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2권 15화
15. 렌시아 그린우드(2)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렌시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주 소중한 인연.
렌시아는 소녀가 정령왕 실피드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릴 적에 한번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실피드?"
"왜 성인식 시험을 보러 오지 않은 거야? 나랑 약속했잖아!"
아직 스물이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우연히 마주쳤던 렌시아와 실피드는 성인식 시험에서 서로 계약을 맺기로 약속을 나누었었다.
그 약속을 믿고 실피드는 렌시아가 성인식을 치를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렸지만 성인식을 치를 50살이 되었을 올해 렌시아는 성인식을 치르러 오지 않았다.
그것에 불만과 불안을 느낀 실피드가 그녀를 찾아서 직접 숲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아, 아아.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그렀게 흘렀군. 미안하다, 집중을 하다 보니 그런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럼 약속은 아직 유효한 거지?"
"당연하지. 이 일만 끝나면 바로 성인식을 치르고 너와 계약할 것이다."
렌시아의 대답에 실피드는 밝게 웃었다.
실피드는 하루라도 빨리 렌시아와 계약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의 실험을 도와주었다.
같이 숲에서 재료를 조달하거나 다음 실험을 빨리 진행할 수 있게 나무 구멍 안에 고여 있는 연기를 한 번에 빼내 주고는 하였다.
"한데, 실피드. 너는 이런 내가 싫지 않나?"
"응? 뭐가?"
"나는 자연을 갉아먹고 있는 존재다. 그런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싫지는 않나......?"
"딱히?"
실피드는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엘프들이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약초를 채집하고 살아 있는 나무를 잘라 재료로 사용하는 행위가 딱히 자연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야. 물론 선을 넘어가 버린다면 훼손이 되겠지만...... 적절한 수준에서의 행위는 자연 순환에 도움이 되는 일이야."
"그러한 건가?"
"나무의 가지가 빽빽하고 나뭇잎이 무성해서 햇빛이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 아래에 있는 풀들은 모두 죽어 버려. 적절한 가지치기는 필요한 법이야. 나도 그러고 다니는걸."
하지만 왜 엘프들은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박혀 버린 고정 관념을 무시하지 못하는 걸 거야. 엘프와 정령이 공생하기 시작한 지는 아직 100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실피드의 도움으로 실험의 순환이 빨라졌다.
하지만 아직 이브의 눈물은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정리시키기 위하여 밤 산책을 나온 렌시아의 뺨을 차가운 밤바람이 기분 좋게 쓰다듬어 주었다.
"후우, 조금은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군."
"바람 더 강하게 해 줄까?"
"윽, 이건 좀 심한 것 같은......."
실피드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숲을 거닐던 렌시아는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지금까지 전혀 느껴 본 적이 없는 불길한 기운.
렌시아와 실피드는 그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소에 달려갔다.
가까워질수록 심각해지는 악취에 둘은 코를 막았다.
바람의 정령이라서인지 실피드는 렌시아보다 몇 배는 더 괴로워 보였다.
달려간 그곳에는 1.5m 정도 크기의 무언가의 덩어리가 있었다.
새파랗고 검은 피부는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녹아내려 땅에 떨어진 피부에 닿은 풀과 나무뿌리들이 검게 변색되고 있었다.
몸 이곳저곳에 구멍이 생겼다가 오므라질 때면 탁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윽......! 이건 뭐지?"
"세상에, 저거 슬라임이야!"
마족이 땅에서 모습을 감춘 지 얼마 안 되던 시점, 대륙에는 아직 그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마족이 자신들의 마기를 이용해 오염시킨 몬스터들도 도망쳐 숨은 일부의 녀석들이 아직 대륙에 남아 있을 때였다.
그 흔적이 결국 엘프들의 숲까지 흘러들어 온 것이었다.
렌시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등 뒤에 손을 뻗어 화살과 활을 찾았다.
하지만 밤 산책을 위하여 나왔던 그녀의 등에 화살과 활과 같은 흉흉한 것이 걸려 있을 리가 없었다.
활과 화살을 가지러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를 발견한 기분 나쁜 형태를 하고 있는 슬라임은 그녀를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투두두두두-.
슬라임의 몸에서 독을 품은 덩어리들이 연쇄적으로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
그녀가 피할 때마다 독의 덩어리들을 대신 맞은 나무와 풀들은 그 즉시 검고 새파랗게 변해 갔다.
그것을 본 렌시아는 이를 악물며 마력을 사용해 활과 화살을 구현해 냈다.
보통의 활과 화살보다도 강인한 위력을 지닌 것이기는 하나,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MP의 소모가 극심했다.
그렇기에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MP가 다 떨어지기 전에 결착을 지어야 했다.
"실피드! 피해가 안 가게 벽을 세워 줘!"
"알았어!"
실피드가 팔을 놀리자 렌시아와 슬라임을 안에 가둬 두는 형태로 동그랗게 날카로운 바람의 벽이 생겨났다.
슬라임이 발사한 독 덩어리들은 그 바람의 벽을 뚫지 못했다.
렌시아는 활시위를 빠르고 정확하게 당겨 슬라임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렌시아가 쏜 마력의 화살이 하나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네 개로, 네 개에서 여덟 개로, 여덟 개에서 16개로 늘어났다.
마지막에는 백을 가뿐히 넘긴 마력의 화살이 만들어져 모두 슬라임에게 명중하며 폭발했다.
다행히도 슬라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빛이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오염된 땅과 나무들은 본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딱 한 번 미세하게 스친 독 덩어리가 닿았던 팔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어째서인지 바람이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다.
"렌시아, 괜찮아?"
"......조금 쌀쌀하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괜찮은 것 같군."
"그래도...... 어머니를 위한 약도 좋지만 우선 자신을 위한 약을 만들면 안 될까? 렌시아가 죽으면 다 소용없는 거잖아. 그니까......."
"후후, 그렇게 하겠다."
울먹거리는 실피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렌시아는 검고 새파랗게 변해 버린 풀과 나무 조각을 조금씩 챙겨서 나무 구멍으로 가져왔다.
일단 오염되어 버린 숲을 복구시키는 것이 먼저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숲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완성해 낸다면 자신 또한 치료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는 죄송한 일이었지만 렌시아는 엘리시아를 위한 연구를 잠시 옆으로 미뤄 두고서 검고 파랗게 변한 숲을 되돌릴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브의 눈물과는 다르게 일주일 만에 확실한 성과가 나와 주었다.
그리고 우연인 것인지 숲을 복구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약을 토대로 어머니를 위한 약도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것이 이브의 눈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전의 자신이 어렸을 때처럼 바깥을 돌아다니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렌시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약에 '엘프의 눈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허리에 매는 가방에 엘리시아를 위한 엘프의 눈물이 있는지를 확인한 렌시아는 실피드와 함께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을을 향했다.
"어머니만 괜찮아지시면 바로 성인식 치르는 거다?"
"그래."
렌시아의 시야에 마을의 입구가 들어오자 마을에 있던 엘프들의 시야에도 렌시아가 들어왔다.
입구에 가장 가까이에 있어서 렌시아를 제일 먼저 발견했던 엘프들은 곧바로 마을 안으로 가서 렌시아가 왔다는 것을 전했다.
렌시아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엘프들은 모두가 자신의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뭐지......?"
처음 보는 엘프들의 반응에 렌시아는 살짝 당황했지만 엘리시아를 만나서 약을 전해 주겠다는 생각에 깊게 신경 쓰지 않고 마을에 발을 들였다.
그때,
척, 척, 척.
나무의 위와 집들의 사이로 렌시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좋은 활솜씨를 가지고 있는 엘프들이 렌시아에게 활을 겨누었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들의 행동에 렌시아가 가만히 있자 워인이 렌시아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피부는 군데군데가 새파랗고 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자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이들의 거의 대부분이 워인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집에 들어가서 창문을 통해 조심스레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엘프들 모두가 그러했다.
그리고 렌시아는 저것이 무엇이고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도 똑같이 겪은 일이었으니까.
"그건......."
"렌시아 그린우드!"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렌시아가 꺼내려 했지만 워인이 그녀의 말을 끊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를 마을에서 추방한다!"
* * *
"안 돼요! 못 들어가요! 엘프들한테는 개인 사생활도 없는 건가요!"
"엘리시아, 그냥 형식적인 조사일 뿐이야."
"형식적이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쿨럭! 쿨럭!"
"그러게 너무 크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엘프들의 마을에서 지금 마을에 만연하고 있는 병의 원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 조사 범위에는 당연하게도 개개인의 집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엘리시아의 집, 렌시아의 방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조사를 위하여 엘리시아의 집에 조사대로 배치된 엘프들이 찾아왔지만 그녀는 병든 몸을 이끌고 자신의 집 앞에서 그들을 막고 있었다.
집 안에는 그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으니까.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그녀였고 피부가 새파랗고 까맣게 변해 버리는 병까지 걸려 있으니 도저히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현재 오래 서 있을 수 없는 상태였고 각혈도 예전보다 자주 일어나고는 했다.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진 엘리시아를 한 명이 부축하고 다른 엘프들은 그녀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극히 평범하고도 평범한 엘프들의 일반 가정집이었다.
그래도 조사는 해야 했기에 그들은 집 안을 돌아보았다.
역시 아무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집, 하지만 어느 방의 문을 열자 문을 열었던 엘프의 표정과 행동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렌시아의 방이었다.
"이봐, 왜 그러고 있는......! 이, 이건!"
종이가 한가득인 렌시아의 방이 결국 엘프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자연을 해치는 것, 자연을 해쳐서 만든 종이 같은 물건을 사용하는 것은 엘프들에게는 금기에 가까운 행위였다.
이 일은 곧바로 마을의 모든 엘프들의 귀에 들어갔다.
"말도 안 돼! 최고의 전사가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본 엘프가 한둘이 아니야. 렌시아의 방에 있던 종이들은 촌장이 수거해 갔대."
"세상에...... 어떻게 렌시아가 그런 짓을......."
"너희 그 얘기 들었어? 종이에 적혀 있던 것들이 연금술의 제조법이었데."
"연금술? 그게 뭔데?"
"자연을 재료로 삼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인간들의 사술이야."
"그런 짓을 렌시아가 한 거야?"
"어떻게 렌시아가 그럴 수가 있어?!"
렌시아에 대한 마을의 평가는 엘프 중에서 활에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최고의 전사에서 인간들의 사술에 물들어 버린 엘프로 전락했다.
인간의 마을을 떠돌아다니니 그런 것에 물드는 것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