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3권 4화
4. 빼앗긴 두 번째 검(1)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폐하......."
제프리노 루제로스.
이즈바론트를 향해 오던 몬스터 웨이브를 성벽의 조그마한 피해와 일부 소수의 병사들의 희생이라는 예상보다 작은 피해로 막아 내었건만 그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이즈바론트는 모험가들의 힘을 빌려 지키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역대 선조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지하 왕묘는 지키지 못하였다.
루제로스의 제4대 국왕이자 당대 두 번째 검이라 불리던 아도라 루제로스의 유해를 지키지 못했다.
그의 유해와 함께 안치되어 있던 그의 검마저 모습을 감추었다.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알리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때 그의 방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이즈바론트의 수호에 최고의 기여를 해 준 세 명의 모험가들 중 아직 보상을 받지 않은 두 명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내 지금 알현실로 내려갈 터이니 잠시 후에 데리고 오도록 해라."
"예."
우선 이 일을 바깥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는 얼굴에 낀 근심부터 지워야 했다.
* * *
퀘스트 '불온한 움직임'이 완료되었다는 시스템 메시지를 본 호야는 보상을 수령하러 가라는 시스템 메시지의 성화에 바로 워프 스크롤을 사용해서 다시 이즈바론트로 돌아갔다.
워프 스크롤을 사용했을 시 도착하는 장소에 도반이 있었다.
"도반 씨, 여기서 뭐 하세요?"
"너를 기다렸다."
"아....... 고마워요."
도반의 말에 호야는 옅게 웃었다.
왕성의 앞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둘을 막으며 용건을 물어 왔다.
용건을 전하자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둘을 안내해 줄 사람이 나와 둘을 성안으로 안내했다.
"두 분 다 저를 따라와 주세요."
안내인의 뒤를 따라서 넓고 깨끗하게 조성된 정원을 지나서 성의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십수 명의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넓었고 벽에는 커다란 그림들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척 보아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그림들, 똑같은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르고 있는 사람들의 인물화.
수수한 색체를 하고 있는 복도에 화려한 그림들이 걸려 있으니 저절로 시선이 갔다.
"역대 국왕 폐하님들이십니다."
호야가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자 안내인이 넌지시 한 말이다.
그림들을 보던 호야의 시선이 하나의 인물화에서 멈추었다.
국왕 한 명만이 홀로 그려져 있는 다른 인물화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두 명의 사람이 그려져 있는 그림.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남자가 한 손으로 은색의 검을 바닥에 세운 채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크라우스?"
"크라우스 님을 아시는군요?"
호야는 작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고요한 복도에는 크게 울려 퍼졌다.
호야의 말을 들었던 안내인이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모험가님들과는 다르게 역사에 관해 아주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시군요. 크라우스 님의 모습이 그림으로 기록된 문서들은 몇 없는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 아뇨. 별로......."
"아닙니다. 정말 대단하신 거예요."
안내인은 호야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호야는 그 상황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이니티움에서 책을 읽은 적은 모안에게 수업을 받을 때 말고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크라우스 본인을 봤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그냥 가만히 있었다.
"크라우스 님의 앞에 계신 분은 제4대 국왕 폐하이신 아도라 루제로스 님이십니다. 크라우스 님이 유일하게 둔 제자이시며 당대 두 번째 검이라고 불리셨던 분이죠. 첫 번째 검은 크라우스 님이셨으니까요."
지금은 그의 '유일한 제자'의 칭호가 벗겨져 있지만 호야는 가만히 있었다.
한데 크라우스에게 제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 제자가 왕이었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다.
호야와 도반은 얼마 안 있어서 커다란 알현실의 문 앞에 도착했다.
안내인이 문 옆에 서 있던 병사에게 말을 전하자 병사가 크게 호야와 도반이 왔다는 말을 전했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중앙을 가로지르듯이 깔려 있는 붉은 레드 카펫.
그 레드 카펫의 양옆으로 귀족으로 보이는 양질의 화려한 옷을 입은 이들이 여럿 서 있었다.
그 레드 카펫의 끝에 있는 낮은 계단 위에 있는 화려한 옥좌에 는 복도에 걸려 있는 인물화에 그려진 왕관과 망토를 두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루제로스 왕국의 현 국왕인 제프리노 루제로스였다.
"이즈바론트를 수호해 주기 위해 분투해 준 모험가들이여, 방문을 환영한다."
안내인에게 전해 들은 말로는 현 국왕인 제프리노는 모험가들의 예절 방식에 그리 까다롭지 않은 편이라 한다.
살짝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했기에 둘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에 미소 지은 제프리노는 둘에게 편히 있으라고 말했다.
"이미 공개적인 수여식이 끝나 버린 것은 참으로 미안하다. 혹 공개된 영광을 원한다면 나중에 다시 일정을 잡도록 하마."
호야와 도반을 제외한 높은 기여도를 달성해 왕에게 직접 보상을 하사받은 또 다른 플레이어는 에리먼이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자신의 업적을 알리며 보상을 받아 갔다고 한다.
제프리노는 둘에게 자신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직접 알리고 싶은 것인지를 묻는 거였다.
그에 대한 둘의 대답은 'NO'였다.
호야와 도반은 둘 다 일부러 보상을 뒤로 미루어 가며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가. 그럼 둘에게는 왕성 창고에서 원하는 아이템 하나를 가져갈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 둘 다 우리를 위해 힘써 주어서 정말 고맙다."
[제프리노의 호감도가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둘은 그 뒤에 바로 왕성 창고로 안내되었다.
"한 분씩 입장하겠습니다. 어느 분이 먼저 들어가시겠습니까?"
창고의 문지기의 말에 도반이 호야를 쳐다보았다.
"......."
"호야?"
도반이 호야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제프리노가 에리먼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부터 호야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언가 다른 것에 정신을 빼앗긴 느낌이다.
"호야?"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냥 이름만 불렀어."
호야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한 문지기는 혼자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했다.
호야는 도반에게 먼저 양보했다.
"아니."
도반이 다시 호야한테 양보한다.
그리고 다시 호야가 도반에게 양보한다.
그런 순환이 반복되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문지기가 도반을 지목해 그를 먼저 들여보냈다.
시간이 꽤 흐른 뒤에 도반이 방패 하나를 들고 나왔고 호야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루제로스의 왕성 창고'에 입장하였습니다.]
[현재 획득 가능한 아이템은 1개입니다. (0/1)]
벽에는 아리아의 방에 버금가는 양의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진열대 위에는 여러 가지 장비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호야는 우선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꺼내 보았다.
[기초 마력 강화의 스킬 북]
사용할 시 '기초 마력 강화'의 습득이 가능합니다.
사용 제한: 마력 250 이상 마법사
[플레임의 스킬 북]
사용할 시 '플레임'의 습득이 가능합니다.
사용 제한: 마력 120 이상 마법사
[아이언 바디의 스킬 북]
사용할 시 '아이언 바디'의 습득이 가능합니다.
사용 제한: 체력 170 이상, 힘 70 이상 전사 혹은 무투가
⋮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모두 스킬 북이었다.
스킬 북을 꺼낼 때마다 '이 아이템을 획득하시겠습니까?' 하는 시스템 메시지가 생겨났지만 호야는 모두 '아니오'를 선택했다.
마을 사람은 장비의 직업 착용 제한을 무시할 수는 있지만 스킬 북의 직업 제한은 무시하지 못한다.
호야가 사용할 수 있는 스킬 북이 아니었다.
직업 제한이 없는 스킬 북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플레이어들 사이에 풀린 양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구하기가 어렵다는 소리다.
언젠가는 교체할 장비가 아닌 계속 힘이 되어 줄 스킬을 습득하고 싶었지만 역시 장비를 확인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 전에 혹시 모르는 일이니 스킬 북을 모두 확인하자는 생각에 호야는 책장에 있는 책을 모두 빼고 넣고를 반복했다.
직업 제한이 없는 스킬 북이 한두 개 나오기는 했지만 모두 호야에게는 그리 필요하지 않은 스킬이었다.
크라우스가 알려 준 '가시나무'가 있는데 '2단 찌르기'를 습득하는 것은 낭비였다.
이제 책장도 마지막 한 줄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역시 장비를 봐야 할까.......'
스킬 북을 확인한 것이 괜한 시간 낭비를 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호야는 스킬 북의 확인을 계속했다.
하지만 끝내 이렇다 할 스킬 북을 찾지는 못했다.
호야는 시선을 장비들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장으로 돌렸다.
이미 시간을 많이 소모했기에 빠르게 확인을 마치고 싶었다.
일단 무기는 제외했다.
오염된 몬스터들을 사냥하고서 호야의 레벨은 250이 넘어 기간트 레드 베어 본 소드의 공격력은 1,500이 되었다.
랭커들 중에서도 최상위, 그러니까 도반과 같은 이들만이 공격력 1,200을 간신히 넘는 무기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 사용하는 무기는 자신의 레벨이 300을 넘을 때까지는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곳에 있는 장비들보다는 좋은 재료를 들고 가서 단탈스에게 의뢰를 맡기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그러니 나중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 바로 교체가 필요한 것을 찾자.
그렇게 생각한 호야는 방어구 위주로 확인을 했다.
그러다 검은색 부츠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벼운 그림자의 발걸음]
등급: 유니크
방어력: 295
내구도: 120/120
*이동 속도를 20% 상승시킵니다.
*밤 혹은 어두운 장소에서 이동할 시 보다 더 기척을 감추기기 쉬워집니다.
*어두운 장소에서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습니다.
그림자를 형태화시켜 실을 짜서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 실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잠행에 특화된 부츠입니다.
착용 제한: 민첩 390 이상 암살자
호야는 일단 이것으로 만족했다.
이동 속도 20% 상승은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칭호 '실피드의 은인'의 효과를 합치면 호야의 이동 속도는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1.6배는 빨라진다.
물론 이동 속도를 올려 주는 아이템이 없는 플레이어 기준이다.
하지만 왕성의 창고이니 레전드리 아이템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레전드리 아이템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유니크도 몇 없었다.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호야는 획득을 하겠냐고 물어 오는 시스템 메시지에 긍정을 표하고 부츠를 갈아 신었다.
부츠를 갈아 신은 호야가 밖에 나오니 도반이 아직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어, 도반 씨, 아직 안 가고 계셨어요?"
"기다렸어."
시간이 꽤나 흘렀을 텐데....... 고마운 한편 의구심이 들었다.
왜 그렇게 까지 기다려 준 거지?
호야는 성을 빠져나오는 길에 자연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그...... 에리먼이라는 사람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자와의 일로 네 생활이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도반은 그를 걱정해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귓속말로밖에 받아 본 적이 없는 긴 문장을 육성으로 들은 것에 호야는 놀랐고 그 내용에 또 한 번 놀랐다.
도반은 호야에게 자신이 느꼈던 것을 말했다.
호야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고 했었는데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에리먼이라는 사람하고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
"네, 정말로요."
호야는 가면 아래로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래, 에리먼과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에리먼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