻔했다.

그러다가 엇갈리기라도 하면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한 이유보다는 미로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창피하다는 이유가 더 컸다.

"어음, 화장실이 급해서 잠깐 입구로 나왔어."

-그래도 말은 하고 움직여야지! 우리가 그쪽으로 갈까?

"아니야, 안 그래도 돼. 지금 가고 있으니까 먼저 출구로 가 있어."

-그래도 아들은 지도가 없잖아?

"입구에 지도가 크게 붙어 있었잖아. 그거 찍었으니까 괜찮아."

호영은 이예숙을 안심시킨 뒤 통화를 끊었다.

돌 미로에 들어오기 전에 입구에 지도가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찍지는 않았다.

당연히 입구로 다시 나간 적이 없으니 스마트폰 안에 지도는 찍혀 있지 않다.

'이제 어떻게 하지.......'

진짜 지도라도 있으면 바로 나갈 수 있는데.

호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른손으로 벽을 짚으며 걸었다.

예전에 어디에서 한쪽 벽을 짚으면서 이동하면 미로에서 나갈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뭘 잘못한 것인지 한곳을 계속 맴도는 것 같다.

주변에 있는 돌벽들의 모양을 보아하니 딱 돌하르방의 얼굴 부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길을 모르겠다.

길을 잃었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호영은 자신이 창피한 것보다는 이예숙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더 싫었다.

그냥 이예숙에게 잔소리를 듣고 재건에게 살짝 놀림을 받고 끝내자는 생각에 스마트폰을 꺼내 이예숙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퍽.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모퉁이를 돌고 나온 여학생 한 명이 호영과 부딪혔다.

그리 강하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기에 둘 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에 호영의 스마트폰이 액정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죄, 죄송해요!"

호영과 부딪혔던 여학생이 깜짝 놀라며 땅에 떨어진 호영의 스마트폰을 주워 주었다.

다행히도 액정 필름에만 자그마한 흠집이 생겼을 뿐, 액정 자체에는 전혀 흠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을 확인한 여학생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다행이다. 정말 죄송해요. 아, 필름값은 드릴게요!"

"아니에요. 저도 앞을 안 보고 있었으니까 제 책임도 있죠."

호영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여학생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일의 발단이 어찌 되었든 원인은 자신이었기에 무언가 사죄를 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여학생에게서 스마트폰을 돌려받던 호영의 눈에 그녀가 들고 있는 관람 안내도가 들어왔다.

"저기, 혹시 그 지도 한 번만 찍을 수 있을까요?"

"네? 네."

여학생에게 관람 안내도를 건네받은 호영은 미로들이 그려져 있는 페이지에서 지금 자신이 있는 돌 미로만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지도를 찍던 호영이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려 보니 자신과 부딪혔던 여학생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빌려줘서 고마워요."

"저기......."

호영이 지도를 찍고서 여학생에게 다시 건네주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네?"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왠지 본 적이 없냐고 물어 오니까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호영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머릿속을 뒤지고 있자 여학생의 옆에 같이 있던 그녀의 친구들이 여학생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볍게 치며 소곤거렸다.

"야 이 계집애야. 그걸 작업 멘트라고 던진 거니?"

"뭐?"

친구의 말에 여학생이 눈을 끔뻑거렸다.

"이런 사람이 취향이었구나. 응, 잘 알겠어."

"그런데 잘생기기는 진짜 잘생겼다. 그래도 먼저 작업을 걸다니, 윤서 너 다시 봤다?"

"그, 그런 거 아니야!"

친구들의 말에 한윤서가 소리쳤다.

아니, 진짜로 얼굴이 살짝 익숙한 것 같아서 던진 말이었는데 한순간에 작업을 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으음, 죄송해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계속 머릿속을 뒤지던 호영이 한윤서에게 답을 내놓았다.

얼마 전까지는 요 몇 년 사이에 밖에 나간 일을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때에도 딱히 누군가랑 마주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아, 제가 죄송하죠!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해요! 얘들아, 빨리 가자!"

"어, 야, 밀지 마!"

"윤서야,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거야?"

"얼른 가자고!"

한윤서는 창피함에 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친구들일 밀고 잡아끌며 그 자리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뭐였지."

호영도 스마트폰으로 찍은 지도를 보고서 금방 그 자리를 벗어나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예숙과 재건은 이미 출구에 도착해서 호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 다음부터는 화장실 같은데 갈 거면 말을 하고 가야 된다?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조금 더 늦었으면 다시 전화하려고 했어."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호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답했다.

"호영아, 혹시 길을 잃었던 거는 아니지~?"

그런 호영에게 재건이 장난스럽게 물어 왔다.

호영은 순간 뜨끔했지만 표정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설마 그랬겠어요? 하하하."

"......아들, 길을 잃었던 거구나?"

호영의 표정 컨트롤은 완벽했지만 귀는 어쩔 수 없었다.

호영의 귀가 새빨개지는 것을 본 이예숙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떨어질 생각 하지 마, 알았지?"

"......응."

* * *

"윤서야, 너 오늘 처음 보는 남자한테 작업 걸었다면서?"

"뭐, 뭐?"

오늘의 모든 일정이 끝난 취침 전의 자유 시간.

민아란과 백호민, 한윤서는 2층 중앙 로비에 있는 자판기 옆 작은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셋 중에서 한윤서만이 반이 다르다 보니까 서로의 반이 절묘하게 일정이 엇갈렸기에 오늘 이렇게 셋이 모인 것은 조식 시간 이후 처음이었다.

"뭐? 진짜? 네가?"

민아란의 말에 백호민이 격한 반응을 보여 왔다.

"와아, 한윤서 네가 작업을 걸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치?"

"작업 건 거 아니야!"

한윤서의 부정에도 입이 살짝 웃고 있는 둘의 미심쩍은 표정은 변하지를 않았다.

"그래? 너랑 같은 반 애들이 말하던데? 크흠, '저기...... 저희 어디서 본 적 없어요?'라고 했다며."

"와,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멘트를......."

"그,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진짜 작업은 아니야!"

"그래, 그래."

한윤서는 둘의 반응이 답답하기만 했다.

아니, 진짜로 어디서 본 것 같아서 말한 건데.......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다는 느낌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누구였는데?"

"......몰라."

"에이, 그럼 작업 맞네."

이제는 변명하기도 지쳤다.

띠링-.

그때 한윤서의 스마트폰에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문자를 보면 바로 전화를 걸라는 내용이었다.

한윤서는 그 문자 때문에 둘과 떨어져서 문자를 보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도 가지 않아서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아빠, 왜 전화하라고 한 거예요?"

-윤서 너, 좋아하는 남자 생겼어?

"뭐?"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렴. 네 친구 트위스터에서 봤으니까.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보니 오늘 같이 움직였던 반 친구 한 명이 트위스터에다가 오늘 있던 일을 적은 모양이다.

'오늘은 제 친구 윤서가 처음으로 남자에게 먼저 작업을 건 기념비적인 날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한윤서의 아버지는 그것을 본 것이었다.

"아빠! 아직도 내 친구들 계정 훔쳐보고 그래요?!"

한윤서는 저런 것을 봤다는 것을 당당히 말하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이가 없었다.

-훔쳐본 거 아니다. 팔로잉 한 계정이라서 나도 모르게 본 것뿐이야.

"딸의 친구 계정을 팔로잉 하는 것부터가 이상하잖아요!"

-나는 그저 가끔 올라오는 비즈 공예들이 예뻐서 팔로잉 한 거다? 우리 딸 반 친구인 거는 나중에 알았어.

"한림 일보 회장이 비즈는 무슨......."

한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스토킹으로 신고했을 거라고 한윤서는 생각했다.

-그래서 네가 먼저 작업 걸었다는 자식......이 아니라 남자는 누구냐? 뭐 하는 놈이래? 까진 놈은 아니지?

"하아, 작업 건 거 아니에요."

-진짜지? 진짜? 아빠가 확인한다?

"진짜 그러면 아빠 번호 차단할 거예요!"

-......알았어.

아버지는 딸의 일갈에 꼬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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