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2권 14화
14. 렌시아 그린우드(1)
책의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를 잘라야만 한다.
죽은 나무로도 종이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인간들은 나무가 수명이 다해 죽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인간들의 마을에 있는 종이는 거의 대부분이 산 나무들을 잘라 만든 것이다.
양피지를 만들기 위해서도 동물들을 죽여야만 한다.
그래서 엘프들의 마을에서는 바람에 의해 자연스럽게 땅에 떨어진 나뭇잎들 중 바스라지지 않는 것들을 엮어 종이 대신에 사용한다.
혹은 죽은 나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 뒤에 원 형태를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줄로 엮어 목판 등을 만들거나 한다.
그러한 것을 엘프들은 자연이 자신들을 위해 남긴 은혜라며 사용하고 있다.
종이로 가득 찬 책방.
엘프들은 나무에 수많은 가공을 하고 과정을 거쳐서 만든 종이는 자연에 대한 모독이라며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엘프가 마음에 들어 할 선물이 있을 리가 없는 장소였지만 렌시아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어서 오세요."
안에 들어가자 카운터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던 주인이 종소리를 듣고서 시선은 책에 고정시킨 채 무심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렌시아는 책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손에 잡힌 책 하나를 꺼내었다.
연금술의 이해와 시작.
책의 이름이었다.
렌시아는 홀리듯이 책을 펼쳐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책을 사지도 않고 보고만 있는 렌시아를 책방 주인이 시선만을 살짝 굴리면서 바라보았지만 딱히 제재는 하지 않았다.
책을 읽기만 하는 경우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도 돈이 목적이 아닌 자신이 책을 읽으면서 부수입을 얻기 위해 만든 책방이었기에 사지 않아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후드 밑으로 보이는 책에 집중하며 반짝이는 눈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렌시아는 그 자리에서 수 시간을 사용해 공들여 가며 책을 완독했다.
그것이 후에 전설이 될 궁수가 연금술을 처음 접하는 순간이었다.
* * *
"렌시아, 돌아왔니? 이번에는 조금 오래 걸렸네."
"미안해요, 어머니!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어머머?"
커다란 짐을 들고 마을에 돌아온 렌시아는 곧바로 몇 날 며칠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다.
식사에 손도 잘 대지 않고 방문도 잠겨 있었기에 엘리시아가 그녀를 걱정할 만도 했다.
하지만 방에 틀어박히기 전에 반짝이던 렌시아의 눈을 보았기에 엘리시아는 그리 렌시아의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불만이 하나 있다면 밥은 좀 제시간에 먹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렌시아~ 밥 두고 갈 테니까 이번에는 꼭 먹어야 한다~?"
"......."
방 안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후로 다시 며칠이 지나자 렌시아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마을을 나서려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마을에 돌아왔던 후로 계속 방에만 있다가 바로 또다시 나간다니, 엘리시아는 살짝 서운했다.
"벌써 가는 거니?"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렌시아가 엘리시아의 두 손을 따듯하게 꼬옥 잡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를 꼭 건강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뭐?"
"다녀올게요!"
의아해하는 엘리시아를 두고서 렌시아는 바람같이 집을 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렌시아의 방문이 열린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호기심에 안을 들여다본 엘리시아는 깜짝 놀랐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종이와 책들.
한 장, 한 장씩 널브러져 있는 종이들에는 빼곡히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만약 종이 천지인 렌시아의 방을 다른 엘프들이 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추방까지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엘리시아는 렌시아를 걱정하는 한편 조용히 문을 닫고 본 것들은 가슴속 깊이 묻었다.
* * *
렌시아는 어릴 적에 봐 두었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의 커다란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구멍의 입구는 몸을 숙여야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았지만 그 안은 그녀의 방보다 넓었다.
렌시아는 서두르지 않는 선에서 빠르게 짐을 풀었다.
아직 파릇파릇한 이름 모를 풀들과 가루들.
렌시아가 직접 고안해 낸 연금술의 제조법이 적힌 종이들.
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그릇.
다른 엘프들이 보았더라면 자연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는 일갈을 들었을 내용물들이 한가득이었다.
렌시아는 우선 인간들의 마을에서 미리 구입했던 약초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제조법이 적혀 있는 종이들은 벽에 붙였고 그릇들은 용도와 크기에 따라서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나올 때에 방문을 잠가 뒀었나?
아마 잠가 뒀을 것이다.
자신의 방에는 후보에서 제외된 연금술의 제조법들이 적혀 있는 종이가 가득했기에 다른 엘프들이 보게 된다면 큰일이다.
"빠르게 움직이자."
일단 정리를 모두 끝낸 렌시아는 연금술에 필요한 재료들을 찾아서 숲을 뛰어다녔다.
연금술.
그것은 대가를 지불하여 새로이 물체를 만들어 내거나 물체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는 마법적 기술을 칭하는 단어였다.
그리고 렌시아는 그것에서 어머니를 건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엿보았다.
물약, 그것이 렌시아가 엿본 희망이었다.
엘프들의 사이에서는 물약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의 마을을 돌아다니던 렌시아조차도 그저 상처를 치유하고 마력을 회복하는 용도로만 알고 있던 물약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다.
기본적인 것이 HP와 MP를 회복시켜 주는 회복 물약.
상태 이상을 단숨에 무효화시키는 상태 이상 해제 물약.
단기간 동안 일정 능력치의 미미한 상승 효과를 보여 주는 버프 물약 등등.
거기서 효능에 따라서 더 세세하게 나누어 간다면 종류는 수백 개가 넘어갔다.
그리고 렌시아는 연금술을 접한 뒤로부터 인간들의 마을에 들러서 책방과 도서관만을 들락거리며 연금술에 대해 탐독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 모든 병을 치료한다는 전설의 물약인 '이브의 눈물'.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고치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치유한다는 뜻에서 신의 이름이 붙여진 그 물약은 실존하는지조차도 불확실했으며 제조법의 끄트머리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전설로 전해져 내렸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라도 비슷한 물건이 실존했다는 뜻일 거다.
그렇게 생각한 렌시아는 엘프라는 정체를 숨긴 채 연금술사들에게 기술을 배워 익혀 나가며 이론을 공부했다.
결국 완성된 물약을 해체하듯이 하여 어떤 재료와 어느 정도의 마력이 들어가고 어떤 기술이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그 후 렌시아는 자신이 가진 지식을 정리해 이브의 눈물을 만들기 위한 제조법을 강구했다.
그중에서도 성공의 가능성이 높은 제조법을 추려서 실험을 위해 마을을 나왔다.
종이를 사용하는 것까지는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엘프들의 성향 덕분에 방에만 둔다면 들킬 걱정이 없다.
하지만 물약을 만들기 위하여 살아 있는 풀들을 자르고 그것을 우려내기 위하여 불을 피우고 마력을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연기나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법진의 빛 등으로 인해서 들킬 확률이 높았다.
자연을 훼손해 가며 실험을 한다니.
다른 엘프들이 안다면 자연을 보호할 줄 모르는 자는 용서치 못한다며 마을에서 추방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이 만든 물약을 먹고서 건강해질 엘리시아를 위해서라도 렌시아는 마을 추방 따위 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장소가 어릴 적에 몰래 마을을 빠져나와 발견했던 이 나무 구멍이었다.
렌시아는 숲을 뛰어다니며 머릿속에 집어넣은 지식들을 통해서 필요한 약재를 채집했다.
그리고 숲에 없는 것들은 인간의 마을로 다시 내려가 조달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런 렌시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브의 눈물'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렌시아가 이브의 눈물의 제조에 집중하는 사이에 마을의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으으, 뭔가 조금 춥지 않아?"
"해가 이렇게 따듯한데? 딱 좋은 정도 아닌가?"
"그래? 기분 탓인가....... 왜 이러지......."
엘프들의 마을에 추위를 호소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한두 명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점점 흘러 반년이 지나자 마을의 거의 대부분의 엘프가 추위를 호소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첫 번째로 추위를 느끼던 엘프가 증세를 호소하고 있었다.
피부의 군데군데가 새파랗고 까맣게 변질되었다.
변질된 곳에서 이상한 악취가 풍겼고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며 간헐적으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증세의 강도는 다르나 원인 모를 추위를 느끼던 이들이 모두 그렇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직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소수의 이들에게서 그들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말과 그냥 추방시켜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우리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저들을 격리시켜야지 우리가 산다고요! 어떻게 전염이 되는 건지 파악도 되지 않았어요!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모두 진정하세요."
워인은 목소리를 무겁게 깔아 내리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입을 꾹 다문 그들을 확인하고서 워인이 말을 이었다.
"......일단은 원인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됩니다. 아직 추위를 호소하지 않는 이들을 중심으로 마을에서 원인을 찾는 이들과 숲에서 원인을 찾는 이들로 팀을 나누죠. 결정은 원인을 알아내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현재 마을에 만연하고 있는 병에 대한 조사대가 만들어졌다.
숲 조사대는 숲에서부터의 원인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숲의 밖을 뛰어다녔지만 이렇다 할 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마을 조사대는 마을에 원인이 있는 것인지를 탐색했다.
그 탐색의 범위에는 당연히 개개인의 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으아아아아-!"
렌시아는 속을 채우던 답답함을 큰 소리로 토해 내고는 바닥에 뒤로 벌렁 누웠다.
그녀가 누운 자리 근처에는 뭔지 모를 약이 담긴 약병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브의 눈물'을 만들기 위해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들이었다.
"후우...... 좋아!"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한번 들이마신 렌시아는 자신의 양 뺨을 때리고서는 다시 제조에 들어갔다.
건조한 스피나 풀을 한 줌, 오래된 지팡이 풀을 두 개, 나무에 걸려 있던 정령들의 가루를 한 스푼.......
수십에 달하는 재료를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섞어 추출한 뒤 조심스럽게 마력을 불어 넣었다.
'제발 이번에는 성공하기를.......'
그러한 염원도 들어갔지만 완성된 것은 효과가 다른 것들에 비해 엄청 뛰어난 것을 제외하면 그냥 평범한 회복 물약이었다.
실패작이었다.
"무엇을 바꾸어야 할까......."
렌시아는 또 한 번의 실패를 디딤판 삼아서 다음 실험의 생각을 했다.
렌시아가 작게 중얼거리며 고민을 하고 있자 나무 구멍의 바깥 저 멀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무 구멍을 나가서 살짝 확인해 보니 엘프 여럿이 무리를 지어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움직이고 있는 방향 앞쪽에는 렌시아가 사용하고 있는 나무 구멍이 존재했다.
'아, 안 되는데......!'
나무 구멍 자체는 풀들로 가려질 정도의 작은 크기다.
하지만 방금 전에 했던 실험으로 인해 발생된 연기가 아직 긴 꼬리를 그리며 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을 저들이 본다면 자신이 연금술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최소한 자연을 훼손했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곤란했다.
렌시아는 그들보다 몇 배는 빠르게 다시 구멍으로 돌아왔지만 구멍의 천장에는 아직 빠져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연기가 한가득이었다.
구멍 내부 자체가 돔에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기에 연기는 위에만 고여 있어 숨 쉬기에 무리는 없지만 연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너무 느렸다.
렌시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기척을 느끼며 방법을 강구했지만 딱히 방법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후우웅-.
그때, 강한 바람이 몰아치며 나무 구멍 안에 고여 있던 연기가 모두 밖으로 빠져나갔다.
밖으로 빠져나간 연기들도 모두 바로 흩어져 사라졌다.
연기가 모두 사라지자 타이밍 좋게 엘프들이 풀들로 가려 놓은 나무 구멍의 앞을 지나쳐 간다.
"저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뒤쪽으로 돌리자 그곳에는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푸른색의 어린 소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