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랭킹 1위는 마을사람
- 2권 13화
13. 엘프들의 마을
[정신의 정령왕 '히에로스'가 당신과의 계약을 원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호야와 히에로스를 중심으로 발밑에 검은 빛을 발하는 마법진이 생겨났다.
내뿜는 빛은 검은색이었지만 전혀 어둡지 않고 오히려 밝다는 느낌이었다.
계약의 의사를 표하자 바닥에 새겨져 있던 마법진이 유리 창문 깨지듯이 깨져 조각났다.
조각난 마법진들은 호야의 오른 손등을 향해 몰려와 스며들었다.
[정신의 정령왕 '히에로스'와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킬 '히에로스의 도움'이 생성됩니다.]
[정령과의 계약을 표하는 각인이 오른 손등 위에 새겨지며 지울 수 없습니다.]
[히에로스의 도움]
정신의 정령왕 '히에로스'와의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히에로스를 불러와 힘을 빌릴 수 있습니다.
사용 MP: 0
재사용 대기 시간: 6시간
오른손을 확인하자 오른 손등에 발밑에 생겨났던 마법진이 간략화되어 새겨져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모두가 호야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계약을 끝마쳤다.
['엘프들의 성인식 시험'을 모두 클리어 하여 경험치와 아이템의 정산이 진행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정령들과의 계약을 마지막으로 던전을 모두 클리어 하였다.
호야는 7개의 레벨이 올랐고 설백호의 일원들은 각자 2~3개의 레벨이 올라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들어오기 전에 했던 조율대로 아이템을 다시 드릴게요."
던전에서 나온 아이템들은 두 번째 시험에서 사냥했던 몬스터들의 부산물이 대부분이었다.
아이템의 분배를 마치고 던전을 클리어 하여 생겨난 빛의 벽을 통과하자 어딘지 모를 숲의 한가운데에 있는 마을로 나왔다.
코미아의 숲과 매우 흡사한 숲이었지만 그들은 이곳이 코미아의 숲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코미아의 숲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구름에 닿을 정도의 커다란 나무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인간? 인간이 어째서 여기에......?"
"정령들이 같이 있는데?"
"설마......."
렌시아와 같은 기다란 귀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엘프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한 엘프가 걸어 나왔다.
인간으로 치면 20대의 나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다른 엘프들과는 다르게 어느 정도 연륜이 느껴지는 모습을 하고 있는 엘프였다.
"실피드 님,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어요?"
"이 인간들이 성인식 시험을 완료했어."
"이들이 말입니까? 실피드 님이 도와주신 건가요?"
"조금? 그래도 정령의 도움을 빌리는 것도 시험 내용이잖아. 뭐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없습니다. 정령의 도움을 받는 것도 시험이지요. 어서 오세요, 위그드라실의 마을에. 시험을 통과한 이들은 종족에 상관없이 모두 환영합니다. 저는 마을의 촌장인 워인이라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제일 앞에 서 있던 호야에게 그가 다가와 안수를 청했다.
호야가 그의 악수를 받자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발견한 호야의 오른 손등에 새겨진 각인으로 인해서 표정이 놀라워하는 얼굴로 변했다.
"그건 설마......."
"내 각인이야."
호야의 뒤에 숨어 있던 히에로스가 호야의 어깨 위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히에로스 님, 계약을 하신 겁니까?"
"왜? 나는 계약하면 안 돼?"
"아뇨, 첫 계약 축하드립니다. 이름이?"
"호야라고 합니다."
"히에로스 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호야."
그는 진심으로 히에로스가 계약을 이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신계의 정령들은 엘프들이 그 힘을 두려워하기에 계약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런 정령들의 정점인 히에로스라면 오죽할까.
호야와 계약하기 전에는 계약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그였다.
"그런데...... 호야, 혹시 어디선가 엘프를 만난 적이 있나요?"
"네?"
"아아,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에게서 엘프의 기운이 살짝 느껴지기에. 모든 엘프들이 이곳으로 모여 생활하고 있으니 무리에서 떨어진 이가 있으면 안전을 위해 이곳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 물어보는 겁니다. 물론 그가 그것을 원할 때이지만요."
"호야는 렌시아랑 친구야."
워인의 말에 답한 것은 호야가 아닌 실피드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호야에게 들려주었던 밝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덤덤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작게나마 적의도 느껴졌다.
마을에 들어온 후로 계속 이러했다.
실피드의 목소리가 컸기에 주변에 있던 엘프들은 모두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 호야와 일행들이 나타났을 때의 웅성거림보다도 더 큰 웅성거림이었다.
"레, 렌시아가 살아 있어......?"
"아아...... 다행이야......."
"이,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엘리시아한테 말하고 올게!"
갑작스러운 웅성거림에 주변을 둘러보던 호야가 워인에게로 다시 시선을 향했다.
그는 소리 없이 눈물 한 줄기를 흘리고 있었다.
"저, 정말...... 렌시아를 아십니까?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아, 갑자기 큰 소리를 내어 죄송합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워인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호야는 이들이 렌시아라는 이름에 왜 이렇게까지 반응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그녀가 전설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들이 렌시아라는 이름에 반응하면서 내보인 감정은 고마움과 죄책감, 안도감이었다.
"우선 저희 마을에 온 첫 번째 손님분들이시니 마을 구경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워인이 조금 억지스럽게 이야기를 돌리며 엘프들에게 일행들의 마을 안내를 부탁했다.
각자 행동하기로 하고 1시간 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로 정했다.
서로 뿔뿔이 흩어지고 자리에는 워인과 호야, 두 명의 정령만이 남았다.
"호야는 마을 구경에 관심이 없으십니까?"
"......마을 구경보다도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호야는 워인에게 자신이 품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호야의 물음에 워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겁니다."
* * *
수백 년 전, 한 엘프의 아이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부모의 약함은 물려받지 않고 태어나 준 덕분에 여느 엘프의 아이들과 다를 것 없이 자라 주었다.
"오오! 렌시아 대단해! 우리 또래 중에 과녁의 정중앙을 30번 연속 맞힌 거는 렌시아가 처음 아니야?"
"하지만 성인식을 한 어른들은 다 하는 거잖아?"
"바보야! 우리는 활을 배우기 시작한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됐다고! 어른들은 오래 익혔으니까 다 하는 거야!"
"맞아! 내가 대단한 거야!"
"후후후, 렌시아, 그런 말은 직접 하는 게 아니란다."
"아! 엄마!"
아이들의 앞에서 허리에 손을 올리며 당당하게 자신을 뽐내던 렌시아는 엘리시아의 목소리에 바로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엘리이사의 품에 포옥 안겨서 얼굴을 비비고는 고개를 올려 그녀를 바라봤다.
"엄마, 방금 봤어! 저거 내가 했다!"
"당연히 봤지! 우리 렌시아는 다 크면 엘프들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궁수가 될 거야."
"으응, 그게 아니지!"
엘리시아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렌시아는 손가락 하나를 높이 치켜들었다.
"엘프들 중에서 제일 강한 궁수가 될 거야!"
어린 엘프들이 모두 품고 있으면서 이룰 수 없는 꿈의 말이었지만 렌시아라면 정말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시아는 흐뭇하게 웃으며 렌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렌시아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히히, 당연하지!"
"그래, 그래. ......쿨럭, 쿨럭!"
렌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미소 짓고 있던 엘리시아가 돌연 갑자기 기침을 토해 냈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자 그녀의 손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 나와 있었다.
"엄마! 괜찮아? 오늘 너무 무리한 거 아냐?"
"크흠, 흠. 엄마는 괜찮아. 이거 보렴."
엘리시아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렌시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과장되게 움직여 보였다.
그것에 안심한 것인지 엘리시아를 걱정하며 바라보던 렌시아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래도 오늘은 이만 집에 들어가면 안 돼?"
"에이, 날씨가 이렇게 좋은걸? 엄마는 집에 있는 것보다 우리 렌시아가 뛰노는 것을 보고 싶은데."
"나 안 뛰어놀 거야! 그러니까 엄마는 집에 가서 푹 쉬어!"
렌시아에 등쌀을 밀린 엘리시아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엘리사아가 밖에 나와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져만 갔다.
* * *
쉬익-, 쾅!
화살 하나가 나무들의 사이를 뚫고서 정확하게 몬스터에게 명중했다.
도저히 화살 하나로만 이루어진 위력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으로 인해서 몬스터는 바로 빛이 되어 사라졌다.
"휘유~ 누님 누군지는 몰라도 실력이 대단한걸?"
"후후, 좀 더 칭찬해도 좋다. 역시 그런 말은 타인에게 듣는 것이 더 기쁘군."
"누님, 우리랑 같이 행동할 생각 없어?"
"그건 사양하지. 여기저기 홀로 떠돌아다니는 몸이라."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 주라."
"알릴 만한 이름은 아니다. 미안하다."
렌시아의 나이 어느덧 46.
렌시아는 후드로 귀를 가린 채 인간들의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엘프가, 그것도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엘프가 인간들의 마을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성인식도 치르기 전에 마을 최고의 힘이 된 렌시아를 말릴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렌시아를 말릴 수 있는 것은 그의 어머니인 엘리시아뿐이었다.
하지만 렌시아가 인간의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엘리시아는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위해 노력해 주는 렌시아를 말릴 수 없었다.
다행히도 혹은 당연하게도 렌시아는 인간의 마을에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아무런 일 없이 무사하게 귀한하고 있었다.
그녀가 방문하는 인간들의 마을도 이곳으로 벌써 여덟 번째.
그동안 인간들의 마을에 방문하면서 겪은 일들을 렌시아는 엘프들의 마을에 돌아올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인 엘리시아에게 여행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야 할 정도로 약해진 그녀에게 더욱 넓은 세상을 알려 주고 느끼게 해 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상업 도시라...... 좋은 선물이 있으면 좋겠군."
상업 도시 이구세.
상업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활기가 넘쳐흐르는 곳이었다.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고 여기저기서 호객 소리가 들려온다.
렌시아는 여러 가게를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엘리시아를 위한 선물을 찾아야만 하는데 엘프들은 자연에게 떨어져 나온 것이면 몰라도 자연을 일부러 훼손해 만든 상품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을에 있는 장식품들도 죽은 나무를 깎은 것이거나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엮은 것이 주를 이룬다.
자연을 의도적으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엘프들의 철칙에 걸맞은 선물이 필요했다.
멈칫.
엘리시아를 위한 선물을 찾아다니던 렌시아가 걸음을 멈춘 곳은 상업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작은 책방의 앞에서였다.