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3권 5화
5. 빼앗긴 두 번째 검(2)
아직 해가 낮게 걸려 있는 주말 새벽.
차가운 공기를 마시면서 호영은 길가를 가볍게 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 밖에 다니는 것에 익숙해지자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지만 지금은 완전히 몸에 습관처럼 배어 버렸다.
달리기 30분을 다 채운 호영은 아파트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8층에 내려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바로 호영의 집이 나온다.
옷에 찬 열기로 느껴지는 답답함에 호영이 겉옷의 지퍼를 내리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자신의 집 현관 앞에서 웬 남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옆집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확실히 호영의 집 앞이었다.
호영은 그 남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재건 아저씨?"
"억?! 아아, 호영이구나."
호영이 다가와 말을 걸자 재건은 깜짝 놀랐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는지 그는 호영이 가까이 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방금 전 자신의 모습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하, 하하하. 오랜만이다, 호영아."
"아, 안녕하세요."
둘의 사이에 살짝 어색함이 감돌았다.
몇 년 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서로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오랜 공백으로 인한 어색함은 아직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으, 정말 감사합니다."
먼저 말을 이은 것은 호영이었다.
"어? 뭐가 말이야?"
"캡슐이요. 구해 주시기 어려웠을 텐데."
"아아, 그거."
재건이 호영에게 캡슐을 구해 주기는 했지만 사실 정확히 따지자면 캡슐을 구해 준 것은 그의 형님이었다.
지금의 그는 캡슐을 그리 빨리 구할 힘이 없었기에 형님에게 부탁해 형님의 자식들이 구해 둔 예비 캡슐을 값을 치르고 받아 낸 것이었다.
그래도 호영이 이렇게 말해 주니 절로 자신의 어깨가 올라갔다.
그리고 기분이 매우 좋았다.
"잘 쓰고 있다고 예숙 씨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 다행이야, 정말."
"아, 네."
둘의 대화가 또 끊겼다.
호영은 재건과 이렇게 어색한 상황이 싫었기에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가고 싶었다.
대화의 주제를 찾기 위해 호영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뒤에 감추고 계신 거는 뭐예요?"
"아, 이거?"
재건이 계속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앞으로 꺼냈다.
그의 손에는 곱게 포장되어 있는 프리지아가 들려 있었다.
"오랜만이니까, 예숙 씨 선물로....... 하하."
재건의 볼을 긁적거렸던 손이 이번에는 그의 뒤통수를 긁적거린다.
재건의 얼굴에는 쑥스러운 미소가 가득하다.
"사실은...... 만날 약속 시간도 꽤 남아 있는데. 내가 긴장이 돼서 이렇게 일찍 와 버렸어. 그런데 막상 오니까 예숙 씨가 왜 이렇게 일찍 온 거냐고 할까 봐...... 하하하. 아, 이거 민망하네."
"괜찮을 거예요. 같이 들어가요."
"그럴까?"
호영의 말에 재건은 활짝 웃었다.
호영이 그것을 받아 주듯이 살짝 미소 짓고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아드을, 오늘은 조금 늦었......."
"하하, 안녕하세요, 예숙 씨."
호영이 돌아온 줄 알고 고개를 내밀었던 이예숙이 호영의 뒤에 서 있는 재건을 보고 우뚝 굳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이예숙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렇게 빠르게 오시면 어떡해요! 화장도 안 했는데!"
나이가 40이 훌쩍 넘는 그녀지만 마음만큼은 아직 소녀였다.
주방을 보니 아직 아침에 먹을 찌개의 재료를 준비하던 도중으로 보였다.
이예숙이 방금 전에 그렇게 들어갔으니 다시 나오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호영은 손님이 있는데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왠지 느낌이 좋았다.
"엄마, 화장할 거면 찌개는 내가 끓일까?"
"안 돼!"
이예숙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엄마가 할 테니까 절대 재료에 손대지 마!"
"어? 어어......."
* * *
이즈바론트의 성문 밖에서 오염된 몬스터들을 플레이어들이 열심히 사냥하고 있던 그때.
"복종의 낙인!"
이즈바론트의 지하 왕묘에 들어온 디노는 한 관의 뚜껑을 열고서 스킬을 사용했다.
그가 스킬을 사용하자 그의 지팡이 끝에서 검은 증기가 폭포처럼 새어 나오더니 관 안에 안치되어 있던 유해를 감싸기 시작했다.
발가락뼈에서부터 검은 증기가 살이 되어 엉겨 붙기 시작했고 바로 다리, 골반, 허리를 타고 올라가 머리가 생겨나고 팔에 살이 붙었다.
창백한 피부와 짙은 눈두덩, 새파란 입술을 한 남자의 몸에 검은 갑옷이 둘러졌다.
천천히 관을 나온 그의 투구 사이로 뜨인 눈이 디노를 응시한다.
[복종의 낙인으로 인하여 '데스 나이트 - 아도라 루제로스'가 당신의 말에 복종합니다.]
"큭, 크하하하하! 됐어! 해냈다고!"
아도라의 모습과 시스템 메시지까지 확인한 디노는 크게 기뻐했다.
"......네놈은 무엇이냐."
아도라가 말을 하자 디노는 놀랐다.
데스 나이트가 된 아도라가 의식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놀라움도 잠시, 디노는 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봐, 오랜만에 깨어나서 머리가 굳은 모양인데, 나는 네 주인님이야. 호칭은 가려서 하라고?"
"그럼 네 녀석이라 해 주마."
아도라의 말에 디노는 혹시 스킬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복종한다면서?
그런데 왜 복종을 안 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도라에게 자신이 누워 있던 관을 부숴 보라는 등의 명령을 내려 보았다.
아도라는 디노의 명령에 참 잘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명령에만 따를 뿐이었다.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라는 것이나 말투의 변경 같은 명령은 따르지를 않는다.
디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명령은 잘 듣고 있으니 말이다.
디노는 곧바로 지하 왕묘를 빠져나왔다.
워프 스크롤 하나만 찢으면 됐기에 나오는 길에 누군가에게 들키는 일은 없었다.
일단 지하 왕묘를 벗어난 디노는 커뮤니티를 통해서 호야의 행방을 찾았다.
마을 사람인 주제에 유명인인 그의 목격 정보는 커뮤니티에 꽤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즈바론트의 몬스터 웨이브에서 그의 목격 정보가 끊겨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목격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호야는 그 후로 다시 치빈이 알려 준 사냥터를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호야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준비했던 것인데 그가 나오지 않자 디노의 화살은 다른 곳을 향했다.
호야를 제외하고도 그가 복수해야 할 사람은 많았으니까.
* * *
PK 길드 '뒷골목 사람들'의 길드 하우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이었다.
"오빠아~, 나 어제 무서운 꿈 꿨오."
"무슨 꿈을 꿨길래 그렇게 떨어? 내가 다 걱정된다."
"흑흑, 오빠가 갑자기 내 옆에서 사라지는 꿈 꿨단 말이야!"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겨 들자 그도 그녀를 꽉 껴안았다.
"거 완전 개꿈이네. 내가 클로에 너를 두고서 왜 사라져?"
"정말이지?"
"그럼!"
클로에 그녀는 블랙 헤븐이 해체된 후 재빠르게 디노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붙었다.
그것이 눈앞에 있는 '뒷골목 사람들'의 길드 마스터였다.
평소에 디노와 친분이 있었고 그가 평소에 자신과 사기는 디노를 크게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클로에는 바로 이 남자에게로 갈아탄 것이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너무 쉬운 작업이었다.
"길마님! 큰일 났어요!"
클로에과 그가 달콤한 시산을 보내고 있을 때에 길드원 하나가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야? 내가 클로에랑 단둘이 있을 때는 방해하지 말라고 한 거 잊었어?"
"악! 잠시만요! 급한 일이라서 그래요!"
자신의 시간을 방해한 길드원에게 그가 검을 휘둘렀지만 길드원은 진짜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소리쳤다.
"디노! 디노 그 새끼가 쳐들어왔다고요!"
"디노?"
길드원의 말에 그는 기가 찼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녀석이 쳐들어온 것 가지고 급한 일이라니 자신을 방해한 것이 괘씸했다.
"하, 추락할 대로 추락한 새끼가 쳐들어온 것이 뭐가 큰일이라고."
"설마 나 때문에 온 거 아니야? 그 자식 전부터 집착 장난 아니었단 말이야! 내가 그거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진짜 그런 이유라면 내가 아주 껌 딱지처럼 눌러 줘야지. 너는 구경이나 하고 있어."
클로에의 겁먹은 척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서 방을 나갔고 클로에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이런 재미난 구경거리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꺄하하, 마침 슬슬 심심했는데 잘됐네.'
길드원의 안내에 따라 길드 하우스의 1층 로비로 나가자 디노를 중앙에 두고서 길드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누구도 먼저 다가가지 않고 무기를 든 손을 벌벌 떠는 것이 뭔가 이상했지만 그는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뭐야, 니들 다 왜 그러고 있어? 저런 녀석 하나 처리 못 해서 나한테까지 이야기가 올라와야 돼?"
"기, 길마님. 그게......."
"여어, 오랜만이다?"
디노를 둘러싸고 있던 길드원 하나가 말을 더듬으며 말하려 하자 디노가 그 말을 잘랐다.
"그래, 참 오랜만이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그때 친절하게 해 줬었나 봐. 이렇게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시 찾아올 줄이야."
"크크크크크."
그의 말에 디노가 상황이 매우 우습다는 듯이 낮게 웃었다.
그는 디노가 왜 저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레벨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지능까지 우수수 떨어졌냐? 왜 처웃고 있어?"
"크크크크. 별거는 아니고, 이 상황이 조금 웃겨서 말이야. ......클로에 네가 왜 거기 있어?"
디노의 섬뜩한 시선을 받은 클로에게 한순간 움찔했지만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표정을 다잡았다.
"디노 씨, 그걸 꼭 말을 해야지 알아요?"
"'오빠'에서 '디노 씨'라....... 그게 네 대답이라는 것으로 알게."
"하, 대답은 무슨 대답."
클로에는 헛웃음을 디노에게 흘렸다.
이제는 별것도 아닌 녀석이 뭘 믿고 저렇게 폼을 잡는 거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야, 이제는 내 여친 님이니까 찌질하게 굴지 말아라?"
"크크. ......하아, 내가 예전에는 지금의 너랑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까 소름이 돋는다."
"잡담은 그만하고. 슬슬 우리 사이도 깔끔하게 정리해야지?"
그의 말에 디노가 또 한참을 웃어 댔다.
그는 디노의 그런 행동이 계속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디노 많이 추락했네. 아주 정신이 나갔어.'
뭐, 내가 이해해 줘야겠지.
그는 그리 생각하면서 귀찮은 일을 빠르게 끝내기 위해 직접 앞으로 나왔다.
그가 앞으로 나오자 디노의 옆에 있던 데스 나이트가 움직였다.
그는 그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데스 나이트라고 해도 저 추락한 녀석의 힘으로 탄생한 녀석이니 예전만큼의 강함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의 생각은 맞는 생각이었다.
소환수들은 어느 정도 소환주의 능력에 따라가는 것이 정석이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데스 나이트가 그 정석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즉사에 이르는 대미지를 입었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어?'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도 하지 못한 채 로그아웃을 당했다.
그런 그를 대신해서 현장에 남아 있는 이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디노의 데스 나이트가 가볍게 움직여 검을 휘두르자 그가 바로 빛이 되어 사라졌던 것이다.
"크하하하하하하!"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 디노가 광소를 내질렀다.
특히 클로에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네 대답 후회하지 마라?"
디노는 그날 길드 하우스에 있던 '뒷골목 사람들'을 모두 로그아웃 시켰다.
물론 클로에도 포함해서.
그것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