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3권 11화
11. 남쪽의 작은 섬(2)
"야, 너 엄마밖에 없다며."
선호영 나이 다섯 살, 막 유치원에 입학한 그에게 한 아이가 다가와 처음으로 그에게 건넨 말이었다.
호영은 그 아이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러한 아이 때문에 자신이 울면 엄마가 슬퍼할 거다.
엄마를 슬퍼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이의 말에 호영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많이 상했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서 떨어져 놀기 위해 멀어지려고 했다.
그때였다.
"나랑 똑같네. 나도 엄마밖에 없는데."
그 아이의 미소는 정말 한 치의 티끌도 없이 깨끗했다.
"나는 문지한이라고 해. 너는?"
"선호영......."
호영의 대답을 들은 아이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호영이라고 하는구나. 우리 친구 하지 않을래?"
"으, 으응."
호영의 손을 맞잡은 아이는 손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다가 호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는 이제 그냥 친구가 아닌 가족 같은 친구가 되는 거야! 베스트 프렌드!"
* * *
"아들~?"
"어? 어어."
눈을 떠 보니 비행기 안이었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날아오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기분 좋은 꿈이었다는 여운은 아직 남아 있었다.
호영이 잠에서 깼을 때에는 이미 비행기가 착륙해 사람들이 내리고 있던 때였다.
호영도 재건과 이예숙의 뒤를 따라서 비행기를 내려와 인파를 뚫고 캐리어를 찾은 뒤 바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을 나오자마자 커다란 야자수들이 그들을 반긴다.
호영과 이예숙과 재건은 호영의 상태가 호전되고 다시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을 기념하며 2박 3일이라는 짧은 일정으로 제주도로 날아왔다.
이날을 위해서 재건과 이예숙은 연차까지 사용했다.
"오......."
호영은 야자수를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주도에서 보고 겪는 것들 모두가 다 처음일 것이다.
학창 시절에 수학여행으로 한 번씩은 다 와 본다는 제주도를 호영은 가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이들이 여행지를 제주도로 정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남들이 다 보고 겪는 것들을 호영에게도 보고 겪게 해 주고 싶었다.
"아들, 야자수만 보고 있을 거니?"
"어?"
시골에서 처음 도시로 올라온 사람이 빌딩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한참 야자수를 올려다보고 있던 호영이 이예숙의 말에 퍼뜩 고개를 내렸다.
이제 렌트카를 가지러 가야 한다는 이예숙의 말에 호영이 캐리어의 바퀴를 굴리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미리 가 있던 재건은 자동차에 충전되어 있는 기름 상태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고서 차체의 외부를 빙 돌아가며 영상을 찍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를 물어보니 이래야 나중에 잡음이 없다고 한다.
렌트카의 인수를 끝낸 그들은 트렁크를 열고서 캐리어를 실었다.
제일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실은 재건이 자신의 캐리어를 열더니 그 안에서 모자 세 개를 꺼내었다.
볼이 검은색이고 챙이 노란색인 같은 디자인의 스냅백이었다.
재건은 호영과 이예숙에게 그것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재건 씨, 갑자기 웬 모자에요?"
"하하하, 선물이에요. 그 사실은...... 소원이었거든요."
단체로 같은 모자를 쓰고서 여행을 다녀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사실은 모자가 아닌 옷을 맞춰 입고 싶었다.
하지만 옷을 맞추기에는 왠지 오버 하는 것 같아서 재건 스스로가 모자로 타협을 본 것이었다.
주문 제작으로 만든 것이었기에 각자의 스냅백의 볼에는 하얀 실로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호영의 모자에는 SHY, 이예숙의 모자에는 LYS, 재건의 모자에는 BJG였다.
"혹시...... 마음에 안 드니? 괜히 해 온 걸까......."
"아뇨, 저는 좋아요."
호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모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 재건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살짝 감동해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것을 재건은 다르게 해석했던 것 같다.
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호영은 재빨리 모자를 자신의 머리 위에 얹었다.
마음에 아주 쏙 드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모자에 쓰여 있는 자신의 이니셜이었다.
이 이니셜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면 좋겠다고 살짝 생각했다.
'SON' 같은 걸로.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낯간지러웠기에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울려?"
호영이 모자를 쓰며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이예숙에게 물었다.
"응, 응. 어엄청! 잘 어울려. 엄마는 어때?"
"엄마도 어엄청 잘 어울려. 5년은 젊어진 것 같네."
"10년도 아니고 애매하게 5년이 뭐니?"
"에이, 사실 엄마 나이에 그 정도는 아니지."
철썩!
호영의 말에 이예숙이 그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호호호 웃으면서 계속 내리치는 손맛이 점점 매워지고 있는 것은 아마 호영의 착각일 것이다.
재건은 둘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활짝 웃었다.
수학여행 시즌이었기에 비행기 표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운 좋게 겨우 구한 비행기 표를 타고서 제주도에 도착한 지금은 이미 한낮이었다.
여행 일정을 빡빡하게 짜 놓지는 않았기에 오늘 일정은 두림 공원밖에 없었다.
길이 막혀서 공항에서 두림 공원으로 가는 데에만 1시간 반이나 걸렸지만 호영에게는 가는 길 중간중간에 자동차 창밖으로 보는 모든 풍경들이 새로웠기에 질리지는 않았다.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두림 공원의 주차장에는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의 커다란 관광버스가 가득 세워져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아직 두림 공원의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높게 솟아 있는 야자수가 눈에 들어오고 있다.
입장권을 끊고 두림 공원의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 또한 길게 늘어선 야자수 길이었다.
저기도 야자수, 여기도 야자수.
호영은 자신이 확실하게 제주도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들, 사진 찍자!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 재건 씨도!"
이예숙은 이날을 위해서 집에 고이 모셔 두고 있던 조니 브랜드의 미러리스 카메라를 들고 왔다.
호영이 아직 어릴 때 구매한 것이기에 출시된 지 시간이 꽤나 흐른 모델이었지만 아직까지 쓸 만했다.
이예숙은 그동안 써 보지 못했던 한이라도 풀려는 듯이 카메라를 목에 걸고 호영과 재건을 양손으로 끌고서 돌아다녔다.
지금은 이예숙이 호영보다 더 즐거워하고 있었다.
야자수 길에서 한 장, 그 바로 옆의 사파리 조류원에서 손에 새를 올리고 한 장, 멧돼지 모양의 돌 앞에서 한 장, 쌍용 동굴을 나와 민속 마을에 들어가서 한 장.
때로는 서로가 서로를 찍어 주기도 하고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에게 부탁해 배경이 크게 나오도록 찍기도 했다.
개인이 찍힌 사진보다도 셋이서 찍힌 사진이 훨씬 많았다.
아홉 가지의 테마로 꾸며진 두림 공원을 약 2시간을 소요하면서 모두 둘러본 그들은 근처에 연예인들이 많이 다녀간 것으로 유명한 맛집에서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향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조금씩 저물어 가고 있는 시간이었기에 호텔에 도착했을 때에는 하늘에서 별들이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고 있었다.
이곳도 역시나.
호텔의 주차장에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과 학생들을 내려 주고 있는 대형 관광버스들이 한가득이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을 학교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들고 있는 선생님들이 통제를 하며 줄을 세우고 있었다.
"너희들이 빨리빨리 움직여서 짐을 정리해야지 밥 먹으러 간다! 굶고 싶어?!"
"아니요!"
밥이라는 소리에 아이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 선 친구와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
호영은 그들의 그런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모습에 자신과 문지한의 모습을 슬쩍 넣어 보았다.
서로 웃고 떠드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니 즐거운 한편 가슴 한편이 뭉클했다.
이제는 이루어질 확률이 0에 가까운 것이 아닌 완전히 0인 상상이었다.
"아들? 안 들어갈 거야?"
"어? 어어, 들어가야지."
이예숙의 말에 정신을 차린 호영은 재건과 이예숙의 뒤를 따라 호텔에 들어가서 체크인을 마쳤다.
체크인을 마친 호영은 둘과는 따로 짐을 풀었다.
재건과 이예숙이 한방, 호영이 한방이었다.
처음에는 이예숙이 셋이서 같이 방을 사용하자고 말했었다.
하지만 호영은 그것을 거부하고 홀로 방을 쓰는 것을 택했다.
둘을 위해 배려한 것이다.
자신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만큼, 호영은 둘이서 같이 있을 시간이 조금이라도 많이 생겼으면 하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셋이서 같이 다니는 것은 관광을 위해 밖을 돌아다닐 때만 해도 충분하다.
호영은 그때에도 틈이 있다면 둘이서 있을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오늘은 이예숙의 행동력에 상황을 그렇게 만들 틈이 없었지만 내일은 꼭 둘이서 있을 상황을 만들어 주고 싶다.
만약 이예숙이 알면 괜한 짓을 한다고 말할 일이었지만 호영은 그 괜한 짓을 해 주고 싶었다.
호영은 빠르게 샤워를 마친 뒤 집에서 챙겨 온 노트북을 캐리어에서 꺼내 이니티움 홈페이지의 커뮤니티 게시판에 들어갔다.
지금 알아 두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제 제프리노에게 아도라의 검을 가져다준 보답으로 들어간 지하 창고에서 발견한 영약으로 인해 생긴 스탯 '친화력'에 관한 것이었다.
호영은 검색 창에 '스탯 친화력'을 입력했다.
['스탯 친화력'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그 뒤에 홈페이지에 뜬 문구를 본 호영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관련 글이 하나도 없다니.......
그래도 호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앞에 스탯을 지우고 친화력만을 검색해 보았다.
하지만 나오는 것이라고는 그냥 우연히 친화력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스탯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내용의 글들뿐이었다.
정보가 전혀 없다.
"어쩔 수 없나......."
선택한 것은 자신이었으니 이제 와서 정보가 없다고 가만히 머리만 싸매고 있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커뮤니티에 정보가 있을 것이라고 크게 기대를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정보가 없어도 스탯의 이름에서 효과는 대강 상상할 수 있다.
친화력을 사전적인 의미로만 따지자면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잘 어울리는 능력'이다.
그것과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호영은 생각했다.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
호영은 노트북을 덮고서 정리한 뒤에 방에 달려 있는 창문을 열고서 그 창틀에 팔을 기댔다.
차가운 밤바람이 호영을 시원하게 감싸 주었다.
"꺄하하하! 너 그게 뭐야~!"
"이게 뭐 어때서!"
창문을 열자 아랫방에서 아이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호영의 방으로 올라왔다.
즐거워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자신도 즐거워지는 한편 살짝 슬프기도 했다.
오랜만에 여행을 와서 그런지 너무 감성적이게 된 것 같다.
똑똑-.
그때 호영의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호영아~ 우리 잠깐 근처에 산책이라도 갈까 하는데 같이 갈래?"
호영은 둘이 있을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살짝 망설여졌다.
......그래, 오늘까지만 둘 사이에서 조금 어리광을 부려 보자.
"네!"
호영은 냉큼 방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